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가 200년 정도 먼저 건국되었다는 학설은 특히 북한측에서 강하게 밀고 있지요. 분명 틀린 학설은 아닐 것입니다. 아니 역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오히려 고구려가 200년 앞서 건국되었다는 학설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는 것이 제 진심입니다. 이는 무턱대고 고구려를 좋아라 하여 고구려의 것이면 무엇이든 좋다..는게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여도 한반도 동남방 끝에..그것도 서북방향은 큰 산맥으로, 동남은 바다로 막혀있던 신라가 먼저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그 누구라도 쉽사리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삼국의 건국은 분명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그 기록을 아주 무시할 수만은 없는 일이지요.
물론 역사서라고 모두가 다 양서는 아니며, 그안의 기록도 모두 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양서라 하여도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의 주관이 들어가게 마련이니, 어찌 과장이나, 속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특히 민족사학의 초두 신채호 선생은 삼국사기를 사대주의의 표본인 개악서라 비판하였지요. 하지만 김부식은 당대 최고의 식자였으니, 어찌 개악서라까지 비판할 수 있을까요..
삼국사기의 내용이 대체로 유교적 덕치주의와 군신간의 충과 예절, 유교적 명분과 춘추대의를 필설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김부식의 사대주의적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당시에 유행하였던 문화적, 학문적 흐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춘추가 저술되고는 춘추필법에 의한 역사서술은 이후 동양(특히 대륙과 한반도)에서 기본적인 저술의 흐름이었습니다. 또 충, 효와 예, 덕은 유학의 기본 수양목록이었습니다.
이것 말고도 삼국사기의 변명(?)은 또 있습니다. 그것은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입니다. 김부식이 직접 쓴 이 표는 삼국사기 편찬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사대부가 우리 역사를 잘 알지 못하니 유감이다. 중국 사서는 우리의 사실을 간략히 적었고, 고기(古記)는 내용이 졸렬하므로 왕, 신하, 백성이 잘잘못을 가려 규범을 후세에 남기지 못했다." 이것이 삼국사기 편찬의 목적입니다. 이는 식자층인 사대부조차 아국의 역사를 모른다는 것이며, 대륙의 역사에 의존해봤자 그 내용이 간략하고, 옛기록은 그 문장이나 문체가 확연히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한반도 역사의 독자성과 함께 고려 지식층의 현실을 직시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여기서 나오는 고기는 삼국에서 편찬한 당대의 사서일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1차 사료입니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차 사료입니다. 이유는 바로 당대의 식자층이 남겼다는 것입니다. 특히 역사에 대한 기술은 여느 지식수준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사서에 참여한 인사층은 당대 최고의 식자층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삼국의 역사편찬과 그 참여자는 중고교 국사시간에 배울 것입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현존하는 당대의 기록(1차사료..)이 없다는 것입니다...ㅜㅜ
그런 이유로 2차 사료임에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한국사에서, 특히 고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절대적이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고대로 갈 수록, 그 기록들이 사라져 현재는 전무하다시피 하다는 것입니다. 분명 삼국이나, 남북국시대(발해와 신라의 남북구도)에 분명 사서가 기록되었다는 흔적은 찾을 수 있으나, 현존하는 사서는 전무하기에 그 1차 사료들을 바탕으로 기록한 2차 사료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가치는 1차 사료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고고학적 성과에 의하여 삼국사기(삼국유사는 아직 야사적 성향이 짙습니다.)의 기록들이 대체로 사실적이라고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김부식을 욕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삼국의 건국은 사실 신화(설화)적 측면에서의 기록들이 강합니다. 더욱이 고고학적으로는 정확성을 밝히기가 아직은 무리가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삼국의 건국년대는 아직 그 어느것도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삼국사기는 그 기록의 토대(전거 : 참고문헌)를 밝히고 있습니다(이것은 삼국유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김부식이나 일연이 사서를 간행할 때 과거 삼국에서 편찬되었던 기록들을 토대로 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고기(古記), 구삼국사(舊三國史), 삼한고기(三韓古記) 및 최치원과 김대문 같은 신라 당대의 대학자들의 기록을 인용하였다는 것은, 김부식의 높은 역사의식을 알 수 있고, 또 그가 삼국사기를 간행함에 참고문헌에 대해 확실하게 언급해 줌으로 인해서 우리들에게도 고대에 이미 역사에 대한 인식이 있어 당대의 삶을 기록해 왔다는 것을 확인케 해주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역시도 대륙의 그들(漢族)과 같이 고대로부터 문화민족임을 재증명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1차 사료에 대한 갈증과 고고학적 성과의 미비로 인하여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있는 고대사를 생각할 때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김부식이나 이규보, 그리고 일연 등 고려시대까지만 하여도 있었던 고대의 기록들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미 조선시대 초기에는 없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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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 쓰고 나니 무슨 말인지...ㅎㅎ;;;
전에 어디선가 삼국사기로 인하여 우리의 역사가 훼손이 되었느니, 머 삼국의 건국이 잘못되었느니...그래서 삼국사기는 몹쓸 사서니 하는 글을 본 기억이 문뜩 들어서 써 봤습니다.
국사책 문제는 국사역시 대학시험이라는 하나의 과제에 대해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가령 대학시험에서 "삼국의 건국과 연대가 올바른 것은??"(실제로 이런 엉터리 같은 수준의 문제는 안납니다~^^;;)라고 난다면 답은 무엇일까요...그러니 일괄되게 삼국사기의 기록을 그 기준으로 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사학계에서는 아직 삼국의 건국연대와 그 신화적 기록들을 두고 정설을 세우고 있지 않습니다. 더욱 많은 연구와 고고학적 성과들을 기대하고 있지요. 한가지 아쉬운 것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가 우리들이 맘대로 가서 연구할 수 있는 우리의 땅이 아니기에 그 연구와 발굴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