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즉 견성(見性)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해오(解悟)와 증오(證悟)입니다.
말 그대로 해오는 '이해하는 깨달음'이며, 증오는 '해오를 너머 완전히 체득된 깨달음'입니다.
그렇다고 해오가 머리로 아는 의식의 깨달음은 아닙니다.
이해한다고 썼지만, 한 번 쑥 내려가는 체험이고,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는, 큰 전환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옛 선사들도 해오를 결코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돈오점수(頓悟漸修)의 돈오는 곧 해오를 의미합니다.
지눌 스님의 절요에서는 '먼저 돈오하고 점수한다는 말은 해오를 기준 삼아 한 말이다'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즉 해오를 곧 견성이라고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가풍에 따라 해오는 견성이 아니고, 증오만이 견성이라고 하는 곳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공부로 돌아와 보죠.
법문을 꾸준히 듣다 보면, 이 법의 자리를 확인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생기고, 발심하여 진지하게 듣다 보면, 문득 '아하 이것이구나' 하고 알아차려지는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 후부터는 법문에서 말하는 이것이 무엇인지가 소화되고, 모든 법문과 경전과 어록들이 다 소화가 됩니다.
그래서 쑥 내려간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삶이 조금씩 달라짐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스스로 느끼게 됩니다.
해오라 하든, 견성이라 하든, 그 체험의 순간이 크게 오고 작게 오고는 상관 없습니다.
그 때부터 점수라는 '소를 키우는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진짜 수행은 이 때부터시작됩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이것을 가지고 '견성했다', '깨달았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스스로 깨달았다는 법상이 생겨나기 때문이지요.
이제 입문했다 여기고, 하심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꾸준히 공부하셔야 합니다.
유튜브를 보고, 또 직접 법문을 듣고 이 즈음까지 오신 분들이 상당히 많 보입니다만 가끔 그런 분들 중에 스스로 깨달았다는 상을 세우는 분들이 계실까 우려되기도 합니다.
본격적으로 점수, 수행을 하여 법의 자리에 여법해져, 증오할 때까지, 즉 완전한 부처가 될 때까지, 마음을 낮추고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그저 할 뿐입니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