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 뷰티숍에 들어선 장한나는 낯설었다. 한 패션지 인터뷰를 마치고 온 그는 짙은 브라운색 아이섀도에 컬이 풍부한 샤기컷 헤어, 가슴골이 살짝 보이고 화려한 보석 장식이 돋보이는 네크라인의 벨벳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협찬 의상이 아니라 원래 그의 옷이라고 했다. 섹시한 의상이 어울리는 나이 스물일곱, 나이를 다시금 각인시켰다. 밝고 경쾌하면서도 투명한 음색의 비발디에 어울리는 헤어와 메이크업으로 전면 수정하기로 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이경민 원장이 어떤 콘셉트를 원하느냐고 묻자, “예쁘면서도 지적으로요” 하고는 “깔깔깔” 웃는다. “헤헤헤”, “큭큭”, “우하하하하”, “까르르륵”. 다양한 옥타브를 오가며 장한나는 그렇게 웃었다. 민망할 때도, 진지한 답변을 할 때도, 거울을 볼 때도 웃었다. 답변 후 웃음이 따라붙지 않으면 어색할 지경이었다. 붕 뜬 하이 톤으로 개구쟁이처럼 말하고 웃는 그에게서 성숙한 여인의 향기를 맡기는 힘들었다. ‘이제 여인이 됐구나’ 하고 느낀 순간이 있었느냐고 묻자, 단호히 “아니요” 하고는 또 “까르르륵” 웃는다. 지난해 한 설문조사에서 그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 1위에 뽑혔다. 그의 해맑고 경쾌한 에너지가 한몫했으리라.
장한나가 비발디를 가지고 돌아왔다.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사계> 정도로 알려진 비발디는 장한나에 의해 첼로협주곡의 명인으로 부활했다. 장한나가 연주하는 비발디는 장한나가 품고 있는 에너지와 닮았다. 기본적으로 유쾌하고 발랄하면서도 세 가지 템포로 변주되는 곡에는 아름다운 슬픔과 격렬한 환희가 오간다. 현악기 중 음역이 가장 넓은 첼로의 깊고 풍부한 소리를 돋보이게 하는 곡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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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18일 예술의전당에서 베를린 필하모닉 신포니에타와 협연하는 첼리스트 장한나. |
“동양이든 서양이든 비발디는 <사계>만 알려져 있어요. 하나의 명곡 때문에 다른 숱한 명곡들이 묻혀 버린 거죠. 저도 사실 이번 음반 작업을 하기 전에는 비발디를 잘 몰랐어요. 비발디는 30곡 넘는 첼로협주곡을 남겼는데, 그중에서 음악가 비발디, 인간 비발디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8곡을 골랐어요. 녹음하면서 비발디가 정말 뛰어난 작곡가라는 걸 알았어요. 슬프고, 외롭고, 고독한 감정부터 신나고 희망찬 느낌, 유머와 재치가 가득한 느낌까지 인간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할 줄 아는 음악가예요.”
비발디 이전에 그는 낭만주의 음악가들의 곡을 담은 <로망스>을 냈고, <로망스> 이전에는 <쇼스타코비치 첼로협주곡>, <프로코피예프 첼로협주곡> 등 러시아 음악을 연주했다. 비발디를 연주하면서 300년 전 바로크 음악으로 돌아갔으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셈이다. 장한나는 “비발디를 하면서 첼로의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었다”며 “비발디는 첼로를 ‘반주’악기에서 ‘독주’악기로 업그레이드시킨 음악가였다”고 말했다. 그가 열 살 때 처음 출전한 콩쿠르 <월간음악>에서 비발디 곡으로 대상을 받았으니, 그의 첼로 인생 처음으로 돌아간 것이기도 하다.
“쇼스타코비치 같은 러시아 음악을 하면서 피곤했어요. 희망 없는 시대에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투쟁하던 때의 음악이잖아요? 그 후 푸근함이 그리워 낭만주의 음악가들의 로망스 앨범을 냈고, 그 다음엔 투명하고 청명한 첼로의 시작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바로크는 클래식 음악의 시작이고, 비발디는 첼로의 시작인 셈이죠.”
