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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13;1-22, 채색 옷을 찢고 손을 머리에 얹으며 크게 울부짖다. 2023. 8. 13.
먼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가정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한 집안이 평안하고 하는 일마다 잘 풀리고 해결이 되려면, 그래서 온 가정의 구성원이 하나같이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생활하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이 먼저이지만 그 이후는 내 자신의 역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항상 나의 몫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어디에 중점을 두고 은혜를 나눌까? 생각을 하다가 후자로 결정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의 내용이 이런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여러분,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修身 濟 家 治國 平天下 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심신(心身)을 닦고 집안을 정제(整濟)한 다음에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天下)를 평정(平定)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에서의 家자가 일반적인 가족의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 과거 중국이 봉건제사회였을 당시 중국의 황실이 중국전역을 나누어서 다스렸잖아요. 일본도 그렇고 지나 온 세계의 역사가 거의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정복하고 권력을 잡은 왕이 넓은 땅을 혼자 다스릴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땅을 우물정자 비슷하게 나누어서 중앙부분은 왕 중의 왕이라는 황제가 다스리고 주변부는 황제의 자녀들과 심복들이 맡아서 다스렸습니다. 봉건제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이지요. 그런데 그러한 통치방식은 유효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점점 세대가 내려갈수록 중앙정부와 지방간의 유대관계가 소원해지기 때문에 몇 세대가 지나면 어느 한쪽에서 들고 일어나는 일이 다반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바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에 나오는 가족은 일반적인 가정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황제의 가족을 말합니다. 황제의 피를 나눈 가족 간의 사이가 벌어지면, 중앙권력과 지방권력사이에 균열이 발생하고 또 그것이 나라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의미에서 먼저 가족을 잘 챙기라는 뜻입니다. 지극히 통치 이념적 관점에서 유래된 표현이었습니다. 또 가화 만사성 이라는 고사성어도 있습니다. 명심보감에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자식이 효도하면 어버이가 즐거워하고,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子孝雙親樂 家和萬事成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화만사성이고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인데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다윗의 집안에서 일어납니다. 다윗 왕의 장남인 암논이 이복(異腹)누이인 다말을 연모했습니다. 당시의 고대 근동에서 인정된 일부다처로 인하여 발생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런 일을 공개적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런데요. 조금만 생각을 하면 일본의 문화가 성경에 나오는 문화를 많이 도입했습니다. 특별히 현재의 일본이 지금도 사촌 하고 결혼을 허락하잖아요? 성경적인 맥락에서 도입을 했는데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서 실행하고 있습니다. 오늘 사건은 다윗의 자녀들 속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아름답고 투명한 빛의 사랑이 아니라 욕정이었습니다. 암논의 흑심 때문에 암논이 계교를 꾸며 누이, 다말을 아프게 하고, 그 후에는 나 몰라라 누구를 대하듯이 내어 쫓아버렸습니다. 이런 아픔을 당한 다말은 친오빠 압살롬의 집에서 처량하게 살아가야 했고, 압살롬은 암논에 대한 원한을 쌓았습니다. 여러분, 왜 이런 일이 다윗의 가문에서 일어날까요? 이스라엘의 왕 다윗에게는 여러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왕자들의 아버지는 다윗이지만 어머니는 모두 달랐습니다. 어머니가 여럿입니다. 사실은 여기서 문제의 씨앗이 잉태되었습니다. 그중 첫째 아들은 암논 이었고, 둘째 아들은 압살롬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인 압살롬은 너무나 얼굴이 잘 생겨서 많은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았는데 이 압살롬에게 예쁜 여동생인 다말이 있었습니다. 공주이지요. 그런데 이 다말을 압살롬의 형인 암논이 마음속으로 좋아하고 결국 이 암논은 이 다말 때문에 상사병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에 큰아버지 아들인 요나답 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아주 꾀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은 간교한 사람이라고 기록을 했습니다. 요나답은 암논이 다말 때문에 병이 생긴 것을 알고 좋지 않은 한 방법을 암논에게 제안합니다. 나쁜 궤계이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만남과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가 들어가 있지만 그럼에도 친구는 정말로 좋은 친구이어야 합니다. 만남과 관계가 중요한데 간교한 사람과의 만남과 관계는 그 길이 좋든지 나쁘든지 구분하지 않고 경청하거나 같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하잖아요? 거기서 빠져 나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성경대로 살고 주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친구로 두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쁜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습니다. 간교한 요나답은 암논을 위한다고 하면서 암논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5절, 더 큰 병에 들린 것처럼 하시오. 