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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2부 9
새벽녘에야 겨우 잠든 네흘류도프는 이튿날 늦게 눈을 떴다.
정오에 관리인이 불러온 일곱 명의 선발된 농부들이 과수원 사과나무 밑에 모였다. 관리인은 땅에 박은 말뚝 위에 탁자를 마련해놓고, 의자를 몇 개 준비해놓고 있었다. 농부들에게 모자를 쓰게 하고 걸상에 앉히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군인 출신 농부는 오늘 깨끗한 각반에 짚신을 신었는데, 장례식 때의 군대 예식대로 다 떨어진 자기 모자를 꼿꼿이 가슴 앞에 받쳐 들고 서 있었다. 그중 미켈란젤로의 모세같이 생긴 반백의 곱슬곱슬한 수염을 하고 구릿빛으로 그은 이마 언저리에 백발이 성성한 위엄 있고 어깨가 딱 벌어진 노인이 큼직한 모자를 집어 쓰고 집에서 갓 지어 입은 카프탄 자락을 여미면서 걸상 곁으로 다가가 앉자, 다른 농부들도 그의 뒤를 따라 의자에 가서 앉았다.
농부들이 다 앉기를 기다렸다가 네흘류도프는 그들 맞은편에 앉아서 계획안이 쓰여 있는 종이를 탁자에 펼쳐놓고는 팔꿈치를 괴고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농민의 수가 적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를 잊고 이 일에 열중했기 때문인지 네흘류도프 역시 이번에는 아무 혼란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곱슬곱슬한 흰 수염에 어깨가 딱 벌어진 노인에게 남달리 주의를 돌리면서 그 노인에게서 찬부의 의견을 기대했다. 그러나 네흘류도프가 그 노인에게 걸었던 기대는 들어맞지 않았다. 풍채가 당당해 보이는 노인은 찬성이라도 할 듯이 아름다운 촌장풍의 머리를 끄덕이기도 하고 다른 농부들이 반대하는 말을 들으면 얼구를 찡그리고 옆으로 흔들리기도 했지만, 실은 네흘류도프의 말을 가까스로 알아듣고 있었다. 그것도 다른 농부들이 자기들 말로 쉽게 얘기했을 때에야 비로소 알아듣는 것 같았다. 그보다는 촌장 연한 노인과 나란히 앉아 있는 체소한 애꾸눈 농민이 네흘류도프의 이야기를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더덕더덕 기운 소매 업는 무명 외투에 헐어서 쭈그러진 장화를 신었고 턱수염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노인이었는데, 네흘류도프가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난로를 놓아주는 일꾼이었다. 이 노인은 눈썹을 찡긋찡긋 움직이면서 열심히 듣다가, 네흘류도프가 하는 말을 곧 자기들 말로 옮겨서 설명했다. 또 한 사람, 키가 작은 탄탄한 몸집에 흰 턱수염을 하고 영리하게 눈을 반짝이는 노인 역시 이해가 빨랐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네흘류도프의 말을 농담조로 비꼬면서 자신의 영리함을 과시하는 듯했다. 군인 출신의 그 사내 역시 군대 생활로 우둔해지지만 않았더라도, 또 무의미한 군대 용어를 남용해서 혼란만 일으키지 않았더라도 쉽사리 문제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가장 진지하게 문제를 대하고 있는 사람은 집에서 짠 옷을 입고 새 짚신을 신은, 턱수염이 짧고 코가 길며 굵직한 저음으로 말하는 키 큰 농부였다. 이 농부는 무엇이든 잘 이해해서 다만 필요한 때만 입을 열었다. 나머지 두 노인 -한 사람은 어제 집회에서 네흘류도프의 제안에 한사코 반대를 외치던, 이가 없는 노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후리후리한 키에 살갗이 희고 앙상한 다리에 탄탄히 각반을 두르고 구두를 신은, 사람 좋아 보이는 절름발이 노인이었다 -은 시종 주의 깊게 듣기만 할 뿐 거의 말이 없었다.
