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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6월18일(일)맑음
아주 더운 날씨. 목욕하고 양주 회암사를 들러다. 지공, 나옹, 무학 3대 증명법사가 주석하였던 고려불교의 중심이었던 절이다. 인도에서 온 指空지공대사는 Dhyanabhadra 드흐야나바드라(智賢으로 한역할 수 있다)로 인도 Maghada마가다국의 왕자로 태어나 출가하여 Nalanda날란다 대학에서 수습을 마치고 동방포교의 길에 올라 티베트, 중국, 한국까지 오셨던 고승이시다. 三山兩水之間삼산양수지간(세 개의 산과 두 갈래의 물이 만나는 곳)에 절을 지어 불교입국을 예견하며 대작불사를 한 곳이 여기 檜巖寺회암사이다. 인도에 있었던 날란다 대학을 고려 땅에 재현하고 했던 스님의 원력 덕분에 불교가 꽃피었다가 임진왜란 때 灰塵회진되었다. 최근에 절터가 발굴된 것을 조망해보니 그 규모의 광대함에 눈을 크게 떠서 둘러봐야 한다. 절터 위에 3대화상의 부도탑이 좌정해 계시고 그 아래 절이 들어서 있다. 현재 주지소임을 보고 있는 스님은 예전에 송광사에서 하안거 동안 같이 수행했던 분으로 명고스님과는 절집의 촌수로 사촌간이다. 귀한 차를 내어 주어 갈증을 달래고 환담을 나누다 재회를 기대하면서 절을 나서다. 인도에서 온 지공대사가 이 땅에 전래해온 불교는 중국선종이었던가, 날란다 전통의 유식과 중관이 통합된 불교였던가? 아니면 티베트 자립논증파의 불교였던가? 의문에 대한 실마리가 풀리지 않은 채 여름 풍경 속을 미끄러지듯 달려서 돌아오다. 올더러 최고로 더운 날씨 같다.
저녁 예불 마치고 너무 더우므로 자유정진하기로 했다. 네 분 스님과 함께 명안보살이 어제 잃어버린 스마트폰을 찾으러 길 옆 풀덤불을 헤치다. 산딸기가 열린 덤불근처를 지팡이로 들쳐보거나 더듬어 보아도 종적을 알 수 없다. 풀잎 하나하나를 샅샅이 들쳐보아야 하는데 풀잎의 수는 무한이다. 덤불 아래에 펼쳐진 풀 속의 영역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넓고도 깊다. 그렇게 으슥한 곳에서 잃어버린 걸 찾는다는 건 바다에 떨어진 좁쌀을 줍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어두워지자 찾기를 포기하고 나뭇짐을 진 樵童초동이 해거름에 뒤뚱뒤뚱 산에서 내려오듯 걸어서 돌아오다.
2017년6월19일(월)맑음
일교차가 심한 날씨. 새벽에 10도, 해 뜰 무렵 20도, 점심 때 30도, 정오 지나면 32도. 수분이 말라버린 길에 발자국이 찍히면 먼저가 풀석 일어난다. 붉은 먼지 紅塵홍진이다. 홍진은 속세를 은유한 말이다. 홍진을 씻으려던 고인들의 시를 찾아본다.
백낙천(白樂天,772~846 中唐)의 시;
莫入紅塵去, 막입홍진거 먼지 자욱한 속세에 들어가
令人心力勞; 영인심력로 힘들여 마음 쓸 일 뭐 있으랴
相爭兩蝸角, 상쟁양와각 달팽이 뿔 위에서 서로 싸운들
所得一牛毛. 소득일우모 소득이라고는 한 가닥 소털뿐인 걸
이원휴(李元休,1696~1724 영,정조)의 세족시(洗足詩)
汲取門前井水寒, 급취문전정수한 문 앞 우물에서 시원한 물 길어서
捧來廚下小龍盤; 봉래주하소룡반 부엌아래에 둔 작은 대야에 받쳐왔네
臨軒快滌紅塵跡, 임헌쾌척홍진적 마루에 앉아 세상에서 묻힌 먼지 말끔히 씻었으니
始得山林一枕安. 시득산림일침안 비로소 숲에서 베개 베고 편히 자겠네.
오후 내내 한 가닥 슬픔이 가슴에 엉겨있음을 느끼다. 여기에 고통이 있다. 살아있음이 아픔이요, 아픔이 ‘있음’이다. 무엇이 존재하는가? 고통의 덩어리가 여기에 있다. 苦聖諦고성제가 여기에 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고통이요, 슬픔이며, 미안함이다. 뭇 생명의 어울림 가운데 한 점에 불과한 내 존재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밀쳐냈을 것이다. 그에게 미안하다. 내 존재가 살기 위해 다른 생명에게 해를 끼쳤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미안하다.
