한국 석조문화와 석장
백제시대 석공 아사달은 신라 불국사의 탑을 완성하느라 아내를 잃고, 불상 완성과 함께 자신 또한 목숨을 던졌다고 전해진다. 기록이 미미해 그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네 옛 석공은 숱한 전설과 함께 오늘날의 ‘국보’와 ‘보물’로 분해 후손과 만나고 있다.
한국의 석공들은 망치, 정 등을 사용해 거칠고 단단한 돌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수준 높은 석조문화를 꽃피웠다. 흔히 석공들은 돌마다 품고 있는 모양새가 있어 그것을 보고 그대로 조각해 내는 것뿐이라고 겸손히 얘기하고는 한다. 그러고 보면 석공이란 자연의 또 다른 이면을 들여다볼 줄 아는 심미안을 지닌, 타고난 인물들이 아닐까.
한국 석조문화는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백제 미륵사지 석탑, 신라 분황사 모전석탑 등의 석탑을 비롯해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등의 석불이 조성되며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석조기술의 발전과 함께 전문인력 양성 또한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어, 삼국시대는 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석장’이라는 기술자가 탄생하고 정착한 시기로 여겨진다.
한국의 석조 작품들은 세계 석조 문화사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조형물로 꼽힌다. 통일신라시대 불국사 삼층석탑에서 정점을 이룬 석탑은 이후 한국 석탑의 근본양식을 성립했다. 불국사 다보탑이 건립됐고, 석굴암 본존불로 석조문화의 정수를 완성했으며, 선종의 도입과 함께 ‘부도(浮屠)’라는 새로운 장르의 조형물이 건립된 것도 이 시기다.
석장이 꽃피운 전통 석공예
2007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20호 ‘석장’ 종목이 지정된 이후, 석조각 공예가 이재순 선생이 한국 최초 무형문화재 석장으로 인정받았다. 석장이란 말 그대로 석조물을 제작하는 장인을 뜻한다. 어린 나이에 외삼촌에게 돌 다루는 기술을 배운 이재순 석장은 스승 김진영 선생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석공예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두 번째 스승인 김부관 선생을 따라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 보수작업을 하면서 돌을 다듬는 기법을 배웠고, 22세 때 국제기능올림픽 석공 부문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전국의 사찰과 문화재가 있는 곳에는 대부분 이재순 석장의 손길이 담겨 있다. 또한, 그의 작품이 2,000여 점에 이른다고 하니 끊임없이 창조해내고자 하는 의지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국내는 물론이고 네덜란드 유트리트 박물관, 이탈리아 카라라시청, 일본 덕정사, 타이완 기륭 자항기념당, 프랑스 파리 7대학 등에서도 이재순 석장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새로 만들어 내는 것만큼 옛것을 지켜내는 것 역시 석장의 소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 등 문화재 보수 작업도 쉬지 않고 수행하고 있다. 2005년 성공적으로 환수한 북한 국보 제193호 북관대첩비(임진왜란 때 함경도 의병 전승비)는 이재순 석장이 복원한 옥개석으로 제 모습을 찾은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성곽이나 석축에 쓰인 돌과 가장 흡사한 포천석을 채석하고, 일일이 정과 망치로 다듬어요. 우리 옛 석조물을 이루고 있는 돌들은 아무렇게 쌓아 올린 게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생각하면서 자연 친화적으로 어우러져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돌 하나를 쌓아도 빗물 빠질 길까지 생각했지요. 돌의 크기가 모두 다르다는 것도 주목해야 합니다. 숭례문을 이루고 있는 돌들을 얼핏보면 부자연스럽고 서로 맞추기도 힘들 법한데, 돌 사이사이의 장돌들이 위아래에서 누르는 압력을 견디도록 했습니다.
그뿐인가요. 대개 돌을 옮길 땐 사방에 밧줄을 연결하는데, 이럴 경우 밧줄을 빼는 과정에서 약간의 오차가 생기거든요. 그런데 숭례문의 돌은 중앙에 구멍을 뚫어 정교하게 옮긴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선인들의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죠.” 이재순 석장은 문화재 보수 작업을 할 때마다 기나긴 세월의 풍화를 읽으며 옛 석공들의 고뇌를 짐작해보곤 한다.
자연에 대한 경외로 일군 천공(天工)의 길
예로부터 돌이 많은 산은 영산(靈山)이라고 했다. 지상에서 영원성을 담을 수 있는 물질은 돌밖에 없고, 돌이 아니었다면 우리 선조들의 훌륭한 문화유산을 이렇게 많이 만나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이재순 석장의 말에 힘이 실린다.
“발에 치이는 게 돌이다 보니 흔히들 돌을 하찮게 여기지만, 태산도 돌이 없다면 서 있지 못합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숱한 별 중에도 물이나 공기가 없는 별은 있을지언정 돌 없는 별은 없으니, 어쩌면 우리 발밑의 돌이야말로 저 하늘의 별과 가장 가까운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돌은 다른 무엇보다 강한 물질이다. 그러니 돌을 다루는 석공 또한 강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게 이재순 석장의 지론이다. 강한 돌, 화강암은 가장 한국적인 돌이다. 산이 7할을 차지하는 한국에서 나오는 석재의 70%가 화강암인 까닭이다.
풍화작용에 강한 화강암은 결이 치밀해 조각하기 어렵다. 그래서 한국의 석공예는 섬세한 조각보다는 선으로 특징을 잡아 표현하는 원만한 조각이 주를 이룬다. 거친 질감이 그대로 살아 있는 돌에 새긴 부드러운 선은 한국 석조문화의 독특한 특징이다. 불상이나 보살상은 그 시대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담았다. 선불교의 영향을 받은 고려시대 불상은 신라시대의 세련된 불상과는 또 다른 경향을 보인다. 한층 토속적인 형상을 띤 미륵은 짧은 하체 때문에 마치 땅에서 솟아 나온 듯한 느낌을 준다.
“일본 불상은 갸름한 모습이고, 중국 불상은 눈이 튀어나오고 표현이 강합니다. 그에 비해 한국의 불상은 달덩이처럼 둥글고 순박한데, 그래서인지 제일 자비로워 보여요. 너무 매끄럽지도 않고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아서 더 신비롭고 푸근한 느낌을 주는지도 모르죠.”
작업에 들어가기 전, 이재순 석장은 부처님께 삼배(三拜)를 올린다. 석공의 간절한 마음과 애틋한 손길이 깃들어야만 해맑은 돌부처님이 탄생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돌은 거짓말을 하지 않거든요. 무심하게 때리면 무심한 표정이 나오고, 화난 사람이 돌을 마주하면 돌도 화가 나 있지요. 돌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은 자연에 대한 존중과 겸손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조금은 부족해 보여도 돌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해치지 않고 원 돌의 아름다움을 감싸고 품어줘야 인간의 심금도 울릴 수 있어요.”
‘천 년 된 돌을 사용하려면 이후 천 년을 견딜 만큼 제대로 다뤄야한다’는 이재순 석장의 말에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보니, 석장의 작품은 모두 선인들의 지혜와 스스로 걸어온 인고의 세월을 본뜬 것이었다.
글‧윤진아 사진‧안지섭 자료참조‧한국문화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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