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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9.10 마산교구 윤 봉문 요셉 성지-경상남도 거제시 옥포동 (055)687-2347
가을인데도 너무 무덥다 섬마을이던 거제는 이제 연륙교가 놓여 있어 섬도 아니고 작은 어촌도 아닌 어마어마한 조선소가 있는 한국 최대의 공업지대가 되었다. 아파트가 우뚝우뚝 서 있었고, 도심의 열기로 조용한 시골의 정취는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윤요셉의 순교지를 찾아가는 옥포 산길도 그랬다. 한적한 시골의 산길을 생각하고 떠난 순례길. 거제 소방서 건너편 주유소를 끼고 돌면 팻말이 있을 거라 옥포성당에서 안내를 해 주었건만 팻말이 보이지 않아서 땀을 뻘뻘 흘리며 헤매었다. 어귀에는 먼지를 풀풀 일으키며 집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그러나 죽어가면서도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를 찾아가는 길이다. 불평은 말자. 눈 높이 보다 조금 높은 곳에 달린 500m 남아 있다는 표지가 많이 반갑다. 500m 쯤이야 좀 더운들 어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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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바로 산길로 이어진다.밭 가운데 서 있는 표지판은 알아볼 수도 없을 지경으로 낡아 있었다.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 순교자를 위한 기도> 를 해야한다고 쓰여 있었고, 순교자가 처형장으로 가며 한 마지막 남긴 말도 적혀 있었다.
"신앙의 형제들이여, 나는 하느님 앞에 죽으려 간다. 이는 오직 내 고향 거제를 위해서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읽을 수 있는 희미한 글. 우리의 신앙도 이처럼 희미해져 가는 것은 아닐까? 일단의 레지오 단원인 듯한 자매님들이 산에서 내려온다. 모기가 몸에 달라붙기 시작하는 오후 네시 쯤,
이미 중턱을 넘어섰는데 카메라 밧데리가 없다. 분명히 충전을 해서 넣었는데 확인 해 보지 않은 것이 불찰이다. 할 수 없이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서 똑딱이 사진기와 스페어 충전기로 사진 몇 컷을 찍을 분량만 충전을 시켜서 올라온다. 카미노를 선택했는데 이쯤의 고생이야 무슨 문제이랴? 확인하지 못하는 성격의 사진가 남편을 더는 다그치치 않는다. 산을 오르자 바로 깔딱 고개이다. 저 깔딱 고개를 70이 다된 나이에 카미노에 동참해 준 것만도 고마워 할 일이므로... 물론 그 자신의 신앙심이 만든 작품이지만... 주변은 울창한 삼나무 숲이다. 500m는 어림도 없어 보인다. 멀고도 힘들어 숨이 헉헉거린다. 더 시원할 때 올 걸, 잠깐 또 안일한 생각에 빠진다. 너무 가파른 산길, 그 정도도 못 참아 내면서 무얼 해 보겠다고... 이 동네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 아침 등산도 하는 길인 데.. 사람들이 오고 간 흔적으로 자연의 산길인데도 길이 반질거린다.
부산교구 김범우 성지는 많은 돈을 들여 잘 가꾸어진 성지였었다. 그러나 이곳은 자연의 숲과 바람과 윤요셉의 얼이 녹아있었고 빽빽한 숲과 숲으로 이어져 있는 조촐한 십자가의 길이, 정말 기도가 저절로 울어나왔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내맘 속에 주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신유박해로 맺어진 옥포와 천주교의 인연은 병인박해를 지나면서 선교로 이어진다. 복음의 씨가 처음으로 옥포에 떨어진 것은 병인박해 직전으로 리델 신부와 순교자 구 다두가 거제도 전교를 위해 다녀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병인박해(1866-1873년) 중에 영일군 기계면 지촌리가 고향인 윤사우(尹仕佑, 스타니슬라오)가 양산 '대처'를 거쳐 이곳 진목정(옥포리)에 와 전교 활동을 폄으로써 활발하게 포교 활동이 이루어진다. 순교자 윤봉문 요셉은 윤사우의 둘째 아들로 거제의 사도로서 형 경문과 함께 교회 회장직을 맡아 신자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전교에 힘쓰는 한편 자신의 수계(守戒)에도 열심이었다.
그리하여 1887년 11월 병인박해후 처음으로 당시 대구 본당 초대 신부였던 김보록 신부가 판공 성사를 주기 위해 거제를 방문하자 그는 자신이 가르치던 예비자 15명을 영세 입교시킨다. 그러나 그 한 달 후 뜻밖에도 이 지역에는 공식적인 박해가 아닌 사사로운 탄압의 바람이 일어 윤봉문은 진수부, 주남이, 한상필 등과 함께 포도청으로 끌려간다. 이때 대부분의 신자들은 모두 뇌물을 주고 풀려 나지만 윤봉문은 천주학의 괴수라고 해서 통영으로 압송된다. 수차례에 거친 문초와 혹형을 받으면서도 그는 배교와 밀고의 강요를 결연히 물리치지만 결국 진주로 보내어 처형하라는 결정이 내려진 뒤 진주로 이송된다. 굵은 칡넝쿨로 발목을 얽어 끌고 갔던 이 길에서 그는 칡넝쿨에 살이 뭉개지고 피가 흘러 참 혹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이었다고 전해진다. 진주에 이르러 3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있던 그는 드디어 1888년 2월 22일 올가미에 목이 졸려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진주 비라실(長在里)에 안장됐다가 후에 유족들에 의해 지금의 옥포인 진목정 족박골 산으로 이장된다. 그 후부터 진목정의 외교인들은 천주학쟁이가 죽은 동네 이름이라 해서 '진목정'을 '국산'으로 고쳤고, 후에는 지금의 옥포(玉浦)라 불렀다. 그의 무덤에는 1978년 2월 24일 기념비가 세워졌다.
안내판에는 앞으로 성역화 작업이 이루어져 곧 좋은 곳으로 이장할 계획이니 기도를 부탁한다 쓰여져 있었다. 온 김에 그 곳에도 가 보려고 본당에 물으니 아직 계획 단계이니 좀 더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까마득했던 길이 내려 갈 때는 그나마 쉽다. 미리 찾아 간 순교자의 일생과 박해시절 이전 이순신 장군 시절부터의 거제의 역사적인 배경을 함께 공부했다. 길을 도사처럼 잘 아는 베드로씨나 통쾌한 아가다나 이 카미노가 되는 일에 동참해 주어서 얼마나 든든하고 행복한지... 여정을 함께 할 동행을 얻는 일은 아무나 얻는 행운은 아니다.
신이 적당치 않아 아가다가 미끌어져 넘어졌다. " 어째 내가 넘어지려 했던 곳에 자네가 넘어지나? 그런 것 마저 꼭 샘을 내야 하겠나?" 무안해 하는 아가다에게 농을 걸며, 힘든 길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재주꾼 베드로 씨. 하느님, 감사합니다. 기도를 하면서 내려가는 길. 오늘 하루도 순교자를 생각하며 나를 돌아본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137 성지. 까마득하지만 하루하루 지나면 아마도 모두 거쳐갈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긴 길만큼 우리의 내공이 얼마나 자랄 것인가이다.
숲 사이로 십자가의 길 팻말이 정겹게 서 있는데 비껴가는 오후의 햇살이 삼나무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