네흘류도프는 먼저 토지 사유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토지라는 것은 내 생각에....."하고 그는 말했다. "팔든지 사든지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토지를 팔 수 있다면 돈 있는 사람이 모두 사버릴 테고, 토지를 갖지 않는 사람한테서 토지 사용에 대한 대가를 마음대로 받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땅 위에 서기만 해도 돈을 받으려고 할 겁니다." 그는 스펜서의 이론을 인용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면 몸에 날개를 붙이고 날아다닐 수밖에 없겠군요!"하고 턱수염이 흰 노인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건 사실이야"하고 코가 긴 노인이 굵직한 베이스로 말했다.
"정말 그렇군요"하고 군인 출신인 사나이가 말했다.
"계집애가 송아지에게 주려고 풀을 좀 뜯었다고 해서 잡아 가두니 말이야." 사람 좋아 보이는 절름발이 노인이 말했다.
"우리 땅은 5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지만, 땅을 빌리려고 해도 땅값을 깎아줄 생각은 않고 엄청나게 비싸게 매겨서 갚을 도리가 있어야죠"하고 이가 없는 성급한 노인이 말했다. "마음대로 골탕을 먹이는 거예요. 농노 시대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하고 네흘류도프는 말했다. "토지 소유는 죄악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토지를 당신들에게 내주려는 거요."
"참 고마우신 말씀입니다"하고 모세같이 턱수염이 곱슬곱슬한 노인이 말했다. 그러나 그는 아지곧 네흘류도프가 토지를 빌려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햇다.
"내가 여기 온 것도 실은 그 때문이오. 나는 더는 토지를 갖고 싶지 않소. 그러니 토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잘 생각해야 한단 말이오."
"생각할 게 뭐가 있습니까,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면 그만이지"하고 이가 없는 성급한 노인이 말했다.
네흘류도프는 그 말을 듣자 성의 있는 자신의 계획이 의심받고 있다고 느끼고 처음에는 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 마음을 가다듬고 그 말을 기회로 자기가 하려던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기꺼이 땅을 나누어주겠소"하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도대체 누구에게 어떻게 나누어주란 말입니까? 어떤 농민에게? 당신들에게만 주고 제민스코예(약간의 토지를 가진 이웃 마을이다) 사람에겐 주지 않아도 좋단 말입니까?"
모두 말이 없었다. 그런데 군인 출신만이 "그렇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자, 그럼" 하고 네흘류도프는 말했다. "한 가지 묻겠는데, 만일 황제께서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명령했다면, 당신들은 어떻게 하겠소?"
"아니, 그런 말이 있습니까?" 이가 없는 노인이 물었다.
"아니, 그런 말이 있다는 게 아니라, 그저 그렇게 물어보는 것뿐이오. 만일 황제께서 지주의 땅을 몰수해서 농민에게 나누어주라고 말씀하셨다면, 당신들은 어떻게 하겠느냐 말이오."
"어떻게 하다니요, 사람 수대로 지주나 소작인이나 다 똑같이 나누어 가져야죠." 난로 일을 하는 일꾼이 재빨리 눈썹을 아래위로 움직이면서 말했다.
"달리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인원수대로 나눠야지요"하고 하얀 각반을 치고 사람좋아 보이는 절름발이 노인이 맞장구를 쳤다.
모두 그 의견이 좋다고 노인의 말에 찬성을 표했다.
"인원수대로라니, 어떻게 한다는 거죠?"하고 네흘류도프가 물었다. "머슴하네도 나눠준다는 건가요?"
"그건 안 됩니다." 군인 출신 사나이가 쾌활하고 용감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분별이 있는 키 큰 농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눠준다면, 모두 골고루 나눠줘야 합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굵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건 안 됩니다." 미리부터 반박하려고 준비하고 있던 네흘류도프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다 똑같이 나눠준다면 직접 일하지 않고 밭을 갈지 않는 사람들, 이를테면 지주, 하인, 요리사, 관리, 서기 같은 모든 도시 사람들은 제 몫으로 받은 것을 곧 부자들에게 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토지는 부자의 손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손으로 경작하는 사람은 식구가 늘어도 토지는 이미 매점되어 있으니까 다시 땅을 얻으려고 부자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그 말입니다."
