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2: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 이를 표현하는 헬라어 '헤 아가페 아뉘포크리토스'는 명사 문장으로 동사 '에이미'가 있는 것처럼 번역해야 한다. '사랑'의 헬라어 표현인 '아가페'는 본서를 제외한 바울 서신 전체에서는 주로 신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나타내는데 사용된 반면 본서에서는 주로 신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데 쓰였다.
그러므로 '아가페'는 10절에 나오는 '형제 사랑'을 나타내는 헬라어 '필라델피아'보다 더 넓은 의미의 사랑인 것이 확실하다. '거짓이 없나니'를 표현하는 헬라어 '아뉘포크리토스'는 '위선없이'를 나타내며 '진실한', '성실한'의 뜻을 가졌다(고후 6:6;벧전 1:22). 사랑은 꾸밈 없이 진실해야 함을 나타낸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
'미워하다'의 헬라어 '아포스튀게오'는 '몹시 미워하다', '혐오하다'의 뜻이 있다. '악'은 '나쁜'을 의미하는 헬라어 '카코스'보다 더 강한 의미로 '악한', '사악한'의 뜻이 있다. '속하다'의 헬라어 '콜라오'는 '함께 하다', '연합하다'의 뜻을 가졌다. 종합하여 말하자면 적극적으로 악을 미워하고 선한 것에 연합하라는 가벼운 명령 혹은 권고이다.
이는 결정이 요구되는 삶의 길목길목에서 확실하게 선을 택하는 생활 원리를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에 속하기 위해 악은 그 모양이라도 미워하고 버리는 태도가 필요하다.
[롬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 이를 나타내는 헬라어 '테 필라델피아...필로스토르고이'의 '필-'로 시작되는 두 단어는 가족간의 사랑을 나타낼 때 쓰인다. 즉 '형제를 사랑하여'를 가리키는 '필라델피아'는 형제 자매간의 사랑을 나타내며 '우애하고'를 가리키는 '필로스톨고이'는 혈육간에 주고 받는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필라델피아'라는 단어를 구성하는 '아델포스'는 교회 생활에서 신자들에게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단어이다.
'필로스톨고이'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서만 나오지만 본서가 기록 될 당시의 헬라 문헌에 자주 나오며 특히 가족간의 '지극한 애정'을 나타낼 때 사용됐다. 따라서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들로 이뤄진 가족으로 그 공동체 안에서 가족간에 느끼는 지극한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사랑이 단순한 이념으로 간주되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이제 사랑의 실천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언급한 것이다.
즉, 사랑은 이론으로만 베풀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도는 그 사랑이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성도들간의 관계에서 표현되기를 요구한 것이다.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 이는 상대방을 인정해 주고 높이 평가해 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성도들이 서로 먼저 존경할 수 있는 이유는 상대방의 개인적 인격이나 능력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셔서 그리스도의 크신 구속의 은혜를 입혀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데 있다.
그리하여 함께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아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사는 거룩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인 것을 생각할 때 그 형제의 인간적인 모든 조건을 떠나서 진실하게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우러러 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인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 베풂에 근거를 둔 권면인 것이다.
[롬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부지런하여 - 바울이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특별히 근면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신앙 생활의 나태를 경계하기 위함이다. 보통 성도들은 처음 믿을 때에는 매우 열심이다가도 어느 정도 연륜이 쌓이게 되면 주를 향한 처음 사랑을 잃고 영적인 타성에 빠져 미지근한 신앙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게으르지 말고 - '게으르지'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오크네로이'인데 이는 근심이나 걱정 또는 부끄러움으로 늑장부리는 것을 의미한다(잠 6:6, 9:21:25;마 25:26). 진정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된 삶은 게으르거나 나태할 여유가 없다. 열심을 품고 - 이 구문의 헬라어 표현은 '토프뉴마티 제온테스'이다. 개역 성경에는 '영'(토 프뉴마티)을 해석하지 않았다.
이 말은 '성령'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면 본문의 의미는 '성령과 함께 하는 열심을 품고' 혹은 '열심을 품고 성령으로 인하여'가 될 것이며 '인간의 영'으로 한다면 '열심을 품은 마음으로'가 될 것이다. 여기서는 전자가 더욱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토 프뉴마티'가 '열심을 품고'와 연결되어 있는 바 주를 섬기기 위한 열심은 성령의 감화가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를 섬기라 - 주를 표현하는 헬라어는 '퀴리오'인데 이는 A, B, P46 사본 등을 따른 것이다. 보다 덜 중요한 사본으로 간주되는 D, G 사본 등에는 '시간에'를 나타내는 헬라어 '카이로'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기록 당시의 상황의 급박성을 나타내어서 '시간을 아끼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사본의 우위성과 문맥상, 전자가 많은 지지를 얻는다.
한편 '주를 섬기라'는 헬라어 표현은 '토 퀴리오'로 3격으로 표현되어 '주께' 섬김을 다하라의 의미가 된다. '섬기다'의 헬라어 표현은 '둘류온테스'로 '종노릇하다', '섬기며 충성하다', '종되다'의 뜻을 나타낸다. 신자들은 주인의 종으로서 충성을 다해 주인을 섬겨야 함을 의미한다.
