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년 고려사 2. '다원사회' 고려의 특징

[장유]

1부 다원 사회 고려를 만들다 - 정치, 경제, 외교 편

1장 시대 개관과 왕조의 특성

1-2. '다원사회' 고려의 특성

1. 다원주의와 다원사회

고려왕조가 오랫동안 존속한 이유 중 하나는 고려가 '다원사회(多元社會)'의 특징을 지닌 탓이라 할 것입니다. 고려사회는 다양한 질서와 원리의 공존을 인정하는 다원주의에 기초한 사회였습니다. 다양한 개별 실체에 의해 유지되면서도 이들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져 사회의 통합력을 발휘하는 것이 다원사회의 강점입니다. 이와 달리 골품제의 원리로 운영된 통일신라와 성리학의 원리로 유지된 조선은 일원적인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다원사회는 기본적으로 다원성과 통합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고려는 불교, 유교, 도교, 풍수지리, 민간 신앙 등 다양한 사상을 용인하면서, 그것을 팔관회 같은 국가적인 의례로 통합함으로써 다양성이 지닌 개별성과 분산성을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문화 면에서도 내부적으로는 중앙 문화와 지방 문화 등 다양한 문화의 공존을 인정하면서 대외적으로는 고려가 문화의 중심지임을 자부하고 주변의 이민족을 야만시하는 문화적 자존의식을 강조했습니다.

불교, 유교 등 다양한 사상이 충돌 없이 공존한 것은 통합성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장경은 목판 인쇄술과 종이 제작 기술, 불교에 관한 높은 학문적 이해, 몽골 침입에 대한 저항 고취 등 기술과 문명, 사상과 인문이 융합되어 창조된, 통합성의 산물입니다. 팔관회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상과 문화를 왕조 질서 속에 포섭해 통합하기 위한 국가적 행사였습니다. 본관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왕조 건국에 협력한 지방세력에게 성씨를 주고 근거지를 본관으로 삼게 해 그들의 권위와 자율성을 인정하는 한편, 그들에게 주민의 교화, 조세와 역역(力役) 수취의 의무를 부과했습니다.

2. 다원사회의 형성배경

통일신라는 진골귀족이 변함없이 지배하였고, 왕조가 바뀐 조선은 기존 지배층 안에서 권력이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이동한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에 반해 고려왕조는 진골 중심의 골품체제, 왕경민(王京民)과 지방민 간 차별적인 지방제도와 신분제도를 해체하고 성립되었습니다. 그 주역은 '촌주', '성주', '장군'으로 불리는 지방의 호족세력으로서, 중앙의 진골귀족과는 그 성격이 크게 다른 집단이었지요. 당시 호족세력의 등장은 혁명적 변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상면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습니다. 먼저 경주 중심의 귀족 불교가 해체되고 지방에서 선종 교단이 대두했습니다. 또 진골귀족부터 지방의 민에 이르기까지 불교 신앙의 주체가 다원화되었습니다. 지방 호족세력의 참여와 협조로 건국된 고려왕조는 풍수지리, 도참사상 등 지방 하층민의 토속 신앙도 공인했습니다. 당나라에서 유학한 후 돌아와 골품제의 한계와 모순을 절감한 6두품 세력은 유교 정치이념을 치국의 이념으로 제공했습니다.

다음은 외적인 배경입니다. 10세기와 11세기 초에는 동아시아 세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나라와 종족 간에 치열한 영토 분쟁이 잇달았습니다. 이로 인해 한족(漢族), 거란, 발해, 여진 등 다양한 국가의 주민과 종족이 고려왕조에 유입되기 시작합니다.

3. '삼한 일통'과 '대일통' 의식

고려의 다원사회를 유지한 이념적 기반 중 하나는 '일통의식(一統意識)'입니다. 이 일통의식에는 두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삼국이 하나로 통합되어 그 주민도 하나가 되었다는 뜻의 '삼한(三韓) 일통의식'을 말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삼한 일통의식은 신라의 삼국 통일에서 기원한다고 합니다. 태조 왕건은 신라가 황룡사 9층탑을 세워 삼국을 통일한 일을 '일통지업(一統之業)이라 표현했는데, 여기서 '일통'은 삼국을 통합했다는 뜻이지요.