"그렇습니다"하고 군인 출신 사나이가 대뜸 동의했다.
"토지는 팔지 못하게 하고, 제 손으로 농사짓는 사람에게만 주면 되지 않느냐 말이에요"하고 난로공은 화난 듯이 군인 출신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이 말에 네흘류도프는 누가 직접 경작을 하고 또 누가 팔아버릴지 분간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
그때 키가 크고 분별 있게 생긴 노인이 조합을 만들어서 경작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래서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나누어주고, 짓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지 않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고 나직하고 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공산주의적인 제안에 대해서도 네흘류도프는 논증을 마련해놓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모두가 다 같이 가래와 말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또 각자가 다른 사람에게 뒤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모든 것, 곧 말과 가래와 탈곡기를 비롯한 모든 농기구를 공유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하려면 모든 사람이 합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네 농민들은 죽을 때까지 합심하지 못합니다"하고 성급한 노인이 말했다.
"싸움이 그칠 날이 없으니까요"하고 흰 턱수염을 기른 노인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낙네들은 서로 눈알을 뽑으려고 덤벼들 겁니다."
"그리고 땅을 분배하더라도 토질 문제는 어떻게 하면 좋겠소"하고 네흘류도프는 말했다.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누구에게는 옥토를 주고, 또 누구에게는 진흙땅과 모래땅을 준단 말이오?"
"다 골고루 할당하면 되지 않습니까?"하고 난로 놓는 일꾼이 말했다.
이에 대해 네흘류도프는 토지 분배 문제는 한낱 조합에 한한 것이 아니라 여러 현의 토지 분배에 관한 문제라고 항변했다. 만약 토지를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준다면, 무슨 기준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땅을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나쁜 땅을 주겠는가? 누구나가 좋은 땅을 차지하려고 할 것은 틀림없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하고 군인 출신 사내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그렇게 때문에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하고 네흘류도프가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조지라는 사람도 같은 생각을했는데, 나는 그의 견해에 찬성하고 있소."
"나리가 주인이시니까 나리께서 나누어주시면 되는 겁니다. 이러쿵저러쿵 말할 게 뭐 있습니까? 나리 마음대로 하세요"하고 성난 노인이 말했다.
네흘류도프는 자기 얘기를 가로채는 노인의 말에 어리둥절했으나, 그 말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마음이 흐믓해졌다.
"잠깐 참아요, 세묜 아저씨, 나리의 말씀을 들어봅시다그려"하고 분별 있는 농부가 위압적인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네흘류도프는 이 말에 용기를 얻어 헨리 조지의 단일세 안(案)을 그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토지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틀림없는 말씀입니다." 몇 사람이 대답했다.
"토지는 공동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토지에 대해 똑같은 권리를 갖습니다. 그리고 누구나가 좋은 땅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럼 똑같이 나누어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그것은 좋은 토지를 가진 사람이 토지를 갖지 않은 사람에게 각자의 토지에 해당되는 땅값을 지불하는 겁니다." 네흘류도프는 자문자답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 누가 누구에게 지불할 것인가를 정하기란 매우 곤란한 일입니다. 그러나 공동비용으로 돈을 저축할 필요가 있으니까 토지를 가진 사람이 그 토지에 해당하는 땅값을 공동 비용으로 지불하도록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누구나, 누구나 다 평등해집니다. 결국 토지를 사용하고 싶은 사람은 좋은 토지에 대해서는 많이 지불하고 나쁜 토지에 대해서는 조금 지불하는 거죠. 그러니까 토지를 사용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한 푼도 내지 않아도 좋습니다. 토지를 사용하는 사람만이 공동 비용으로 돈을 지불한다, 그 말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하고 난로 일꾼이 눈썹을 움직이면서 말했다. "좋은 땅을 가진 사람이 더 내는 건 당연해요."