[롬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 '소망'의 헬라어 표현 '엘피스'는 일시적으로 더 좋은 것을 바라는 헬라적인 개념보다는 '확실한 소망'을 나타내는 히브리적 개념이다. 이는 종말론적 의미를 지닌 것이 분명하다. '소망 중에'는 '종말론적 보류'를, '즐거워하며'는 '종말론적 설레임'을 나타낸다. 죄의 형벌 아래에서 인간은 참된 소망도 즐거움도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소망만이 참된 즐거움을 줄 수 있다.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소망의 근거이며 근본이 되시므로 영원한 즐거움을 주시는 자이시다. 환난 중에 - 환난은 모든 인간이 당하지만 특히 신자에게는 복음으로 인한 환난이 있다. 참으며 - 이를 나타내는 헬라어 '휘포메노'는 초기 기독교 문헌에는 '참다', '끝까지 견디다', '굽히지 않다'의 뜻으로 나타난다. 이는 단순한 인내를 의미하기 보다는 소망을 바라보고 참는다는 의미로서 종말에 취할 것에 대한 선취를 근거로 참는 것이다.
이러한 종말에 대한 소망과 그 선취로 인한 확신으로 성도는 끝까지 견디는 힘을 공급받는다. 기도에 항상 힘쓰며 - '항상 힘쓰며'의 헬라어 '프로스카르테룬테스'는 '전심 전력하다', '헌신하다', '견디다'의 뜻이 있다 이 단어는 기도를 언급할 때 주로 쓰인다. 종말이 가까워 올수록 하나님과 기도로 그 긴장을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또한 본 구절에서 현재 분사형을 사용한 것은 기도에 힘쓰는 것이 계속적이고 반복적으로 행해져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롬 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성도들의 쓸 것을 - 성도들은 로마에 있거나 예루살렘에 있거나를 막론하고 곳곳에 흩어져 있는 모든 신자들을 일컫는다. '쓸 것'에 해당되는 헬라어 '크레이아이스'는 알렉산드리아사본, 비잔틴 사본 등을 따른 본문이며 어떤 사본들은 '크레이아이스' 대신 '기억', '기념'의 뜻을 가진 '므네이아이스'로 나오는데, 고대 라틴 사본들이 이를 지지한다. 또한 여러 학자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해 연보한 것을 언급하면서 '므네이아이스'를 지지한다.
그러나 '기억', '기념'이라는 뜻의 '므네이아이스'보다는 '쓸 것'이나 '궁핍'을 뜻하는 '크레이아이스'가 내용에 더 부합하며 알렉산드리아 사본이나 비잔틴 사본은 다른 사본에 비해 오래되고 우수한 사본이다. 즉 사본상의 우위성과 문맥상 전자가 우월하다. 공급하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코이노네오'의 현재 분사형인 '코이노눈테스'이다. '코이노네오'는 물질적이며 재정적인 도움의 의미를 띤 '주다', '
몫을 기부하다', 또는 '참예하다, '함께 하다'의 뜻을 가진다. 성도들에게 서로 어려운 성도의 필요와 궁핍을 도와줄 뿐 아니라, 어려움에 함께 동참하라는 권면이다. 당시의 로마 제국은 식민지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고 토지를 몰수하는 등 많은 재정적인 압박을 가했다. 그래서 일부 귀족층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따라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거기다 성도들은 신앙에 대한 박해도 감수해야 하는
형편이었으므로 성도간의 곤경을 도우며 동참하는 것은 서로에게 용기를 주며 위안과 격려가 되는 것이다. 손 대접하기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필롸세니안'은 '필'과 '크세노스'의 합성어이다. '필'은 '사랑하는', '좋아하는'의 뜻이며 '크세노스'는 '손님', '이방인', '객'을 뜻한다. 따라서 '필롸세니아'는 '손님이나 이방인, 즉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으로 손님을 환대함을 일컫는다.
애굽에서 '객'으로 있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과거 역사를 생각하면서 '손 대접'하기를 강조하곤 했다
또한 초대 교회 당시 성도들에 대한 핍박이 심했으므로 이곳 저곳 나그네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행하는 자들과 핍박으로 도망하는 자들, 돈 때문에 심부름 다니는 자들은 곳곳에서 신자들에게 대접을 잘받았다. 신자들은 한 가족이면서 모두 나그네이므로, 서로를 손님으로 여기고 합심하여 서로를 돌본 것이다.
힘쓰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형은 '디오코'인데 '추구하다', '좋다', '노력하다'를 뜻한다. 여기서는 현재분사형 '디오콘테스'가 사용되어 계속적으로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권면이다. 이는 14절에 나오는 '핍박하는 자'를 나타내는 헬라어 '디오콘타스'와 같은 동사에서 파생한 것으로 바울이 의도적으로 문맥상 상반되는 곳에 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 '힘쓰라'는 의미가 상대적으로 강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