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최고라다(의회)는 20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종교 법안을 통과시켰다. 궁극적으로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아니라 '러시아 정교회 소속'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성당, 수도원, 단체 등의 활동을 금지하는 법안이다.
이 법이 정식으로 시행되면(내년 5월 예정), 우크라이나에 있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산하 러시아 정교회는 모스크바와의 연계를 끊지 않을 경우, 폐쇄 혹은 청산된다.
우크라이나 종교 법안 개표 결과/사진출처:우크라 의원 페북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조속한 법안 채택을 촉구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의회가 이날 두번째 독회에서 법안이 의결된 후 "우리의 영적 독립에 관한 법률이 채택됐다"며 "앞으로 바르톨로메오 세계총대주교측과 접촉할 것"이라고 환영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환영 발언에서 보듯, 이 법안은 모스크바 대주교청에서 일찌감치 분리 독립한 우크라이나 독립 정교회(OCU: Orthodox Church of Ukraine, 이하 OCU)와 사사건건 대립해온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산하 러시아 정교회(정식 명칭은 우크라이나 정교회, UOC:Ukrainian Orthodox Church, 이하 UOC)의 오랜 종교 유물(성물)과 재산, 권위 등을 빼앗고 활동을 압박하기 위한 것이다. UOC가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이후 모스크바 대주교청과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단절하고, 키릴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의 전쟁 지지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발표(2022년 5월)했으나, 우크라이나 정치 권력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전쟁을 기회로 OCU와 결탁해 UOC의 기존 종교적 권위를 박탈하고 튀르키예(터키) 이스탄불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세계총대주교청,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과 협력을 꾀하고 있다. 종교와 정신적 차원에서 '러시아의 흔적' 지우기 일환이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는 서방에서 '종교 탄압' 비판을 불렀다. 특히 트럼프 미 공화당 대통령 후보의 러닝 메이트(부통령 후보)인 J.D. 밴스는 대놓고 이 법안의 심의 자체를 비판한 바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사이트
◇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뿌리
명칭이야 어떻든,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뿌리는 러시아에 있다. 우리가 흔히 '동방정교회'로 부르는 종파는 크게 그리스 정교회(세계총대주교청)와 러시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등으로 나뉜다. 신도수는 약 2억 6천만명. 우크라이나 정교회란 명칭은 아예 없었다. 17세기 이후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산하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러시아계 인구가 많은 돈바스 지역(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과 크림반도가 2014년 사실상 러시아 통제 하로 들어가자, 친러시아와 친우크라 세력으로 분할됐다. 친우크라 세력은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우크라이나 독립 정교회(OCU)는 그렇게 탄생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은 이탈하지 않은 기존 세력과 관계를 강화하고 OCU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것은 콘스탄티노플 세계총대주교청이다. OCU를 2019년 독립 주교청으로 승인했다. 정교회 신도의 절반(러시아 1억명, 우크라이나 3천만명)을 갖고 있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의 위력에 눌려온 세계총대주교청이 모스크바를 견제하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OCU의 독립을 전격 승인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갈 곳 없었던 OCU도 이를 즉각 환영하고 협력을 선언했다.
바르톨로메오 1세 세계총대주교는 '동로마 제국' 이래 교회(정교회)의 최고 권위를 인정받고 있지만, 정치 권력과 결탁된 러시아 정교회와는 조직력이나 영향력 면에서 한참 뒤진다. (이슬람이 대다수인) 터키와 그리스의 크레타(섬), 인근 국가에 퍼져 있는 그리스계 신도 공동체들을 관할하고 있을 뿐이다. OCU를 산하로 두게 되면 영향력을 키울 수 있다.
모스크바총대주청도 즉각 콘스탄티노플 세계총대주교청과의 관계 단절을 선언했다. 가뜩이나 지리멸렬한 동방정교회는 서로 간에 더욱 대립각을 세우면서, 제2, 제3의 종교전쟁을 예고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과 OCU의 '윈윈' 작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성향의 OCU는 전쟁 발발을 계기로 '러시아 정교회'와의 차별화를 가속화했다. 모스크바의 키릴 총대주교를 지도자 명단에서 배제하고, 모스크바에서 갖고 온 성유가 아닌 자체 성유를 미사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 우크라이나 전쟁에 반대하는 기존 UOC의 신도들을 대거 흡수했다. 하지만, 오랜 종교적 신념이 하루 아침에 바뀔 수는 없는 법. 여전히 수백만명의 신도들이 UOC 소속 성당에서 종교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OCU에게는 눈에 가시와 다름없다.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페체르스크 라브라/사진출처:위키피디아
UOC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우크라이나 당국과 OCU가 짜낸 아디디어는 '활동 근거지'를 박탈하는 것이다. 2022년 11월 우크라이나 보안국(SBU)가 UOC 산하 교회를 압수수색하고, 신부를 체포하는가 하면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상징하는 키예프의 '페체르스크 라브라' 수도원의 일부 건물을 봉인하고 신도들의 접근을 제한했다. 또 페체르스크 라브라 수도원의 파블로 대주교를 가택연금했다.
