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배우 역할을 가장 근사하게 해낼 배우를 찾아내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다. MBC 새 일일 드라마 '인어 아가씨'에서 한혜숙이 맡은 역이 바로 배우다.
그녀는 배우로만 30년을 살았다. MBC 공채 탤런트 2기생으로 처음 이 세계에 입문했으나 '왔다 갔다'(방송국과 집 사이, 혹은 화면 안에서)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KBS에서 드라마 주인공을 찾는다고 해 응시했는데 (스무살의 오기?) 덜컥 1등으로 뽑혔다. 4천대 1이었다.
두려울 게 있었겠는가. 40대 이상이라면 아마 그녀가 처음 주인공으로 나온 드라마를 기억할 것이다. 주제가가 인상적이었던 '꿈나무'. 꿈나무라는 메타포는 아마 그 드라마에서 처음 시작된 듯하다.
'눈부신 아름다움'을 무기삼아 그녀는 KBS의 꿈나무로 무럭무럭 자란다. TV에서 '춘향전'을 여러 차례 방송했지만 TV 춘향의 원조는 그녀였다.
'팔도강산'시리즈로 인기 절정을 구가했고 제작 당시 그녀 또래의 모든 여배우가 탐냈던 대하드라마 '토지'의 주인공 서희 역도 당당히 꿰찼다.
'노다지'로 각종 연기상을 휩쓸었던 그녀는 '왕과 비'의 정희왕후 윤씨역을 끝으로 잠시 연기 생활을 접었다. '인어 아가씨'는 그녀가 새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드라마인 셈이다.
내게 그녀는 왕년의 명배우, 그 이상이다. 조금 더 들춰내면 소년시절 흠모의 대상이었다. 실제로 마주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드라마를 통해서만 만나고 싶은 마음이 반반이었다. 신비의 대상을 명시거리에서 확인했을 때 그녀의 '리얼리즘'이 다락에 숨겨둔 사춘기의 거울을 깨는 게 내심 두려웠기 때문이다.
만나고 단 5분 안에 그녀는 모든 환상을 무너뜨렸다. 그 거침없는 솔직함이 30년의 신비감을 일거에 무력화시켰다. "제 별명이 좀 많아요." 나는 새침떼기, 혹은 '영원한 공주' 정도가 아닐까 짐작했는데 뜻밖의 언어들이 쏟아져 나온다.
독일군 여장교, 미스 면돗날, 향기없는 목련, 가시돋친 흑장미에서 사감 선생님에 이르기까지. 별명은 이미지의 동상이다. 그녀는 사열하듯 그것들을 즐기고 있었다.
딸만 다섯인 집의 장녀인 그녀에게 아버지는 유언으로 세가지를 당부하셨다. "잘 먹어야 한다" "모범이 돼라" "동생들을 위해 네가 희생해라"였다. 평생의 짐을 주고 가셨지만 그녀는 그 계율을 배반하지 않았다. "좀 까탈스런 면이 있죠.
오염되고 싶지 않았거든요." 고혹적 미모의 그녀가 신봉하는 가치는 놀랍게도 '질서와 체계'다. 그녀를 '경우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 어느 PD의 말이 수긍이 간다. 대인관계가 다소 폐쇄적이라는 세간의 평도 실은 그 '원칙' 준수의 부산물이 아니었을까.
'왕과 비'에 출연하던 때 우연히 스튜디오에 들른 가수 양희은이 무심코 던진 말이 아직 가슴에 꽂혀 있다."당신은 안 늙을 줄 알았는데…." 나는 그 말이 양희은이 안심하는 소리로 들린다.
"아직도 환상의 줄을 안 놓고 버둥거리는 모습들을 보면 안타까워요." 20대의 오기가 50대의 여유로 성장한 모습이 아름답다.
결혼에 대해서도 명쾌하다. "누군가 말하더군요. 아름다운 오해로 시작해 참혹한 이해로 끝나는 게 결혼이라고요." 한혜숙과의 만남은 내게 아름다운 오해로 시작해 평화로운 이해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