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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포장지
송구영신부터 설날까지 한 달이 넘도록 ‘복’을 입에 달고 살았다. 가히 축복이란 덕담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중이다. 아무리 입에 달고 살아도 축복의 언어는 덕담 중의 덕담임에 틀림없다. 결코 손해 볼 일은 없기 때문이다. 축복은 세계 만인의 보편적인 언어이다.
예전에 중국 청도를 방문했다가 다기(茶器)점을 구경하였다. 지인의 안내로 차를 대접받은 터라 만만한 물건 하나를 구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찬히 넓은 진열대를 구경하던 중 눈에 번쩍 뜨인 물건을 발견하였다. 아담한 필통이었다, 굵은 대나무를 단면으로 잘라 만든 원통형 필통은 감동적이었다. 필통 표면은 커다란 ‘복’(福) 자를 중심으로 둥글게 돌아가며 100가지 다른 필체로 작은 복 자를 새겨 넣었다. 가히 한자 켈리그래프의 경지처럼 느껴졌다.
‘복 복(福)자’를 파자하면 보일 시(示), 한 일(一), 입 구(口), 밭 전(田)인데, 이를 풀면 ‘한 입으로 밭을 가꾸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즉 복은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받는 것이지, 누가 주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이와 다른 의미도 있다. 하늘이 사람에게 내렸다는 상형문자 ‘시(示) 자’와 배가 부른 모양의 단지를 뜻하는 상형문자 ‘부(畐) 자’를 합한 회의문자라는 것이다. 같은 복이로되, 여러 가지 해석이 대립하는 셈이다.
복은 모든 종교의 공통언어이다. 한국 사람은 다양한 종교에도 불구하고 설날 복을 비는 일만큼은 신앙을 따지거나, 갈등이 없다. 그런데 엉뚱한 데서 문제제기가 들어왔다. 장기하와 얼굴들이 부른 ‘새해 복’은 복에 대한 기존 관념을 해체한다. 새해를 맞아 복을 기원하면서도, 그러나 복만으로는 안된다고 손사래를 치는 중이다.
“새해 복만으로는 안돼/ 니가 잘해야지 (안돼)/ 노력을 해야지 (안돼)/ 새해 복만으로는 안돼/ 니가 잘해야지 (안돼)/ 열심히 해야지 (안돼)// 새해 복만으로도 돼/ 절대 잘하지 마 (돼)/ 노력을 하지 마 (돼)/ 새해 복만으로도 돼/ 절대 잘하지 마 (돼)/ 열심히 하지 마 (돼)”
성경에서 복은 상대적인 가치가 아니다. 하나님의 복은 절대적이다. <행복연습>을 쓴 맥스 루케이도는 성경에는 기쁨, 행복, 즐거움, 축하, 환호, 웃음, 축제, 잔치, 축복, 환희가 들어간 문장이 무려 2,700개가 넘는다고 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아론의 축복문(민 6:24-26)은 축복의 주도성을 쥔 하나님에 대해 고백한다. 세 차례 반복한 여호와란 이름은 마치 하나님의 인격과 명예를 전제로 하는 것처럼 들린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유대교의 랍비들은 행여 제사장의 축복문에 대해 빈정거리는 태도를 경고한다. “당신은 행여 이 초라한 제사장이 나에게 무슨 축복을 베풀 수 있겠는가 하지 말라. 왜냐하면 당신에게 복을 주시는 자는 그 제사장이 아니라 그 제사장을 통해 말씀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독일어 알파벳 문자 하나하나를 조각하여 새긴 ‘축복문 십자가’가 있다. 현관이나 거실에 걸어 두는 아주 흔한 축복 문구이다. “주여, 우리 집을 축복하소서”(Herr unser Heim segne). 십자가 한복판에 태양과 햇살 이미지를 담았다. 해가 비치는 모습은 아론의 축복문을 연상하게 한다. 그 은총의 빛이 친밀하여 과분하게 느껴진다.
유대인은 날마다 축복기도문 ‘셰모네 에스레’를 시나고그에서 간구한다. 2세기에 정리한 고전적인 기도문은 모두 18조로 구성되었다. 9조의 내용이다. “금년에도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시옵소서. 오 주, 우리의 하나님이시여, 그리고 주님의 보물 창고에 있는 재물로써 이 세상을 만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은 복되도소이다. 오 주, 해마다 복 주시는 분이시여!”
그렇구나! 축복(祝福)은 설날에만 비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드리는 간구여야 한다. 또 들뜬 기분에 헤프게 나누는 값싼 은혜가 아니라, 기쁨과 고통까지 함께 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지금 아픔과 고통 중에 있더라도, 그 위로 비추실 평화와 은총은 얼마나 눈부신 것일까? 모든 기쁨과 좋은 것을 뛰어넘는 하늘의 복을 누리려면, 먼저 ‘고난은 축복의 포장지’라는 말에도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