페체르스크 라브라는 1051년 성 안토니우스가 세운 수도원인데, 드네프로 강가 절벽에서 '라브라 동굴'이 처음 발견되면서 슬라브 정교회의 발상지로 꼽힌다. '라브라 동굴'의 지하 무덤에는 성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기도 하다.
UOC측에 대한 당국의 탄압은 신도들의 저항에 의한 폭력 사태만 부추겼을 뿐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우크라이나 당국이 UOC를 겨냥한 '종교법안'을 밀어붙인 이유다.
이 법안은 종교 생활에서 UOC를 축출하려는 우크라이나 정부 정책의 일환으로 2023년 1월 의회에 제안됐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를 둘러싼 논란으로 의회의 심의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우여곡절 끝에 가결됐지만, 집권 여당의 '인민의 종'에서도 60명(재적 의원 233명 중 173명 찬성)이 사실상 반대했다. 진보 성향의 야당들은 조직적으로 반대표를 던졌다.
UOC 측은 법안 통과 즉시 "우크라이나 헌법에 규정된 종교의 자유와 민주주의 원칙을 위배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UOC 측의 변호사이자 유명한 미국 변호사인 로버트 암스테르담은 법안 채택전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우크라이나 당국이 UOC에 압력을 가하는 행위는 반인도적 범죄로 국제형사재판소의 관할권에 속한다”고 경고했다. 또 바르톨로메오 세계총대주교에게 "평화를 보호하고 촉진하는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라도 우크라이나 의회가 종교 법안을 철회하도록 요구하라"고 촉구했다.
◇UOC 말살하는 방법은?
종교 법안에 따르면 UOC(소속의 많은 교회들)는 모스크바 대주교청과의 연계 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크라이나의 민족정치국(State Service for Ethnopolitics)이 법원에 활동금지(폐쇄) 소송을 내고, 법원의 판결에 따라 피소된 UOC 교회는 폐쇄된다. UOC의 고민은 자체적으로 모스크바와의 연계 고리를 끊을 수 없다는데 있다. 모스크바대주교청이 UOC를 산하 교회로 규정한 헌장을 UOC가 스스로 고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교회'는 또 ‘루스키 미르'(Русский мир, Russian world, 러시아 세계) 교리를 바탕으로 통일된 '루시 세계'를 설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루시' 민족(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몰도바)은 공통의 역사적 경험과 문화, 언어를 공유하며, 분리할 수 없는 단일 세계로 통합되어야 하며, 그 중심에 러시아 정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UOC도 '루스키 미르'의 이념 하에 들어 있다고 보면, 이 역시 UOC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UOC의 이같은 약점을 꿰뚫어본 뒤 법안 도입에 나선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그 투쟁 과정은 결코 짧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우크라이나 민족정치국(State Service for Ethnopolitics)이 UOC 교회의 폐쇄를 법원에 요청하고 법원 심의는 법안 공포 후 9개월 뒤에야 가능하다. 일러야 2025년 5월 말이다. 현지 전문가들은 내년 5월까지 UOC의 대처 움직임을 거의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교회(UOC) 산하 교회를 압수수색하는 장면/사진출처:텔레그램 캡처
다만, 우크라이나 당국은 특정 UOC 교회가 모스크바 대교구청과의 관계가 의심될 경우, 국가 시설을 쓸 수 있는 임대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 민족주의 성향이 센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에서 UOC 교회 측의 반발 혹은 반대 시위가 격화할 가능성이 있다. UOC측 세력이 아직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UOC의 조직적 반발도 한계가 뚜렷하다. 법안은 UOC 교회의 강제 인수 과정에서 이를 방해하는 성직자들과 신도들의 행동을 공무집행 방해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UOC가 순순히 물러설 것 같지는 않다. 가두 시위가 막히더라도 헌법 재판소와 유럽 인권법원 제소, 해외 인권단체들에 대한 호소 등을 통해 합법적 국제적 권리 보호에 나설 게 분명하다.
특히 트럼프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이 법안은 생존 자체가 불투명해질 수 있다. 스트라나.ua는 UOC 교회 폐쇄에 대한 법원의 심의를 법률 공표 9개월 뒤로 미뤄 놓은 것도 미 대선 결과를 지켜보자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나아가 2년 6개월째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이 법안의 채택으로 러시아 사회는 더욱 분열되고, 종교 갈등도 심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