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덕 金尙德 (1892-1956)】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초대 위원장"
김상덕은 1892년 12월 10일 경상도 고령현 내곡면 저전동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김성옥(金聲玉)과 어머니 김경익(金敬益) 사이에서 5남 1녀중 4남(다섯째)으로 태어났다. 5살 때 아버지의 권유로 고향 저전동 근처 내상리 소재 내산서당(乃山書堂)에 들어가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의 문하에서 19살 때까지 한학을 수학했다.
21세가 되던 1912년 4월 뒤늦게 고령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중퇴하고 상경해 경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7년 3월 경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곧 일본에 유학,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를 거쳐 에 입학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최팔용(崔八鏞)·백관수·김도연 등과 함께 조선독립청년단 대표로 2.8 독립 선언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그해 3월 21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금고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2심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0년 3월 중화민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동방혁명대표자대회에 한국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고, 1923년 2월에는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개조파로서 선언서 수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6월 국민대표회의의 폐회 선언이 이뤄지면서 결렬되자, 1924년 봄 길림성 길장도(吉長道) 반석현(磐石縣)[5]으로 가 김동삼 등과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으로서 기관지 《농민보(農民報)》를 간행하였다. 이후 정의부에 참가했으나, 1928년 정의부·참의부·신민부의 통합회의가 결렬되자, 김동삼을 따라 혁신의회(革新議會)에 참여해 집행위원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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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12월 15일 작성된 모 경찰부 고등형사과 수배대상 인물카드[6] |
1932년 한국독립당 소속 군대인 한국독립군 참모를 거쳐, 1933년 한국독립당 중앙대회의 결정에 따라 신숙(申肅)과 함께 난징에 파견되어 한중연합군을 조직하기 위해 중국 국민정부와 교섭하기도 했다. 1934년 3월에는 난징에서 신한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여 당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여 서기부원 및 중앙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2년 조선민족혁명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자 같은 해 11월 임시의정원 경상도의원에 선임되었으며, 1943년 4월 임시정부에서 구성한 선전위원회 위원 15인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44년 4월 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에 취임하였으며, 그해 6월부터는 학무부가 문화부로 개편되면서 문화부 차장에 취임하였다. 1945년 3월에는 문화부장에 취임하여 활동하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그해 11월 23일 제1차 임시정부귀국단으로 귀국하였고, 이후 비상국민회의 대의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 민족통일총본부 총무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1947년부터 1948년까지는 모교인 경신중학교 교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그는 1919년 일본 유학생 시절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였다. 이 일로 옥고를 치르고 그는 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김상덕은 1944년 임시정부의 문화부장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하던 중 해방을 맞는다. 1948년 제헌국회 때 고향인 경북 고령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이 되었다. 1949년 1월, 반민특위가 구성되었고 친일파의 처단은 새로운 국가 건설에 반드시 거쳐가야 할 과정이었다. 김상덕은 반민특위의 위원장으로 선출돼 해방 직후 민족의 과제였던 친일 청산의 과업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반민특위의 수난과 좌절
반민특위는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을 시작으로 친일 문학인 이광수, 33인의 한 사람 최린의 체포 등 여론의 주목을 받으며 역사적 과제를 이루어나간다. 하지만 반민특위의 앞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친일파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특위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수정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으며, 국무회의에서 체포된 친일파의 석방을 언급하기도 했다. 또한 반민특위 위원장인 김상덕의 관사를 방문해 직접적인 관여를 하기도 했다.
색깔 공세도 이어졌다. 친일세력은 공산당과 싸우는 투사로 변신했다. 반공투사인 자신들을 잡아넣는 반민특위는 공산당이라는 논리로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친일청산에 적극적이던 소장의원들이 체포되는 상황도 연출된다.
무산 되어버린 친일파 청산
친일 경찰 노덕술의 체포는 반민특위의 험난한 앞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앞장 섰던 친일경찰은 미군정을 등에 업고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노덕술의 체포는 경찰 전체의 위기로 다가왔으며 경찰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다. 1949년 6월 6일 경찰은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특위의 특경대원을 체포한다. 결국 이 사건으로 반민특위는 힘을 잃기 시작했고 친일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 역시 무산되고 만다.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은 계속되는 압력과 탄압에 민족의 과제였던 친일 청산을 이루지 못하고 사퇴하고 만다.
독립운동의 커다란 상징이며 친일세력 청산의 커다란 후원자였던 백범 김구마저 암살되면서 친일청산의 목소리는 잦아들기 시작했다. 체포됐던 친일파들은 하나둘 무죄로 석방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민특위 관계자들은 신변의 위협을 피해 숨어 다니기 시작했다. 결국 체포됐던 친일파들은 하나둘 풀려나고 민족정기는 회복되지 못한다. 이들은 다시 권력과 결탁하고 이제 더 이상 친일청산을 언급 조차할 수 없게 됐다. 다시 친일파의 세상이 된 것이다.
이루어져야 하는 친일파 청산의 꿈
김상덕 역시 반민특위의 역사와 함께 그렇게 잊혀졌다. 친일경력자가 독립운동가를 국가유공자로 심사하고 때로는 스스로 독립운동가였음을 자처하던 시대. 김상덕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1990년에서야 겨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납북인사였기 때문이었다. 김상덕의 독립운동은 복권이 되었지만 실패와 좌절로 끝난 반민특위 활동은 아직 복권되지 않았다. 이제 김상덕은 우리에게 자신이 못 다한 친일청산의 역사를 다시 복권시켜달라 말하고 있다. 친일파들은 일제시대 때는 전 국민이 친일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했다. 그리고 지식인인 자기들에게 올 수밖에 없는 수난이었다고 변명한다.
60년이 지난 지금, 국회에서 친일진상규명법을 제정해 다시 한번 친일 역사 청산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때처럼 진상규명에 대한 논란들이 벌어지고 있고 여전히 친일파들은 그때와 같은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실패로 끝난 반민특위와 김상덕 위원장을 통해 반복되는 오늘의 현실을 되새겨 본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민족통일본부 후보로 경상북도 고령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반민특위를 해체하려는 이승만과의 갈등을 겪었으며, 궁극적으로 이승만에 의해서 반민특위가 해체됐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곽태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6.25 전쟁 때 납북되어 1956년 4월 28일 별세하였다. 사후 재북인사릉에 안치되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