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명고] 02
씬1. 배경화면+자막
‘낙랑공주와 호동왕자’를 아십니까? 가장 아름답고 비극적인 설화로 알려진 사랑이야기.
호동을 위해 조국을 배반했다는 낙랑공주의 사랑은 설화가 아닌 실제입니다.
한사군에서 독립해, 단지 7년을 실존했던 낙랑국의 이야기를 이제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되살리고자 합니다.
‘자명고’
씬2. 왕검성, 자명고각 안 (아침)
자명, 단도를 들고 날아올라 라희의 심장부를 향해 날아간다.
라희 : 너 진심으로 호동이 죽기를 바라는 거니? 그가 죽어도 살 수 있겠니?
자명 : !
자명이 멈칫하며 호동을 생각하는 동안
라희, 머리를 틀어 올려 고정시켰던, 한 뼘의 폭이 얇고 예리한 단도를 빼들고 자명의 가슴에 박는다.
자명, 쿵- 그대로 자리에 떨어진다.
라희 : (미소) 어쩔 수 없이 너도 호동의 여자였구나.
자명 : .. (숨을 헐떡인다)
라희 : 바늘 끝의 독은 몰라도, 그 독은 피할 수 없을게다.
자명 : .. (단도를 빼보려 하지만 손이 바들거려 집지 못한다)
라희 : 너의 죄가 뭔 줄 알아?
자명 : ..
라희 : 너만을 바라보는 호동을 나 혼자 지켜봐야 했지. 내 자존심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
라희, 검으로 자명고 북을 가른다. 비단 폭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파열음.
씬3. 왕검성, 외곽
자명을 태운 수레가 달리고 있다. 말을 모는 일품, 그 옆에 차차숭.
휘장 없는 평상 같은 수레 뒤에 자명이 누워있고, 미추가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자명의 심장에 박힌 한치 단도는 출혈을 걱정해 뽑지 않았다)
미추 : 빨리!! 빨리, 빨리!!! 아이고, 우리 공주님 죽네!!
차차숭 : (돌아보고, 미추에게) 이놈아, 자꾸 재수 없는 소리할래!!
자명, 울컥 검은 피를 토한다.
씬4. 왕검성, 미앙전(未央殿) 방 안
라희, 술을 한잔 따라 마시고 술잔과 병을 들고 벽에 걸린 호동의 초상화 앞으로 온다.
(인서트) 비단에 그린 호동의 채색 초상화.
라희 : .. 우리 건배라도 할까..?
라희, 다시 술을 따라 호동의 초상화와 건배하듯 들어 올리고.
라희 : 나.. 당신이 원하는대로 했어. 북도 찢었고.. 자명이도 죽였지..
라희, 술병과 술잔을 땅바닥에 던진다. 요란스레 부서지는 자기들.
라희 : (격하다) 나라고! 나라고! 아무리 미운년이라도!! 아무리 질투에 눈이 멀었다해도!! 아무리 배다른 동생년이라 해도,
자명일 죽이고 싶었겠냐구!!! (슬픈) 호동아.. 너 왜 날 이토록 죽일 년을 만드는 거니. 니가 무슨 권리로..
라희, 호동을 본다.
라희 : 넌.. 왜.. 나를... 사랑하지 않은 거니?
라희, 호동의 초상화 두루마리 족자를 마치 진짜 호동을 잡듯이 잡는다. 족자가 그 힘에 풀썩 떨어진다.
라희 : (바닥에 떨어진 호동의 그림을 보면서) 나는.. 왜.. 그런 널..사랑할 수밖에 없는 거니...
라희, 벽에 기대 눈물을 흘린다.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는 라희의 눈물.
씬5. 자명 있는 바닷가 (황혼)
수박만한 돌들이 임시로 만든 화덕 안에서 달궈진다.
차차숭과 일품, 돌들을 커다란 쇠집게로 꺼낸다. 개펄 한쪽을 파서 임시로 바닷물이 고이는 웅덩이를 만들어 뒀다.
미추 : 빨리!! 빨리해!! 빨리 줌!! 빨리!!
차차숭과 일품, 땀을 뻘뻘 흘리며 돌을 날라다 웅덩이에 고인 바닷물에 돌을 넣는다. 치익-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김이 오른다.
미추 : 일품아!!
일품, 한쪽에 진흙을 바르고 누워있는 자명을 안아다가 웅덩이에 담근다.
빈사 상태의 자명, 의식이 없다. 자명, 마치 죽은 사람처럼 축 늘어져 있다.
(자명의 속마음 소리) : 아버지... 자명고를 지키지 못했어요.. 이제 우리 낙랑은 어찌되는 걸까요..
죄송해요.. 아버지가 어떻게 세우신 나라인데...
씬6. 유헌의 폭정 몽타주 (과거/낮)
(자막) 서기18년, 낙랑군 낙랑성
낙랑궁 정전 앞에 포락형(暑烙刑, 달구어진 구리기둥 위를 맨발로 걷는 형벌)이 준비되어 있다.
구리기둥 아래 장작불이 피워져 있고, 조선인 반란군들 맨발로 벌겋게 단 구리기둥을 건넌다.
유헌, 술상을 차려 놓고 앉아 호곡, 오부귀와 함께, 포락형을 당하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조선인 반란군들, 죽을힘을 다해 구리기둥을 뛰어 건너려 하지만. 치직- 소리와 함께 발이 익어 떨어지는 사람들.
그 중 몇 명, 요행이 구리기둥을 건너 땅으로 내려선다.
최리와 왕굉, 호위무사들 속에 서있다.
최리, 붉어진 눈으로 칼을 들고만 있고 차마 베지 못한다.
호곡, 그 모습을 보다가 자신이 칼을 휘둘러 조선인들을 벤다. 이런 모습들 위로.
(자명의 나레이션) : 한무제가 단군왕검께서 세우신 고조선을 산산이 부숴버리고,
옛 조선땅 낙랑(樂浪)·임둔(臨屯)·진번(眞蕃)·현도(玄?)에 한사군을 세운지도 백이십년이 넘었습니다.
커다란 수레바퀴에 사지를 매달아 굴렁쇠 돌리듯이 돌린다.
유헌, 호곡에게 화살을 받아 마치 사냥하듯 화살을 날린다.
다른 한쪽에서는 조선인 여자를 수레바퀴에 매달아 방아를 찧게 한다.
수레바퀴 구르며 바닥 멍석에 놓인 곡식 위로 지나고, 탈곡된다.
(자명의 나레이션) : 낙랑군의 왕 유헌은 독한 인물이었고, 옛 조선 백성들의 불만은 하늘에 닿았습니다.
막 혼인을 끝낸 신부가 얼굴을 가리고 말 위에 올라, 신랑과 길잡이들의 인도로 시댁으로 가고 있다.
신부행렬 앞에서, 징과 북을 치며 흥을 돋우는 사람들.
호곡과 호위무사들, 말을 타고 달려와 신부 얼굴을 가린 보(yashmak) 벗겨본다. 못생겼다.
호곡, 말 위에서 신부를 땅으로 밀어버리고 달려간다.
다른 신부행렬.
호곡, 달려와 얼굴 보를 벗겨본다. 아름다운 여인이다.
호곡, 신부를 옆구리에 끼고 자신의 말 위로 옮긴다. 호곡, 항거하는 신랑을 한칼에 베어 버린다.
유헌의 침소 문 열리고, 신부가 침상에 내동댕이쳐진다.
유헌, 능글맞은 웃음을 띠고 신부를 바라본다.
씬7. 낙랑성 안 (과거/낮)
낙랑군 왕, 유헌의 봉위 30주년 기념식 준비가 이뤄지고 있다. 기념식단이 마련되고, 꽃들로 장식된다.
(자막) 서기18년, 낙랑군 낙랑성 광장
유헌, 승상 오부귀, 태부 호곡, 태사령 자묵과 함께 조금은 떨어져서 자신의 봉축행사 준비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기념식단 옆 나무에 늘어트린 현수막 비단천이 있다.
‘樂浪郡 劉憲大王 奉位 三十周年 奉祝’ (자막) 낙랑군 유헌대왕 봉위 삼십주년 봉축
호위무사들을 제외한 모든 군사들과 조선백성들, 땅바닥에 부복해 있다.
광장 한쪽에 마련된 나무 그루터기 돋운 단 위의 전언자(왕의 말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허리에 맨 북을 쳐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전언자 : (북채 멈추고, 잠시 유헌을 바라보고 시선 돌려 백성들을 본다. 우스꽝스럽게) 듣거라, 무지한 것들아!!