"그 조지라는 사람은 보통 머리가 아닌데" 풍채가 좋은 고수머리 노인이 말햇다.
"다만 우리 힘으로 그 돈을 갚을 수만 있다면야"하고 사태의 추이를 미리 짐작한 듯 키 큰 농부가 굵은 베이스로 말했다.
"그 금액은 너무 비싸도 안 되고, 또 너무 싸도 안 됩니다. 비싸면 갚을 길이 없어서 손해가 날 테고, 싸면 서로 사겠다고 할 테니까요. 그래서 바로 그 점을 잘 해결하고 싶은 겁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렇지요, 사실 그렇습니다"하고 농부들은 말했다.
"정말 머리가 좋은 사람이군"하고 어깨가 넓은 고수머리 노인이 말했다. "그 조지란 사람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런데 제가 만일 토지를 갖고 싶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하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관리인이 말했다.
"빈터가 있으면 그걸 얻어 농사를 지을 수도 있게찌"하고 네흘류도프가 대답했다.
"당신이 뭐가 필요하단 말이오? 그렇지 않아도 배가 부를텐데"하고 눈웃음을 치는 노인이 말했다.
이것으로 집회는 끝났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제안을 다시 한 번 설명했으나, 이번에도 즉답은 요구하지 않고 마을 전체 사람들과 상의해서 회답을 보내달라고 말했다.
농민들은 마을 사람들과 상의해서 회답하겠다고 말한 후, 작별 인사를 하고는 각자 흥분에 사로잡힌 채 집으로 돌아갔다. 큰 소리로 떠들면서 돌아가는 그들의 말소리가 오랫동안 길가에서 들려왔다. 그들의 말소리는 그날 밤 늦게까지 마을 쪽에서 냇가를 건너 들려왔다.
이튿날 농민들은 일손을 놓고 주인 나리가 제안한 문제를 협의했다. 집회는 두 파로 갈라졌다. 한 파는 주인의 제안이 유리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인정했으나, 다른 한 파는 그 속에 간계가 숨어 있다고 믿고 그 저체를 알 수 없어 더욱 두렵다고 했다. 그러나 사흘째 되던 날 주인이 제안한 조건을 모두 수용하기로 합의를 보고, 전체 결의를 보고하려고 네흘류도프를 찾아왔다. 이렇게 합의를 보게 된 데는 어떤 노파의 설명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 노파는 주인의 제안에 조금도 의심할 만한 점이 없다며 그들의 의구심을 일소해주었다. 노파는 그가 영혼을 생각하기 시작했고, 또 그 영혼을 구제하려고 이런 일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설명은 그가 파노보에 머무는 동안 많은 돈을 적선했다는 사실로 입증되었다. 네흘류도프가 이곳에서 돈을 희사하게 된 것은 농민들이 처해 있는 비참한 궁핍 상태를 처음으로 보고 그 빈궁에 놀란 나머지 그들에게 돈을 주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님을 알면서도 주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그의 수중에는 지난해에 쿠즈민스코예에서 판 산림 대금과 농기구를 판 계약금까지 해서 많은 돈이 들어와 있었다.
지주가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준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특히 아낙네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도와달라고 청했다. 그는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 누구에게 얼마를 줄지 결정하는 문제에서도 도대체 어떤 기준을 둬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는 도움을 바라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가 갖고 있는 많은 돈을 주지 않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무턱대고 주는 것은 무의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이곳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는 재빨리 그 방법을 실행에 옮겼다.
