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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자(마 5:7)
할렐루야! 2월 첫 번째 주일, 주님의 전에 나아와 예배하는 여러분들과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기도하는 모든 일들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풍성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고 받는다”(Give and Take, 기브 앤 테이크)
“주고 받는다”는 단순한 원리가 어디서나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선을 악으로 갚고, 호의와 친절을 배은망덕으로 갚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고받으려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기보다는 받으려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런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지게 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인 듯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라고 말했습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기도문이 있다고 한다면, “프란시스코”의 “평화의 기도”일 것입니다. 그 기도문 가운데,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날들을 살아갈 때에, 받기보다는 나누어 줄 수 있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매주일, 계속해서 “팔복”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는 데,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들일까요? 현재의 대통령입니까?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과거에 대통령을 했던 사람들과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입니까? 현재의 국회의원들입니까? 아니면, 앞으로 공천을 받게 되는 사람들입니까?
팔복의 말씀을 통하여,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첫째, 심령이 가난한 사람, 둘째, 애통하는 사람, 셋째, 온유한 사람,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오늘은 “긍휼히 여기는 자”라는 제목으로, “복 있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팔복의 다섯 번째, 복 있는 사람은 긍휼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긍휼히 여긴다”라는 말은 “불쌍히 여긴다. 측은히 여긴다. 동정한다. 자비를 베푼다. 은혜를 베푼다. 사랑을 베푼다. 용서한다.”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긍휼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는 무자비하고, 무섭고, 살벌합니다. 허심탄회하게,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31)라고 말했는데, 사도 바울 당시나 오늘날이나 별 차이가 없는 듯 합니다. 세상은 더 악해져 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숨쉬고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죄가 너무도 만연하여, 사람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해치는 시대가 되었고, 살인을 해도,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하는 무서운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는 부자는 더 부자가 되기 위해서,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권력을 잡은 사람은 그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서, 더 큰 폭력을 행사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편 10:9-10절을 보면, “사자가 자기의 굴에 엎드림 같이 그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당겨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그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의 포악으로 말미암아 가련한 자들이 넘어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긍휼이 너무나도 필요한 시대입니다. 사랑과 긍휼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 시대에, 주님은 우리에게 “긍휼히 여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어로 “긍휼”이란, “헤세드”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헤세드”라는 단어가 구약성경에 150회 이상 나오는데, 그중에 90% 이상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친절, 따뜻한 마음을 긍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긍휼을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편에 자주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을 보면,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입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시 145:8-9)
한 마디로,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이 가득한 니느웨성를 구원하신 다음 그것을 불평하는 요나에게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욘 4: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3:23절을 보면,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무궁무진합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의 긍휼이 있기에, 우리는 진멸되지 아니하고, 사라지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십자자가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주셨습니다. 용서함 받을 수 없었던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긍휼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긍휼이 있기에,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하시면서,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2-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긍휼을 맛보아야 합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때리고, 감옥에 가두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핍박을 했는지,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 가다가, 다메섹에서, 빛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핍박자요, 악행자요, 비방자인 사울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살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긍휼이요 사랑입니다. “왜 사울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살려 주셨습니까?” 그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아직 맛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왜 사울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살려 주셨습니까?”라고 묻기 전에, “왜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셨습니까?”라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았기에, 지금 우리는 숨쉬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자부하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갈릴리 호수가에, 고기 잡으려고 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라고 물으셨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는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시고, 그에게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과 긍휼을 체험한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도마는 멀리, 그리고 깊이 숨어 버렸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라고 말했지만, 도마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의심 많은 제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의심 많은 도마에게 나타나, 손과 발의 못자국을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7,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전승에 따르면, 도마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와 중세교회의 수많은 복음성가의 가사 중에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이 아주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도가 있다면,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입니다.
여러분! 누가 이웃을 긍휼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푼 사람에게,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한 마디로, 긍휼이 긍휼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사울, 베드로, 도마는 예수님의 긍휼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을 받았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시 18:25)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준만큼 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베푸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받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긍휼은 댐 안에 가두어두는 것이 아니라, 계속 흘려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을 담아두는 댐이 아니라, 물을 흘려보내는 폭포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썬다 싱”이 추운 겨울 어느 날,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가야 했습니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히말라야 산맥을 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가다 보니까, 어떤 사람이 눈보라 속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함께 동행하던 사람에게, “저 사람을 업고 가자”고 했더니, 그는 “혼자 몸으로도 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기가 힘겨운데, 그것은 무모한 짓이다”라고 말하고는, 혼자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썬다 싱은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 등에 업고는 땀을 뻘뻘 흘리며, 거센 눈보라를 맞으며, 산맥을 넘었습니다. 그런데, 산맥을 거의 다 넘었을 때, 혼자 먼저 떠났던 그 사람은 추위에 못 이겨, 길바닥에서 얼어 죽어 있었습니다.
썬다 싱이 히말라야의 추위와 싸워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눈길에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을 긍휼히 여겨, 등에 업고 오다 보니까, 온몸에 땀이 흘려, 그 매서운 추위를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은 왕으로부터, 전부를 탕감받았습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런데, 그는 그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의 빚을 탕감해주지 않고,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왕은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에게,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 18:32-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긍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받은 긍휼마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물이라 할지라도, 흘려보내지 않고, 계속 가두어 두면, 그 물은 썩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과 긍휼은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긍휼은 실천하고 실행함으로, 이루어지고 베풀어집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은 실행하면 실행할수록 더욱 커지고, 깊어집니다.
긍휼도 실행하면 실행할수록 더욱 진해지고,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긍휼을 베풀면 베풀수록,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고 싶어집니다.
우리 주변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풀 수 있을 때,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풀 수 있도록,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리고 말했습니다.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던 고넬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행 10: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시 41:1)라고 말했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사람에게 긍휼이 임합니다.
여러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어떤 복을 받습니까?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친절을 베푼 오네시보로를 위하여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딤후 1:16-18)
사도 바울이 오네시보로를 위하여, 왜 이런 기도를 했을까요? 그가 평소에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도 바울에게 긍휼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낌없이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선한 사마리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긍휼의 삶을 살았기에, 사도 바울은 그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하기를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 아들이 이웃집에 갔다 와서, “낫을 빌려줄 수 없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거절당하고 그냥 왔다고 말했습니다. 며칠 후에, 바로 그 이웃집에서 이 집에 낫을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낫을 빌려 주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아들은 아버지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며칠 전에,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는데요.”
그때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빌려줄 수 없다. 이것은 복수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려준다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것은 증오다. 거절당했다고 하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아무 상관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그저 낫이 필요하다니까, 빌려 준다 하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바로 이것이 긍휼이다.”
철두철미하게,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때로는 손해 본다고 해도, 양보하며, 이해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마음 자세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범사에 복수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까? 증오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 증오하고자 하는 마음은 다 버리고, 오직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 9: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을 원하십니다.
나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과 세상을 향하여, 복수하고 증오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용서하며, 긍휼을 베풀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긍휼을 베풀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며, 도움과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의 마음을 전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긍휼하심을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나님의 용서함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사오니,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사오니,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살아가기보다는 용서하며, 이해하며,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새 힘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