둘째는 새로운 천자국의 탄생 혹은 천하의 통일이라는 뜻의 '대일통(大一統)'입니다. 옛 삼국의 다양한 인적, 문화적 자원을 흡수하고  통합해 천하를 통일함으로써 다원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새 문화를 창조했다는 고려인들의 자부심 속에는 반세기에 걸친 후삼국 통합전쟁에서 승리하고 고려 스스로 천자국 체제를 건설했다는 '대일통' 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4. 고려 왕조의 개방성

고려 사회는 우리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하층민의 운동과 정치적 진출이 활발했고, 그에 따라 신분 이동 또한 매우 활발했던, 역동성을 지닌 사회였습니다. 한편 수도 개경 인근의 벽란도를 비롯한 서해안 일대는 당시 송, 거란, 여진뿐 아니라 멀리 아라비아의 상인들까지 드나드는 동아시아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는 고려왕조가 대외무역을 용인하고 나아가 장려하는 개방적인 자세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개방성은 고려의 국력을 융성하게 했을 뿐 아니라, 문화의 번성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바다 상인이 세운 나라:

고려왕조는 농업국가인 동시에 해양국가였습니다. 바다를 국가 운영의 한 수단으로 삼는, 즉 대외무역이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이를 위해 대외적으로 개방적인 정책을 추구하는 국가를 해양국가라고 하지요. 해양국가는 언제나 외부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개방적인 자세를 유지합니다. 고려왕조가 역대 어느 왕조보다 적극적인 개방정책 을 펴게 된 이유도 이런 해양국가로서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농업국가에서는 인간의 모든 삶이 토지에 묶여 있어 정착 생활이 주를 이룹니다. 그에 따라 토지 소유에 기초한 폐쇄적인 자연 공간, 자급자족의 생산 단위, 지리적으로 가까운 공동체와의 연대를 통한 인적 물적 네트워크가 형성됩니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개별 공동체의 유지에 더욱 큰 목적을 둔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을 띠게 됩니다. 따라서 농업국가에 대외적으로 개방적인 성격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요.

당나라를 이은 송나라 역시 대외무역을 장려하여 이를 통해 재정 수입을 확대하는 정책을 취합니다. 송나라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고려도 그 영향을 받아 통일신라기 해상 활동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고려 왕실에서 찾을 수 있지요.

고려왕조를 세운 태조 왕건과 그 조상들은 원래 개경을 근거지로 활동한 해상세력입니다. 개경의 길목인 예성강은 '돈으로 덮인 포구'라는 뜻의 '전포(錢浦)'라 불렸다고 합니다. 이 지명은 예성강을 중심으로 수많은 재화가 오간 당시의 정황을 드러내는 적절한 이름이라 여겨집니다. 이렇게 예성강 포구의 중심에 '돈 냄새' 물씬 풍기는 바다 상인 출신인 왕건의 조상이자 고려왕실의 조상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태조 왕건이 태봉국 황제 궁예의 결정적인 신임을 받게 된 것도 해군대장군이 되어 후백제 견훤의 근거지인 지금의 나주 지역을 점령했을 때입니다. 또한 태조 왕건의 29명의 후비(后妃) 가운데 서열이 가장 높은 제1비 신혜왕후 유씨와 제2비 장화왕후 오씨는 모두 서남해 해상세력의 딸입니다. 왕건이 개성 지방의 성주에서 결국 고려왕조를 세우기까지 조상 때부터 해상 활동으로 축적한 자기 집안의 자본과 서해 해상세력과의 네트워크가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활발한 대외 교류:

당시 고려와 송, 거란, 여진, 일본 뿐 아니라 아라비아 상인까지 드나들며 활발한 문물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1220년 벽란도의 모습을 묘사한 이규보(1168~1241)의 시에도 잘 나타납니다(*한문으로 된 글의 번역본).