파노보에서 묵던 마지막 날, 네흘류도픈느 안채로 들어가 거기 남아 있는 물건들을 조사해보았다. 그는 거기서 고모가 쓰던, 사자 머리에 청동 고리가 달린 낡은 마호가니 장롱 아래 서랍에서 많은 편지를 발견했다. 편지에 끼어 사진 한 장이 나왔다. 그것은 소피야 이바노브나와 마리야 이바노브나, 대학 시절의 그 자신, 그리고 순결하고 쾌활하며 아름답고 또 삶의 기쁨에 넘쳐 있던 카튜샤가 찍힌 사진이었다. 이 집에 있는 물건 가운데 네흘류도프는 편지와 사진만 챙겼다. 그 나머지는 만날 빙글빙글하는 관리인의 주선으로 파노보에 있는 그의 집과 가구 일체를 10분의 1의 헐값으로 사들인 물방앗간 주인에게 넘겨주었다.
네흘류도프는 지금 쿠즈민스코예에서 재산을 잃은 것을 아까워하던 그때를 떠올리며,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하고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지금 끝없는 해방의 기쁨과 새로운 땅을 발견한 탐험가만이 맛볼 수 있는 새로운 감정에 휩싸였다.
부활 2부 10
도시로 돌아온 네흘류도프는 도시의 모든 것이 유달리 새롭고 기괴하게 느껴지는 데 놀랐다. 그는 가로등이 켜진 저녁녘에 역에 내려 집으로 돌아왔다. 방방마다 아직도 나프탈렌 냄새가 풍겼고,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와 코르네이는 둘 다 녹초가 되어 기분이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줄에 널고 말려서 챙겨두는 것 말고는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는 물건들을 처리하느라 말다툼까지 하고 있었다. 네흘류도프의 방은 쓰지도 않았는데 정리가 안 돼 있었고, 트렁크가 흩어져 있어서 드나들기가 거북했다. 네흘류도프의 귀가는 일종의 묘한 타성에 따라 수행되고 있는 이 집안 일에 확실히 방해가 되는 것 같았다. 농촌의 빈곤 상태를 목격하고 온 네흘류도프에게는 (자기도 한때는 이 속에서 살아오긴 했지만) 이 모든 미치광이 같은 생활이 지극히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에게 누나가 와서 집안의 일을 완전히 처분할 때까지 그녀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물건들을 정리해달라고 부탁하고는, 그 이튿날 바로 하숙집을 정해 옮기기로 결심했다.
네흘류도프는 아침부터 집을 나와 감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처음 눈에 뜨인, 지저분한 가구가 딸린 두 칸짜리 아파트를 빌린 다음, 자기가 골라놓은 짐들을 운반해 오도록 지시한 뒤에 변호사한테 갔다.
밖은 추웠다. 소나기가 내린 뒤 봄철에 흔히 오는 추위가 닥쳐온 것이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불어와 얇은 외투를 입은 네흘류도프의 몸을 떨리게 했으므로 그는 걸음을 빨리하여 몸을 녹여보려고 했다.
그의 기억 속에는 시골 사람들, 아낙네들, 어린 아이, 늙은이, 또 그가 이번에 처음 본 빈곤과 고통, 더욱이 생긋거리면서 살이 없는 다리를 흔들어대고 겉늙어 보이던 갓난애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그는 무심결에 그들과 이 도회지 사람들을 비교해보았다. 고깃간, 생선 가게, 기성복 가게 앞을 지나면서 그는 마치 난생처음 그런 사람들을 보듯이, 시골에서는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는 말쑥한 옷차림에 기름기가 도는 살찐 상인들의 모습을 보고 새삼스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자기 상품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도 없는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노력을 무익하기는커녕 지극히 유익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앗다 큼직한 궁둥이에 단추가 잔등에 달린 옷을 입은 마부도, 금줄을 두른 모자를 쓴 문지기도, 앞치마를 두른 고수머리 하녀도, 특히 사륜마차 속에 자빠져서 사람을 업신여기는 풀어진 눈으로 행인들을 쳐다보고 있는, 목덜미를 면도한 고급 마차의 마부들도 모두 한결같이 배가 불러 있었다. 