그러면 분명 왕께서 병문안을 오게 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해서 다윗 왕까지 속이고 다말을 끌어 들이라고 합니다. 목적을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합니다. 암논의 마음과 눈에는 온통 다말 밖에 없기 때문에 간교한 친구의 말을 그대로 순수하게 듣고 이행을 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다말공주가 암논 자신에게 과자를 만들어 먹여 주게 해 달라고 간청을 하면 다윗 왕께서 들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암논 왕자가 많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 다윗 왕이 큰 아들의 병문안을 왔습니다. 6절에, 폐하 다말 공주가 내게 와서 맛있는 과자를 만들어 먹여 주면 내 병이 훨씬 나을 것 같다는 말씀에 따라 다윗 왕은 다말공주의 집으로 사람을 보냈고 아무것도 모르는 다말은 아버지의 명령대로 암논의 집에 가서 맛있는 과자를 만들었습니다. 다말 공주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오빠를 위해서 과자를 만들었고 예쁘게 음식상을 차려 암논 왕자에게 가지고 왔지만 암논 왕자는 먹지 않았습니다. 왜요? 목적이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암논 왕자는 자기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내어 보내었고 다말공주에게 공주가 직접 가지고 들어와서 나에게 먹여 주면 내가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 9-13절 그 냄비를 가져다가 그 앞에 쏟아 놓아도 암논이 먹기를 거절하고 암논이 이르되 모든 사람을 내게서 나가게 하라 하니 다 그를 떠나 나가니라. 암논이 다말에게 이르되 음식물을 가지고 침실로 들어오라 내가 네 손에서 먹으리라 하니 다말이 자기가 만든 과자를 가지고 침실에 들어가 그의 오라버니 암논에게 이르러 그에게 먹이려고 가까이 가지고 갈 때에 암논이 그를 붙잡고 그에게 이르되 나의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하는지라. 그가 그에게 대답하되 아니라 내 오라버니여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하지 못할 것이니 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라 내가 이 수치를 지니고 어디로 가겠느냐 너도 이스라엘에서 어리석은 자 중의 하나가 되리라 이제 청하건대 왕께 말하라 그가 나를 네게 주기를 거절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되.
다말 공주는 암논 왕자의 말을 듣고 암논 왕자가 누워있는 침대로 과자를 들고 가까이 갔습니다. 그때 일이 발생하는데 누이야, 내가 누이를 사랑하는데 사랑을 나누자고 합니다. 하지만 다말은 제발 나에게 이런 일을 하지 말고, 이런 일은 안 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사실 암논이 아버지 다윗에게 다말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결혼을 허락 받으면 되는데 다말의 이 요청을 무시하고 해서는 아니 될 일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종들을 시켜서 다말을 자기 집에서 내어 쫒아 버렸습니다. 15-17, 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니 다말이 그에게 이르되 옳지 아니하다 나를 쫓아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하되 암논이 그를 듣지 아니하고 그가 부리는 종을 불러 이르되 이 계집을 내게서 이제 내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라 하니. 길거리에 사람을 버리듯이 울타리의 문빗장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다말은 자신이 입고 있던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입는 예쁜 색동옷을 다 찢어버리고 머리에 재를 덮어쓰고 손을 얹고 울면서 그 집을 떠났습니다. 18-20, 암논의 하인이 그를 끌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니라 다말이 채색옷을 입었으니 출가하지 아니한 공주는 이런 옷으로 단장하는 법이라 다말이 재를 자기의 머리에 덮어쓰고 그의 채색 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가서 크게 울부짖었습니다.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되 네 오라버니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그는 네 오라버니이니 누이야 지금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라 하니라. 이에 다말이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의 집에 있어 처량하게 지내니라. 이 소식을 들은 친오빠 압살롬이 다말을 자기 집으로 데려 가면서 너에게 이런 나쁜 일을 한 사람이 암논 이었느냐? 이 말을 들은 압살롬의 눈빛은 아주 무섭게 변했습니다. 다말아, 너는 아무 말 없이 조금만 참고 기다려라 내가 분명코 원수를 갚아 줄 것이다. 다말은 그날부터 오빠 압살롬의 집에서 처량하게 살았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이후에 복수를 합니다. 암논은 자신의 잘못된 사랑의 표현으로 압살롬과 원수가 되었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다윗의 가정사입니다. 다윗의 가정사가 풀리지 않습니다. 수신제가가 안 되고, 가화가 안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하나 두 개가 아닙니다. 안되려니까 다윗은 이전의 예리함도 없고 통찰력도 없습니다. 수신제가도 못합니다. 훈계와 징계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기 전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바로 세우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 일을 아버지인 다윗이 알게 되지만 그는 단지 심히 노할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아버지로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혼내야 했으며, 따뜻한 위로를 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못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다윗 역시 같은 이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원본의 사랑과 용서를 받았지만 수신제가를 못했기 때문에 권면과 사랑을 이야기하지 못했고, 그 일을 입에 담기조차 거북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윗의 자녀들의 이 일은 엄밀히 보면 다윗이 져야 하는 십자가 이었습니다. 다윗의 잘못에 대한 나단 선지자의 2번째 예언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이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이 주는 의미와 진리가 무엇입니까?
