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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朝人物考四十五
■ 구수복(具壽福)
[본관] 능성(綾城)
[생졸년] 1491년(성종 22)~1519년(중종 14) / 향년 28세.
[대표관직] 이조좌랑(吏曹佐郞)
자는 백응(伯凝) · 정지(挺之), 호는 병암(屛菴) · 수재(睡齋). 구강(具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조참의 구신충(具信忠)이고, 아버지는 생원 구이(具頤)이며, 어머니는 덕수이씨로 현감 이의영(李宜榮)의 딸이다. 동생은 구수담(具壽聃)이다.
1510년(중종 5)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51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부정자(副正字)에 제수되었다가 곧 검열에 천거되었고, 주서(注書) · 부수찬(副修撰) · 정언(正言) · 수찬 ·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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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복 묘갈명(具壽福 墓碣銘) - 송시열(宋時烈)
국조(國朝)에서 인물이 성대하기로는 중종(中宗) 기묘년(己卯年) 만한 때가 없었는데, 북문(北門)에서의 참화[慘禍, 기묘 사화(己卯士禍)]는 또 국조에서 아직까지 없었던 바, 많은 인물들이 세상에 나와 그 비참함이 또한 더욱 심하였다.
당시 심정(沈貞) 등이 몰래 대궐로 들어가 창자(創子)ㆍ기물(器物)을 갖추어 놓고 임금께 은밀히 아뢰어 밀지(密旨)를 받았다면서, 눈 깜작할 잠깐 사이에 수많은 어진 선비들의 목을 나란히 하여 살육 당하게 하였던 것인데, 그때를 당하여 재빨리 자행할 일을 뉘 미처 귀를 가리리요?
그러나 먼저 제현(諸賢)의 직명(職名)을 바꾼 연후에 그 일을 행했어야 할 것이었다. 병암(屛菴) 구공(具公)의 휘는 수복(壽福)이요 자는 백응(伯凝)이니, 천조(天曹, 이조(吏曹))의 직소(直所)로부터 그러한 명을 받았을 때 공이 수긍치 않고 말하기를, “이와 같이 늦은 밤에 갑자기 참인지 거짓인지 어떻게 분별하겠는가?”하니, 심정 등이 공갈 협박으로 북문(北門)을 열 것을 재촉하므로, 공이 이에 분격하여 말하기를, “이러한 것들이 어찌 큰 죄가 되겠는가?
비록 임금의 명을 직접 받았더라도 죽음을 무릅쓰고 고집하겠다.”하며 드디어 통부(通符)를 풀어 던지고 나와 버리니, 심정 등이 크게 노하였다. 당시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장곤(李長坤) 공이 심정에게 속임을 당하여 이미 응대하였다가는 바로 깨닫고서, 영상(領相)인 정광필(鄭光弼) 문익공(文翼公)을 부르자고 청하였다.
영상이 명을 받들고 급히 들어왔는데, 공이 만나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또 말하기를, “상공(相公)께서 힘을 써 주십시오.”하였다. 심정 등은 문익공을 맞아 사건을 말하면서 노한 기색이 불과 같으므로, 문익공이 잘못된 일이라 하고 또한 공을 꾸짖으니, 심정 등은 노기가 조금 풀렸다.
문익공이 이 틈을 타서 말하기를, “나이 젊은 사람이 아직 사체(事體)를 잘 알지 못해서 그러했고, 또 임금께서도 지금 매우 진노하고 계시니, 공들은 조금 너그럽게 생각하시오.”하였다. 공은 그 까닭에 화를 면하게 되었고 고신(告身)만 회수당하였으며,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등 제현(諸賢) 또한 죽음을 면하여 장배(杖配)로 그치게 되었다.
그러나 또 얼마 되지 않아 죄를 추가하여 사류(士類)를 모두 없애버리기에 이르렀다. 공이 유배로 남방에 내려 가 있던 중, 김태암(金泰巖) 공이란 이가 있어 그는 뜻이 높은 선비였는데, 충암(冲菴) 김정(金淨)과는 교분이 매우 두터웠으므로 그를 찾아가 공과 함께 살기를 청하였다.
