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군(英陽郡)은 경북뿐 아니라 전국에서도 군세(郡勢)가 가장 약한 축일 텐데,
영양 남씨는 그 영양이 본관(本貫)이다.
세종실록지리지/경상도/안동대도호부/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
영양 속현 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영양의 성이 4이니, 남(南), 이(李), 김, 방(房)(지금은 방(方)을 쓴다) 이요..
영양 김씨는 영양 남씨 조상 설화에 의하면 같은 조상이라고 ‘전(?)’하며,
성씨 房 과 方이 통하는 줄은 이 구절보고 처음 알았다.
600년 전 세종실록 때 그런 것으로 지금도 이 성씨들이 영양에 다수인 것은 아니다.
지금은 영덕(盈德)군 영해면이지만 옛날엔 영해(寧海)가 더 유명했다.
영양은 18세기 초반까지 영해부(府) 속현(屬縣)으로, 현의 이름만 있고
실제 관아(官衙)는 없어, 관청 일은 영해부에서 봐야 했다.
때문에 영양현 사람들이 부역이나 공물을 바치려면 영해까지 가야 했는데,
영양-영해 사이는 태산준령(泰山峻嶺)이 가로 막아, 울팃재-한자로 읍령(泣嶺)
이라고 이름도 살벌한 고개를 넘어야 했다.
고개의 현재 이름은 ‘창수령’으로, 이문열 소설,
젊은 날 눈 쌓인 겨울, 영양에서 태백산맥 무작정 걸어서 넘다가,
잿마루 주막에서 일단 한잔 마시고 술값 없으니 몸으로 때우겠다! 하여
겨우 내내 ‘불목하니’ 하던 경험담-자전적 소설의 배경으로 나오는 고개다.
옛날 우리나라는 돈이 미처 발달하지 않아, 세금은 곡식 같은 걸로 바쳤는데
그 짐 지고 고개 넘다 얼어 죽고, 짐승에 물려 죽고, 겨우 살아 도착하면
그땐 영해부 사람들이 텃세를 하며, 자기들도 바닷가 주제(?)면서
영양 두메 산골 사람들을 촌놈에 종놈 취급하여 도저히 못살겠다! 는 구절이,
영양 선비들이 독립시켜 달라고 17세기 후반 현종(顯宗) 때 조정에 올린 상소문에 나온다.
남씨(南氏)는 이런 영양의 토성(土姓)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당나라 여남(汝南) 사람 김충(金忠)이 일본에 사신(使臣) 다녀 오다가
태풍을 만나 신라 땅에 표류하였다. 당시 신라 경덕왕이 의중을 물으니
김충은 신라에 머물러 살기를 원하였다. 이에 경덕왕은 여남(汝南)의 남(南)을
사성(賜姓), 거동과 언행이 敏捷(민첩)하다고 이름을 敏(민)으로 쓰게 하여,
김충(金忠)이 남민(南敏) 되었다. 그때 김충-남민이 대동한 맏아들은
새 성을 쓰지 않고 그대로 김씨 성을 써서 영양 김씨의 조상이 되었다…
어디를 검색해도 비슷한 내용이니, 아마 영양 남씨 시조 설화의
표준 텍스트 화(化)한 모양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어느 성씨나 시조 및 저 아득한 상계(上系)에 대한
설명은 그런 양하고 들어야지, 사실(事實) 관계를 따질 수는 없다.
박혁거세나 수로왕 이야기는, 신화학적, 역사학적 의미를 연구하는 것은
별개로 하되, 그 자체가 ‘팩트(fact, 事實)’일 수는 없지 않은가?
아버지가 성을 바꾸는데 아들이 왜 안 바꾸는지? 설명이 없으나,
영양 남씨와 김씨가 같은 지역 토성(土姓)으로서 긴밀한 관계이었을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英陽 말고 穎陽 南氏가 또 있으나 한자만 다를 뿐 같은 성씨이고,
고성(固城), 의령(宜寧) 남씨도 있으나, 모두 남민을 시조로 한다고 한다.
본관이 영양이라고 남씨가 영양에만 사는 것은 당연히 아니고,
이미 조선 왕조 시대에 경북 일대에 널리 퍼져 번성했던 모양이다.
설화 상 같은 후손으로 설정(?)된 ‘영양 김씨’는 족세(族勢)가 그리 큰 것
같지는 않으나, 고려 때 호장(戶長) 지내고,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나왔으니 내실(內實) 있었던 듯. 영양 김씨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유명한 건축가 김수근씨가 영양 김씨라고.
호지말(마을)(濠池村, 槐市里)
영양 남씨 집성촌 중 유명한 곳은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槐市里)다.
마을 소개하는 글귀들을 읽어 보니 이곳에 남씨 집성촌이 이루어진 것이
17세기 후반부터니, 나의 앞선 글에서 이미 말한 대로 우리나라 집성촌이
처음 만들어 지는 무렵이다.
마을은 원래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난 곳이라고 한다.
