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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한 우군 "설렁설렁님"을 동행으로 여정을 시작합니다.
혹시라도 빠른 걸음으로 걸을지 몰라서 그랬나요? "걷고"님이
이름을 바꾸어서 나오셨네요. ㅎ
맑은 날의 태양은 여전히 강렬하였습니다.
볕과 그늘을 오가며 직각 예각 둔각으로 고도를 바꿔가며
기하학적 탐구생활을 밟아 보았습니다.
지식이 짧고 안내문도 많지 않아 따로이 검색을 해서
후기에 보탭니다.
5호선 서대문역 1번출구에서 직진합니다.
기찻길옆 유명한 식당들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전주집, 남도식당 등 한식이 맛있는 곳들을 찾아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때마침 기차가 굴을 빠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문산에서 신촌으로 오는 경의선인 것 같습니다.
곧 언덕길로 접어 오릅니다.
인창고등학교와 경기대 가까이에 선교교육원이 있습니다.
여기도 등록문화재입니다.
교육원안으로 들어가서 살펴보니 지하 공간은 쓰지 않은 지가 꽤 오래 된 듯 하였습니다.
교육운 현관앞 대리석 계단 난간에 신문이 그냥 놓여 있었습니다.
아직 일과를 시작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조립식 부속건물들을 활용하고 본관은 사무동으로만 쓰나?
한적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습니다.
언덕을 내려 와서 서대문에서 마포로 이어지는 대로를 건너
5호선 충정로역 9번출구쪽으로 갔습니다.
출구옆 골목안으로 들어가면 음식점들이 많고
굴요리집이 보였습니다.
굴요리집 건물 옆에서 새단장중인 집이 이명래 고약 집입니다.
공지를 할 때에 검색을 해보니 이 곳이 아니라
연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가 마주보는 곳(독립문에서 금화터널을 지나서)으로
이사를 한 것 같았습니다.
개인들의 "글창고"에는 충정로에서 본 글들이 작년말에도 올라 와 있었긴 했지만.
어릴 때 조고약이 유명하다는 소리를 들었었고 이명래고약도 그와 마찬가지라고
알고 있습니다.
벽면을 칠하고 있는 분들께 "여기가 이명래 고약집인가요?" 라고 물어보니
잘 모르겠다고 근처 식당주인에게 알아 보라고 하는데
마침 식당에서 여자분이 나오길래 여쭈어 봤더니 맞다고 확인을 해주셨습니다.
아마도 한 삼십년 전 쯤인 것 같습니다.
턱밑에 뭔가가 돋아 난 것 같아서 손으로 뜯었더니
처음에는 그 주위가 약간 단단해지다가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이내
열이 나고 부어 올라 턱과 목의 경계가 안 보일 정도가 되어
고개를 움직이면 골이 지끈거릴 만큼 아픈 상태에 이르렀었습니다.
병원하고는 본디 친하게 지내지 않았기도 했고
당시에는 누구나 약국에 가는 게 당연한 것 처럼 생각하던 때니 학교 근처 약국에 갔었고
지금 생각해도 참 재미있는 약사분을 만났습니다.
"혹시 아주 친한 친구가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목숨을 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친구사이인가요?"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그럼 안되겠네요."
"왜 그러시는데요?"
"아~ 손님처럼 종기가 나서 이렇게 퉁퉁 부어 있는 경우에는
특별히 금방 낫게하는 약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친구가 배에 올라타서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두 손으로 종기를 확 터뜨려
고름을 짜 내는 것이 제일 확실한 방법이거든요.
그런데 얼마나 아픈지 눈물이 쏙 둘러 빠집니다.
무의식적으로 종기를 짠 사람의 아구통을 날리게 될 것입니다.
친한 친구라면 그렇게 주먹질을 해도
평생 서로 다시는 안 보는 원수지간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얘기지요."
그래서 약을 사지 않고 그냥 돌아 왔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친구놈하고 원수가 될 것 같아서 약국아저씨가 알려 준 방법은 포기하였습니다.
골이 아프다고 아무 것도 못하면서 죽는다고 난리법석을 떨고 또 며칠을 뭉개고 있었을 때
할머니께서
"야야~ 안된다 저래 나 뒀다가 큰 일 나겠다.조고약을 사와라" 하셨습니다.
조고약을 찾았는데 이명래고약을 준 건지 처음부터 이명래고약을 사려고 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집에서는 조고약이라고 하셨는데 생긴 모양이 비슷해서 이명래 고약도 아쉬운대로
쓰자고 한 것도 같고.......
어찌되었건 할머니께서 이명래 고약을 기름종이에 녹여서 발라 주셨습니다.
그 걸 바르고 나니 하룻만에 바로 종기 핵이 빠지고 양손으로 짜보니
고름이 철철 흘러 넘쳐 나왔습니다.