공은 그가 충암의 벗이라면 어진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상주(尙州)에서 곧바로 보은(報恩)에 있는 구병산(九屛山) 밑으로 이사하였다. 김공은 택리(宅里)를 분할하여 공이 그곳에 살게 하였다. 공은 두문불출하고 단정히 앉아서 옛날 배운 것을 다시 복습하는 것을 일상의 생활로 하였는데, 사자(士子)들이 멀리서 오기라도 하면 공은 그때마다 겸양의 자세로 부끄러워 하였으나, 정성스러운 뜻으로 비분강개해 하는 사람에게는 간혹 이들을 계발(啓發)해 주기도 하였다.
그가 살고 있던 곳은 먼 들판이 앞에 있고 중간에 높이가 몇 길이 되는 외로운 산봉우리가 있었는데, 푸른 시내가 그 봉우리를 휘감고 흘렀다. 충암 선생은 늘 그곳에 놀러와 풍경을 즐기었다. 공은 매양 흥이 날 때마다 그곳에 가서는 야로(野老)들과 자리를 다투어 가며 시를 읊으며 집에 돌아가는 것을 잊고서 진솔(眞率)한 취미를 이루었었는데, 어떤 자들이 당시 세상의 일을 말하기라도 하면 길게 한숨 쉬며 크게 탄식할 뿐이었다.
중종[中廟] 계사년(癸巳年, 1533, 중종 28) 상공(相公) 이준경(李浚慶)이 공의 아우 구수담(具壽聃)과 더불어 옥당(玉堂)에 같이 있었는데, 기묘 당인(己卯黨人)들을 신구(伸救)하여 드디어 공을 구례 현감(求禮縣監)에 제수되게 하였다.
공은 부임(赴任)하여 정사에 부지런히 힘쓰다가 을미년(乙未年, 1535, 중종 30) 9월 26일 향년 45세로 재임 중 관(官)에서 졸(卒)하였는데, 구병산 아래로 귀장(歸葬)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공부에 힘쓰고 취향(趣向)이 매우 정당하였으므로 한때의 제현(諸賢)이 추중(推重)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그중공을 평하여 말하기를, “겉으로 보기에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 같지만 속마음은 강직하며 굳세다.”하였으니, 이는 충암(冲菴)이 칭찬한 바이다.
또 “준칙(準則)을 고수하고 요약(要約)함이 참으로 절실한 사람이다.”하였으니, 이는 송재(松齋) 한충(韓忠)이 논한 바로서, 오직 정암(靜菴) 선생의 이른바, “질박하고 정직하며 순수하고 올바름이 평탄할 때나 험난할 때나 일치(一致)한다.”고 한 것은 더욱 극진한 표현이라 할 것이다.
중종(中宗)께서 밤낮으로 정사에 힘쓰실 때에 제현(諸賢)들과 협동하여 정성을 쏟고 절개를 다하여 삼고[三古, 하ㆍ은ㆍ주(夏殷周) 3대(三代)]에 돌아갈 것을 기약했었는데, 놀라운 일이 별안간 발생하여 중도(中道)에 이탈되었으니, 어찌 유독 사류(士類)만의 불행일 뿐이겠는가?
세상에서는 모두 당시의 사화(士禍)가 문익공(文翼公)에 의해 다소 완화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것이 실적(實跡)이겠으나, 공이 초두(初頭)에 힘써 간악한 모의를 꺾지 않았던들 상현(象賢)들은 이미 부질(斧質)에 복주(伏誅)되어서 문익공이 그 충성과 용기를 베풀 데가 없었을 것이다.
