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의 내용은 모두 다른 사이트에서 퍼 왔습니다. 사실, 미국과 소련이 약소국가에 저지른 만행은 밑의 경우 말고도 더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의 내용에서 미국의 범죄사례 소개글이 소련에 비해 너무나 빈약해서 죄송합니다.
(소련:1945년 한반도 북부에 친소정권 수립, 1968년 체코의 두브체크 정권 전복, 1978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미국:1945년 한반도 남부에 친미정권 수립, 베트남 전쟁, 1974년(?)칠레 아옌데 정권 전복에 개입, 1953년 이란의 모사테그 정권 전복, 2003년 이라크 침공...)
위의 사실들은 이미 아시는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위의 사례들, 그리고 밑의 글들을 올리는 이유는 국가가 힘을 잃을 때, 외세의 횡포에 시달린다는 점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밑의 두 가지 사례 중 소련의 범죄사례는 우리나라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할 경우 어떠한 일이 닥칠지를 보여줍니다.
(괜한 쓸데없는 짓을 한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어떤 분들은 이번의 탄핵사태에 미국이 개입했다고 하고, 저도 그런 글은 올린적이 있었는데, 전혀 근거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후 헝가리는 정치 경제적으로 완전히 소련에 종속되어 있었습니다. 헝가리의 정치지도자들은 소련의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했죠. 특히 헝가리의 경제는 소련의 경제계획에 따라 조정되었습니다. 헝가리의 자원은 소련의 생산을 위해 생산되었고, 그나마 불평등한 무역으로 수탈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헝가리는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직면했죠. 식량도 부족했고, 공장을 가동할 연료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일반 대중들의 불만이 고조되어가자, 소련은 폴란드의 '포즈난 항거'와 같은 사태를 우려하여, 헝가리의 오랜 독재자이자 '소(小)스탈린’이라 불린 라코시를 제거합니다. 하지만 후임자는 라코시의 측근이었던 게뢰였습니다. 게뢰는 부분적인 양보조치를 강구하였지만 대중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죠.
1956년 10월 23일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는 드디어 작가·학생·시민들로 이루어진 대규모 시위가 조직됩니다. 이들의 첫번째 요구사항은 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한 독자적인 국가정책을 수립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소련과의 관계가 평등의 원리에 기초해서 조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다음으로 경제적인 위기 극복을 위한 경제계획의 수정을 원했고, 공장의 운영에 노동자를 참여시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또한 임금 수준을 개선하고 생활 수준의 향상도 요구했죠. 또 이 모든 것을 위해 임레 나지에게 정권을 넘기라고 주장했습니다. 임레 나지는 1953년 스탈린 사후 소련이 정치적 변동을 겪을 때 헝가리에서 잠시 수상직을 맡았던 온건한 공산주의자입니다. 그는 수상직에 있을 때 일련의 개혁정책으로 일반 대중들에게 신임이 꽤나 높았던 인물이었죠.
시위는 수만명이 참가하는 대규모적인 것이었지만, 대체로 온건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라디오 방송국을 지키던 정치경찰(AVH)이 시위 군중에게 발포함으로써 모든 상황은 돌변합니다. 시위자들은 돌과 화염병, 총을 들고 독재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한 싸움을 시작합니다.
게뢰 정부는 소련의 군사 개입을 요청합니다. 소련군의 탱크가 시내 전역으로 진주하죠. 하지만 헝가리의 국가기구는 완전히 붕괴되어 수많은 헝가리 병사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시위 군중에게 넘기고 혁명에 가담합니다. 이제 게뢰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임레 나지를 수상으로 하는 새 정부의 구성을 선포합니다.
하지만, 혁명은 전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동시에 협동농장과 공장 등을 중심으로 혁명위원회가 조직되고 곳곳에서 노동자평의회가 구성되었습니다. 이들 조직은 라디오 방송국과 신문사들을 접수하면서 실질적으로 각 지역을 장악해나갑니다. 온건한 임레 나지의 정부는 곧 이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소련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약속합니다. 레지는 공산당에 의한 일당 독재체제를 폐지하고 복수정당에 의한 연립정권을 수립을 선언합니다. 또한 바르샤바조약기구에서의 탈퇴와 중립도 선언하기에 이르죠. 이제 헝가리 혁명은 완전히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10월 31일 소련군은 부다페스트로부터 철수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수상쩍은 병력의 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소련 지도자들은 부대가 단지 이동중일 뿐이라고 주장했죠. 하지만 소련군은 주요 군사적 거점들을 점거하고 부다페스트를 다른 지역으로부터 고립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임레 나지는 공식성명과 유엔을 통해 소련군의 진주로 인해 헝가리의 중립성이 침해당하고 있다고 호소하였습니다.
11월 3일 소련은 헝가리 정부에게 군대 철수 문제를 협상할 대표단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헝가리의 대표로는 혁명 과정에서 대중의 인기를 얻고 국방부 장관이 된 말레테르가 맡았습니다. 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소련은 자신들의 비밀경찰을 동원해 말레테르를 비롯한 헝가리 대표단을 모두 체포합니다.
다음날인 11월 4일, 소련은 제2차 대규모 군사개입을 단행합니다. 이날 새벽부터 무자비한 포격과 학살이 헝가리 전역에서 벌어지죠. 나지와 정부 각료들은 가까스로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하는데 성공하지만 곧 소련군에게 강제 연행되고 말죠. 나지의 개혁정부는 이렇게 붕괴하고 말았습니다.