한고조 유방황제의 15대 후손이시며. 평제황제의 숙부가 되시며, 양주성 장세왕의 큰 아드님으로,
신성한 이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셨으며, 하늘의 천신도 땅의 지신도 그 위엄에 벌벌 떨며 보호하시며,
기이한 능력으로 황해바다를 맨발로 걸어 건너 낙랑으로 홀연히 오신, 지극히 위대하신 유헌대왕님이 여기 오셨도다!!!
전언자의 소개의 끝자락에 맞춰서.
유헌, 뒤뚱거리는 몸집으로 마치 로마의 네로황제 같은 폼으로 앞으로 걸어 나온다.
군사들 : 천세!! 천세!! 천천세!! 위대하신 낙랑군 유헌대왕 천천세!!!
유헌, 웃음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근엄한 채 한 손을 들어 군사들의 환호에 답하는데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씬8. 동 장소, 다른 곳
유헌, 한쪽에 준비된 왕의 연에 오른다.
유헌의 연이 떠나고, 연 옆으로 오부귀, 호곡, 자묵이 말을 타고. 호위무사들은 군장한 채 그 뒤를 따른다.
유헌의 수레 앞에는 군악대가 앞선다.
나무 밑에 만삭의 모하소와 동고비가 서있다.
모하소, 만삭이지만 우아한 기품이 엿보인다. 동고비, 손에 제물이 든 보퉁이를 들고 있다.
(자명의 나레이션) : 팥죽솥처럼 들끓는 시대상황과는 상관없이, 생명은 태어나고.. 또 죽어가고..
나는 내 어머니 모하소의 태중에, 라희는 왕자실의 태중에 있었습니다. 저 분이 내 어머니지요.
모하소, 유헌과 시선이 마주치면 눈을 내리깔고 읍한다.
동고비, 보퉁이를 놓고 바닥에 부복한다.
유헌 : (오부귀에게) 기품 있는 여인이로다. 해산 하는 대로 궁으로 들이라.
오부귀 : (질겁하며) 좌중랑장 최리의 첫부인이옵니다, 폐하.
유헌 : (실망) 그러냐?
호곡 : (낄낄-거리며) 색기로 보나, 미모로 보나 저 여인보다야, 최리의 둘째부인 왕자실이 낫지요.
유헌 : 거리의 창부라면야 색기가 아름다움의 기준이나, 대가의 여인이라면 기품이 먼저지.
게다 여인의 요염함이란 침실서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게 아니던가.
자묵 : 왕씨 여인은... 폐하께오서 그리 말씀하실 여인이 아니옵니다.
유헌 : 오호~ 이젠 태사령까지. 대체 왕자실이 어떻기에?
자묵 : (설레는) 달로 치자면 바다를 가득채우는 보름달 같고..꽃으로 치자면, 폐하께서 후원에 두고 아끼시는 한떨기 부용화 같지요.
유헌 : 하하하- 사람을 멀리하고, 여인을 멀리하고, 오직 목 빠지게 별만 보는 태사령까지 왕자실에게 반했군, 그래.
자묵 : .. (붉어진다)
유헌의 연이 모하소의 곁을 스쳐지나간다.
유헌, 연에 장식되어 있던 꽃을 한 송이 따서 모하소에게 던진다.
모하소, 모욕감에 얼굴이 붉어진다.
유헌, 능글맞게 웃으며 야한 시선으로 모하소의 온몸을 샅샅이 훑는다.
모하소, 어쩔 수 없이 꽃을 집어 들고 절을 한다.
모하소 : 황공하옵니다. 폐하.
유헌 : 그대 얼굴이 꽃보다 더 붉군. 최리는 복도 많아.
유헌, 손짓해서 연을 움직이게 한다.
유헌 일행이 떠날 때까지 꽃을 든 모하소, 그 자리에 읍해 있다.
씬9. 서해, 바닷가
만삭의 왕자실, 능숙하게 수영을 하고 있다.
해안에는 천막이 쳐져 있고, 화로에는 물주전자가 끓고 있다.
치소, 바닷물에 발목까지 담그고 왕자실에게 소리치고 있다.
치소 : 마님!!! 중부인 마님!! 물이 차요!! 입추가 지남 물 속에 물것도 생기는데 그만 나오세요!! 그만 나오시라니까요!!
왕자실, 그러거나 말거나 자맥질까지 하면서 수영을 한다.
씬10. 낙랑성, 광장 안
유헌의 연이 시야에서 사라지면 모하소, 유헌이 던진 꽃을 말 여물통에 던져버린다.
동고비, 침을 퉤- 뱉는다.
동고비 : 아우..느끼해. 뭔놈의 왕이..먹은게 다 기어올라오네. 우웩- (토하는 시늉)
모하소 : 하루 해를 걷자면 개도 보고, 소도 보고, 똥도 보고. 시대가 그러하니 어쩔 수 없는 일.
그이도 참는데 내가 이 정도를 못넘겨서야...
씬11. 서해, 바닷가
왕자실, 물 속에서 나와 해변으로 걸어온다. 젖은 그녀의 실루엣에 만삭의 몸이 드러난다.
왕자실, 한 손에 전복을 들고 있다.
왕자실 : (치소에게 건네며) 전복이 실하지? 물로 마셔야겠다.
치소 : (받아서 다른 시비에게 주며) 참기름에 덖어 고아. 물은 두 사발 잡아, 한 사발로 졸이고.
시비 : 예.
치소, 왕자실의 몸을 비단가운으로 가려 입혀주고. 다른 시비, 왕자실의 물기를 비단수건으로 닦는다.
치소 : 낼,모레. 낼,모레 하시는데. 그러다 애기씰 물 속에 빠치심 어쩌려구요.
왕자실 : 걱정마라. 아일 순산하려고 하는 일이니. 응애, 눈 떠서 그이와 혼인 전까지 열수강에서 자맥질 하고 놀던 나다.
치소 : 순산하시려면 잘 먹고 잘 자고. 조심조심 몸을 돌보셔야죠! 말 타고, 자맥질 하시고.
왕자실 : 몸을 많이 움직여야 아일 쉽게 낳는거다, 이 바보야.
왕자실, 천막 쪽으로 걸어가다 치소를 돌아본다.
왕자실 : 내, 비록 그이의 둘째 부인이나, 내 아이만은 장군의 큰아들이 될게야.
무슨 일이 있어도, 모하소보다 먼저 아이를 낳을게다.
씬12. 단군왕검의 사당 앞/안
허물어진 단군왕검의 사당.
모하소와 보퉁이를 든 동고비, 걸어온다.
동고비, 사당을 열면 빛바랜 천에 단군왕검의 진영이 그려져 있고.
모하소, 사당 안을 둘러보다 목에 두른 목수건을 풀어 거미줄을 걷어내기 시작한다.
동고비 : 제가 할게요, 대부인 마님. 좀 쉬고 계세요.
모하소 : 치성은 내 손으로, 내 마음 기울여 하는 것이다.
모하소와 동고비, 사당 안을 청소하기 시작한다.
씬13. 서해 바닷가, 천막 안
왕자실, 간이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잠들어 있다.
치소, 탕파(湯婆, 일본의 유담뽀와 같은 것)를 만들고 있다.
양가죽 주머니에 화로에서 끓고 있는 뜨거운 주전자의 물을 붓고 주머니의 주둥이를 막는다.
비단수건을 겹으로 싸서, 왕자실의 배 위에 얹어주고, 양털로 짠 얇은 홑겹 담요를 덮어준다.
치소 : (소근거리듯) 바람끝이 차요. 그만 집으로 가심이..
왕자실 : .. 조용히 해..귀찮다.. (나른하게 대꾸하고 꿈속으로 빠져든다)
씬14. 단군왕검의 사당 안
깨끗이 청소 된 사당 안.
향이 피워져 있고. 진영 앞 대 위에 머루·다래·모과 같은 당시 전래된 몇가지 과일이 진설되어 있다.
모하소, 펴둔 대자리 위에 앉아 기도를 하고 있다.
모하소 : 천제의 아드님이시요, 우리들의 조상 단군왕검이시여. 최리의 아내 모하소, 간청하나이다.
제 나이 일곱에 혼인해, 스물다섯 해를 살면서도 그이에게 아들을 낳아주지 못했나이다..
제 몸을 빌어 그이에게 건강한 자식을 주소소. 제 비록 딸을 낳는다 하여도..