그는 이런 사람들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토지를 빼앗기고 도회지로 쫓겨 온 시골뜨기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는 도회지의 온갖 생활 조건을 잘 이용하고 양반 신세가 되어 자기들의 처지를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도회지에 나왔으나 촌에 있을 때보다 더 못한 처지에 놓여 그때보다 훨씬 더 비참한 생화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지하실 창가에서 일하고 있는 구두장이 같은자들은 네흘류도프에게 이런 비참한 축에 드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비누 냄새가 풍겨 나오고 김이 서려 있는 활짝 열린 창문 앞에 서서 앙상한 두 팔을 걷어 올리고 다림질을 하고 있는, 파리하게 여윈 얼굴에 머리가 헝클어진 세탁부도 그려했거니와, 앞치마를 두르고 맨발에 구두를 신은 채 네흘류도프 앞으로 걸어오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페인트투성이인 두 칠장이 역시 그러했다. 그들은 팔꿈치까지 소매를 걷어 올린, 볕에 그을고 비쩍 마른 파리한 팔로 페인트 통을 나르며 연방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었다. 얼굴은 지쳐빠지고 성난 듯한 표정이었다. 흔들흔들 마차를 타고 가는, 새까만 얼굴에 먼지투성이인 짐마차꾼도 그러한 표정이었다. 길모퉁이에 서서 동냥을 하는, 남루한 옷차림에 얼굴이 부은 사나이와 아이를 거느린 여자들도 모두 같은 표정이었다. 그 같은 표정을 한 얼굴은 네흘류도프가 지나가던 술집의 열려 있는 창 안에서도 볼 수 있었다. 술병과 찻잔을 늘어놓은 지저분하고도 조그만 탁자 사이를 비틀거리며 흰옷을 입은 종업원이 일을 하고 있었다. 땀이 배고 얼굴이 빨개진 손님들은 얼간이 같은 표정으로 앉아서 소리를 지르거나 노래를 불렀다. 창가에 앉아 있던 한 사나이는 눈썹을 치켜 세우고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청히 눈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런 곳에 모여 있는 걸까?'하고 네흘류도프는 찬바람과 함께 휘몰아치는 먼지와, 사방에 퍼져 있는 갓 칠한 페인트의 역한 냄새를 들이마시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어느 거리에서 무슨 쇠붙이를 운반하는 짐마차 대열과 나란히 걷게 된 그는 울퉁불퉁한 포장길에서 쇠붙이가 내는 요란한 소음으로 귀가 먹먹하고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는 마차 대열을 앞지르려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갑자기 요란스러운 쇳소리 사이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을 멈춘 그는 자기보다 조금 앞에서 콧수염 끝을 뾰족하게 세운, 번들번들 빛나는 원기 왕성한 얼굴의 군인을 보았다. 그는 고급 마차 위에서 손을 흔들며 유난히 흰 이를 드러내고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네흘류도프! 자네 아닌가?"
첫 순간에는 네흘류도프도 기뻤다.
"아, 셴보트!"하고 네흘류도프는 반가운 소리로 그를 맞았지만, 곧 반가워할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다.
그는 그때 고모네 영지에 들렀던 바로 그 셴보크였다. 네흘류도프는 오랫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는 빚이 많은 데다 연대를 나와서도 기병 행세를 하며 그럭저럭 부자들과 교제하고 있다는 소문만 듣고 있었다. 쾌활하고도 만족스러워 보이는 그 표정이 그 소문을 증명해주었다.
"마침 잘됐군, 자넬 만나다니! 이 거리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말이야. 아니, 자네도 꽤 늙었군그래." 마차에서 내려 양어깨를 펴면서 그는 말했다. "걸음걸이를 보고 곧 자넨 줄 알았네. 같이 식사라도 하러 가세. 어디 먹을 만한 곳이 없나?"
"글쎄,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군." 네흘류도프는 친구의 감정이 상하지 않게 이 자리를 벗어날 궁리만 하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자넨 어떻게 여길 다 왔나?"하고 그는 말했다.
