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재속 프란치스코회 역사
조선 재속 3회의 설립(1937∼1941)
1) 장 면, 장 발 형제의 3회 입회
한국 교회가 선교사가 아닌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입교로 시작되었듯이 한국 재속프란치스꼬회 역시 카나다 형제들이 이 땅에 프란치스칸 씨앗을 심기 위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재속 3회원으로 서약한 장 면(요한), 장 발(루도비꼬) 형제에 의해 기묘하게 시작되었다.
장 면(張勉, 세자 요한, 1899∼1966)은 미국 유학 시절 뉴욕 맨하탄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기숙사 근처의 프란치스코회에서 사목하는 성 요한 성당에 다녔다.
그는 그 곳에서 재속 3회에 대해 알게 되었고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매료되어 1921년 3회에 입회하였으며 1922년 9월 24일 수도명을 프란치스코로 서약하였다. 또한, 동생 장 발(張勃, 루도비꼬) 역시 1922년 3회에 입회하여 1923년 12월 30일 수도명을 가브리엘로 서약하였다. 이들은 유학을 마친 후 입국하여 혜화동 성당 신자로서 서울 교구와 한국 교회를 위해 헌신하였고, 또한 사부 프란치스코의 향기가 되어 많은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영향을 끼쳤다. 당시 서울 형제회는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형제회의 구성원들이 모두 교회 엘리트들로 교구 활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교회의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회원들은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활동을 하였으며 평신도 활동이 활발하지 못했던 당시의 교회 안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2) 프란치스꼬코의 조선 진출과 오기선, 이광재 신부의 3회 입회
프란치스코회는 1937년 9월 15일 도 요한(Jean-Joseph Deguire), 배 쥐스땡(Justin M. Bellerose) 형제가 입국함으로써 조선에 진출하였다. 그 후 9월 30일 대전에 도착한 형제들은 수도원의 터를 닦기 시작하였으며, 1938년 12월 15일 대전 목동에 '천사들의 성 마리아 수도원'을 건립하여 지원자들을 받아들였고 이로써 프란치스꼬회는 조선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흠모의 마음을 가지고 있던 오기선(吳基先 요셉, 1907∼1990) 신부는 재속 형제회에 입회하여 재속에서 사부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풍수원 본당에 있다가 요양 중이던 이광재(李光在, 디모테오, 1909∼1950) 신부에게도 재속 형제회 입회를 권했다. 그리하여 1937년 9월 28일 서울에 온 도 요한(Deguire) 형제의 주례로, 원 라리보 주교 경당에서 오기선 신부(수도명 : 프란치스코)와 이광재 신부(수도명 : 안또니오)가 한국 사제로는 처음으로 재속 3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두 신부는 도 요한 형제의 도움으로 재속회 조직의 권한을 위임받아 3회원인 장 면, 장 발 형제와 함께 당시 교회 지도층이 많았던 백동 성당을 중심으로 재속 형제회 창설을 추진하였다. 프란치스코회의 조선 진출과 재속회원 장 면, 장 발 형제, 그리고 오기선, 이광재 신부의 입회를 바탕으로 조선에서 재속 형제회는 뿌리를 튼튼히 내리면서 출발하였다.
3) 초기 재속 형제회에 대한 프란치스코회의 역할
대전의 도 요한, 배 쥐스땡 형제의 적극적인 호응과 오기선 신부, 장 면, 장 발 형제의 도움으로 시인 정지용(鄭芝鎔, 6. 25 때 납북)을 비롯하여 28명(남 13명, 여 15명)이 1937년 12월 25일 오기선 신부의 주례로 서울 혜화동 성당에서 착의식을 가졌다. 그리고 1938년 11월 15일 오기선 신부가 대전에 내려가 도 요한 신부의 주례로 첫서약을 하였다. 또한, 1937년 입회한 28명의 형제 중 20명(남자 9명, 여자 11명)이 1939년 1월 3일 혜화동 성당에서 서약을 하였다. 이로써 1939년 1월 3일 원 라리보 주교의 인가로 교회법적인 요건을 구비하여 '서울 형제회'가 정규 형제회로 발족하였다. 또한,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1902∼1984) 신부를 비롯하여 중견 지식인 수십 명이 프란치스꼬 재속 형제회에 입회하였다. 후에 노기남 신부는 서울 교구 대목구장 주교로 임명받았다.
정식 형제회로 발족한 서울 형제회는 프란치스칸들의 영적 보조와 오기선 신부의 지도로 날로 회원이 증가하였다.
도 요한 형제는 조선의 프란치스꼬 재속 3회의 발전에 기초를 마련해 주었고, 서울 형제회를 창설하였으며, 대전 본당에 재속 형제회의 기초를 다졌다.
당시 대전에는 3회 회칙을 따라 공동 생활을 하는 미혼 여성들의 공동체가 있었는데, 이들 역시 도 요한 형제의 특별한 지도를 받고 있었다. 1939년 당시 서울 형제회는 수련자를 포함하여 60명의 회원이 있었다. 그리고 대전 목동 지역에는 형제회 조직은 없었으나 목동 성당을 중심으로 약 25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1939년 4월 23일 프란치스코회 일본 지부장 앙브르와즈 르블랑(Ambroise Leblanc) 형제가 조선 재속 3회를 방문하였으며, 도 요한 형제는 계속해서 대전 지역 3회원과 수도회를 지망하는 3회 젊은 여성들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캐나다 관구장의 결정으로 1940년 8월 13일 카나다로 돌아감으로써 아쉽게 이별을 해야 했고, 도 요한 형제의 후임으로 배 쥐스땡(Bellerose) 형제가 임시 수도원 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미혼 여성 공동체는 고 베드로(Cormier) 형제가 제2차 세계 대전 전까지 지도하였다.
국가형제회 홈에서 옮김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