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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학자 儒賢 스크랩 산택재 홍여하
이장희 추천 0 조회 48 15.05.08 23: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성명 : 홍여하(洪汝河) , 1621년 ~ 1678년
본관 : 안동
: 백원(百源)
: 산택재(山澤齋) , 산택재(山澤齋), 대박산인(大朴山人)
출생지 : 안동
출신지 : 영순면 율곡리
분묘지 : 예천 흑송리
입사경로 : 1654년 생원진사시 합격, 식년문과 을과 합격
내관직 : 1655년 검열, 대교 1656년 정언, 봉교, 열서
외관직 : 1657년 고산도 찰방, 1658경성 판관
증직및기타 : 통정대부 부제학 추증,
홍여하
홍여하(洪汝河)는 1621년(광해군 13)에 안동에서 태어나 1678년(숙종 4)에 고향인 문경 율곡에서 졸하였다. 어릴 때부터 제주가 뛰어나고 독서를 즐겼다 한다. 그리하여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에게서 반드시 대유(大儒)가 되리라는 상찬을 받았으며 또한 그의 가르침을 계승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예언에 걸맞게 영남사림으로부터 추존된바, 우복, 동강(東岡), 창석(蒼石)과 함께 영남 문장 4대가의 반열에 드는 인물로 성장하였다.

1654년(효종 5) 진사가 되었으며, 그해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고 이어 설서, 전적, 정언을 거치면서 경연(經筵)에서 『주례』를 강학하기도 하였으나, 효종에게 시무소(時務疏)를 올렸다 서인의 배척을 받아 고산 찰방으로 좌천되었고, 다음해 파직당하였다. 1658년 경성판관으로 복귀하여 다음 해 제1차 예송(禮訟) 때 송시열의 기년복론(朞年服論)을 공격하였고, 윤휴(尹)의 3년 복론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자 1660년 황간(黃澗)에 유배되었다. 다음해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복직을 단념하고 귀향하여 산택재를 짓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 제2차 예송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 정권이 수립되자 관직에 복귀하여 병조좌랑·사간을 역임하였다. 부제학에 추증되었고 상주의 근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목재집』이 있고 편서로 『주역구결』,『의례고증』,『사서발범구결(四書發凡口訣)』,『휘찬여사(彙纂麗史)』,『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해동성원(海東姓苑)』,『경서해의(經書解義)』 등이 있다.

 

가족이야기

: 홍덕록(洪德祿)
생부 : 홍호(洪鎬)
: 장흥고씨(長興高氏) 종후(從厚)의 딸
형제 : 여렴
부계홍씨
부계홍씨(缶溪洪氏)는 고려 중엽 재상을 지냈다는 홍란(洪鸞)을 시조로 하나, 시조 이후의 세계(世系)를 잃어버렸으므로 세계가 이어지는 직장(直長) 홍좌(洪佐)를 1세조로 하고 있다.

부계홍씨는 본래 남양홍씨(南陽洪氏)에서 갈라진 파이다. 홍란이 남양에서 부림현(缶林縣)으로 옮겨 살았으므로 그 후손이 부계(缶溪)를 본관으로 삼았다.
남양홍씨는 당에서 동래(東來)하였다는 홍학사(洪學士)를 시조로 하였는데, 홍학사와 홍란 사이 10여 세의 세계는 알 수 없다.

예빈경공파(禮賓卿公派)는 10세에 이르러 홍치하(洪致賀), 홍귀통(洪貴通), 홍귀달(洪貴達)의 세 후손이 있었는데 홍치하는 후손이 없으므로 홍귀통과 홍귀달의 두 계통으로 후손이 이어진다. 이 중 홍귀달은 벼슬이 호조판서에 이른 인물로, 1499년 『성종실록(成宗實錄)』을 찬진(撰進)하고 장의동(藏義洞) 차일궁(遮日宮)에서 세초연(洗草宴)을 베풀었다. 1500년 왕명에 의해 『속국조보감(續國朝寶鑑)』, 『역대명감(歷代明鑑)』 등을 편찬하였고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다. 문장이 뛰어났고 글씨를 잘 썼으나, 성격이 강직하여 관직에 있는 동안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문광(文匡)의 시호를 하사받았다.

그리고 그의 계통은 홍언방(洪彦邦), 홍언충(洪彦忠), 홍언국(洪彦國)으로 이어지며 이 중 홍언국의 증손이 홍호(洪鎬)이며, 그의 아들이 곧 홍여하이다.