안토니오 비발디의 음악은 귀에 와서 꽂히는 멜로디도 없고, 화음 변화가 거의 없어서 첼리스트들이 엄두를 내기 어렵다. 오죽하면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비발디는 똑같은 작품을 300곡이나 썼다”고 혹평했을까. 그에게 ‘나라면?’ 하는 자신감이 있는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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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의 거장 로스트로포비치와. 1994년 로스트로포비치 경연대회 최우수상 수상 후 장한나는 로스트로포치를 스승으로 맞았다. |
“자신감보다는 꼭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었어요. 몇 점을 줄 수 있느냐고요? 그런 난해한 질문을? 헤헤. 최선을 다해서 준비를 하고, 녹음을 했고, 음(뜸들이다가)… 좋아요. 비발디의 첼로협주곡은 자주 연주되지 않았으니까 ‘아, 이게 정답이구나’ 하는 게 없어요. 그래서 더 자유롭고 재미있었어요.”
장한나의 화려한 수상경력과 평가를 열거하는 건 숨이 찰 정도다. 열한 살이던 1993년 줄리어드음대 특별장학생으로 입학, 1994년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경연대회 최우수상, 1995년 런던 교향악단과 협연으로 데뷔 음반 제작, 2004년 칸 클래식 음반상 협주곡 부문 수상, 2006년 영국 클래식 음악 전문지 그라모폰 선정 ‘내일의 클래식 슈퍼스타 20인’ 선정…. 특히 2005년 발매된 그의 쇼스타코비치 앨범에 대해 서구 언론은 로스트로포비치보다 우위에 있다고 극찬했다. 현존하는 첼로의 최고 거장인 로스트로포비치를 능가하다니, 이보다 더한 찬사가 있을까. 미샤 마이스키는 “나에게 한 명의 제자가 있다면 바로 장한나다”라고 말했고,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로린 마젤은 “장한나만큼 완벽한 연주를 하는 첼리스트는 내 생애 처음”이라고 말했다.
“저는 음악 속에서 모든 걸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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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1995년부터 미샤 마이스키는 장한나의 스승이 됐다. |
음악성만큼 인생도 무르익어야 대가다운 연주가 나온다는 세상의 편견은 장한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는 부모님 밑에서 성장했고, 제대로 된 사랑 한 번 안 해 봤다는 그에게서 어떻게 세상을 화들짝 놀라게 하는 원숙한 연주가 나오는 걸까. 그의 정체 모를 원숙함에 대해 미샤 마이스키는 “한나의 연주를 듣고 나서 환생을 믿게 됐다”고 했다. 뛰어난 연주자가 환생한 것 같다고.
“부모님께 감사하죠. 집에 오면 늘 마음이 편했어요. 음악과 공부에 몰두할 수 있도록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 주셨어요. 하지만 큰 교통사고 안 당해 봤다고, 몸살 감기도 안 앓는 것은 아니잖아요? 늘상 겪는 성장통은 있었어요. 꼭 경험해야만 좋은 연주가 나오나요? 인간의 다양한 감정은 자기 안에 내재돼 있어요. 저는 슬픔과 기쁨, 고통과 분노 같은 감정을 경험이 아니라 음악 안에서 느껴요. 음악을 하면서 점점 감수성이 풍부해지는 것 같아요.”
동석한 음반사 매니저는 “한나 씨는 40, 50대 취향이에요”라고 말했다. 왜 아니겠는가. 또래와 어울려야 할 시기에 그는 세계적인 음악가 아저씨, 할아버지들과 어울리며 자랐다. 어린 시절을 박탈당한 상실감은 없을까.
“없어요.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니까요. 연주하는 순간 가장 행복을 느껴요. 제가 선택한 거고, 후회는 없어요.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잖아요. 제 기준에서는 제가 평범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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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연주자 황병기 교수와 장한나는 나이를 초월해 스스럼없는 친구처럼 지낸다. 장한나는 올해 4월 황병기 교수와 협연했다. |
요즘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가 인기를 끌면서 클래식 열풍이 불고 있다. 이 드라마 OST는 클래식 음반 판매 순위 1위에 올랐다. 얼마 전, 지휘자 강마에(김명민 분)가 두루미(이지아 분)에게 마음을 빼앗기면서 포효하듯 격정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베토벤 <운명> 교향곡을 부드럽게 표현한 후 미친 듯 화를 내는 대목이 있었다. 이 부분을 언급하면서 연주자로서 외부 환경에 얼마나 영향을 받는지 물었다.
