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귀리 속냉이골 작은 푯말을 세우다
박남준
도둑처럼 숨어들어 옆드리며 피눈물을 뿌리고 가던
아들딸이 있었으리라
먼발치로 고개 숙이며 여린 어깨 들먹였겠지
숨죽여 울었으리
아내와 형제들과 그 어머니와 할머니가
아버지와 그 할아버지들 기가 막혔으리라
엎어지고 자빠진 주검들이 여기 있네
손가락질당하며 핏발을 곤두세워
삿대질당하던 주검들이 여기 묻혀 있네
강대국들의 지배 이데올로고에 등 떠밀려
서로의 가슴에 총칼을 들이밀던 눈먼 날이었네
우리들 모두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주고 또 받았네
어제오늘이 아니네
십 년 아니 이십 년 반세기가 넘도록 아직껏 풀리지 않고
나와 내 이웃을 단죄하며 옥죄는 이념의 사슬에 묶인 채
낙인 찍힌 영혼들이 여기 누워 있네
찔레 덩굴 잡목 숲 무성히 우거져 있었네
찔레꽃 무더기, 바람을 부르는 상여 꽃 같은 흰 꽃무더기
두런두런거리며 피어나던 곳
4.3의 제주여, 돌이켜보면 여기 이 주검의 자리
내 부모 내 형제의 죽음을 보며 산으로 올라간 이였네
내 이웃과 친구의 죽음을 막으려 총을 잡은 이였네
누가 누구의 얼굴에 침 뱉을 수 있겠는가
누가 누구의 등에 돌을 던지며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겠는가
용서하고 용서하지 않는다면
화해하고 화해하지 않는다면
거기 어찌 평화가 깃들 수 있겠는가
여기 어찌 생명의 씨앗 하나 자랄 수 있겠는가
평화의 섬 제주여
오늘 우리 속냉이골 쓸쓸한 무덤가
반목의 풀을 베고 적대의 덩굴 걷어내며
손에 손에 돌 하나 모아 방사탑을 쌓았네
작은 푯발 하나 세웠네
다시금 고개 숙이네 엎드려 절을 하네
여기 엎드려 머리 조아리는 것
해묵은 상처를 씻겨주고 닦아주며
서로의 등 다독여주자는 것이네
일으켜주자는 것이네 일으켜 함께 가자는 것이네
속냉이골 맴돌며 떠도는 넋들이여
모두 여기에 오시라 어서 이 자리에 오시어
차림 음식들 나누시라 어서어서 오시라
넋들이여 그 모든 속냉이골 혼백들이여
생명과 평화의 손길로 우리들 위로드리오니
부디 편히 잠드소소
* 속냉이골 : 제주도 남제주군 남원읍 의귀리, 속칭 산꾼이라고 부르던 유격대원들의 무덤이 방치되어 있던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