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전설을 찾아서/靑石 전성훈
2023 계묘년 마지막 인문학 기행은 경기도 여주(驪州) 일원이다. 여주를 생각하면, 세종대왕 영릉과 신륵사가 떠오른다. 40년 가까이 오래전에 여주 신륵사를 갔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다른 고장을 가면서 여주를 지나치기는 했어도 볼일을 보거나 찾아간 기억이 없다. 제법 쌀쌀한 날씨를 느끼며 여주에 도착하여 첫 번째 방문한 곳은 고달사지(高達寺址)이다. 고달사는 764년에 창건(신라 경덕왕 23년)되었으나 누가 창건했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고달사의 명칭과 관련하여 슬픈 전설이 전해온다. 고달이라는 석공은 딸과 아내가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절을 짓는 데에 혼을 바쳤는데, 절을 다 이루고 나서는 가족의 불행을 알게 되어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도를 얻어 큰스님이 되니, 고달사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고달사지에는 국보인 고달사지 승탑(僧塔), 보물인 고달사지 석조대좌(石造臺座) 및 원종대사탑(元宗大師塔)이 남아 있다. 영겁의 세월 동안 여주의 역사와 문화를 품 안에 끼고 흐르는 여강(驪江, 이 지역에서 부르는 남한강의 별칭)의 기운을 더는 받지 못한 채, 어느 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사찰, 폐사지(廢寺址) 고달사터에 서니 허전하다. 폐사지의 느낌은 어디서나 안쓰럽고 마음이 쓰라리다. 한 시절 찬란했던 영화는 어디로 가고 북적이던 스님들의 낭랑한 독경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침 햇살 속에 빛나는 검은 주춧돌의 윤기가 그 옛날의 영광을 말해주는 듯하다. 그다지 높지 않아 구릉 같은 혜목산(慧目山)에 안긴 고달사지, 늦가을에 누렇게 물든 단풍이 나그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맞이해준다. 후대의 길손은 허허벌판 이곳저곳에 이빨 빠진 듯이 덩그러니 남은 주춧돌을 밟으면서 부처님의 자비를 청한다.
고달사지를 떠나 찾은 곳은 봉미산신륵사(鳳尾山神勒寺)이다. 강을 끼고 있는 유일한 평지사찰의 모습으로, 일주문 기둥에 쓰인 주련이 눈을 끈다. 삼일수심천재실(짧은 기간의 마음 수행이라도 천년의 보배요), 백년탐욕일조진(백년의 탐욕은 하루아침의 티끌이다). 요사채와 일자(一字)로 연결된 불이문도 특이하다. 이런 모습을 다른 절에서는 본 기억이 없다. 신륵사는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사찰의 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데는 미륵 또는 나옹선사의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이 있다. 또 다른 전설은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워 사람들이 잡을 수 없었는데, 인당(印塘)대사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신륵사가 대찰을 이루게 된 것은 고려말의 고승 나옹화상이 이곳에서 갖가지 기적을 보이면서 입적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옹화상이 입적할 때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龍)이 호상(護喪)하였다고 한다. 오래전 신륵사에 왔었던 추억은 지금의 신륵사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만큼 세월이 흐르고 나 역시 세월 따라서 늙은이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보호수인 은행나무에 관세음보살을 닮은 나뭇가지를 보면서 자연의 신비로운 모습에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른다. 해설하는 여성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절 경내 나무들은 지난밤 강풍에 잎이 다 떨어진 채 깊어가는 가을 속으로 다가오는 겨울을 맞이할 채비를 하는 듯하다. 신륵사를 떠나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함께 잠드신 영릉(英陵)을 찾는다. 햇볕이 따사롭게 쏟아지는 한가한 오후 시간, 늦가을의 정취가 흠뻑 쏟아진다. 잘 다듬어진 멋진 왕릉을 보니 엉뚱한 생각이 떠오른다. 임금의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백성을 다스리고 나라를 이끄는 것일까? 제왕의 길에 대해서는 역사상 이런저런 가르침이 전해 내려오지만, 왕이나 황제 개인의 삶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조선왕조의 가장 뛰어나고 훌륭한 임금으로 칭송받는 세종대왕, 하지만 임금 세종의 개인적인 삶은 행복하지 못한 것 같다. 임금의 자리에 오르면서 부친인 태종에 의하여 장인(심온)이 목숨을 잃고, 사랑하는 장녀 정소공주와 아들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버리고, 세자(훗날 문종)의 아내 두 사람을 궁궐에서 내쫓는 시아버지의 고뇌, 정비인 소헌왕후를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 임금인 자신은 육신에 이런저런 몹쓸 병으로 고달픈 삶을 살면서도 뛰어난 문화 창달의 업적을 발휘하신 모습에 저절로 머리가 숙어지고 존경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
11월에 떠나는 인문학 기행은 다른 계절과는 달리 허전한 마음이 들지만 깊은 여운을 남긴다. 아마도 충만한 생명의 계절이 다음 세대를 위하여 자연의 순리를 따라가고 있기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올해 주어진 탐방 기회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내년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함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23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