몸이 정상으로 돌아 왔다고 생각하는데
원수가 될지도 몰랐을 친구놈이 한다는 소리가
"야! 그 거 그렇게 나으면 안으로 곪아 들어가서 나중에 더 큰 일 난다.
병원 빨리 가 봐라"
그렇게 되어 한 달을 넘게 끙끙 앓던 종기소동은 고약으로 거의 다 진정을 시킨 후에
외과의원을 찾아가게 하였습니다.
의사선생님은 구멍을 두 개 뚫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달걀 먹을 때에 구멍 두 개 내는 거 아시죠?
그런 원리로 고름을 완전히 빼내려고 하는 겁니다." 하시면서 겁나게 칼을 댔고
면봉솜크기의 솜이 고름을 완전히 흡수하는 장치로 며칠 붙어 있었습니다.
진작 병원에 갔으면 시간과 돈도 모두 절약을 했을텐데......
제가 하는 선택이 이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이명래 고약집에서 대로변으로 나가는 골목안쪽에 충정각이 바로 보였습니다.
장사를 하는 개인영업장에 가까이 가기가 부담스러워 멀리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누리검색을 해서 가져 온 것입니다.
1910년대에 독일사람이 일반주택용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유럽풍에 한국식과 일본식을 가미한 양식이라고 하네요.
충정아파트를 찾아 볼까요?
1930년대에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라고 합니다.
건축주이자 설계를 했던 일본인 도요타 다네요(豊田種松)의 이름을 따서
도요타아파트, 풍전아파트로도 불렸다고 합니다.
일제시대와 미군정때에 호텔로 사용하다가 1961년도에 정부로 반환하였고
건국훈장을 받은 김병조에게 불하되었는데 한국전쟁때 6명의 아들이 전사했다는 것이
거짓말로 들통나서 당시 코리아호텔로 운영하는 것을 정부가 환수를 했고
이후에도 소요주가 여럿이 바뀌었다가 1975년 서울은행이 처분을 하려는 때에
아파트로 다시 용도를 변경하여 개별분양을 해서 오늘에 이르른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1979년도에 도로가 8차선으로 확장되면서 앞면이 잘려 나갔고
2008년에는 재개발계획에 따라 철거위기에 몰렸었는데
호텔로 운영될 당시에 불법으로 올린 5층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보상을 해 줄 수가 없다는 주장,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자는 의견 등으로 아직 해법을 못 찾은 상태입니다.
아래 사진도 다른 곳에서 퍼 온 것입니다.
옆면과 뒷면쪽인데 제법 큰 규모네요.
내부는 정원이 있는 형태인데 도로확장 때 앞면이 잘려 나간 쪽의 입주민들이
다닐 공간 확보 등으로 복잡하게 변형이 된 것 같답니다.
충정아파트 옆 골목안으로 더 들어가면
리하우스라는 건물이 보이고 곧이어 성요셉아파트가 나왔습니다.
1971년에 약현성당에서 지은 것으로 초기에는 신도들에게 배정되었던 것인데
후에 일반에 매각되었습니다.
내리막길로 가려다가 언덕을 바라보니 재개발 사무실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 저기가 호박마을인가 보다.
주위의 높은 건물에 둘러 싸여 곧 철거될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처음 서울에 올라 왔을 때 세종문화회관뒤 내수동에서 살았는데
대구 집에 내려 갔다가 새벽에 올라오면 버스도 없고 하니
슬렁슬렁 걸어서 돌아 본 곳이 중림동 비탈길이었습니다.
서울에 그런 곳이 있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후 밝은 날에 다시 가 봤었는데 더운 여름날 발을 치고서 다닥다닥 붙은
그 곳에 선풍기가 돌고 냉장고가 크고 아이들이 밝아서
괜히 제가 기분이 좋았었지요.
그 곳을 오늘 다시 기웃거려 봅니다.
이미 이사를 간 사람들의 집앞엔 곱표가 붉게 칠해져있고
남은 사람들은 그 앞에 화분을 가지런히 놓았습니다.
조금이라도 더위를 피하려고 진흙과 볏짚을 섞어서 벽을 발랐습니다.
시골에서 봤던 형태로군요.
훌쩍 높아진 중림동 하늘의 구름이 시원했습니다.
재개발이 잘 되어서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재개발사무실앞을 지나 계속 걸으면 왼쪽으로 살짝 구부러진 내리막길을 택합니다.
바로 약현성당 예식장 안내문이 보였고 그 곳으로 들어가니 주차장이 보이고
곧 이어 성당이 나왔습니다.
최초의 벽돌조 서양식 교회 건축물이로군요.
1892년도에 세운 것입니다. 일백이십다섯살입니다.
많은 이들이 종교적 신념으로 유명을 달리 한 이 곳에
성당을 세웠습니다.
서소문밖 순교지를 기리는 곳이라는군요.
