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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로 사는 최상철씨는 평소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두운 방에서 홀로 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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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철(90)씨는 강원도 거진에 사는 납북귀환어부 피해자이다. 그는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살고 있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평소에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홀로 누워있다는 그는, 오랜만에 사람이 집에 찾아왔다며 전깃불을 켰다.
최씨의 고향은 경북 울진군 근남면이다. 근남면에 위치한 노음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경제적 어려움으로 일찍 학교를 그만두고 배를 탔다. 울진에서 배를 타는 것보다는 거진에서 오징어나 명태를 잡는 것이 돈벌이가 더 된다는 말을 듣고 결혼하자마자 강원도 고성의 거진으로 이주했다, 목선을 타고 그물을 이용해 주로 잡어를 잡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엔진이 달린 기계선으로 옮겨 타면서 조금씩 먼 바다로 나가 일을 했다고 한다.
최씨는 흔치 않게 두 번 납북되었다가 귀환한 피해자이다. 1차는 오징어 배였던 창원호였다. 1차 납북되었던 해가 1964~5년경인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최 씨는, 납북되었던 배가 오징어 배였던 것만은 확실하다고 했다.
"오징어 배였는데 몇 년도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요. 북한에 한 3개월 잡혀 있었어요. 선원으로 탔는데 창원호에는 나 같은 선원이 한 10명 이상 타고 있었어요. 전부 다 '거진' 사람들이었는데 선원 중 4~5명은 14~15살 정도 되는 어린아이들이었어요.
그 아이들 5명 정도가 귀환할 때 같이 귀환하지 못하고 북한에 남았어요. 북한 사람들이 엄청 유혹했나 보더라고요. '북한에서는 배불리 먹을 수 있다', '공부도 무료로 시켜준다', '대학까지 보내준다' 이러니까 아이들이 그 말에 속아 넘아가 고향으로 안 내려오겠다고, 북한에 남겠다고 한 거죠.
3개월 억류되어 있다가 어느 날 보내준다고 해서 남한으로 내려오니까 해경이 우리를 데리고 속초항을 거쳐 속초경찰서로 데려가더라고요. 속초경찰서와 유치장에 한 6개월 잡혀있으면서 조사도 받고 재판도 받았던 것같아요. 북한 경비정에 잡혀 북한에 다녀왔다니까 잡혀갔다 온 죄로 '북한 사람들에게 지령받았냐, 간첩했냐' 하면서 그렇게 때리더라고요.
우리 선원들 같은 경우는 여인숙이나 여관 같은데 가둬놓은 것이 아니라 경찰서 안에서 조사하면서 때리더라고요. 경찰서 안에서 조사받은 기간이 6개월가량이었어요. 속초경찰에서 구속당해서 6개월 넘게 있으면서 검찰 조사와 재판을 받았는데, 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풀려나서 집으로 왔어요."
납북 공포보다 더 무서운 것이 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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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선원 생활으로 망가진 최상철씨의 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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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는 그렇게 조사와 재판을 받은 뒤 망가지고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몇 주 가량 집에 머물다 다시 배를 탔다고 한다. 배운 것이라고는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는 것밖에 몰랐다는 최씨는 납북의 공포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가난이었기에 자신만을 바라보며 굶고 있는 가족을 보는 것이 괴로워 결국 다시 바다로 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2차 납북사건을 당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두 번째는 1967년 12월 20일 흥진호라는 배를 타고 작업을 나갔다가 잡혀갔어요. 흥진호는 명태잡이 배였는데 선원으로 승선해 작업하다가 잡혔죠. 명태잡이 배였기 때문에 낮에 작업을 하였는데, 납치되던 그날도 한낮이었어요. 한 12시경이나 되었나, 갑자기 북한 배가 나타나 총을 쏘면서 우리 배를 잡아 채 갔어요.
주변에 명태 잡는 배들이 꽉 차 있었어요. (한국) 해군 배가 멀리 있었는데 북한 배가 여러 척이 넘어와서 우리 선박들을 둘러싸서 몰아가니까 해군 배는 저 멀리서 보고만 있더라고요. 그때 잡힌 배가 대여섯 척 정도였어요. 북한 경비정이 여러 척 내려와서 우리 남한 선박 수십 척을 둘러싸서 총을 쏘면서 북으로 올라가라고 하니 흥진호 같은 배들 여러 척이 무서워서 잡혀 올라간 거죠.