 

학문이야기

스승 : 정경세
향사 : 상주 근암서원 제향
학파 : 퇴계 학파
교유인물
이구(李?), 권대재(權大載), 허목(許穆), 이선(李瑄), 이윤해(李允諧), 정봉휘(鄭鳳輝)
史書찬술에 지대한 업적
홍여하는 실증 사관에 의한 사서 찬술에 큰 업적을 이룬 인물로, 당시 영남 사림에서는 우복, 동강, 창석과 함께 그를 영남 문장의 4대가로 추존하였다.

그는 학맥상으로 그의 5대조인 허백당(虛白堂) 홍귀달로부터 이어져오는 전통적인 가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우복 정경세에게서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의 학문은 종적으로는 가학의 학통을 이어받으면서, 횡적으로는 경북 북부의 학맥을 수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40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오로지 양생과 경서에 침잠하여 경의 강론과 소요로 일관하였다. 그는 사서 중에서 특히 중용을 중요시하여 이를 해석한 『용학구의(庸學口義)』와 같은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평생 『주자절요(朱子節要)』를 눈에서 떼지 않았다고 하며, 예천의 복천림으로 옮겨 존성재(尊性齋)를 짓고 살 당시에는 그 깊이를 더욱 심중히 하였다. 아울러 역학 연구에도 대단히 깊은 경지에 들었다고 하는바, 때때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을 읽음에 명리에 얽매여 참뜻을 알지 못한다.”고 비판하였다 한다.

그의 학문이 물론 도학(道學)을 근본으로 삼고 있기는 하나 사학에도 대단히 심취하여『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 『휘찬려사(彙纂麗史)』등의 사서를 찬술하였다. 여기서 드러나는 그의 사관은 ‘단군신화’나 삼국의 ‘시조신화’와 같은 설화적 사료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 실증 사관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그의 정치 생활은 매우 다난하였다. 특히 사헌부 감찰을 거쳐 정언에 오르면서 직언을 결코 마다하지 않았으며, 결국 그의 바른 소리가 시사(時事)를 논변하는 상소로 나타면서 반도들의 견제 속에 좌천과 파면으로 이어지는 수난을 면치 못하였다.

 

저작이야기

저서
홍여하는 생전에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현일(李玄逸)이 지은 행장과 권유(權愈)가 지은 묘갈명에 의하면,『사서발범구결(四書發凡口訣)』,『주역구결(周易口訣)』,『의례고증(儀禮考證)』, 『휘찬려사(彙纂麗史)』, 『동사제강(東史提綱)』, 『용학구의(庸學口義)』와 문집 약간 권이 가장되어 있다고 하였다.
『목재집(木齋集)』
현재 12권 6책으로 전하는 『목재집』은 권유(權愈)의 서문 외에는 여타 기록이 없어 영정조년 사이에 간행되었다는 것 외에는 편찬 경위와 간행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초간본으로 본다면 손자 홍대구(洪大龜)가 지은 행장에 외손서 권세장(權世長)이 진사로, 외손자 이달중(李達中)은 생원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이들의 합격 연도는 1729년(영조)이다. 따라서 본 행장은 1729년 이후, 홍대구가 졸한 1737년 이전에 지은 것이니, 본집의 간행 또한 그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추각된 「의례소(議禮疏)」는 1666년 율리(栗里) 은거 시절 경상도의 유생을 대신하여 지은 것인데,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의 예론을 부정하고 비판하면서 저자의 예론을 펴나간 내용이다. 초간을 낼 때에는 내용의 성격상 기휘(忌諱) 때문에 싣지 못하였다 이 소를 발표해도 될 만한 상황이 되었을 시기에 추각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시기는 「누판고(鏤板考)」에 “『목재문집』 14권은 함창(咸昌)홍씨의 집에 소장되어 있다”고 실려 있으므로 정조 연간에 추각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분량이 14권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서가 권7로 분리된 이후에 작성된 듯하다.
『휘찬려사(彙纂麗史)』
이 책은 고려사를 기존의 사실에 저자의 구상을 가미하여 서술한 기년체 형식의 저술이다.

여기서 저자는 고려사를 송?금?원의 대륙사와의 총체적인 면에서 밝혀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종래 고려사에서 누락된 부분이나 언급되지 못한 사실을 보충하려는 시도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저자가 「외이(外夷)」부록을 넣은 것은 고려사를 총체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 때문에도 그러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거란?여진?왜를 외이로 취급하면서 고려의 자존 의식을 고양하려 하였다는 것은 저자의 역사 인식의 일단을 피력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의의가 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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