“연주자에게 그건 비현실적인 얘기예요. 왜냐하면 연주자는 그 누구보다 작곡가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음악가가 돼야 하거든요. 어떤 상황에 처하든 음악에 충실해야지, 마음 상태에 따라 연주가 변한다든지, 해석이 달라지면 프로가 아니에요. 제 입장에서 강마에 씨는 프로가 아니네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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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진천군 문상초등학교 마을 도서관 개관식에서 학생들과 협연 중인 장한나. |
장한나는 인터뷰 중 “작곡가의 의도가 중요하다”, “경험이 필수는 아니다”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체험해야만 음악적 영감을 준다는 생각은 음악의 거대한 힘을 너무 작게 보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작곡가의 예술혼이 살아 숨 쉬는 연주를 재현하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다. 작곡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그는 음악가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과 음악가의 인생에 대해 꼼꼼히 공부한 후 음악가의 영혼을 느낀다고 한다.
“연주자는 작곡가의 도구라고 생각하고, 악보의 모든 것을 알기 위해 노력해요. 비발디는 열정적인 사람이었고, 비발디가 살던 베니스는 스캔들이 가득하고 매일매일 새로운 게 요구되는 다이내믹한 시대였어요. 바로크는 복잡하고 화려하면서도 완벽한 균형을 갖춘 양식이잖아요. 그 구조 안에서 즉흥적인 요소가 중시됐고요. 고아원에서 음악 선생님을 했던 빨강 머리의 비발디는 수십 년 동안 일인자 자리를 유지했어요. 끊임없이 연구하고 고심한 증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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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장한나는 성남아트센터에서 열린 국제청소년관현악축제에서 지휘자로 데뷔했다. |
그는 현재 하버드대 철학과 휴학 중이다. 음대에 진학할 거라는 예상을 깬 그의 선택은 음악적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인생 설계를 위한 선택이었다. “음악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내 인생의 전부가 되는 건 싫다”고 잘라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버지의 권유와 본인의 의지 중 무엇이 더 강하게 작용했느냐는 질문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아버지는 제가 사회학을 공부하길 원하셨어요. 늘 다른 사람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마음을 크게 해서 생각을 네 것으로 만들라는 말씀을 많이 하시고요. 사회학과 철학은 분야는 다르지만 결국 아버지 말씀대로 사유체계가 흘러가는 것 같아요.”
이야기는 사랑으로 흘렀다. 예술가는 불멸의 숭고한 사랑에 대한 갈망이 강하지 않느냐는 진지한 질문에 그는 “그래요? 하하하하” 통쾌하게 웃어 버렸다. 결혼하고 싶은 나이도 인터뷰 때마다 달라진다.
“한 서른일곱 쯤? 저야 물론 결혼하고 싶죠. 그런데 가족의 희생이 너무 커요. 어렸을 땐 부모님, 자라면서는 형제자매, 결혼해서는 배우자와 아이들의 희생이 따르죠. 제게 가장 큰 부담은 시간이에요. 사랑하면 누군가와 함께하기 위해 시간을 나눠야 하잖아요. 그래서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 해본 것 같아요. 연습할 시간도 부족한데 전화해야죠, 문자 보내야죠, 만나서 손잡고 있어야죠. 그런데요, 그러고 싶은가 보죠? 깔깔깔.”
‘대작은 말년에 나온다’는 말이 장한나에게도 해당된다면 그의 정점은 어디일까. 첼로를 시작한 후 경쟁상대가 없었고, 대가의 연주를 능가한다는 극찬을 받은 이 시점에서 그의 꿈은 무엇일까. 그는 벌써 자신의 재능을 환원할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아낌없이 나누는 음악가가 되고 싶어요. 그게 제 꿈이에요. 음악은 청중들과 나눠야 의미가 있잖아요. 제가 가진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나눠 주고 싶어요. 음악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동과 행복을 선사해요. 저는 매일 느끼거든요. 그걸 청소년들에게 나눠 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