동고비 : (불쑥- 끼어드는) 딸을 낳긴 뭔 딸요! 누구 좋으라구.
모하소 : 흣! (주의 주고) 이 몸이 딸을 낳게 된다면, 자실 아우에게는 아들을 주어 그이에게 기쁨을 얻게 하소소..
모하소, 간절히 눈을 감고 기도를 한다. 그러다 일순간 모하소의 어깨가 기울어진다.
동고비 : (보고) 마님?
모하소 : 어째 이리 졸음이 쏟아지는거지... 향 때문인가...
모하소, 동고비의 어깨에 기대 잠에 빠져든다.
씬15. 왕자실 있는 곳/왕자실의 꿈
왕자실, 꿈을 꾸고 있다.
왕자실, 홀로 새벽녘 바닷가 근처의 누각으로 걸어온다. 월해청원(月海淸園)이라는 누각의 현판이 보인다.
왕자실, 월해청원 현판을 본다.
왕자실 : 여긴... 매시달이잖아. 어찌 된거야?
왕자실, 누각을 오른다. 아직도 어두운 미명이 채 가시지 않은 해 돋기 전의 시각이다.
왕자실, 누각에 올라 창해(滄海, 동해의 옛 이름) 바다를 바라본다. 그 순간 수평선에서 수레바퀴만한 붉은 해가 떠올라 온다.
붉은 해가 마치 로켓포처럼 엄청난 속도로 날아와 왕자실의 가슴팍으로 들어온다.
씬16. 모하소 있는 곳/모하소의 꿈
모하소, 동고비에게 기대 자고 있다.
꿈속의 모하소, 아침에 월해청원 바닷가를 걷고 있다. 갑자기 온 사방이 어두워지며, 비바람과 뇌성벽력이 친다.
모하소 : (두려움에 둘러본다) 동고비야...동고비야!!
(어린 자명의 소리) : 겁낼 꺼 없어요.
모하소 보면, 캄캄한 어둠 속에 한 어린 계집아이(자명/8세)가 붉은 해를 안고 하늘로 집어던지려고 한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하소.
모하소 : 얘야!! 지금 뭘 하는거니!!
어린자명 : 해님이요, 우리집 마당에 떨어져서요. 넘 깜깜해 다시 해님 집으로 보내주려는 거예요.
모하소 : 꼭 그래야 한다면 내가 도와주마!! 어린 네겐 너무 힘들다.
어린자명 : 아줌만 할 수 없어요.
어린 자명, 끙끙- 거리며 해를 창공에 집어던진다. 해가 서서히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로 올라간다. 하늘이 서서히 밝아진다.
모하소, 무릎을 백사장에 대고 어린 자명의 눈높이로 앉아 자명의 두 손을 잡아 호호- 불어주는 동작들에 맞춰.
모하소 : 아가.. 어디 보자. 얼마나 뜨거웠니.. 고래기름을 발라주마..
어린자명 : (눈망울을 굴리며) 아줌마. 나, 아줌마한테 가 살아두 돼요?
모하소 : 응?
어린 자명, 모하소를 꼭 끌어안는다.
자명이 거대한 불덩이가 되어 모하소를 감싸더니, 그대로 모하소의 몸 안으로 스며들어간다.
동고비, 모하소의 어깨를 편하게 잡아주려고 손을 대는데.
모하소가 눈을 번쩍 뜨면서 소리 지른다.
모하소 : 아가!!
동고비 : 꿈꾸셨어요?
모하소 : .. (주위를 둘러본다. 사당 안이다)
씬17. 왕자실 있는 곳
치소, 의자에 앉아 아기옷에 수를 놓다가 왕자실의 신음소리를 듣는다.
왕자실 : 으음... 으음...
왕자실, 몸을 뒤채며 신음을 흘린다.
치소 : 마님!! 중부인 마님!! 일어나세요!!! 얼른요, 마님!!!
왕자실, 눈을 반짝 뜬다. 주위를 보면 자신은 천막 안에 누워있다.
왕자실, 자리에서 일어난다.
치소 : 가위 눌리셨죠?
왕자실 : 호호호- 호호- (갑자기 웃기 시작한다)
치소 : ... 무서워요..마님.
왕자실 : 난 언제나 내 감을 믿었지. 내 가슴 속에 살아 펄펄 뛰는 그 감대로 살았어.
모하소가 있는데, 남의 둘째 부인이 될 여자가 아닌 내가 왜 그이와 혼인했겠느냐.
치소 : 그야 잘 생겨서죠, 주인어른이.
왕자실 : (무시하고) 난 대단한 아이를 낳게 될꺼다. (배를 만지며) 아가, 넌 낙랑의 왕이 될게야. 엄마 말을 믿으려무나.
치소 : (놀라서) 그게 뭔 큰일 날 소리세요!!!
왕자실 : (위엄 있게) 전복 다 고와졌으면 가져오너라. 마셔야겠다.
씬18. 고구려 국내성, 후원
대무신왕, 어린 호동(7세)과 함께 산책을 하고 있다.
그 옆에 송매설수, 여랑, 뒤로 내시장과 시녀장 등이 따르고 있다.
호동 : (풀 위에서 여치를 잡아, 송매설수에게 준다) 어머니, 이거.
송매설수 : 어머나. 여치로구나. 호동아, 이 어미한테 주는 거니?
호동 : (고개를 끄덕인다)
송매설수 : 고맙구나.
여랑 : (송매설수에게) 언닌, 참 관상도 특이하오.
송매설수 : 공주, 그게 무슨 말이죠?
여랑 : 아, 입은 달콤한 감미수 같은데 (송매설수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며) 여긴 고드름 같으니까 하는 소리죠.
대무신왕 : 여랑아!
송매설수 : (호동에게) 왕자, 진실로 그랬다면 어미가 미안해요. 세상 사는 일은 하나같이 공부가 필요하답니다.
이 어미, 아직 어미가 될 공부가 부족했나 보니 이해해요.
여랑 : 하기사 자기 자식 안 낳아보고 남의 자식 키우기 쉽진 않죠. 오라버니, 귀하고 천함을 떠나 여잔 여자예요.
귀함 받고, 예쁨 받아야 남도 사랑할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구요. 안그래요, 언니?
송매설수 : (싸늘하다) 충분히 폐하께 아낌 받고 있어요.
대무신왕 : 그러는 너는, 어째 부마도위 사이에 여태껏 아이 하나 못두는 거냐?
여랑 : 그야 둘 중 하나죠. 그이가 고자거나!
대무신왕 : 어허! 이 녀석이! 고만 입 다물거라.
여랑 : 하던 말은 마저 해야죠. 오라버니가 온 천지사방 전쟁터로 끌고 다니니 합방 할 시간이 있어야죠. 안그래요? (배시시- 웃는다)
시녀장과 시녀들, 입 가리고 조심스럽게 키득키득 웃는다.
후원 문으로, 을두지와 우나루, 급히 들어온다.
우나루 : 폐하, 폐하!
여랑 : 좌우간 양반은 못된다니까.
대무신왕 : 무슨 일인가?
을두지 : 낙랑궁에 심어 둔 세작이 매를 띄웠습니다!
대무신왕 : 그래!!
씬19. 고구려 외곽
파오가 쳐져 있다. 파오 꼭대기에
현무(비류나부가 마자수 건너 북쪽에 있고, 고구려의 북쪽을 상징하는 문양은 현무다)가 수놓아진 비류나부기가 걸려있다.
비류나부의 호위무사들 파오 앞에 서있다.
송옥구, 밖에 나와 서서 송매설수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송매설수와 양덕, 호위무사 몇 명.
송매설수, 말에서 뛰어 내린다.
송매설수 : 아바님!!
송옥구 : (미소 지으며, 읍한다) 마마..
송매설수, “아버님!” 반갑게 부르며 송옥구를 와락- 끌어안는다.
씬20. 송옥구의 파오 안
다탁과 의자만 놓여 있다.
시녀장, 한쪽에서 숯불 화로에 개장국 질뚝배기를 끓이고 있다.
송옥구, 서있고. 송매설수, 의자에 앉아 바구니를 열어 음식을 꺼낸다. 바구니에서 접시에 담긴 음식이 나온다.
송매설수 : (흰 비단보로 싼 찐밥을 푼다) 새아리밥, 부루. 정말 먹고 팠어요.
꿈에서도 가끔은 어마님이 쪄주신 새아리를 먹었거든요~ (배시시)
송매설수, 손으로 네모난 새아리밥 한 모퉁이를 떼어 맛있게 먹는다.