1. 최소 단위와 작은 일과 사건이 시작의 중심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름다운 일이든지 그렇지 못한 사건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현대는 무슨 일을 하든지 메가를 좋아하고 대형과 메머드로 시작을 해야 히트가 된다고 합니다. 사업이 그렇고 정치가 그렇습니다. 교회도 메가 교회를 선호합니다. 그런데 시작은 의외로 깊고, 의외로 작은 것으로 부터 시작할 때가 많습니다. 최소단위가 많습니다. 그래서 작고 조그마한 것과 최소단위를 얕볼 수가 없고 그냥 넘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 되었나요? 다윗이 허물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암논이 다윗을 따랐으며, 이스라엘 백성들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여러분, 왕과 가장이 잘못한 일인데 가족들과 백성들이 똑같은 유형의 잘못을 한다면 누가 꾸짖겠습니까? 다윗은 지금 먹구름으로 잔뜩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 여파는 나라 전체로 퍼져 갑니다. 여러분, 항상 그렇습니다. 먼저는 수신제가 치국 평 천 하 입니다. 그리고 가화만사성입니다. 이것이 되어야 꿈을 꾸는 세계가 나의 손안에 있게 됩니다. 왜요? 나의 꿈과 소망과 목표의 이룸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가 나의 손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고 허락하신 영역 안에서 내가 스스로 수신제가를 하더라도 치국평천하는 주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인이 잘못했을 경우에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와 가화만사성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답은 이렇습니다. 자신에게 비록 허물이 있더라도 자녀를 권면하고, 가르치는 일을 소홀하면 아니 됩니다. 삶을 다스리는 법과 마음을 헤아려 주는 법을 몸소 실천하고 그리고 백성들과 자녀들에게 권면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잘못 때문에 그냥 넘어가면 더욱 어려운 상황이 됩니다. 최소단위와 기초단위가 무너지기 시작을 하면, 그 사회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기초단위와 최소단위에 있다는 사실이고 이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장 작은 잘못과 허물로부터 시작을 하고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어느 때는 하나님께서 고통과 아픔을 통해서도 가화만사성과 치국평천하를 위해서 사용하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항상 시작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바다가 시작이 되는 곳은 어디일까요? 발원지입니다. 산 위로 올라가는 길 주위에 여러 꽃과 나무들이 있고 천연 기념물인 가시 오가피나무와 노랑 무늬 붓꽃 등이 있고, 희귀한 식물들이 있는 생태경관 보호지역이 있습니다. 식물뿐만 아니라 각가지 동물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올라가 보면 물이 흐르는 곳이 있습니다. 일본이나 한국도 그렇습니다. 일본의 후지 산과 한국의 태백산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태백산의 계곡 가운데 검룡소라는 곳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태백의 광명과 정기, 여기 솟아 민족의 젖줄 한강을 발원한다고 쓰여 져 있습니다. 강의 시작이 검룡 소인데, 강원도 태백에서 이루어집니다. 커다란 웅덩이에서 한강의 514,4km의 발원지로 하루 2천여 톤 가량의 수원이 석회암반을 뚫고 나옵니다. 깊이 1.5m, 넓이 1.2m의 암반 2.3m를 뚫고 나오는데 수온은 사계절 내내 9도이며, 암반 주변 풀 이끼는 신비함과 오염되지 않은 자연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 물이 강을 지나 서해 바다로 흘러갑니다. 그러니까? 거대한 바다도, 최소 단위가 시작의 중심입니다. 바다나 강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인류도 아담이라는 사람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창조 역사의 공동체는 아담과 하와의 기초 단위로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기초 단위로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말씀도 여기서 부터이며 순종도 여기서 부터이며 은혜도 여기서부터 시작을 합니다. 기초단위가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와를 허락 하셨습니다. 최소 단위와 기초단위가 중요 합니다. 