소련군은 2차 군사개입에서도 철저히 탱크 부대만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들은 보병을 파견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보병이 투입된다면, 그래서 소련의 보병이 헝가리의 시위대를 바로 접한다면, 소련의 보병들은 그 시위대가 일반 시민이자 노동자들임을 알고 혼란에 빠졌을 테니까요. 당시 소련은 헝가리혁명을 파시스트, 서방의 첩자들이 일으킨 반혁명이라고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군대와 함께 들어와 소련군의 수족이자 헝가리의 새로운 지도자 노릇을 한 자는 바로 전까지도 개혁주의자를 자처했던 카다르였습니다.
나지 정부의 붕괴 이후에도, 시민과 노동자들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소련군은 부다페스트를 완전히 장악하는데 3일이나 걸렸죠. 헝가리 각지의 무력 항쟁은 12월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20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소련군과 3천대의 탱크의 투입앞에 보잘것없는 무기로 무장한 시민, 노동자군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요한 군사적 패배이후, 부다페스트 중앙 노동자평의회를 중심으로 한 각지의 노동자평의회는 전면적인 파업으로 전술을 전환합니다. 물론 파업은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지 승리를 위한 수단은 아니죠. 노동자평의회의 전술은 군사적 패배이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 기간에 소중한 민주주의적 경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 노동자평의회는 비합법적인 전국 노동자평의회의 구성을 통해 각지의 요구를 조정하고 생산을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겁니다. 헝가리에서는 상당기간동안 이러한 이중권력의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1956년 12월 11일 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는 임원 전원이 구속됨으로써 와해됩니다. 소련과 카다르정부는 더 이상 이중권력상태를 용인할 수 없었던 거죠.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또다시 헝가리 전역에서 총파업이 일어났거든요. 그리고 그 파업은 해를 넘겨 1월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카다르정부가 헝가리혁명의 산물이었던 노동자평의회의 완전 해산을 명령하는 것은 1957년 11월에 이르러서입니다. 그리고 임레 나지와 말레테르 등 개혁정부인사를 반혁명분자로 처형한 것은 그 다음해의 일이죠. 카다르정부가 이전의 권력을 되찾기까지는 이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헝가리혁명은 수만 명의 사상자와 20만 명에 이르는 국외 망명자를 낸 채 실패로 끝났습니다. 한가지 끔찍한 사실은 배신자 카다르가 헝가리의 1인자로서 32년간 권력을 독점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헝가리혁명은 세계사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습니다. 먼저 맑스 레닌주의에 입각해 건설되었다는 노동자국가 소련이 실상은 노동자의 요구를 철저히 외면하고 자신의 이해만을 도모하는 단지 거대한 제국이었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죠. 또한 헝가리혁명은 올바른 사회주의의 건설이 시민과 노동자에 의해 아래로부터 건설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파나마는 사실 그 태생 자체가 미국의 이해관계와 얽혀있는 나라다. 파나마는 1903년 콜롬비아로부터 독립하였는데, 이는 미국이 파나마의 분리독립주의자들을 옆에서 졸라 충동질해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젤 짧은 거리의 해로를 만들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는데, 젤 좋은 입지조건을 갖춘 곳이 바로 파나마였던 거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파나마의 독립을 지원한 대가로 운하의 건설권 및 운영권을 챙겼다. 파나마에 운하가 생기면 지덜도 대서양으로 진출하기 용이한 것도 있다만, 다른 나라 배덜도 여기를 거쳐 다니는 게 좀 많겠어? 유럽에서 태평양 쪽으로 가든, 혹은 그 반대로 향하든. 당근, 여기서 생기는 수익이 졸라 짭짤하리라는 계산속이 있었지. 앤드, 파나마 사람덜이 언제까지나 이 상황을 좌시하기만 할 리도 없었고.
그리하여 60년대부터 파나마운하 운영권을 파나마에 돌려줘야 한다는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된다. 게다가 1968년 미국의 지원으로 집권했던 토리호스(Omar Torrijos Herrera)는, 70년대 들어 파나마운하 문제를 국제문제화시켜 버림으로써 미국의 뒤통수를 쳤다. 그런 토리호스가 1981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마누엘 노리에가(Manuel Noriega)는 CIA에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등 미국의 첩자 노릇을 했다.
사실 노리에가는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70년대부터 미국 CIA로부터 공작금을 받고 활동하던 인물이었는데, 재밌는 건 당시 조지 부시(George Bush)가 CIA의 국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는 거다. 미국의 41번째 대통령이었으며, 현 대통령인 조지 W. 부시의 아버지이기도 한 바로 그 조지 부시 말이다. 그러나 노리에가는 철권통치로 파나마 국민들의 심한 반감을 샀다. 게다가 공공연하게 마약밀매에 개입하는 노리에가의 행태는 미국의 눈밖에 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결국 미국은 1989년, 스텔스 폭격기까지 동원해 가며 파나마를 침공하여 노리에가를 마약밀매죄로 체포해 버리기에 이른다(미국으로 흥한 자 미국으로 망했다. 그런 면에선 아리스티드랑 흡사한 행보다). 노리에가가 체포될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조지 부시였다. 노리에가는 징역 40년을 언도받았으며, 말많고 탈많던 파나마 운하의 운영권은 1999년 12월 31일 파나마에 반환되었다.
첫댓글 칠레 쿠데타라면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꽤 오래전에 기록된 자료인데 자게에서 삭혀지고 있어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