"좀 볼일이 생겨서. 후견 일일세. 난 이래봬도 후견인이라네. 사마노프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어. 자네도 알지, 그 부자를? 어리석긴 하지만 5만 4천 정보나 가지고 있거든." 그는 마치 자기가 그 5만 4천 정보를 마련해놓기라도 한 듯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관리는 엉망진창이엇어. 토지는 전부 농민에게 빌려주었는데 그놈들이 한 푼도 물지않아서 체납금이 8만 루블이 넘는 형편이었지. 그런 걸 내가 1년 동안 전부 개혁해서 7할 이상의 수입을 올렸다네. 어때?" 하고 그는 득의양양해서 말했다.
네흘류도프는 재산을 전부 탕진해버리고 도저히 갚을 수 없게 된 셴보크에게 공교롭게도 어떤 특별한 보호자가 나타나 쓰러져가는 부자 노인의 후견인 역을 맡게 해주었고, 그가 지금은 그것을 뜯어먹고 산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자, 어떻게 해야 이자에게 모욕을 주지 않고 헤어질 수 있을까?' 네흘류도프는 기름 바른 수염에 번드르르 혈색 좋은 얼굴을 바라보면서, 또 어디 맛있는 데가 없느냐는 둥 후견 사무를 어떻게 정리했다는 둥 자랑하며 허물없이 지껄이는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어디서 식사를 하지?"
"그런데 시간이 없군그래." 네흘류도프는 시계를 보면서 말했다.
"아, 그래, 그럼 오늘 밤 경마가 있는데, 오지 않겠나?"
"아니, 난 못 가네."
"오게. 내 말은 없지만 그리샤의 말에 거는 거야. 자네도 알지? 그잔 멋진 말을 가지고 있거든. 꼭 오게, 같이 저녁 식사나 하세."
"저녁 식사도 어렵겠어." 네흘류도프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왜 그러나? 지금 어디로 가지? 뭣하면 태워다 주겠네."
"변호사한테 가는 길일세. 바로 저 모퉁이에 사는 사람이야"하고 네흘류도프는 말했다.
"참, 자네, 감옥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다면서? 감옥의 고문이라도 됐나? 코르차긴 일가 사람에게서 들었네만"하고 셴보크는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들은 이미 떠나버렸다네.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이야기 좀 해보게!"
"그래, 모두 사실이야"하고 네흘류도프는 대답했다. "하지만 길가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나!"
"아, 그렇군. 자넨 본디부터 좀 괴짜였으니까. 그럼 경마에는 올 수 있겠지?"
"아니, 못 가겠어. 갈 수도 없거니와 가고 싶지도 않네. 제발 화내지 말게."
"그런 일로 무슨 화를 내겠나. 그런데 자넨 지금 어디 있지?" 그는 이렇게 묻더니 갑자기 정색을 하고, 멍청히 한 곳을 응시하면서 눈썹을 치켜세웠다. 뭔가 생각해내려고 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네흘류도프는 그의 얼굴에서 조금 전 술집 창가에서 본 한 사나이의 표정, 눈썹을 치겨세우고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던 그 사나이와 똑같은 무딘 표정을 발견했다.
"몹시 추운 날씨로군! 안 그래?"
"그렇군."
"물건 산 건 가지고 있지?" 셴보크는 마부에게 물었다.
"자, 그럼 잘 거게, 자네를 만나서 퍽 반가웠네." 셴보크는 이렇게 말하고 네흘류도프의 손을 꼭 쥔 다음 마차에 뛰어올랐다. 그는 새로 산 흰 양피 장갑을 낀 큼직한 손을 번들거리는 얼굴 앞으로 내저으면서 유난히 흰 이를 드러내며 씽긋 웃었다.
'나도 저랬을까?' 변호사의 집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네흘류도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다. 꼭 저렇지는 않았더라도 저렇게 되려고 노력했고, 또 한 평생 저렇게 살아가리라고 생각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