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반점에서 자장면을 먹는 내 모습
-윤재철
신길역 굴다리 앞 골목집에 행복반점
테이블 두 개뿐인 작은 중국집에 혼자 앉아
탤런트 누가 누구와 연애 중이네
스포츠 신문 뒤적이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더운 자장면을 받아
어린 시절 입맛대로
허겁지겁 한참을 우겨넣다가
잠시 고개를 드는 순간
반대편 벽면에 걸린
안개처럼 뿌연 거울이 나를 본다
축 개업 벗겨진 글자 밑에
왼손에 젓가락을 들고 우적우적 자장면을 씹고 있는
씹을 때마다 쭈글쭈글한 목젖이 흔들리는
비쩍 마른 중년의 한 사내가
측은한 듯 나를 보고 있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자장면을 훌쳐넣지만
계속해서 그 사내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천천히 마저 먹으라 하나
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차가운 정수기 물 한 잔으로 입을 가시고
행복반점을 나서는데
키 작은 지붕들이 머리를 맞댄 신길동 골목길
그 사내 스파이처럼
골목길 여기저기 모퉁이에 몸을 숨기며
나를 따라붙고 있다
햇빛 환한 가을날 점심시간
-윤재철 시집『능소화』(2007. 솔)
나를 한 명뿐인 줄 알지 말자. 나는 무수히 많은 사람 속에 흩어져 있으며 그들로부터 온다. 마치 적립식 적금처럼 쌓이기도 하고 슬그머니 빠져나간다. 스스로 알고 있는 나는 오히려 너무나 작은 나이다. 나를 나라고 말하는 자는 다만 신앙심 두터운 존재일 뿐이다. 그 신앙심으로 하여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그리하여 가끔 타자로 있는 나의 방문이나 대면은 견디기 힘들 때도 있다. 조금은 특별하게, 지금 자장면을 먹고 있는데 그가 찾아왔다. "반대편 벽면에 걸린/ 안개처럼 뿌연 거울이 나를 본다/ 축 개업 벗겨진 글자 밑에/ 왼손에 젓가락을 들고 우적우적 자장면을 씹고 있는/ 씹을 때마다 쭈글쭈글한 목젖이 흔들리는/ 비쩍 마른 중년의 한 사내가/ 측은한 듯 나를 보고 있다". 그는 내가 모르는 내 모습을 보고 안다. 내가 별로 생각해 보지 않은 면이나 내 뜻과는 전혀 다른 면을 본다. 그렇다고 부정적인 면을 들추는 것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다른 모습, 혹은 내가 의식하지 않았던 모습, 혹은 내 편의에 의해 잊고 있던 모습을 본다. 그 낯선 조우의 기분이 묘하다. 물론 많은 사람은 참 빠른 순간에 '낡은 거울에 비친 나구나'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지라도 그처럼 거울에 비친 자신과 동일시를 이루어지기까지 잠깐 묘한 느낌이 스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습은 분명 내에게서 떨어져나간 나의 쪼개진 몸이기 때문이다. 그 불협화음이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자장면을 훌쳐넣지만/ 계속해서 그 사내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천천히 마저 먹으라 하나"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나의 분열, 흩어짐, 쪼개짐이 더 크게 나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차가운 정수기 물 한 잔으로 입을 가시고/ 행복반점을" 나온다. 하지만 떨칠 수 없다. 그가 계속 따라붙는다. 그가 계속해서 '너를 한 명뿐인 줄로만 생각하지 마라'고 말한다. '너를 너로만 알지 말라'고 말한다. 더욱 '에고(ego)라 불리는 자아를 전부로 생각하는 오만에서 벗어나라'고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이 "햇빛 환한 가을날"의 진실이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타자로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스스로 "햇빛 환한" 세상을 사는 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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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미안합니다.
오철수 仁兄 2007년 가을, 윤재철이라고 쓰여진 시집을 이제야 읽습니다.
낯선 타자로서의 나를 남기지 않기 위해 스스로 유폐시킨 삶도 못 되면서
그냥 미뤄두었던 것 같습니다.
형이랑 밴댕이 회를 안주로 먹던 강화 술집이 생각나네요.
저는 아직 술 먹을 만한 몸이라 여전합니다.
한 해 지난 2008년 가을, 늘 건강하십시오.
-철수가
윤재철
1953년 충남 논산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1982년 <오월시> 동인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아메리카 들소』『그래 우리가 만난다면』『생은 아름다울지라도』『세상에 새로 온 꽃』. 산문집『오래된 집』. 1996년 신동엽 창작상을 받았다.
첫댓글 오늘부터는 윤재철 시집 <능소화>(솔출판사)를 감상하겠습니다. 이 양반 시집은 거금을 털어 구입해서 머릿맡에 두고 읽으실만 할 겁니다.
어? 충남 논산요? 나희덕 시인도 논산이더만. 반가워라!
서은 님.....논산이면 좋은 건가요? 저도 논산이에유~~~~~^^
ㅋ... 지도 논산 産이에유~~~~~^^
훔~ 타자로서의 나..
타자로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자장면을 훌쳐넣지만", '타자로 있는 나'가 '나'를 본다는 것, 좀 민망하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