시녀장, 개장국 질뚝배기를 송매설수 앞에 놓아준다.
송매설수 : 으음~ 집 냄새. (숟가락으로 떠먹고) 토장이 달라 그런가. 궁에서 먹는 개장국 하곤 맛이 달라.
역시 우리 어마님 솜씨네요.
송옥구 : (딸을 흐뭇하게 보며) 천하에 일미가 다 모여 있는 궁인데. 아무렴 집만 못하려구요.
송매설수 : 궁에서 받는 제 밥상은 양념으로 모래라도 끼얹는지, 하나같이 서걱서걱 합니다. (자조적으로 피식- 웃는다)
송옥구 : (가만히 보다) 힘드십니까, 마마.
송매설수 : 아바님이 짐작하지 못하실 만큼.. 너무 너무. 너무너무요. (눈물을 글썽인다) 집에 돌아가고 싶습니다.
송옥구 : .. (시녀장에게) 양덕인 나가 있거라.
시녀장 : 예, 고추가 어른.
시녀장, 파오 밖으로 나간다.
송옥구 : 나약한 계집아이처럼 징징- 거려, 아비를 실망시키지 마라.
송매설수 : 아바님!
송옥구 : 내가 널 무휼에게 보낸 것은, 내 딸이라서가 아니다. 여태껏 이 아비, 너만큼 예쁘고. 너만큼 강하고, 영리한 여잘
비류나부서 본 적이 없다.
송매설수 :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이 송매설수, 마음만 먹으면 어떤 사내도 녹일 수 있고, 누구라도 발밑에 엎드리게 할 수 있다,
자신했습니다. (흥분하는) 그런데 아니에요! 제 착각이죠!!
송옥구 : 무휼이 사내를 좋아하는 놈이 아니라면, 어찌 너처럼 고운 여인을 못본체 하랴.
송매설수 : 그이가 아니라, 호동이 문젭니다! 제가 그이와 베갯머리를 다투는 적수는 후궁들도 아니고,
후원에 자색 고운 시비년들도 아니고. 호동입니다!
송옥구 : ..
송매설수 : 고구려에 왕비가 된다. 잘난 사내, 무휼의 부인이 된다. 꽃단장 하고, 마자수 건널 때,
전처 소생 아들놈하고 이러고 살 줄 몰랐습니다.. 제 팔자가 왜 이리 더럽답니까.
송옥구 : 아들을 낳아(낳아라). 늙어 본 자식은 원래 귀한 법. 무휼이라고 다르리. 고구려에 다음 왕은 내 손주가 될 것이다.
송매설수 : (발끈하는) 아이는 저 혼자 낳습니까! 제 방에 와서도, (하다 멈춘다)
송옥구 : ?
송매설수 : (송옥구의 궁금증 무시하고, 일어난다) 가겠습니다.
송매설수, 싸늘한 표정으로 파오입구 쪽으로 간다.
송옥구, 복잡한 표정으로 딸의 뒷모습을 보다가.
송옥구 : 호동의 나이 이미 일곱이다.
송매설수 : 의붓아들 나이도 모를까 봐요?
송옥구 : 더 이상 자라면 감당하기 어렵다. 호동이 왕이 되면, 비류나부는 죽은 목숨이다.
송매설수 : 아들을 낳을 자신이 없습니다.
송옥구 : 낳아야 한다.
송매설수 : 아바님.
송옥구 : 나는 비류나부 사만백성의 수장이다. 비류나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사랑하는 내 딸이라도 죽여야 한다.
송매설수 : !!
송옥구 : (다가와 송매설수의 손을 잡는다) 너를 믿는다, 매설수야..
송매설수 : .. (손을 뺀다) 어마님께 제가 몹시 그리워하더라 전해주세요.
씬21. 고구려 국내성, 외성
송매설수, 말을 달리고 있다. 그 뒤를 말 타고 따르는 시녀장과 호위무사1·2.
송매설수의 귀에 송옥구의 말이 환청처럼 들려온다.
(송옥구의 소리) : 비류나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내 딸이라도 죽여야 한다.
송매설수, 입술을 깨물고 말에 박차를 가해 달려간다.
씬22. 고구려 언덕, 낙랑군과의 경계선 (오후)
대무신왕의 말이 달려온다. 그 뒤로, 을두지와 우나루, 호위무사들.
대무신왕의 말 앞에 어린 호동이 앉아 있다.
말 멈추고, 호위무사의 등을 밟고 대무신왕 내린다.
대무신왕, 호동을 안아 내린다.
대무신왕 : (멀리 낙랑군과의 군사경계선 목책을 바라본다, 혼잣말처럼) .. 낙랑군에 자중지란이 일어나고 있다..
을두지 : 낙랑군 패수 아래로 때 아닌 물난리에 굶어 죽는 백성이 산을 이뤘는데,
유헌이란 자는 봉위 삼십년 봉축행사로 백성들을 쥐어짜 기어이 반란이 터졌다 합니다.
대무신왕 : (웃으며) 그것이 권력이지. 그 맛에 왕이 되고자 하는 게 아닌가.
우나루 : (OL) 원래 왕이란 백성들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분 아닌가요?
대무신왕 : 채찍 대신 쌀을 나눠준다고 백성을 잘 다스리는 건 아니지.
어진 임금이 되든, 폭군이 되든, 혼군이 되든 그건 유헌의 마음이고.
우나루 : 폐하!
대무신왕 : 걱정할 것은 없어. 내가 그런 폭군이 되겠다는 것은 아니니까.
반란이 문제가 아니라.. 이 기회에 낙랑군 유헌이 반드시 둘을 죽여줘야 한다.
을두지 : 둘이란.. 좌중랑장 최리와 우중랑장 왕굉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대무신왕 : (고개를 끄덕인다) 최리는 지장이고, 왕굉은 용장이다. 머리와 칼이 합쳐지면, 우리 고구려에 버겁다.
우나루 : 건 그렇다치구요, 지금당장이야 유헌이 놈이 더 문제죠.
대무신왕 : 떠오르는 해가 뜨겁지, 지는 해가 뜨겁던가? 유헌이 무너지는 건 시간의 문제. 그가 무너졌을 때,
우리 고구려가 낙랑을 집으려면, 최리·왕굉 둘을 반드시 치고 가야 한다. (호동에게)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호동 : 이이제이, 적으로 적을 치고. 어부지리, 아버님은 조개를 줍듯 낙랑을 주우시려는 거죠?
대무신왕 : 하하하- 하하. 영민하구나, 호동아.
호동 : 모두가 사부님의 가르치심입니다. (을두지를 향해 읍해 인사한다)
을두지 : 과찬이시옵니다. 왕자마마. (답례의 읍한다)
대무신왕 : (사심없는 기쁨) 이 녀석. 이 녀석 호동아!! 누가 있어 나를 이리 기쁘게 한단 말이냐!!
대무신왕, 호동을 번쩍 안아 머리 위로 치켜든다.
우나루, 헤벌쭉 웃고. 을두지, 흐뭇하게 부자지간의 다정함을 본다.
씬23. 낙랑군, 유헌의 정전 앞 (오후)
호위무사들 삼엄하게 경계서고 있다.
씬24. 낙랑군, 유헌의 정전 안 (오후)
유헌의 주재 아래, 신하들 대책 회의를 하고 있다.
중앙에 세 개의 계단이 돋우어져 있고, 그 위에 대리석이 깔려 있다.
대리석에 비단보료. 유헌이 비스듬히 앉아 눈을 내리 깔고 신하들을 내려다본다.
오부귀, 호곡 등의 대신들과 무장차림의 최리, 왕굉 등이 문·무의 자리배치에 따라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라져 있다.
유헌 : 짐은 결심했다. 증지·탄열·점제·열구·둔유·기망 반역에 가담한 여섯현을 벌하겠노라!!
최리와 왕굉, 긴장한 표정으로 유헌을 본다.
유헌 : 여섯현의 정남들은 단 한번이라도 반역에 가담했다면, 한 두름에 엮어 황해바다에 수장하고.
나머지는 요동군과 현도군에 노예로 판다!
최리/왕굉 : !!
유헌 : 계집들 중 이쁜 것들은 가려 뽑아 장안의 황실과 고관대작의 시비로 보낼 것이오,
(강조해서) 못생긴 것들은! 머리를 빡빡 깎아 죽을 때까지 방아 찧는 노역을 하게 하라!!
최리 : !!
유헌 : 대장군 유성아가 지금 장안에 가 있으니, 반란진압은 최리와 왕굉이 맡도록 하라.