"조수가 밀려왔다 다시 밀려가고, 오가는 뱃머리 서로 잇대었네

아침에 배가 이 누 밑을 떠나면, 한 낮이 못 되어 남만에 이른다네

사람들은 배를 물위의 역마라고 말하는데, 바람처럼 달리는 준마도 이만 못하네

만약 돛단배 바람 속에 달리듯 한다면, 순식간에 봉래 선경에 이러나니

어찌 달팽이 뿔 위에서 아옹다옹 다투리오, 배타면 어딘들 가지 못하랴"

고려의 개방성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예는 팔관회입니다. 불교 행사인 연등회와 함께 팔관회는 고려의 가장 큰 축제였습니다. 양대 도시인 서경과 개경에서 각각 음력 10월과 11월에 열렸는데 국토를 수호하고 여러 산천의 신과 하늘과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노래와 춤을 비롯한 각종 형식의 오락을 통해 나라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했습니다. 국왕과 중앙 관료는 물론 지방 수령들도 참석하는 국가적 행사로 일종의 추수 감사제라고도 할 수 있지요.

이 행사에는 특히 탐라를 비롯해 여진, 거란, 송, 일본의 상인들도 참석하여 국왕의 장수를 빌며 의례의 형식으로 국왕에게 특산물을 바쳤습니다. 이들은 행사 기간 중 자신들이 가져온 물건을 판매하거나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는 등 상행위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다음은 수도 개경에 많은 외국인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좋은 예입니다.

"쌍화점(雙花店, 만두파는 가게)에 쌍화 사러 갔는데

회회(回回, 이슬람계 서역인) 아비가 내 손목을 잡네

이 말이 이 가게 밖에 나가 들면

다로라거디러, 조그만 새끼 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그 간 데같이 지저분한 곳이 없네"

이슬람계 상인들이 만두 장사를 하면서 고려 여인과 정을 통하는 내용의 고려가요로, 활발하면서도 자유로운 개경 저잣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외국 상인들이 자유롭게 상행위를 할 정도로 개방적인 고려의 모습이 드러나지요.

개방정책과 외국인 등용:

고려는 대외무역을 장려하는 동시에 외국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수용하여 왕조의 면모를 일신하고자 했는데, 정부의 인사에도 이런 노력이 반영되었습니다. 바로 실력과 능력 있는 외국인을 관료로 채용한 일입니다. 조선왕조 때는 찾아볼 수 없는 고려왕조만의 특성이지요. 광종 때의 과거제 도입이 이런 식의 인사를 촉진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잘 알다시피 광종 때 과거제 시행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은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한 중국 5대 마지막 왕조 후주(後周)의 관리 출신 쌍기(雙冀)이지요. 광종의 신임을 받은 쌍기는 고려에 귀화해서 고위직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많은 중국인이 고려로 귀화해서 관리가 됩니다. "고려사"에 등장하는 숫자만 해도 30여 명을 헤아립니다.

고려 전기 중국에서 고려로 귀화한 인물 약 40명 가운데 반 이상이 학자나 문인인데 이들은 대부분 고려의 관리가 됩니다.  나머지는 상인, 음악가, 승려, 역관이거나 의술 또는 무예, 점성술에 능한 사람들입니다. 고려 정부는 이들에게도 능력에 따라 관직을 주는 등의 대우를 했습니다. "고려사"에 의하면 문종 6년(1052)에는 문종이 송나라 진사 출신 귀화인 장정에게 벼슬을 내리면서 "타산(他山)의 돌이라도 나에게는 쓸모가 있다"라며 훌륭한 선비를 얻었다고 기뻐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고려 후기에도 계속됩니다. 특히 세계제국 몽골과의 강화(1259) 이후 고려는 원나라(1271~1368)와 활발히 고려합니다. 해풍 장씨(덕수 장씨), 연안 인씨, 경주 설씨, 원주 변씨 등은 모두 이들의 후손인 것입니다.

주:

이 글은 "오백년 고려사"(박종기,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2020)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 요약자가 곁들인 글

[정세주]

학창시절의 역사시간보다
재미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장유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