내 존재가 살기위해 다른 생명이 살 기회를 빼앗을 수도 있다. 그것이 미안하다.
내 존재가 유지존속하기 위해 다른 존재를 이용하고 괴롭혔을 수도 있다. 그것이 미안하다. 내 존재가 즐거움을 추구하려고 다른 존재를 이용하고 불편하게 했을 수도 있다. 그것이 미안하다. 모든 존재가 서로 어울리며 함께 존재하고 있는데 나만이 즐거울 수 있을까, 나만이 편안할 수 있을까, 나만이 고통 없이 유유자적할 수 있는가? 그것은 대 생명가족에게 죄송한 일이다. 아니 그것은 후안무치를 넘어 배은망덕한 일이다. 차라리 내 가슴이 아픈 게 다행이다. 소심하고 아픈 가슴으론 최소한 배은망덕한 짓을 하려고 설치진 못할 것이기 때문에. 숨 쉬고 밥 얻어먹고 물마시고 걸어 다니고 움직일 수 있는 것만 해도 얼마나 복된 일인가? 그밖에 무얼 더 바라는 것은 덤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훔친 것이다. 덤으로 받은 것은 그나마 죄가 되지 않겠지만 훔치는 일은 죄가 된다. 죄를 멀리하고 선을 닦으러 산으로 들어와 山僧산승이 되어놓고는 염라사자에게 그림자를 밟혀서야 되겠는가? 검은 업인지 하얀 업인지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염라사자에게 꼬리를 잡혀서야 되겠는가? 이 사실을 몸으로 느낀다면 무서워 벌벌 떨어야한다. 그런데 모두 쇠로된 심장과 돌로 된 마음을 지녔는지 천방지축 사지를 흔들고 돌아다니면서 재미를 보려고 재미삼아 죄를 짓는다. 무서운 일이다. 그리고 슬픈 일이다.
2017년6월20일(화)맑음
봉선사 능엄학림 학장이신 정원스님이 월운 조실스님을 시봉하면서 일어났던 에피소드를 모아 책으로 낸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라는 수필을 읽었다. 조실스님은 재치가 있고 유머 감각이 뛰어나 주변사람들을 촌철살인 하듯 찌르면서 웃겨준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옮겨본다.
스승 노릇하려는 자를 경책하며: ‘內虛者, 好爲人師. 내허자 호위인사’-속이 허한 사람이 남의 스승 되기를 좋아한다.
보고 싶다는 말을 이처럼 맛갈나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얼굴 보고 싶으니 얼굴 가지고 와봐.
누가 안부를 물으니: 어제보다는 늙었고 내일 보다는 젊습니다.
일을 하되 철두철미하게 하라는 뜻으로: 殺人須見血, 爲人須己徹. 살인을 하려면 반드시 피를 봐야하고, 남을 위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히 바쳐야한다.
벼슬하기 좋아하는 스님에게: 長장 자를 좋아하지 말게나. 학장, 원장, 총장, 소장, 중장, 대장...長의 종말은 송장이니까.
오늘은 더웠다. 진주에는 비가 온다고 하던데 여기는 비올 조짐이 전혀 없다.
2017년6월21일(수)맑음
한낮 작열하는 햇볕아래 만상은 고요히 숨을 죽인 채 납작 엎드려 꼼작하지 않으려한다. 담장 밖 풀밭에는 망초 꽃이 소금을 뿌려놓은 듯 하얗게 피어있다. 가끔 바람이 불어와 밤꽃이 흐드러지게 핀 나뭇가지를 흔들고는 단풍나무와 가문비나무 사이로 빠져나간다. 벽에 걸린 온도계를 보니 35도. 꽤 더운 날씨다. 숲속이 이정도이니 바깥세상은 얼마나 더울까? 날씨도 더운데 마음을 뜨겁게 만드는 일에 빠지면 그야말로 화탕지옥일 게다. 고래로 중국에서 불을 다루는 신으로 炎帝염제을 받들었는데 그 이름을 神農신농이라하며 성씨는 姜강이다. 강태공과 진주 강씨도 염제의 후손이라 하니 그 연원이 자못 깊다. 인도에서는 불의 신으로 아그니Agni를 받든다. 아그니는 신들의 입이면서, 인간과 천신의 중개역할을 맡아 하늘에 제물을 전달한다. 그래서 아그니는 3개 또는 7개의 혀를 가지고 있으며, 머리카락은 불꽃처럼 위로 곤두서 치솟아있다. 나는 나무들이 녹색의 아그니Green Agni로 느껴진다. 나무들은 두 팔을 들고 하늘을 향해 춤추며 뛰어오른다. 나무의 몸은 푸른 불꽃 형태를 띤다. 큰 나무를 멀리서 내려다본다면 푸르게 타오르는 불꽃같이 보이기도 할 것이다. 녹색의 아그니는 대지가 바치는 공물을 연기도 없이 태워서 하늘에게 바친다. 그것은 산소와 피톤치드, 음이온 등등 유익한 물질이다. 나무는 소리 없이 착한 일을 하는 친구다. 언제나 남을 이익 되게 하는 나무에게 배운다. 미국 서부를 횡단할 때 가봤던 샌프란시스코 북쪽일대의 레드우드Redwood 숲이 생각난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성지로 여겼던 신성한 영역이었다. 유럽에서 몰려온 침략자들이 이곳을 무참하게 벌목하자 자연산림을 보존해야한다는 운동이 일어나 레드우드국립공원으로 지정받았다. 그 안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나무 세 그루가 있다. 1위는 하이페리언(115.61m), 2위는 헬리오스(114.58m), 3위는 이카루스(113.15m). 아주 먼 옛날에는 이런 숲들이 전 세계에 펼쳐져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인간들이 지혜가 없어 이런 숲들을 훼손하고 있으니 지구의 앞날이 어둡다.