(일어나며) 좌중랑장 최리, 우중랑장 왕굉은 짐의 뜻을 받들라!
왕굉과 최리,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앞으로 나와 한쪽 무릎을 꿇고 지의를 기다린다.
유헌 : 짐이 명하노라. 우중랑장 왕굉은 군사 천오백을 이끌고 증지·탄열현으로 나가 반란군을 한구뎅이에 쓸어 담아라!!
왕굉 : 삼가 지의를 받드나이다. 비직 왕굉, 반란을 진압하고 혹 있을지 모르는 고구려 놈들의 도발을 막겠나이다!
유헌 : 네 말이 든든하다. (미소를 짓고, 시선 옮겨 최리를 본다) 좌중랑장 최리는 군사 삼천을 이끌고, 점제·열구·둔유·기망 네 현의
반란을 잠재우고. 반역 수괴, 왕조의 둥지를 들어내라. 그 놈들을 구멍 뚫은 썩은 배에 태워 황해 바닷물에 쳐 넣고 오라!!
최리 : ..
오부귀 : 무엄하다! 어찌하여 좌중랑장은 지의를 받들지 않는가!
최리 : 세 끼를 굶으면 옆집 담을 넘고, 사흘을 굶으면 관청 창고를 털고, 열흘을 굶으면 자기 자식도 잡아먹는다 했습니다.
이번 반란은 굶주림 때문이옵니다! 이제 여섯현을 털어내면 누가 있어 폐하를 섬기겠습니까!
왕굉 : (안타까워) 그대는 무슨 말을 하는건가!! 어서 지의를 받들게!!
유헌 : .. (살벌한 시선으로 계단을 내려온다)
정전 안에는 침묵이 감돈다.
유헌, 걸어 내려와 정전 안을 몇 걸음 서성거리다 발걸음을 멈춘다.
유헌 : (싸늘하게 최리를 보고) 짐이 최리에게 묻노라.
최리 : 비직 최리, 폐하의 하문을 듣사옵니다.
유헌 : 너 최리는 우리 한족이냐? 조선족이냐?
최리 : ... (곤혹스러운)
유헌 : 네 할애비가 이미 황실로부터 한족의 첩지를 받았다. 답하라! 내 물음이 들리지 않느냐!!
너, 최리는 우리 한족이냐! 조선족이냐!!
최리 : .. (차마 대답하기 힘들다)
왕굉 : (최리의 눈치를 살피다) 폐하, 그 무슨 하문이시오니까! 당연히 좌중랑장 최리는 폐하의 신실한 신하이오며,
유헌 : (OL) 짐이 최리에게 묻고 있거늘!! 왕굉 너 따위가 감히 어디라고 나서는가!!
왕굉 : 비직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목숨으로 죄를 물어 주소서!!
왕굉,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찧는다.
유헌, 눈짓으로 정전 밖에 있는 호위무사들을 부른다.
호위무사들, 무장한 채 최리를 끌어내기 위해 안으로 들어온다.
왕굉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최리, 그들을 본다.
유헌 : 대답하라!! 이 한 대답에 최리 네 목숨이 달려있다!! 너는 한족이냐! 조선족이냐!
최리 : .. (양심의 소리에 괴로운)
유헌의 손짓에 호위무사들, 몇 걸음 더 다가온다.
유헌 : 너는 나의 신하가 아니라, 반란수괴 왕조의 신하였더냐!!
최리 : .. (갈등하는)
유헌 : 당장, 최리를 끌어내 요참하라!!
호위무사장 : 예, 폐하!!
최리 : (결국 어쩔 수 없음을 안다) 비직... 최리, 폐하의 지의를 받드나이..다.
유헌 : (최리를 본다) 진심이냐?
최리 : 예, 폐하..
유헌 : 그렇다면 다시 묻겠다. 너는 진정 한족이냐? 조선족이냐?
최리 : 비직 최리, 폐하의 하문을 받자와 답을 올립니다.
(목이 메인다) 신은 황은을 입고 뼛속까지, 피 한방울까지 다시 태어난 한인이옵니다. 비직, 결코 조선족이 아니옵니다!
최리, 이마에 피가 베이도록 바닥을 찧는 쿵쿵- 소리가 정전에 메아리친다. (Dis)
씬25. 단군왕검의 사당 앞 (저녁)
최리, 말에서 뛰어내린다.
씬26. 단군왕검의 사당 안 (저녁)
칠지등이 밝혀져 있다.
모하소가 진설해 놓은 과일들이 그대로 놓여 있다.
최리,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는다.
최리 : 이 몸이 양심을 꺾은 것은 죽음이 두려워가 아니옵니다!! 이 한 몸 개죽음이 조선의 백성들을 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몸은, 죽어도·살아도 뼛속 깊이, 피 한 방울까지도 조선인이옵니다!!
최리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
씬27. 낙랑군, 낙랑성 유헌의 연회실 (밤)
유헌, 오부귀와 호곡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다. 닭볶음과 배추줄기볶음 같은 안주가 놓여 있다.
호곡 : 이러니 백년이 흐르든, 이백년이 지나든, 조선족 놈들은 믿을 수 없단 겁니다.
오부귀 : 어찌하시렵니까, 폐하..
유헌 : (술잔을 내려놓고) 최리를 죽이라.
오부귀 : (OL)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왕굉·최리 수중에 이미 병사 사천오백이 있습니다!!
유헌 : (혼잣말처럼)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긴 한데.. 그렇다고 고름잡힌 입술을 그냥 두기엔 잠자리가 찜찜하고...
흠.. 최리...최리.. 이 개자식을...흠..
문 열리고, 내시장 들어온다.
유헌 : 누구도 들어오지 말라 했거늘!!
내시장 : 태사령께오서 폐하를 모셔오라 합니다. 영성의 움직임에 반역의 징조가 있다 하옵니다.
유헌 : !! (벌떡 일어난다)
씬28. 단군왕검의 사당 앞 (밤)
왕굉, 말에서 내려 사당 쪽으로.
씬29. 단군왕검의 사당 안 (밤)
왕굉, 입구에 서서 최리를 바라본다.
최리, 사발 하나를 놓고 단도를 집어 손목을 긋는다. 최리의 피가 뚝,뚝- 사발에 떨어진다.
최리 : 맹세코!! 맹세코 이 최리, 유헌을 죽이고. 낙랑군을 파버리고! 단군왕검께오서 이루셨던 옛 조선을 다시 세우겠사옵니다.
그 신표로 이 최리의 붉은 피를 바치옵니다!!
(욍굉의 소리) : 그 피에 내 피를 섞어도 되겠는가?
최리, 돌아보면 왕굉이다.
최리 : 진심입니까?
왕굉 : 그대는 하나 뿐인 내 여동생 자실의 남편이며, 내 이십년 전우며, 나와 피를 같이 하는 조선족이며, 사나이지.
거기에 내 피를 보태겠네.
왕굉, 최리의 옆에 무릎 꿇고 최리에게 단검을 넘겨받아 자신의 손바닥을 긋는다.
왕굉의 피가 사발에 담긴 최리의 피에 뚝,뚝.. 섞여든다.
씬30. 낙랑군, 낙랑성 영성단 (밤)
자묵, 유헌과 영성단에 올라 별을 보고 있다. 그 아래, 오부귀와 호곡, 내시장 시립해 있고.
유헌 : 최리에게 태어날 두 딸년이 낙랑군을 망하게 한다?
자묵 : 첫별이 뜨기 시작하는 갑야에서 늦별이 지는 무야까지 소신 눈꺼풀 한번 덮지 않고 영성을 살폈사옵니다.
패성이 천구수성에서 돋아 올라, 화개를 침범했으니 (하는데)
유헌 : (OL, 귀찮은듯 손 내저으며) 골 아픈 소리는 관두고, 본론만 말하라. 틀림없이 최리에게 태어날 두 딸년이 나를 위협하는가?
자묵 : 소신의 목을 걸고 장담하옵니다. 내일 해가 뜨기 전에, 최리에게 역모의 두 딸이 태어날 것이옵니다.
유헌 : (오부귀와 호곡을 본다) 승상과 태부는 듣게.
오부귀/호곡 : 예, 폐하.
유헌 : 지금 당장 최리를 죽일 수 없으니, 대신해 두 딸년을 죽이겠노라. 최리의 집에 가, 그 놈에게 전하라!
그놈 손으로 직접 두 딸년을 죽이게 하라!
오부귀 :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겠나이다, 폐하!!
