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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2. 묵상글 들 (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 만족의 방향 틀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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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2.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만족의 방향 틀기
오늘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 신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간청하고 있습니다.
곧 여러분이 모든 영적 지혜와 깨달음 덕분에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지고 그 지식이 자라기를 빕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 충만하도록 나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오늘 바오로 사도처럼 형제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충만하지 못할 때 우리는 늘 욕심부릴 것이고
불만을 달고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끝마다 욕심을 비우라고 서로 얘기합니다.
그만큼 욕심 비우기가 잘 되지 않는다는 표시이고,
비웠다가도 다시 욕심을 부리고 채우기 때문이지요.
충만하지 않으면 그렇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욕심이란 결핍을 채우려는 내부 기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만복 곧 배가 부를 때는 식욕이 전혀 없다가
배가 고프면 식욕이 생기고 어떻게든 빈 배를 채우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배가 고프든 다른 무엇의 결핍이든 결핍이 있을 때
욕심과 함께 생기는 것이 불만이고, 이 불만은 그 욕심을
채우든 다른 것으로 대리 만족하든 그때까지 사라지지 않지요.
가장 흔한 대리 만족이 주전부리나 게임과 도박이나 쇼핑인데
그러나 이런 대리 만족으로는 불만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고,
이제와 영원히 가장 완전한 불만 해결은 하느님으로 충만하고,
하느님 은총으로 충만할 때 뿐임을 아는 것이 우리의 지혜입니다.
어제는 우리 수도원에 살다가 나간 형제와 늦게까지 한 잔을 했습니다.
그렇게 오래 산 것이 아닌데도 자주 수도원 사는 꿈을 꾼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수도원 생활을 그리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욕심이 많아서
수도원 떠났다고 후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만족하며 살 것을 그때는 욕심이 많아서 만족치 못하였고
그래서 수도원을 떠났다는 후회인데
그런데 그때는 무슨 욕심이 그리 많았다는 걸까요?
말하는 뉘앙스로 보면 형제들과 수도원에 대한 불만이었고
그것은 더 완전한 형제들과 수도원이기를 바란 욕심 때문이었다는 건데
제가 생각하기에 그 형제의 욕심이 실은 형제들과 수도원에 대한
욕심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을 소유하기까진 그칠 수 없는 욕심이었습니다.
왜냐면 저는 그 형제의 종교적 편력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종교적인 방황을 한 것인데 제가 보기에 그 형제는
아오스딩 성인이 하느님을 만나기 전까지 방황했던 것처럼
그렇게 방황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형제 뿐 아니라 우리도 하느님으로 충만하기까지는
이런 저런 것으로 대리 만족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치 못하고 또 다른 만족들을 찾아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만족의 방향을 틀어야 함을,
세상으로 향했던 만족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틀어야 함을
깨닫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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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2.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버리고 떠나기
어디로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희망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더 좋은 것을 기대하면 희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났던 아브라함,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길 바랐던 성모님의 모습에서 “절망 속에서도 희망”(로마4,18) 해야 한다는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많은 수고와 땀을 통해 일구어 자리를 잡은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많은 미련과 아쉬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명을 받았으면 후회가 없어야 합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있고 싶은데 떠나라는 명을 받고, 빨리 떠났으면 좋겠는데, 더 있으라는 명을 받기도 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내일 당장 떠날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성직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때가 되면 자기가 움켜잡고 있던 모든 것을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떠났으면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안주하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을 때 떠나야 합니다. 영광까지 누리려 한다면 욕심입니다.
엉뚱한 생각을 해 봤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으로서 교황으로 선출되리라고 생각을 하셨을까? 교황으로 선출되면 다시 그리로 돌아가지 못하시는데 짐정리는 다 해놓고 오셨을까? 소지품들은 어떻게 처리하실까? 아니 추기경관저에서 살지 않으시고 방 한 칸의 아주 검소한 아파트를 임대하여 간단한 저녁식사를 직접 해 드셨고, 버스로 출퇴근을 하며, 근검한 선교사들에게 추기경관저를 내놓으셨다 하니 아예 정리할 것도 버릴 것도 없이 사신 것은 아닐까? 세상의 권력은 다 버리고 주님의 권위와 겸손으로 만족하셨음에 존경과 사랑을 드립니다.