공은 그 당시 선비의 기개가 산과 같이 솟아나, 맹분(孟賁)ㆍ하육(夏育)과 같은 용사로도 능히 빼앗을 수 없었으니, 양성한 바가 두텁지 않고 지킨 바가 확고하지 않고서야 어찌 능히 이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 공이 늘그막에 이르러 고요하고 한가로운 가운데에서 그 보익(補益)한 바가 다시 가볍지 않았을 것인데, 모두 민몰(泯沒)되어 전하는 것이 없으니, 아! 애석한 일이로다.
공은 능성인(綾城人)이니, 시조(始祖)는 구존유(具存裕)로 고려 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대대로 공경(公卿)을 지내어 동방(東方)의 대성(大姓)이 되었다. 집의(執義) 구강(具綱)은 나이 18세에 대각(臺閣)에 들어가 우리 태종 대왕(太宗大王)을 섬겼으니, 이 분이 공의 증조이다.
할아버지 구충신(具忠信)은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일찍이 임금의 행차에 따라갔는데, 세조(世祖)께서 중에게 말을 주라고 명했으나 공이 이에 맞서 거절하니, 임금이 노하여 공이 타고 있는 말을 빼앗아 중에게 주었다. 공은 엎어지며 걸어갔으나 이로 인해 병을 얻어 졸(卒)하였다.
아버지 구이(具頤)는 생원으로 참판(參判)에 증직되었고, 어머니 덕수 이씨(德水李氏)는 현감(縣監) 이의영(李宜榮)의 딸인데, 홍치(弘治) 신해년(辛亥年, 1491, 성종 22)에 공을 낳았다. 공은 단산 도정(丹山都正) 이수(李穗)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부인은 정숙하고 현명하여 공의 상(喪)을 치를 때에 슬픔이 지나쳐 비록 밤이라도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한번도 머리에 빗질을 하지 않았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려(旌閭)를 명하였으며 부인이 죽자 공과 합장하였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구빈(具斌)은 생원이고 차남 구변(具忭)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봉상시 정(奉常寺正)이 되었다. 또 4녀를 두었는데, 사위는 조윤성(趙允誠)ㆍ이무(李懋)ㆍ박현능(朴賢能)ㆍ민백남(閔伯男)이다.
봉상시 정이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남 구광원(具光源)은 봉사(奉事)이고 차남 구곤원(具坤源)은 정랑(正郞)이다. 봉사가 3남을 낳았는데, 구재(具裁)ㆍ구계(具棨)ㆍ구섭(具)으로서 구계는 사의(司議) 벼슬을 하였고, 구섭은 승지(承旨)에 증직되었다. 사의는 구봉서(具鳳瑞)를 낳았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감사(監司)가 되었다.
정랑은 구발(具橃)ㆍ구원길(具元吉)ㆍ구숙(具橚)을 낳았는데, 구숙은 첨지중추부사로 구봉익(具鳳翊)ㆍ구봉징(具鳳徵)ㆍ구봉양(具鳳陽)ㆍ구봉장(具鳳章)을 낳았으며, 구봉장은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사위가 되었다. 승지는 아들이 없었는데, 그 후계가 된 사람은 공의 아우인 부제학 구수담(具壽聃)의 현손(玄孫) 구봉우(具鳳羽)이다.
지금 이 표석(表石)을 세움에 있어 내외 적서(嫡庶)의 자손들이 많아서 다 기록할 수 없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병산(屛山) 구공 묘소에는 조각 돌[片石]이 앞에 있네.
하필 명(銘)을 많이 하랴?