씬31. 낙랑성, 청해헌 앞 (밤)
마차가 멈춘다.
바닷가에서 돌아온 왕자실이 내린다. 뒤를 따르는 치소와 시비들, 손에 불 밝힌 등을 들고 있다.
왕자실 : 으음.. (신음을 흘린다)
치소 : 왜 그러세요?
왕자실 : 고단하구나.
치소 : 그러게 물에 너무 오래계셨어요. (하다 문득 왕자실의 치마를 본다)
왕자실의 치마가 붉은기와 함께 물들고 있다.
치소 : 마님!!
왕자실 : (치소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치마를 본다)
치소 : 아기씨가 나오려합니다!!
왕자실 : 어서 장군께 알려라! 나는 산실로 갈테니!!
씬32. 청해헌, 모하소의 처소 (밤)
모하소, 동고비에게 왕자실이 산기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하소 : (반색) 그래!! 자실 아우가 산기를 보인다고!!
동고비 : 그게 그리 즐거워하실 일인가요? 장자 자릴 뺏기게 생겼는데.
모하소 : 쓸데없는 소리. (살짝 째려보고) 산실로 가봐야겠다.
모하소, 침상에서 일어나는데 침상 흰 이불에 붉은기 섞인 물기가 배어난다.
모하소 : ! (동고비를 본다)
동고비 : 아기씨예요!! 기도한 효험이 있어, 중부인 마님보다 먼저 아일 낳으시려나 봐요!!!
모하소 : .. (미소가 떠오른다)
동고비 : 잠시만요! 금방 산실로 모실께요!! (문 쪽으로 서둘러 가며) 얘들아! 누구없니! 대부인 마님께서 몸을 풀려 하신다!!!
(뛰어나간다)
모하소 : (자신의 배에 조심스레 손을 얹고) 아가. 이제 곧 엄마가 널 만나겠구나.
씬33. 낙랑군, 낙랑성 일각 (밤)
오부귀와 호곡, 자묵은 말을 타고. 무장한 호위무사 삼십명은 뛰어서 청해헌으로 급박하게 달려가고 있다.
씬34. 청해헌, 최리의 서재 (밤)
최리와 왕굉, 낙랑군 지도를 놓고 밀담을 나누고 있다.
낙랑군 지도에 최리, 낙랑군 군사들이 포진해 있는 곳에 표식을 하면서.
최리 : 수중에 군사 사천오백 중, 한족이 천오백. 우리 조선족이 삼천입니다.
형님이 한족 병사들을 이끌고 증지 쪽으로 멀리 떠나세요.
왕굉 : 내가 그들을 따돌리는 동안 자네가 삼천을 끌고 유헌을 치겠다?
최리 : 그래야죠.
왕굉 : (고개를 끄덕인다) 자실이 아이 낳는 것만 보고 바로 떠나지.
씬35. 청해헌, 왕자실의 산실 (밤)
왕자실, 산통을 겪고 있다. 산파와 시비, 시중을 들고.
문 열리고 치소, 쟁반을 들고 들어온다. 쟁반에 김 오르는 삶은 돼지고기 담긴 접시가 놓였다.
치소 : 이것 좀 드세요! 찐 돼지고기에요! (접시를 내민다)
왕자실 : 치워라. 지금 그게 먹히겠느냐.
치소 : 힘 쓰셔야 되잖아요. 잡수실 수 있는 양껏 잡수셔야 힘을 쓰신다구요.
아기씨 미끌미끌 쑥 나오라고 기름이 잘잘잘- 흐르는 부위로 잘라온걸요.
왕자실 : 망할 것. 돼지비계 먹는다고 순산한다는게 말이 되느냐. 아기가 어디 목구멍으로 나온다더냐.
왕자실, 치소를 흘기면서도 돼지비계를 손으로 집어 소금을 찍어 먹음직스럽게 삼킨다. 그러면서도 산통 때문에 신음을 흘리는.
씬36. 청해헌, 모하소의 산실 (밤)
모하소의 진통이 극심하다. 산파 달개비가 모하소 이마의 진땀을 비단수건으로 꼭꼭, 눌러 찍어내고.
문 열리고, 염소젖이 담긴 사발 놓인 쟁반을 들고 들어오는 동고비.
동고비 : 금방 짜온 염소젖이에요~ 마시세요~
동고비, 사발을 모하소의 입가로 가져간다.
모하소 : (고개를 젓는, 힘없이) 됐어...
달개비 : 억지루라도요. 어떡하든 힘을 모으셔야 애기씰 몸 밖으로 밀어내실 수가 있죠.
동고비 : 그치, 언니? (모하소의 입가에) 한모금만요~ 한모금만~
모하소 : (억지로 한모금 삼키는데, 진통이 몰려온다)
씬37. 청해헌, 대문 앞 (밤)
오부귀와 호곡, 자묵, 호위무사들 도착한다.
정문 양쪽 추녀 끝에 붉은 등이 불을 밝히고 있고.
대문에는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는 ‘産中禁外人出入’ 산패가 붙어 있다. (자막) 산중금외인출입 (해산 중이니 외부인의 출입을 금함)
호곡, 말에서 뛰어내려 무작스럽게 산패를 확- 잡아뜯어내 발로 밟고.
호곡 : (큰소리로) 좌중랑장 최리는 어서 문을 열고 폐하의 지의를 받들라아!!!
씬38. 청해헌, 최리의 서재 (밤)
(호곡의 소리) : 좌중랑장 최리는 속히 나와 폐하의 성지를 받들라!!!
왕굉, 서둘러 양피지 지도를 말아 옷 속에 감추며.
왕굉 : 무슨 일인가.. 이 밤에 호곡이...
최리와 왕굉, 불안한 시선을 교환한다.
씬39. 청해헌, 정원 (밤)
불이 대낮처럼 밝혀져 있다.
호위무사들과 함께 오부귀와 호곡, 기세등등하게 서 있다. 자묵, 조금 떨어져 서 있고.
하인이 대나무 자리를 빠르게 펴면.
최리 : (신발 신은채 대자리로 올라가 왕궁 쪽을 향해 세 번 절하고, 무릎을 꿇는다) 비직 최리, 성의(聖意)를 듣습니다!!
오부귀 : (품에서 양피지를 꺼내 펼친다) 좌중랑장 최리는 듣거라. 짐이 황제폐하의 명을 받들어, 이곳 낙랑군에 온지
이미 서른해가 되도다. 짐의 보살핌으로 그간 낙랑군은 태평성세를 이루었으나, 근자에 모반이 도처에서 일어나
황망하고 참담하여, 태사령 자묵으로 하여금 천제의 뜻을 살피게 했노라.
씬40. 낙랑군, 낙랑성 영성단 (밤)
유헌, 홀로 앉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다.
(유헌의 소리) : 때아닌 물난리와 모반이 어디서 오는가 옥황상제께 여쭈었더니, 태사령 자묵에게 그 답을 주셨도다!
씬41. 청해헌, 정원 (밤)
오부귀 : 드디어 반역의 기운을 태사령이 찾아냈노라!! 그것은 바로 좌중랑장 최리 너였노라!!
최리 : !! (쿵, 설마 싶은)
오부귀 : 그러나 최리 네가 반역을 하여, 낙랑군을 멸하는 것이 아니라. 네 몸에서 태어날 두 딸 년의 운명이
그러하다 옥황상제께서 말씀하셨도다. 이제 짐은 하늘의 뜻에 따라 최리 네 두 딸년을 죽이고자 한다.
최리 : (황당한) 허.. 대체 이 무슨 황망한 말씀이십니까?
호곡 : 대왕의 뜻에 뭔 토를 다나! 달길!! 잠자코 쳐듣기나 하지!
오부귀 : 오늘 최리에게 두 딸년이 태어나면 자식을 잘못 둔 죄, 최리에 손으로 직접 죽이도록 하라!!
최리 : !!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딸인지·아들인지도 알지 못하는데 이게 무슨 얼토당토 안한 일입니까?
자묵 : (차가운) 그대에게 아들은 없소.
최리 : .. (불길한)
오부귀 : 그대의 손으로 두 딸년의 목줄을 누르라!!
최리 : ..
오부귀 : 어찌 대답이 없는가! 폐하께서 따로이 말씀하시길,
최리가 뜻을 받들지 않을시, 청해헌에 목숨있는 것들은 단 하나도 살아남지 못한다 하셨도다!!
최리, 생각한다.