2017년6월22일(목)맑음
일주일째 폭염 기승, 연일 불볕더위, 계속되는 가뭄. 이런 타이틀이 실시간 검색 1위를 달린다.
모든 만남은 언제든 깨어질 수 있으며, 이별이 예상되는 불안을 항상 안고 있다. 아무리 견고해 보이는 관계라도 언제든 변질될 수 있다. 정들었던 것과 미리 정을 떼는 연습을 하라. 자신에 맺고 있는 모든 인간관계에 대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듯 얼버무리거나 건성으로 지나치지 말라. 어느 땐가 헤어질 날은 반드시 오고야만다. 그것이 필연적이든 우연이든,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오랫동안 이어지든 관계라도 한 순간에 깨어질 수 있음을 받아들여라.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이 다음 순간에도 계속 유효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지금 내가 누리는 것이 다음 날도 똑 같이 주어질 거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지금 쉬는 숨이 다음 순간에 멈출 수 있다는 걸 아는가? 지금 눈앞에 있는 것들이 연기처럼 사라질 수도 있음을 받아드리는가? 현재 내 삶을 지탱하는 모든 것들이 샅샅이 흩어져 근저부터 허물어지고 있음을 아는가? 당신이 이 사실을 알든 모르든, 받아드리든 받아드리지 않든 당신이 밟고 있는 다리는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다. 우리는 가라앉는 다리를 밟고 서있다. 나는 언제 어디에서 어떤 이유로도 죽을 수 있음을 받아드린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이 세상이 지금 바로 끝날 수도 있다. 세상이 끝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끝나면 끝나는 것이지. 세상과 타협하지 말라. 세상과 잠시 어울려 살아주는 것이다. 세상은 이내 떠날 곳이지 죽치고 머물 곳이 아니다. 세상은 다리라, 건너가야지, 다리위에다 집을 짓지 말라. 죽는데 무슨 이유가 있으리오? 죽게 되면 죽는 것이다. 죽음 앞에 약해지거나 비굴해지지 말라. 죽음을 친구삼아 같이 가라. 구차하게 살기 보다는 떳떳한 죽음을 택하라. 비루한 생존보다는 깨끗한 퇴진과 청정한 멸진을 택하리라.
2017년6월23일(금)맑음
살아서 죽는 사람은 없다. 죽고 나서야 죽음이다. 산 사람은 죽은 게 아니므로 죽음을 모르고, 죽은 사람은 죽어버렸으니 죽음을 알 수 없다. 그러면 누가 죽음을 아는가? 죽음이 코앞에 닥칠 때까지도 죽음을 모른다. 죽음은 산 자의 망상이다. 그것이 피해망상이든, 학습된 망상이든, 생태계의 단백질순환의 결과이든 간에. 죽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살아간다. 죽음을 예비하며 살아간다. 완전한 끝맺음을 위해 산다. 그러면 언제 어디에서나 그곳이 바로 죽을 곳이다. 거기에서 시작되고 거기에서 끝난다. 다시 어디로 가야할 곳도 없고 다음으로 미룰 일도 없다. 거기서 그렇게 끝나지 않으면 죽음은 ‘다음’으로 미루어진다. ‘다음’이 있다는 것은 덤으로 ‘다음’을 얻는 것이 된다. ‘다음’은 항상 덤으로 주어졌다는 걸 의미한다. ‘다음에 다른 곳’에서 끝난다고 하면 그때까지는 덤에서 덤으로 이어지는 행운을 누리는 것이다. 죽음은 지금에서 다음으로 유예된다. 삶은 죽음이 집행유예된 것이다. 남쪽으로 열린 창에 아침 햇살이 가득하다. 죽음은 삶을 감싸는 여백이 되고, 삶은 죽음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린다. 오늘은 어제와 전혀 다르게 그린다. 매일 새로운 그림이다. 밤마다 죽고 아침마다 다시 태어난다. 하루살이 같은 삶으로 충분하다.