같이 잡혔던 배 이름은 오래 돼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명태 잡으려고 바다에서 남한 배들이 해군 배들 호위 받으면서 작업했으니까 분명히 남쪽 바다였어요. 남쪽 바다였는데 북한 배들이 내려와서 잡아갔어요. 그렇게 북한에 잡혀가서는 평양에 있는 여관에서 3개월 정도 억류되었어요. 거기서 여관에 가둬놓고 밖에도 못 나가게 가둬놓더라고요.
그곳에 있는 동안 버스 타고 견학도 가고 공부도 시키고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평양에 3개월 있다가 어느 날 금강산으로 다시 나와서 납북될 때 탔던 흥진호에 태우더니 남한으로 내려보내더라고요. 67년 12월에 잡혔던 배들이 평양에서 같이 생활했고 모두 같이 남쪽으로 내려왔어요. 68년 3월에 여러 척이 같이 내려왔던 것으로 기억나요."
최씨가 타고 있던 흥진호가 귀환한 것은 1968년 3월 20일이었다. 최씨의 말대로 3개월 동안 억류되었다가 귀환한 것이다. 흥진호 선원들은 거진항에 입항하자마자 가족들과 말 한마디 나눠보지 못한 채 곧바로 버스에 실려 고성경찰서로 실려 갔다. 고성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간 선원들은 그날부터 곧바로 수사실에서 조사받았다고 한다. 그곳에서 한 달 이상 조사를 받은 뒤 4월 초 구속이 되었다고 한다.
고성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뒤 이송된 속초경찰서에서 추가조사를 받으며 심한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한다. 최씨가 구타당한 주요 이유는 '두 번에 걸친 납북이유'였다.
국가가 범죄자로 만들어 한평생 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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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상철씨의 집 앞에 걸려있는 명패. 함께 납북되었던 선원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이제 남은 것은 최씨뿐이라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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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경찰서에도 수사과 사무실에서 많이 맞았어요. 손발로 많이 때렸어요. 두 번 갔다 온 죄로 많이 맞았죠. 형사들이 저한테 일부러 두 번 갔다 온 것 아니냐며 많이 때리더라고요. 정말 억울해서 미치겠더라고요. 우리가 명태 작업할 때는 분명히 남쪽에서 하다가 북한 배가 남한 바다로 내려와 강제로 납치된 것이 분명한데 그렇게 주장해도 안 믿어요.
멀쩡한 대낮에 잡혀갔는데 경찰이나 법원에서는 전혀 안 믿었어요. 그게 제일 억울해요. 결국 속초법원에서 전에도 납북되어 집행유예선고 받았던 것까지 합해서 징역 4년을 선고하더라고요. 재판이 끝나고는 대전교도소로 가서 징역을 꼬박 4년 다 살고 나왔어요."
교도소에서 출소한 뒤에도 최씨는 다시 배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납북 경험 때문에 선원 생활이 두렵지는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최씨는 배운 것이 물고기 잡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선원 생활을 이어 나갔던 그는, 80세가 되던 10년 전까지 배를 타고 선원 생활을 했다고 한다.
"경찰들이 감시를 해서 뭘 할 수가 없었어요. 바닷가로 나와서 그물 작업하면 배를 잘 타나, 별일 없이 잘살고 있나, 항상 둘러보고 다녔어요. 나쁜 짓은 안 하나 감시하는 거죠. 집에 와서 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며 물어보기도 하고, 집 주변을 늘 돌아보고 돌아가요. 그렇게 감시받고 산 게 한 50년 된 것 같아요. 최근까지도 감시를 받았던 것이죠.
내 인생을 경찰이 늘 감시 감독하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가족들도 감시받으며 수십 년을 살았어요. 둘째 아이 같은 경우는 고등학교 졸업해 취직도 못 하고 별 볼 일 없이 힘들게 살고 있어요. 아버지가 국가보안법 전과자, 빨갱이라고 하니까 어릴 때부터 공무원이나 회사 같은데 들어갈 엄두는 아예 못 내더라고요."
그는 북한에 두 번이나 잡혀갔다 와서 정부로부터 처벌받은 것이 가장 억울하다고 했다. 분명 북한에 의해 납치된 것이 분명한데도 국가는 자신을 범죄자로 만들어 한평생 감시한 것이 너무도 억울하다고 했다. 최씨는 기자에게 '지은 죄 없이 전과자, 전과자 가족으로 산 것을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최씨는 귀환한 자신들이 처벌받을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어민,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사람들이 처벌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꼭 납북귀환어부로서의 한을 풀고 생을 마감했으면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