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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들어올 때 출입문 위쪽에 관심있게 보면 오늘 성경본문 4절이 썬팅되어 있습니다. 4절....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집이란 지금 우리가 예배드리는 교회가 주의 집입니다. 그런데 주의 집에서 사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복이 있는 자입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인은 인생호흡이 끊어지는 그날까지 유형교회든 무형교회든 하나님의 집에 사는 자로 살아갑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광야시대에는 성막을 중심으로 살았고 왕국시대에는 성전을 중심으로 살았고 포로시대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회당을 중심으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1948년 5월 14일 독립이후 지금 이스라엘은 강원도 만한 땅덩어리에 인구도 얼마 되지 않지만 전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가는 복된 나라가 된 것은 오직 성전 중심 신앙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말씀에서도 주의 전에 거하는 자가 얼마나 주의 집을 사모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교회와 비슷한 단어가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주의 장막이라고 했습니다...... 2절에는 여호와의 궁정...... 3절에는 주의 제단..... 4절에는 주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일곱 절 속에 주의 집을 시인이 사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슴아프게도 오래전 조상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깊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의 심판이란 영적인 상처를 다시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두려워 떨리는 심정으로 주의 집에서 직분에 대해 본분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결단이 있는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누구입니까?...... 표제문에 기록하고 있듯이 “고라자손의 시” 라고 했습니다. 레위의 세 아들 게르손, 고핫, 므라리가 있는데 고라는 고핫의 손자입니다. 모세와 아론도 고핫의 손자인데 고핫의 첫째 아들은 아므람이고 고핫의 둘째 아들인 이스할인데 첫째아들이 고라입니다. 그러니까 고라자손은 다 모세와 아론과는 사촌 간이 됩니다.
그런데 이들은 성막에서 제사장인 모세와 아론을 돕고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고라는 모세와 아론만이 제사장 직분을 감당 할 수 있느냐 우리에게도 제사장이 할 수 있는 직분을 달라며 요구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에 동조한 사람이 250명(르우벤 지파 포함 )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250명의 고라의 일당들이 모세를 반역하는 일에 한 목소리를 높인 것입니다. 저들의 주장은
민16:3.......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목소리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저들과 맞서 싸우기보다 그냥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민16:4)
그리고 모세는 고라 일당들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너희들이 정말 제사장의 직분을 원한다면 향로에 불을 담아 가지고 나오라 하니까 250명의 고라 일당들이 250개의 향로를 준비하여 회막 문 앞에 나오게 됩니다.
이런 광경을 누가 보고 계실까요?..... 하나님께서 이미 저들의 잘못을 알고 제사장 직분을 분수에 넘게 요구한다 생각하시고 고라 일당들을 멸하고자 계획하시고 모세와 아론에게 그 자리를 피할 것을 지시하니까 무리들까지 고라당의 머무는 자리에서 떠나게 되는데 그 순간 모세가 외쳤습니다.
민16:30-31...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이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물을 삼켜 산 채로 스올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그가 이 모든 말을 마치자마자 그들이 섰던 땅바닥이 갈라지니라
민16:35.........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명을 불살랐더라
그런데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심판으로 고라와 그 일당들이 지진으로 죽는 끔찍한 심판을 살아남은 고라자손들이 본 것입니다.
그래서 오고 오는 세대속에 고라자손들은 조상들이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고 교만했던 그 잘못으로 지진으로 가족들이 죽었던 사실을 오랜 세월이 지난후에도 그 아픔을 알고 있기에 우리는 우리 조상들처럼 따르지 않고 두려운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온전히 예배드리며 살겠다는 다짐을 가지고 노래한 시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1-2....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고라자손들이 주의 장막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세요~~ 너무 가슴이 떨리고 흥분 된 나머지 그의 얼굴과 마음이 쇠약할 정도로 사모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사랑하면 상사병이라고 하지요 고라자손들은 하나님의 전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의 장막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는 것은 단순히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 자체를 사모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tv에서 가끔 유럽의 고딕식 양식으로 지어진 성전들을 볼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입이 딱 벌어집니다. 그러나 그런 성전이 구경거리 예물단지로 전락한 교회가 있습니다.겉으로는 성전 같지만 성전에 예배가 없고 하나님의 임재를 만날 수 없는 교회들이 상당수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주님의 전을 사모하는 성도는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이 아닌 내면 깊이 다가오는 하나님과 임재를 경험하는 감격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의 전을 사모하는 시인은 마치 참새와 제비가 집을 짓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보금자리처럼 주의 전에서 주님과 함께 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제가 처음 목회했던 곳은 경남 거창 기리교회였습니다. 사택은 엣날 초가집 새마을 운동 사업으로 지붕만 개량하여 살았던 곳인데 40여년전 모습이니까 오래됐지요 그런데 시골에서 제비가 보금자리를 처마 밑에 집을 짓습니다. 그런 말이 있지요~~ 강남에 갔던 제비들이 돌아온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봄철이 되면 어김없이 제비가 돌아와 집을 짓는데 꼭 처마 밑이 안정되는지 새끼를 낳고자 집을 짓는데 하필이면 사택 안방 문 위쪽에 보금자리를 만들었어요
제가 집을 짓지 못하게 해도 어느 순간 며칠간 집을 비었다가 돌아오면 이미 보금자리가 만들어지곤 하는데 제비가 작은 가지에 진흙을 묻어 가지고 입에 물고 와서 집을 지으면 안방 출입구밑에는 부스러기가 떨어져 편상 마루는 지저분합니다.