오늘로 결제한지 반이 지났다. 반 결제 날이라 해서 대중이 유행을 간다. 절 옆에 있는 광릉수목원을 구경하러 갔다 오다.
2017년6월24일(토)흐림
구름 긴 하늘이 차분한 아침. 해가 나기 전 시원해진 틈을 타 도량에 풀 뽑는 울력을 하다. 종일 흐리다. 비가 올 듯 말 듯 하다가 송알송알 방울비가 뿌리다가 이내 그치다. 비가 오기 싫은 기색이다. 오기 싫은 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저리도 많은데 자연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 도덕경에 天地不仁천지불인이라 했다. 천지는 만물을 운행함에 있어 억지로 인심을 쓰지 아니하고 자연의 질서에 맡길 뿐이라고. 그래도 자연의 질서를 조작해서라도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 결국 求不得苦구부득고를 경험하고 말지만. 원하는 것을 늘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원하는 대로 되는 것 되는 것도 아니다. 무릇 구함이 있으면 괴롬이 따른다. 욕구불만은 현대인의 기본적인 심리상태이다.
오후에 휴휴암을 방문하여 인봉스님과 덕원스님의 안부를 묻다. 덕원스님은 인봉스님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휴휴암에 기거한 지 두해가 되었다고 하니 다행한 일이다. 암주스님이 끊임없이 차를 내어놓으며 환담을 이어간다. 때를 알아서 돌아오니 광릉 숲은 비안개 끼어 옹울하다. 더위가 식혀진 하루였다.
2017년6월25일(일)차츰 흐려져 가끔 소나기
잔뜩 흐려졌다가 비가 한차례 뿌리다가 다시 그치다. 하늘에서 겨우 한 바가지 물만 뿌리고 비를 내려줬다는 생색을 낸다. 그래도 나무들은 더 푸르고 숲에 생기가 난다. 멀리 죽엽산에서 구름이 일어나자 앞산 일자봉에서도 안개가 피어난다. 밤 정진하는 사이 소나기가 한 차례 쏟아져 시원스런 풍광을 만든다. 처마 끝에 매달린 낙숫물이 은방울 수렴을 드리운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선방을 울린다. 이내 비는 그치고 스님들은 放禪방선한다.
2017년6월26일(월)비온 후 흐림
아침 찻잔을 드니 비가 내린다. 숲은 비안개에 싸여 깊은 숨을 내쉬고 대지는 길게 엎드려 세상을 받든다. 사랑이 물이 되어 낮은 곳으로 흘러가 그 다정함과 온유함으로 만물을 살린다. 건조한 지혜는 습기를 머금은 자비에 촉촉이 적셔져야한다.
오전 정진 마치고 나니 구름 걷히고 살짝 해가 나다. 오후에 풀 뽑기 울력하다. 저녁하늘에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인다. 비가 한차례 쏟아지려나 했는데 다시 맑아졌다. 마른장마인가?
이상호(1954~ , 경북 상주 출신)의 시집 <마른장마>가운데에서
길
오늘 나에게 쏟아지는 별빛은 오늘의 것이 아니라
수백 광년을 달려온 머언 옛날의 별빛인 것처럼
오늘의 내 마음은 오늘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수백 년 전부터 조금씩 형성된 먼 옛날의 화석
나는 이제 나를 아껴 써야 한다
나를 공손하게 아껴 써야 한다고 생각하자
나는 내가 너무 무거워
나는 내가 너무 무섭다
무서운 밤길을 혼자 걸어가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니 더 무섭다
오늘의 저 별빛이 수백 광년을 달려온
먼 옛날의 별빛이라는 무서운 사실처럼
오늘의 나는 어제의 너이고
내일의 너는 오늘의 나이다
모든 길들이 끈끈하게 이어져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것처럼
이상호 시인의 시는 가던 발길 멈추고 왜, 어디로, 어떻게 가고 있는가, 꼭 그 길로 가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거냐고 묻는다. 독자로 하여금 사유를 하게 만든다. 사유하게 만드는 게 시의 역할이다.
첫댓글 죽을걸 태어나고, 헤어질걸 만나니 사람이 어리석어서인지 자연의 섭리가 잔인해서인지 혼돈의 머리를 안고 선원가서 공부해야겠습니다.
초전법륜과 무아상경 을 들으며 평정을 찾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