사업도 마찬가지이고,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가장 작은 것이 시작의 중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초단위와 최소단위를 소홀히 하면 시작과 함께 중심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러분, 바다가 그냥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꿈과 비전도 최소 단위와 기초 단위로부터 이루어집니다. 100미터 달리기의 출발이 여기에 있습니다. 휘니시 라인이 있기 전에 스타트 라인에 서야 합니다. 여러분, 왜 채색 옷을 찢고, 왜 머리에 손을 얹고, 왜 울부짖습니까? 최소 단위와 기초단위가 적용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말은 최소단위와 기초단위를 알았습니다. 그 최소 단위와 기초 단위는 아버지 다윗 왕의 허락을 받으면 간단하게 해결 되는 일이었습니다. 시작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암논과 요나답과 다윗 왕과 압살롬은 이 것이 아닌 순리를 역리로 바꾸었습니다. 수신제가가 되지 않았습니다. 가화만사성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최소 단위와 기초단위가 중요하고 그 시작이 중요한데 나의 몫입니다. 이 것을 기억하고 실행하시는 그래서 여러분의 비전과 꿈이 반드시 이루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꿈을 꾸고 비전이 되는 세계사는 가장 작은 공동체로 시작을 합니다. 세계사는 곧 가정사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 중 가장 아름다운 제도가 가정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심히 기뻐하셨고, 예수님도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 첫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름다운 가족제도가 점점 해체되고 먼저 살아보고 결혼 여부를 결정하는 계약결혼 제도가 점점 보편화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한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끊임없이 보여줍니다. 첫 번째 이유는 가장 기초단위인 가정이 흔들리면 그 사회 전체가 불안하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두 번째는 부흥과 성장과 지경의 넓어짐도 가정으로 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 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고귀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삶의 문제보다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왕의 가정과 종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속한 곳과 현장에서 매듭이 잘 되어야 꿈과 소망과 비전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평안해야 세상이 보입니다. 여러분, 약속은 목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표현이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약속은 목숨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약속과 언약에 도전하라는 것이고 약속을 했으면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왜요? 어른이라 할지라도 말씀과 약속을 어기면 존경이 사라지고, 말과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우정에 금이 가고, 기업과의 약속을 어기면 거래가 끊어지고 관계가 단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속을 목숨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면 자신도 믿을 수 없고, 내가 내 자신을 못 믿는다면 세상에 나를 믿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삶은 미래를 향한 시온의 대로는 열리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 예언서가 무엇입니까? 약속은 바로 목숨이라고 주장하는 선지자들의 말씀입니다.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옷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으며, 30년을 한 가정 속에서 성장을 하셨고, 이후 3년 동안 공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은 이렇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으며, 그리고 마지막에는 목숨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으며, 음부의 세계에서 3일 동안 머무르시다가 부활하셨고 최종적으로 승천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부활과 천국백성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오실 예수님입니다.