그런데 제비들이 자기집 짓는 기술을 어디서 배워왔을까요? 그래~~아내나 저나 제비 한테 두손들고 내가 졌다 하고 새끼와 살 집을 만들고 새끼를 낳게 되면 그때부터 먹이를 입에 가져 날아 새끼에게 주면 입을 벌리고 받아먹느라고 짹짹거리며 소리지릅니다.
우리가 사는 것처럼 별 봐 다를 것이 없어요 그런데 그런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고 제가 귀찮다고 제비집을 없애 버릴 수 있겠습니까?
시인은 주의 제단을 이런 새들의 보금자리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보금자리는 주님이 계시는 집입니다......내 영혼의 고향입니다.
이런 주님의 집에서 예배하는 성도들이 모여 말씀을 먹고 아멘하고 축도후 예배를 마치면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며 할렐루야 아멘 인사하는 아름다운 광경이 마치 새의 보금자리같이 느끼고 주의 전을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여 집사님이 간암진담을 받고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의사 소견서가 내려졌습니다. 집사님은 앰브람스에 몸을 실고 집으로 가는데 운전기사에게 자신이 출석한 교회에 꼭 들려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얼마나 주님이 계시는 집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그랬을까요? 어쩔 수 없이 엠브란스 운전자는 환자의 소원대로 섬기는 교회로 갔는데 전세로 있는 아주 작은 교회였지만 집사님은 불편한 몸을 의지하고 주의 전 교회에 올라가 생의 마지막 남은 시간 성전에서 기도하기를 “주님의 전이야말로 나의 평안한 나의 보금자리입니다” 기도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성도가 지금 앉아 있는 주의 집은 신앙의 흔적 그대로 남아 있는 곳입니다...... 내가 찬송하는 자리..... 내가 기도하는 자리 그 자리가 곧 은혜의 자리였고 신앙체험의 자리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천국가신 어머님 기도의 퍼모먼스가 떠올랐습니다. 기도의 자리는 지금 제가 서 있는 강대상이 지금은 하나이지만 전에는 십자가를 중심으로 2개였습니다. 그러면 강대상 중심 사이에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으시고 두손들고 기도하셨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동안 우리교회를 섬겼던 우리 성도들의 모습도 하나같이 다 생생하게 지나갑니다. 그렇때 마다 제 옷깃을 여밀며 주의 전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전을 사모하는 마음과 함께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무엇일까요? 먼저 시인은 기도했습니다.
2절..... 하반절에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8절....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우리가 주일마다 성도들이 제출한 중보기도를 보고 성도의 이름을 부르면 부르는 순간 하나님 보좌에 기도가 올려지는 것을 느끼며 기도하고 계십니까? 단순한 환상이 아닌 깊은 묵상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이 1대1로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기도하는 순간 다른 잡념이 보이지 않도록 오직 십자가 주님만 집중해서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절대 이론이 아닙니다......기도는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실제로 내가 내 목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기도하면 내 영혼이 건강합니다...... 기도하면 영적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4절....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집에 거하며 찬송하는 것은 예배하는 자의 특권입니다. 세상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기에 복 있는 자입니다.
사도행전16:31... 전도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에 구원을 얻으리라
믿음 좋은 바울과 실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전 하다가 핍박받고 감옥에 갇혀 있는데 이곳에서 미친 사람처럼 찬양 한 것입니다. 다른 죄수들은 오늘 나갈까 걱정하며 근심하고 있는데 바울과 실라는 찬양하고 있는데 누가 놀라겠습니까? 감옥을 지키는 간수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찬양 중에 기적이 일어났는데 옥터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리고 묶여있는 쇠사슬이 끊어진 것입니다. 자연히 옥문이 열리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보낸 천사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유유히 옥문을 빠져 나오는데 누가 이 모습을 본거예요 간수가 보고 있을 때 바울이 이런 유명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에 구원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성도여러분!! 불안하고 초초한 성도가 있습니까? 찬양하십시오 하나님이 찬양 가운데 거하십니다.
다니엘기도회 어제까지 16일째 생방송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기도와 찬송이 함께 어울려 영적인 조화가 이루어질 때 마음에 와닿아 더 기도하고 싶고 더 찬송하고 싶은 마음으로 다가오셨습니까?
이번 집회 때 지선 전도사님 부른 “충만”이란 찬양을 자주 듣습니다. 차에서도 듣고 집에서도 듣고 자주 들으니까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고 기도하게 됩니다.
♬♪ 무명이어도 공허하지 않은 것은 예수 안에 난 만족함이라 가난하여도 부족하지 않은 것은 예수 안에 오직 나는 부요함이라 고난 중에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주의 계획 믿기 때문이라 실패하여도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예수 안에 오직 나는 승리함이라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이제 고라자손들이 주의 전에서 기도와 찬송으로 나아갈때 주님이 저들에게 주신 영적인 복이 있습니다.
5절....주께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주의전을 사모하며 기도와 찬송으로 나아가는 성도는 반드시 영적에너지를 얻게 됩니다. 우리가 차를 몰다가 기름이 떨어지면 주유소에서 기름을 주유 합니다. 그래야 멈추지 않고 차가 계속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전 교회는 영적 충전소입니다. 위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영적 에너지, 생명의 샘물이 흘러내리는 장소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전에 거하며 예배드리기를 사모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십니다.
시인도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6절.....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노래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결코 만만한 현장이 아닙니다. 때로는 슬픔이 있고 눈물의 터널을 지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들이 주의 전을 사모하는 그리스도인을 실족시켜 넘어 뜨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힘들고 목마를 때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우리의 목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이른 비로 우리의 삶에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하실 것입니다.
고라 자손들처럼 이 시대에 주님의 전을 항상 사모하며 영적인 힘을 공급받아 세상을 능히 이기며 승리하며 살아가는 주향성도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