성당정문이 비좁습니다.
성당은 보통 다 넒던데.......
약현성당에서 한국경제신문(은색건물)사이에 바로 중림어시장이 보입니다.
1970년대초 도시미관상 외곽으로 이전하는 과정에서도 끝까지 남은 50여명의
상인들이 아직도 새벽 어시장의 명맥을 이어갑니다.
도심의 명물로 볼 수도 있고 다른 시각이 있을 수도 있고........
다시 약현성당쪽으로 되돌아 가면서 찍은 사진은 시장이 더 커 보이네요.
착시?
염천교를 넘어서 직진을 하면 유명한 수제화 거리가 나타압니다.
서울역으로 통하는 굴다리위 횡단보도를 넘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첨탑이 약현성당이고 흰색과 고동색이 섞인 콘크리트건물이
수제화상점이 즐비한 그 곳입니다.
이어
수제화거리와 피혁상이 여기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남대문에서 서울역을 잇는 차도를 건너서 옛 대우빌딩(서울스퀘어)과 메트로타워 뒤에는
남대문교회가 불쑥 나타납니다.
너무 바짝 붙어서 사진찍기가 쉽잖아 가져온 사진(아래)을 보탭니다.
서울역앞 고가 새단장이 한창입니다.
완성이 되면 다리위에서 보는 전망도 좋을 것이고 공사그림을 보면
서울역 박물관 지붕위로도 걸어 오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도 약현성당과 수제화상점 건물이 가깝네요.
구리개(銅峴, 을지로1가)에서 제중원 부설교회로 1885년에 출발하였습니다.
누리검색을 해보니 남대문교회의 안내판과는 다소 다르게 설명을 해놓았네요.
심지어 백과사전 검색에도 종류별로 교회설립년도에 차이도 있습니다.
"..........초기에는 정식 교회로서의 조직을 갖추지 못했으나 1885년 6월 28일 최초의 공식 주일예배를 가졌으며, 노춘경·서경조·최병오·정공빈이 세례를 받는 등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1904년 제중원이 세브란스 병원으로 바뀌게 되면서 위치가 구리개에서 남대문 밖에 있는 복숭아골로 이전되었고, 교회명칭도 남문밖교회, 남대문밖교회, 남문외교회, 남대문밖 제중원교회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울역 주변의 건물사이에 이런 쉼터가 있을 줄이야.
남대문교회 부지인 것 같은데 수백년된 된 것 같은 은행나무에 느티나무가
훌륭한 그늘을 제공하고 작은 마당엔 운동기구며 채소가 있어서 참 포근한 느낌입니다.
이제 발길은 다시 서울역을 관통하여 서부역으로 나옵니다.
국립극단이 예술적이지요?
미군이 쓰던 자재창고가 아닌가 싶습니다.
담장이 미군부대같았습니다.
국립극단에서 숙명여대쪽으로 난 길 첫번째 골목으로 들어가서
국립극단벽을 따라 걸으면 곧바로 개미슈퍼가 나옵니다.
이 건물이 백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만리재로 올라 시장구경 해볼까요?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성우이용원입니다.
두리번거리다가 성우이용원을 물으니 바로 알려 주시던
아주머니께선 안으로 들어와 보라고 하셨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어린 아이들 머리를 깎을 때 팔걸이에 나무판자를 걸쳐서
키를 돋우던 기억이 납니다.
다음엔 한번 들어가 봐야 하겠습니다.
효창공원을 지나서
원효로 용문시장으로 갔습니다.
시장구경 좀 하고 육회집으로 갔습니다.
뭉태기(육사시미)가 좋은데 육회밖에 없어서 그 것으로 안주삼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늦지 않은 시각에 자리를 파했습니다.
따사로운 햇살과 마음이 따뜻한 걷고님이 함께 한
여름날 한 때를 이렇게 기록하게 된 것이 고마운
오늘도 바람처럼.
첫댓글 설렁설렁님이 뉘신가 했더니
걷고님 다워요~ ㅎㅎ
서울에 산지가 반백년 세월이 지났는데도
전혀 감 안잡히는 곳이 더 많으니~
제 머리가 바빴답니다 ㅎ
곱표?
듣느니 첨인지라 역시 헤매고 ㅎㅎ
늘 흥미 있게 공부 잘하고 있지요
이번 길엔 마음 따뜻한 걷고님이 함께여서 저도 따듯해지네요 ^(^
공표 곱표 할 때 곱표지요.
곱하기 표시의 준말.
요즘에야 오 엑스라고 하는데
원래 공표곱표라고 한 걸 잊어가는 게 안타까워서요.
정말 서울에 볼거리는 끝이 없네요.
사라질 길들을 두고 보게 해줄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래도 부수기 전에 보고 와서 다행입니다.
걸을 수 있는 가을 넘 사랑스럽네요.
또 즐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