(인서트) 씬29
최리 : 맹세코 이 최리, 유헌을 죽이고. 낙랑군을 파버리고! 단군왕검께오서 이루셨던 옛 조선을 다시 세우겠사옵니다.
오부귀 : 좌중랑장!!!
최리 : .. (대의가 더 소중하다. 궁궐 쪽을 향해 읍하고) 폐하.. 삼가..지의를 받드나이다.
제 소생이 딸이라면 이 비직의 손으로 그 목을 눌러 죽이겠습니다..
씬42. 청해헌, 모하소의 산실 마당/산실 안 (밤)
무장한 호위무사 15명, 삼엄하게 지켜 서 있다.
모하소, 동고비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달개비 : 그게 뭔 미친 소리!
모하소 : ... (기가 막히는)
동고비 : 반드시! 반드시 아들을 낳으셔야 합니다, 마님!! 반드시요!!
씬43. 청해헌, 왕자실의 산실 마당/산실 안 (밤)
역시 무장한 호위무사 15인 지켜 서 있고, 호곡 서 있다.
왕자실, 마지막 산통을 겪는다. 치소와 산파, 시중들면서.
치소 : 제발.. 제발 아드님요! 아드님이어야 합니다!! 안그러면 죽습니다!!
왕자실 : 걱정..마라. 반드시.. 아들이.. (하다, 마지막 산통의 비명)
마당, 호위무사들 ‘으왕!!’ 하는 아기 울음소리를 듣는다.
호곡, 주머니에서 볶은 콩을 한주먹 꺼내 이로 껍질을 뱉어가며 우적우적 먹고 있다가,
아기울음소리에 볶은 콩 한주먹을 마당에 던지고.
호곡 : 아들놈이냐!!! 딸년이냐!!!
호위무사 : 지금 으왕했는데 어찌 압니까, 태부어른?
호곡 : 가, 물어봐!! 방문 열고 드가보든가!!
왕자실 : 당연히 아들이지?
치소 : ..
왕자실 : 왜 대답이 없어!! (불안한) 아들이....겠지..? 그렇...지?
치소 : ...
왕자실 : (일어나 산파가 강보에 싼 아이를 받아든다. 강보를 급히 헤쳐보고) !!
(호곡의 소리) : 왕씨 여인아, 무엇을 낳았는가!! 아들놈인가! 반역의 씨앗, 딸년인가!!!
왕자실 : ..
씬44. 청해헌, 후원 (밤)
자묵, 홀로 등 하나를 밝히고 의자에 앉아 밤하늘을 바라본다.
씬45. 왕자실의 산실/산실 앞 복도 (밤)
호곡, 호위무사들을 재촉한다.
호위무사들, 잠긴 문을 흔들고 있다.
호위무사 : 갈쳐도 안주고, 열지도 않는데요?
호곡 : 발로 들이차!! 그깟 문 하나 못 뽀개, 이 새끼야!!
호위무사, 발길로 문을 차 부수려는데.
왕자실 : (산파에게) 아들이라 해라.
치소 : (불안한) 어쩌시려구요. 금방 들킬텐데..
왕자실 : (산파에게) 내 말대로 하고. (치소에게) 태사령 자묵이 함께 왔다지?
치소 : 예.. 후원에서 별 보고 혼자 쳐앉아 있다네요.
왕자실 : 화장을 해야겠다. 가장 화려한 옷을 꺼내오고, 가장 눈부시게 날 화장시키고, 숨 막힐 듯 화사한 금목서 향물을 가져오너라.
씬46. 청해헌, 서재 (밤)
최리와 왕굉,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왕굉 : 지금 들이치는게 어떻겠나? 저들 삼십이야 우리 둘로도 가능한 일.
최리 : 제 자식...둘 보다. (눈시울이 붉어진다) 낙랑...삼십만 백성을 살리는... 대업을.. 어찌 제 자식 살리겠다고..
(말문이 막혀버린다)
씬47. 청해헌, 왕자실의 산실 마당 (밤)
눈부시게 치장한 왕자실이 산실 복도를 치소를 뒤세우고 걸어 내려온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눈부신 무사들.
호곡 : .. (입 벌리고 보다가) 뭔.. 해산한 여자가 달뎅이 같이 야시시하오?
왕자실 : (요염하게 웃고)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호위무사 : (주의 주는) 태부어른.
호곡 : (정신 차리고) 그래. 아들이라고?
치소 : (떨리는) 예...
호곡 : 내가 드가 함 보겠소, 부인.
왕자실 : 산실 피비린내 가시지 않았습니다. 방을 치우고, 제 아들을 보여드릴테니 잠시 기다리십시오.
아비에게 자식을 먼저 보이는게 예의 아니던가요.
호곡 : 험..험.. (헛기침) 건 그렇고. 암튼 축하하오. 아들낳은거. 내 좀 기다려주지.
왕자실 : (가볍게 고개 숙여 절하고, 걸어간다)
왕자실이 걸어가면 그녀에게 압도된 무사들, 길을 터준다.
씬48. 청해헌, 후원 중문 앞 (밤)
등을 든 치소를 앞세우고, 화려하게 성장한 왕자실, 중문을 넘어선다.
왕자실의 시선에 홀로 석탁 앞 의자에 앉아 별을 올려다보고 있는 자묵의 옆모습이 보인다.
왕자실 : .. (잠시 생각하다, 치소에게) 넌 산실을 지켜. 아무도 들어서지 못하게.
치소 : 죽기 살기루 애기씰 꼭 부둥켜 안구 있으께요, 마님.
치소, 등을 땅에 놓아두고 중문을 넘어간다.
씬49. 청해헌, 후원 (밤)
자묵, 홀로 앉아 별을 보고 있다. 석탁 위에는 술 한 병과 잔이 놓여있고, 안주로는 대추꿀졸임 정도가 접시에 담겨 있다.
자묵, 술에 손도 대지 않고 별을 보는데..
사각사각- 비단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왕자실이 걸어온다.
자묵, 쳐다보지 않고 그 자세로 앉아 있다.
왕자실, 자묵의 옆으로 걸어와 두 소맷자락을 겹쳐 눈높이로 올리고 우아하게 읍한다.
이미 왕자실이 올 것을 예측하고 있던 자묵,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자묵,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왕자실을 바라본다.
자묵 : 아들을 낳으셨다구요?
왕자실 : (읍한 팔을 내리고 자묵을 본다) ...
자묵 : 예까지 걸음한 이윤 알지만 그만 들어가세요.
왕자실 : 내 남편은 아들이 없다 하셨다죠?
자묵 : 운명을 비켜갈 자, 두 발 달린 생명 중에 아무도 없습니다. 최리에게 아들은 없소.
왕자실 : 내 딸은 죽을 운명이 아닙니다.
자묵 : 억지 쓰지 말고, 따님을 내어 주십시오.
왕자실 : (OL) 창해 붉은 해를 안고 태어난 아입니다! 첫 숨 내쉬자마자 목졸려 죽을 거라면 내 몸 빌어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태양을 품은 아이가 이리 어이없이 죽을 운명이란게 말이 되나요! 난 믿지 않아요!
자묵 : 유헌대왕에 핏줄이 아니고선 누구도 태양을 안고 태어나서는 안됩니다.
왕자실 : 운명을 바꿀 자 아무도 없다면서요?
자묵 : (손을 들어 왕자실의 말을 막는다) 낳자마자 자식을 잃게 된 부인의 처지가 딱해 좀 전 얘긴 못들은 걸로 하지요.
왕자실 : 하늘의 뜻을 받고 태어난 제 딸을 살려주십시오.
자묵 : 낙랑에 하늘은 오직 유헌대왕. 폐하의 지의십니다.
왕자실 : 그이가 가진 재산 전불 드리죠.
자묵 : 훗.. (피식 웃음이 난다) 고마운 말씀이군요.
왕자실 : 아버지가 내 몫으로 주신, 박릉평야의 비옥한 땅두요.
자묵 : 하하하- 하하하- (폭소를 터트린다)
자묵, 한참을 웃고 나서 왕자실을 온아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자묵 : 내 나이 쉰. 두 발목 정도는.. 아닌가? 어쩌면 (허리를 손 옆으로 세워 가늠하면서) 이만큼은 흙 속에 묻혀 썩고 있다 봐야죠.
반은 죽고, 반은 숨만 붙어 있는. 오십이 본래 그래요.. 재물에 혹하던 시절은 아쉽게도.. 지났습니다. (쓸쓸한 미소)
왕자실 : ..
자묵 : 해산한 몸으로 바람을 맞으면 좋지 않습니다. 그만 들어가세요.
