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남의 발언과 행동은 비난할 수 있지만 남의 `존재'를 비난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성애자들이 동성에게 끌리지 않는 존재이듯이 동성애자들은 이성에게 끌리지 않는 존재이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생겨난 존재'로서, 서로 다른 성징을 갖는 것은 얼굴 모습이 다르고 천성이 다른 것과 똑같이 다양성을 요구하는 대자연과 하늘의 뜻에 따른 것일 뿐이다. 따라서 동성애자를 혐오하고 사회에서 왕따시키는 일은 마치 여자나 혼혈아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혹은 혈액형이 AB형이라는 이유로 그 존재에 돌을 던지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그게 나니까. 거짓말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잘못한 것 없으니까. 단지 그 뿐이고 그게 전부다.” “왜 동성애자임을 밝혔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홍석천씨의 답변이다. 그렇다. `단지 그 뿐이고 그게 전부'다. 그는 그의 존재를 밝혔을 뿐이다. 어디에 잘못이 있는가?
동성애자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소수파에 속한다는 잘못 하나밖에 없다. 동성애자들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인식을 없애고 그들의 인권 회복을 위해 싸웠던 프랑스의 한 지식인은 다음과 같은 역자사지를 말한 적이 있다. 4~10%를 차지하고 있는 동성애자의 비율과 이성애자의 비율이 정반대로 나타나는 사회를 가정해 보자는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절대적 소수파로 몰린 이성애자들은 종족 생산을 위한 노예로 전락할 것이란 얘기였다. 다시 말해 이성간의 사랑이란 있을 수 없고 이성애자들은 오직 아이 생산을 위한 노동에 동원될 뿐이라는 것이다.
이성애자들이여, 실로 끔찍하지 않은가? 그런데 바로 지금 한국의 동성애자들이 그런 끔찍한 일보다 더 심한 일을 당하고 있다! 자신의 존재를 감춰야 하고, 심지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부정해야 하는 일보다 더 끔찍한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젊은 장군이며 잘 생긴 알키비아데스를 사랑한다고 공공연히 선언했던 소크라테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 그리스에서 동성애는 용인됐을 뿐만 아니라 특권적 가치로까지 인정됐다. 고대 로마 시대에도 용인됐던 동성애는 기독교가 강력해지면서 죄악시됐고 오늘에 이르렀다. 동성애에 대한 혐오가 인간 본성의 표현이 아니라 사회의 산물에 지나지 않음을 서양의 거시적 역사는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60%를 넘는 가톨릭 신자를 갖고 있는 프랑스에선 지난해 `민간연대계약법(PACS)'을 통과시켜 동성애자들의 동거를 법적으로 인정해 줬다. 법안 제출 때 팽팽했던 찬반 의견은 법안 통과 후 1년이 지난 오늘 프랑스 국민의 70%가 찬성하게 됐을 만큼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부정적 인식은 급격히 약해지고 있다.
또 기독교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네덜란드는 가장 앞선 톨레랑스(용인, 관용)의 나라답게 지난 9월 하원에서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허용하는 법안을 압도적 다수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어느 의원은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반대하지만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면서 찬성 표를 던졌다고 말했다.
서로 앞다퉈 한국의 대표 공영방송을 자부하는 <한국방송공사>와 <문화방송>은 홍석천씨를 퇴출시켰다. 이는 연예인에겐 사형선고와 같은 전횡적인 폭력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이 프로에 걸맞지 않는다는 변을 늘어놓지만 어린이들은 본디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 감정을 갖고 태어나지 않으며 또 갖고 있지 않다.
여기서 방송언론인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이 무엇인지 새삼 묻지 않을 수 없다. 사회의 그릇된 편견과 인식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그것에 추수함으로써 죄없는 존재에 대한 혐오 감정을 고취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퇴출돼야 할 사람은 홍석천씨가 아니라 그의 퇴출을 결정한 그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