요8:1~11의 내용을 아십니까? 의미하는 내용을 아십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하여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예수님께로 끌고 왔습니다. 이들은 그 여인을 인격적인 존재로 대하지 않고, 단지 예수님을 비방할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은 손가락으로 땅에 두 번 글을 쓰시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과 말씀의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찔림을 받아서 그 자리를 피하였고 여인만 남았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도구로 취급받던 여자를 존귀한 사람으로 대우해 주시는 동시에, 다시는 죄에 처하지 않도록 사랑으로 감싸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타인을 정죄하고 헐뜯는 자리에 처하게 될 때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정죄하고 비판하는 태도로 일관할지라도 이해하고 품어주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이 땅에 십자가의 복음의 진리를 마음에 담고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랑과 관용과 긍휼의 자세가 되어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물론 돌을 던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그런데 그 진의를 모르고 너 자신과 집안일이나 잘 챙기지 다른 일에 왜 참견하고 그러느냐? 오지 랍도 넓다는 뜻으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어구를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잘 인용하고 사용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인용하는 것은 현실의 잘못이나 오류에 대한 사회적 비판을 원천봉쇄하고 그것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려는 통치 이념적 관점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여러분, 비판 없이 발전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누가 가족이고 누가 타인입니까? 6사람만 거치면 이 지구의 모든 사람이 서로 그 어떤 관계로라도 엮여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은 3사람만 거처면 다 친척입니다. 그래서 법을 지키지 아니 합니다. 우리가 남이가? 하면 다됩니다. 하지만 내 일이 타인의 일이고, 타인의 일이 또 나의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이라면 주님 안에서 용서와 함께 누구나 서로에게 권면할 권리는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의 어느 누가 선생을 하겠습니까. 물론 예수님만이 우리의 선생 입니다. 하지만 가두고 있는 그 어떤 울타리와 인식하지 못 하고 있는 굴레들을 발굴하고 분석하고 새로 세워야합니다. 왜냐하면 나쁜 의미를 바꾸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긍정적 의미에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의미는 평천하를 위해서 나아가야할 방법입니다. 세계를 보려면 반드시 자기를 관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수신만을 강조하고 수신만을 실행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충분한 수신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지성인이 왜 흙탕물에 뛰어들려고 하냐며 안타까워합니다. 흙탕물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그가 자신의 지조를 잃어버렸다며 비판하기까지 합니다. 허나 수신만을 하고 치국과 평천하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엇을 위한 수신이 됩니까? 또 반대로 수신을 하지 못하면 평천하를 할 수 없지만 평천하를 하지 않는다면 수신은 필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수신을 하고 평천하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작을 하고 끝을 맺지 않는 것이고, 반대로 치국평천하를 하려는데 수신을 않는다면 이것 또한 무엇이 중심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세계를 보려면 작은 공동체로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다. 작은 공동체를 다스리지 못하면 세계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 여러분, 한사람이 중심이고, 여러분의 삶의 영역이 중심이고 여러분의 교회가 중심입니다. 여기서부터 꿈과 비전이 보여 지게 됩니다.
라인홀드 니이버의 기도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을 주시고, 내 힘으로 고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며, 그리고 이 두 가지 차이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여러분, 키가 작은 사실 때문에, 외모 때문에, 자신의 허물 때문에, 가난한 부모 때문에 비관하거나 한탄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이 변화시킬 수 없는 일에는 순복하여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나 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결코 포기하거나 체념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 달란트를 땅에 묻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게으른 종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수신제가입니다. 여러분, 산꼭대기에 오르면 행복 할 거라 생각 하지만 정상에 오른다고 모든 것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그런 곳은 없습니다. 같은 곳에 있어도 행복한 사람이 있고 불행한 사람이 있고, 같은 일을 해도 즐거운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지만 기분이 좋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같은 물건과 좋은 음식과 좋은 장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정말 행복한 사람은 모든 것을 다가진 사람이 아니라 주어진 일을 즐거워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만족해하는 사람과 하고 싶은 일이 있는 사람과 갈 곳이 있는 사람, 갖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변화시킬 수 없는 하나님의 일에 순응하는 용기와 변화가 가능한 일에 매진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골3;22-24.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순응하는 요기와 매진하는 용기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성실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하듯 해야 기업의 상을 받습니다. 한시를 한편 읽겠습니다.
流水 不 復 回(유수불복회) 흐르는 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行雲 難 再 尋(행운난재심) 떠도는 구름은 다시 볼 수 없고,
老人 頭 上 雪(노인두상설) 늙은이의 머리 위에 내린 하얗게 쌓인 눈은,
春風 吹 不 消(춘풍취불소) 봄바람이 불어와도 녹지를 않습니다.
春盡 有 歸 日(춘진유귀일) 봄은 오고 가지만,
老來 無 去 時(노래무거시) 늙음은 한 번 오면 갈 줄을 모르네,
春來 草 自 生(춘래 초자생) 봄이 오면 풀은 저절로 나건만,
靑春 留 不 住(청춘유불주) 젊음은 붙들어도 머물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쁜 색동옷을 다 찢어버리고 머리에 재를 덮어쓰고, 손을 얹고 울면서 울타리를 떠나는 아픔이 아니라,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주신 삶의 영역을 소중하게 생각하시고 그 영역 안에서 수신제가하여 주님의 손 안에 있는 여러분의 소망과 비전이 아름답게 이루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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