왕자실 : 여자에 대한 욕망도 벌써 반은 썩어 버렸나요?
자묵 : (무슨 뜻인지 감 안잡힌 얼굴로 본다)
왕자실 : 그래도 아직 그대 속에 사내가 반은 남아 숨쉬겠죠.
자묵 : !
왕자실 : 날 안고 싶지 않나요?
자묵 : 부인!
왕자실,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자묵에게 한걸음 다가가, 그의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유혹적인 손길로 쓸어 올린다.
씬50. 모하소의 산실 (밤)
모하소, 힘도 주지 않고 진땀을 흘리며 누워있다.
동고비, 탯줄을 끊을 비수와 가위를 소독하고 있다. 화로에 숯불이 담겨 있고, 동고비 비숫날을 숯불에 달구고.
벌겋게 단 가위 손잡이를 집게로 집어 끓는 물에 담그면, 지직-소리 내며 물이 튄다.
달개비, 대야에 담긴 따뜻한 물에 손을 씻고, 모하소의 하체를 덮은 하얀 비단천을 들치고 머리를 넣어 그녀의 상태를 살핀다.
달개비 : (머리 빼고, 천 덮고) 우째 힘을 안쓰세요. 아까부터 애기씨 머리가 새카맣게 보이는데!
모하소 : 그러고 싶지 않아.
달개비 : 애기씰 숨 막혀 죽이실 작정이세요?
모하소 : (OL) 이대루 천년이구, 만년이구 할 수만 있담 내 몸 안에서라도 살게 해주고 싶어.
동고비 : 그러다 마님두 죽어요!
모하소 : 죽어야 한다면.. 나랑 같이.
동고비 : 마님, 진짜!!
달개비 : (동고비에게) 흣! (주의주고, 모하소에게) 아드님인지? 따님인지 어찌 아시구.
모하소 : ..
(인서트) 씬16
어린자명 : (눈망울을 굴리며) 아줌마. 나, 아줌마한테 가 살아두 돼요?
어린 자명, 모하소를 꼭 끌어안는다.
자명이 거대한 불덩이가 되어 모하소를 감싸더니, 그대로 모하소의 몸 안으로 스며들어간다.
모하소 : (격해져서, 몸을 조금 일으키며) 난 안다! 이 아인..딸이야. 태어나자마자 제 아버지 손에 목졸려 죽어야할..
가엾은 내 딸아이.
달개비 : 그렇지만 이미 애기씨가 세상에 나오고 싶어하시네요.
달개비, 의자에서 일어나 물 묻은 손을 수건에 닦고 몸 돌려 문쪽으로.
동고비 : 어디가?
달개비 : 호마유 가지러.
동고비 : 내가 가. (일어나는)
달개비 : 넌 그거나 매매 달궈. 귀한 애기씨 탯줄 끊을 것이니.
모하소 : 너도 어미가 아니더냐. 왜.. 내 맘을 몰라주는거냐..
달개비 : 제 젖이 퉁퉁 불어 흐를 지경입니다, 애기씨에게 물리고파서. 애기씨에게 드릴 몸이라 지난 몇달 밥도 가려먹고.
잠도 가려자고. 일품애비랑 한 자리에 누운 적도 없습니다. 이 년이 어찌 마님 맘을 모를까요.
모하소 : 날 그냥 두라니!!
달개비 : (OL, 버럭) 대부인 마님만 힘든줄 아세요! 그 좁은 몸안서 애기씬 마님보다 열배는 더 힘들어요!
모하소 : 달개비야!
달개비 : 아무리 싫으셔도, 전 애기씰 마님 몸 밖으루 꺼내드려야겠네요.
달개비, 문을 가린 휘장을 젖히고 문 열고 나간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모하소.
씬51. 청해헌, 내당 주방 (밤)
커다란 화로에 솥이 걸려 있고, 김을 설설 내며 끓고 있는 미역국.
시비들, 얼음에 재운 우럭을 꺼내 끓고 있는 미역국에 넣는다. 작은 화로에는 밥을 짓고 있고, 분주하다.
달개비, 자기병의 호마유 기름을 손 담글 정도의 큰 사발에 붓는다.
시비1 : 여기 꿀요. (작은 사발을 내민다)
달개비 : 응. (받아 쟁반에 얹고)
시비2 : (나무국자로 국을 조금 떠서 달개비 입가로) 간 줌요.
달개비 : (조금 마셔보고) 우럭 한 마리 더 넣구, 장은 고만 쳐라. 간이 쎄믄 해산 붓기 잘 안 내리신다.
시비1 : 유모. 참말예요? 딸 낳음 죽인다는게.
달개비 : 시끄럽다!
시비2 : (아랑곳없이) 중부인마님은 고추를 떡, 하니 낳으셨다는데. 대부인마님은 클났네.
한 가지에 고추가 두개나 열리겠어요, 그쵸?
달개비 : 아구리 닥치라니깐!
달개비, 물에 불린 미역이 담겨 있는 바가지를 들어 시비2에게 확-뒤집어씌운다.
시비2, “에구!!” 하며 놀라 보고. 시비1, 시비2의 얼굴에 붙은 미역을 뜯어주다 하나쯤 자기 입에 넣고.
달개비, 호마유 기름 사발과 모하소에게 마시게 할 작은 꿀사발을 얹은 쟁반을 집어든다.
씬52. 청해헌, 후원 중문 앞 (밤)
달개비, 쟁반을 들고 걸어간다.
멀리 치소가 둔 등이 놓여져 있다.
씬53. 청해헌, 후원 (밤)
왕자실, 자묵을 유혹하고 있다.
자묵, 왕자실의 요염한 눈길을 바라본다.
왕자실 : 모하소도 딸을 낳는다면,
자묵 : 계집아이가 맞습니다.
왕자실 : 그럼 내 딸은 살려줘요. 둘 다 죽어야 하는건 아니잖아요.
자묵 : 내겐 그럴 힘이 없습니다.
왕자실 : 오직 태사령 어른만은 할 수 있음을 압니다.
자묵 : .. (갈등하는)
왕자실 : 자묵.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바라본다) 예전 내 혼사일에 그대가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을 난 기억해요.
자묵 : .. (얼굴을 붉히며, 더듬는) 그야.. 사내라면.. 누구라도..
왕자실 : (한걸음 다가온다) 내 딸을 살려줘요. (자묵의 손을 잡는다)
자묵 : 숨이 막힙니다. 놓아주세요.. (손을 빼려는)
씬54. 청해헌, 후원 중문 앞 (밤)
달개비, 쟁반을 들고 등 쪽으로 걸어온다.
달개비 : 응? (왜 등이 여기 놓여있지? 싶은)
달개비, 중문입구에 서서 후원을 바라본다.
왕자실이 자묵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달개비 : !!
씬55. 청해헌, 왕자실 있는 곳/달개비 있는 곳 (밤)
자묵 : 부인. 이 늙은일... 놀리지 마세요.
왕자실 : (손을 뻗어 자묵의 뺨을 쓰다듬는다)
달개비, 놀라 왕자실을 바라본다.
자묵 : 그만,그만! 더는.. 부인을 거절할 힘이.. 내겐 없습니다.. (가까스로 왕자실 손에서 자신의 손 빼내고)
왕자실 : 방금 아일 낳은 몸이 아니라면, 내 전불 드리겠으나.. 지금 내가 줄 것은 이것 밖에 없군요.
왕자실, 술병을 들어 한모금 입에 머금는다.
자묵, 왕자실을 바라본다.
왕자실, 자묵에게 키스하며 술을 흘려 넣는다.
달개비 : !
자묵, 더는 항거하지 못하고 왕자실에게 키스한다.
왕자실, 자묵의 목덜미를 껴안는다.
(일품의 소리) : 엄마~~
달개비, 보면 어린 일품(남/4살)이 해맑은 웃음을 짓고 뛰어온다.
일품 : 엄마~~ 엄마~~
달개비 : (왕자실이 눈치 챌까봐, 조마조마) 쉿! (빈 한쪽 손을 들어, 손가락을 자기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어린 일품, 달려와 온몸의 무게를 실어 달개비의 두 다리를 안는다. 그 바람에, 달개비 한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트린다.
자묵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왕자실 희미하게 쟁반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왕자실, 키스하던 자묵의 어깨 너머로 중문께를 바라본다.
달개비, 어린 일품을 안고 입을 막고 있다.
달개비 : ..
왕자실 : !
왕자실의 눈빛에 살기가 감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