목은이 중국 원(元)나라 갔을 때 괴시(槐市)라는 마을을 본 바,
‘호지말’이 그와 흡사해 그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이런 종류 이야기는 진위 여부를 가리기 힘들고, 그냥 들어 두면 된다.
이 일대 사람들은 ‘괴시’ 보다는 ‘호지말(마을)’이라고 보통 부르는데,
나는 가보지 못했고 인터넷으로 보았지만, 조선 후기 양반 가옥들이
잘 남아 있어 소개 글도 많이 올라 오고 관광객도 꽤 있는 모양이다.
남흥재사(南興齋舍)
남흥재사는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리’에 있으니, 안동댐과 가깝다.
지도; 구글
이 재사(齋舍)는 영양 남씨 중 고려 말 전리판서(典理判書) 지낸 남휘주(1326
∼1372)공과 참판 남민생(1348∼1407)공 부자의 묘사(墓祀)를 위해 지었는데,
이 부자의 후손이 영양 남씨 ‘무슨 파(派)’ 인지는 조사하지 못하였다.
(남씨 시조(始祖) 김충(金忠)-남민(南敏)의 산소는 영양에 있다고 함.)
지도: 남흥재사 전경
전면에서 오른 쪽으로 보이는 누(樓)마루가 원모루(遠慕樓)니,
능동재사의 추원루(追遠樓), 금계재사의 영모루(永慕樓), 수동재사의 상로재
(霜露齋), 모두 조상을 영원히 그린다는 작명(作名) 발상은 같은 것이다.
사진: 원모루(遠慕樓) 현판
앞서 쓴 풍산 유씨 금계재사(金溪齋舍)가 원래 절이었던 바,
이 남흥재사도 남흥사(南興寺) 법당을 인수하여 고쳤다고 한다.
남흥재사라고 하여 남(南)씨라서 그런 이름 지었나 했더니,
공교롭게 절이 남흥사(南興寺)고, 그 이름을 그대로 물려 받은 모양이다.
사진: 남흥재사 도면
서측 통용문으로 들어서면 문에 붙어 부엌이 있고, 이어 내정(內庭)인데,
세 단으로 쌓아 올린 축담을 올라 서면 안채 대청이다.
사진: 남흥재사 내정
안채 대청은 원모루 2층 누마루와 같은 평면으로 쪽마루로 연결되어 있다.
사진: 원모루 누마루에서 본 내정과 안채 대청
원래 절이었다니 절인 줄 알지만 일반 집과 별 차이를 모르겠다.
같은 지역에서는 절집이나 살림 집이나 결국 비슷하게 수렴되는 모양이다.
사진: 원모루(遠慕樓) 누마루
재사의 누마루는 산소를 바라 보는 법인데, 남흥재사는 ‘설단’ 쪽,
아니 설단 할 때 그 방향을 맞추었으리라.
재사 뒤로 돌아 언덕에 오르니 저녁 노을이 재사 건물을 비추는데
서는 자리에 따라 빛이 다 다르다.
설단(設壇)
남흥재사 후손들은 조상 산소를 찾지 못하고 대신 마을 입구,
원모루에서 바라 보는 방향에 설단(設壇)을 해 두었다.
사진: 남흥재사 동네 입구의 설단(設壇) 전경
족보와 집성촌이 만들어 지는 것이 조선 중기 이후니
고려 시대로 올라가면 조상 산소를 제대로 찾아 낸 집안이 거의 없다.
고구려, 백제, 신라 왕릉으로 전하는 것이 약 200 기 가량일 텐데,
그 중 묘주인이 확실한 것은 1971년 발굴 때 묘도에서 지석(誌石)이 나온
공주의 백제 무령왕릉 단 하나로, 나머진 다 전(傳)이다.
경주 일대 신라 왕릉 내지 왕릉 ‘끕(級)’ 분묘 150 여기,
누구 왕릉이라고 이름은 붙었지만, 다 그렇다는 전(傳)일 뿐이다.
그런데 전(傳)이 잘못 되기란 무지 쉽다.
아, 그 정도면 거의 틀림없지 않겠느냐? 하는 전(傳)도 개중엔 있지만.
왕릉이 이러니, 민간의 분묘를 찾아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다른 데는 겨우(?) ‘설단’ 인데, 우린 찾아내 대대로 수호해 오거든!’ 하고
자랑하는 집안도, 끝까지 들어 보면 ‘그거 과연 그럴까요?’ 하는 느낌이다.
얼굴 맞대 놓고 표를 못 깨어 그렇지. 그런 짓 하다간 이민 가야 할 지도.
잃어버린 조상 산소 천신만고 끝에 찾아 내어 따지고 또 따졌다는데,
‘고고학적 증거 따위’가 있을 리 없고, 추론 과정도 ‘그 전설(?)의 장소!
조상 산소가 결국 여기 아니겠느냐?’ 하는 강한 의지 내지 집단 최면을
형상화한 것 아니겠느냐? 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무리하게 입론(立論)하느니 설단을 하는 것이 순리(順理)라고 본다.
사진: 남흥재사 후손들이 설단(設壇)을 기념하여 세운 비(碑)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