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강 기자의 흰 고무신 / 김형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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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 마 전 황해도 신천에 있는 전쟁박물관을 둘러보다 중간에 그만두었다. 6·25 때 신천군민 수만명이 학살당한 흔적 앞에서 계속 구역질이 났다. 황석영의 소설 〈손님〉에서는 개신교인들이 당시 학살의 주역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북쪽 당국은 미군들이 저지른 짓이라고 주장한다.
남쪽에도 그 비슷한 곳이 있다. 1968년 12월 북쪽 군인들이 내려와 아무런 죄도 없는 일곱살짜리 승복이와 어머니, 형제들을 무참히 죽였다. 남쪽 당국은 이승복기념관을 만들어 입이 찢어져 죽은 승복이 사진을 전시해 두었다. 구토 없이 그 사진들을 보기 어렵다. 남북 서로 누구를 탓하랴.
북쪽은 학살자가 미군이 아니라 개신교인들이라고 한 황석영에 대해 불편해한다. 남쪽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60, 70년대 반공이데올로기 강화라는 집권자의 의도에 손상을 주는 진실에 대해서는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불편해한다. 한 달을 굶어가며 산속을 도망 다닌 총을 든 무서운 아저씨들 앞에서 일곱살 아이의 입이 감히 떨어졌을까?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만일 승복이가 정말 그랬다면 어른들이 원망스럽다. 그 어린아이가 무얼 안다고 그렇게 끔찍하게 죽였으며, 그 아이가 무얼 안다고 죽임을 당하더라도 공산당은 싫다고 말하라고 가르친 것일까.
엊그제 대법원은 이 사건 보도를 한 〈조선일보〉 강아무개 기자가 사건 다음날 현장에 갔던 것은 진실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강 기자가 현장에 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여러 정황들이 법원에 제시되었다.
첫째, 조선일보 사진기자가 찍었다는 사진들 속에는 〈경향신문〉 기자만 계속 찍혀 있을 뿐 조선일보 강 기자는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또 경향 기자가 들어있는 사진을 조선 기자가 찍었다면 두 신문 기자들은 서로 현장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증언해야 할텐데 조선의 강 기자도, 경향의 기자들도 서로를 본 적이 없다고 몇 번씩 증언했다.
둘째, 강 기자는 사진 속 한 인물에 대해 “이게 바로 나요”라며 30년 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파안대소’했다. 그러면서 기자인 자신이 군·경으로부터 거꾸로 취재를 당해 매우 불쾌했다고 당시를 상세하게 증언했다. 그런데 사진 속의 인물을 확대해 보니 흰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그리고 강 기자 앞에 있는 군·경(?)도 사실은 경향 기자였으며, 흰 고무신을 신은 사람은 마을 주민이었음이 경향 기자의 증언과 사진 감정으로 밝혀졌다. 무슨 이유로 조선일보 강 기자는 흰 고무신을 신고 그 험한 산골을 한 달 동안 공비소탕 취재를 하러 다녔다는 걸까. 그리고 무슨 일로 경향 기자에게 취재를 당한 것일까. 그 둘은 왜 현장에서 서로 본 일이 없다고 증언하고 있을까.
셋째, 사건 직후 이웃 주민이 퇴비더미 부근에 있던 주검들을 마당 가운데 돗자리를 깔고 수습했다. 이승복기념관에 걸린 주검 사진은 이때 찍은 것이다. 그런데 그 뒤에 왔다는 강 기자는 난데없이 주검들이 퇴비더미 속에 있었다며 퇴비더미를 찍은 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그 밖에 몇 가지 정황이 더 있으나 지면상 줄인다. ‘흰 고무신 신은 강 기자’, ‘돗자리 위에 수습되었던 주검들이 다시 퇴비더미 속으로 들어간 사연’. 대법원은 이에 대해 어떤 해명도 없이 딱 한 구절, 원심조치는 “수긍이 가고”로 끝냈다. 북의 신천 박물관과 남의 이승복기념관이 진실에 기초하고, 나아가 남북 모두 자신들이 저지른 일의 의미를 깨닫고 내탓이오 가슴치고 서로 부둥켜안을 날은 그 언제일까. |
기사등록 : 2006-11-29 오후 06:36:18
기사수정 : 2006-11-29 오후 06:53: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