기묘 명현(己卯名賢)이면 그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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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屛菴具公墓表。
國朝人物之盛, 莫如靖陵己卯, 而北門之禍之慘, 又國朝之所未有, 惟其甚盛, 故其慘也亦甚焉。 時沈貞等潛入闕廷, 先具創子器物, 以密啓受密旨, 瞬息俄傾之間, 群賢當騈首受戮矣。 當其時疾雷, 誰及掩耳也? 然必須先遞諸賢職名, 然後其事乃行。 屛庵具公諱壽福, 字伯凝。 自天曹直所受其命, 公不肯曰: “暮夜倉卒, 眞僞何辨?” 貞等喝嚇脅促, 公奮然曰: “此等胡大罪? 雖親承上命, 猶當死執。” 遂解擲通符而出, 貞等大怒。 時兵曹判書李公長坤爲貞等所欺, 旣對乃悟, 請召領相。 鄭光弼文翼承命亟入, 公遇之涕泣言, 且曰: “相公勉之。” 貞等迎爲文翼以事, 怒氣如火。 文翼謬亦訶公, 貞等稍解。 文翼因曰: “年少之人, 未諳事體, 且天威方震, 公等少寬之。” 公以故得免, 只收告身, 而靜菴諸賢亦減死杖配。 然亦未幾, 加罪而士類盡矣。 公流落南中, 有金公泰巖高士也, 與金冲庵凈友善, 往造而請與同居。 公以爲冲庵之友則賢也。 自尙州卽徙報恩之九屛山下, 金公割宅里以處之。 公杜門端居, 尋溫舊學。 士子自遠而至, 公輒退讓慙丁, 而其誠
意憤悱者, 則時或啓發焉。 所居前臨迥野, 中有孤峯, 高可數仞, 而碧流環之。 冲庵先生嘗遊而樂之。 公每遇興輒往, 野老爭席, 吟詠忘歸, 以成眞率之趣。 人或語以時事, 則喟然長嘆而已。
中廟癸巳, 李相浚慶與公弟壽聃同在玉堂, 伸救己卯黨人, 遂除公求禮縣監, 公黽勉赴任。 乙未九月廿六日, 卒于官, 年五十五。 歸葬九屛山下。
公幼而力學, 趣向甚正, 一時諸賢無不推重。 其曰“外似和緩, 中實剛毅”者, 冲庵之所稱: “固守繩墨, 眞切要約”者, 韓松齋忠之所論; 而惟靜菴先生所謂質直純正, 夷險一致者, 尤可謂盡矣。 當中廟宵旰求治之日, 協同諸賢, 竭誠殫節, 期回三古, 而駭機闖發, 中道而稅, 豈獨士類之不幸而已? 世皆以當時士禍少紓於文翼, 此實跡也。 然匪公初頭力折奸謀, 則衆賢已伏斧質, 而文翼無所施其忠勇矣。 其時氣涌如山, 賁、育莫能奪, 非所養之厚, 所守之確, 烏能如此哉? 至其暮年靜閑之中, 其所得益復不淺, 而皆泯沒而無傳, 吁可惜也!
公綾城人。 始祖存裕, 高麗上將軍, 世有公卿, 爲東方大姓。 執義綱, 十八入臺閣, 事我太宗大王, 是公曾祖。 祖信忠, 以兵曹參議, 嘗從幸光廟, 命給僧馬匹, 公立爭之, 上怒奪給公所騎。 公𨈀仆徒步, 因以病卒。 考頤, 生員, 贈參判。 妣德水李氏, 縣監宜榮女。 弘治辛亥, 公生焉。
公娶丹山都正穗女。 性淑哲, 執公喪哀戚甚, 雖夜不脫衰麻, 一未嘗頮櫛。 事聞, 命旌其閭, 與公同葬。 男斌, 生員: 忭, 文科, 奉常正。 四女壻: 趙允誠, 李懋, 朴賢能, 閔伯男。 正生光源, 奉事: 次坤源, 正郞。 奉事生栽、棨、欇。 棨, 司議: 欇, 贈承旨。 司議生鳳瑞, 文科, 監司。 正郞生橃: 元吉: 橚, 僉正, 生鳳翊、鳳徵、鳳陽、鳳章、鳳文。 鳳章爲昭顯世子壻。 承旨無子, 爲其後者, 公弟副學壽聃之玄孫鳳羽也。 今立此表, 內外嫡庶多不能盡錄。 銘曰:
屛山之墓, 片石在前。 何必多銘? 惟己卯賢。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