시몬 베드로는 고기 잡는 어부였습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는 이유는 생계를 유지하고 더 나은 윤택함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밤새 고기를 잡으려 애썼지만 잡지 못했습니다. 실망 속에 그물을 정리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몬은 말씀대로 그물을 내렸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말씀대로 했더니 차고 넘쳤습니다. 순명이 기적을 낳았습니다.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기적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어부가 많은 고기를 보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지만 현실입니다. 전에는 고기만 봤는데 이제는 능력의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하고 고백합니다. 그는 주님을 가까이 모시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또한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하시며 죄 많은 자의 고백을 기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마침내 주님의 능력과 자비를 체험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자기의 어부로서의 지식과 경험, 상식, 그야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부가 배를 놓고, 고기를 놓고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사람을 낚을 사명을 주시니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바뀌는 제자로서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도로 살게 된 것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몸이 떠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가 잡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지식이나 경험, 업적, 애착…. 인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을 만나는 데 걸림돌이 되는 하나를 버리는 가운데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거듭나고 싶은 만큼 버려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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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2.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시몬의 배에 타시어 군중을 가르치시고 난 다음, 시몬에게 이르셨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그러자 시몬이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일이 다 끝났는데도 굳이 다시 그물을 치는 일은 귀찮기도 한 일이었지만, 사실, 그물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어부로서의 자신의 앎을 내려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고기가 없다는 것을 이미 밤새도록 확인한 그곳에 다시 그물을 친다는 것은 이미 경험을 통하여 확인한 앎을 내려놓는 일이었습니다. 고기 잡는 일에 있어서 프로였던 베드로는 그렇게 자신의 ‘앎’을 내려놓고 ‘말씀대로’을 따랐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1코린 3,18)
그렇습니다. 자신이 아는 것,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맞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에서 주님을 만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끌어올린 그물에서 많은 고기와 함께 많은 죄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참으로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이 죄 많은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그는 그물을 치기 전에는 예수님을 어떤 한 분 ‘스승’(5,5)을 만났을 뿐이었지만, 이제 “말씀대로” 그물을 치고 난 다음에는 오직 한 분 ‘주님’(5,8)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진정한 인격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의 ‘변화’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앎’을 버릴 때 찾아들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변화는 자신이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되는 대상이 될 때에 오는 가 봅니다. 곧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되는 존재가 될 때 찾아드나 봅니다.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응답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기에 변화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요, 회개 역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수락에 의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앎’을 버리고, 말씀을 수용할 때 생겨나는 은총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지만 무능하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유롭게 동의하지 않을 때에는 무능하시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의 ‘앎’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수락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나의 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미 ‘주님의 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항해하는 배 말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주님!
제가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의 대상임을 알게 하소서.
제가 민낯으로 당신을 뵙고, 진정 죄인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 생각을 내려놓고, 제 경험을 내려놓고, 당신의 말씀을 따르게 하소서.
제 앎을 내려놓고, 제 옳음을 내려놓고, 당신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게 하소서!
제가 스스로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 변화되는 존재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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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2.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 이야기를 전해 주는데, 그들이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던 어부들임을 감안하여 풍어기적으로 당신의 신적인 권능을 보여주심으로써 그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물고기들이 지나다니는 물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던 그들조차 밤새 허탕을 친 판인데,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하고 한 말씀 하셔서 그대로 했더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으로 많은 물고기들이 잡힌 일이 그것입니다.
한민족에게 하느님이 전해진 경위는 실로 놀랍습니다. 예수회 소속으로 중국에 파견된 이태리 선교사 마테오리치 신부는 한문과 유학을 공부한 끝에 ‘천주실의’(天主實義)를 1594년에 펴냈습니다. 이 책은 곧 조선에 전래되었고 남인 선비들 가운데에서 천주학에 대한 연구 운동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1779년에는 권철신과 그의 문하 선비들이 천진암에서 천주실의와 함께 전래된 실학 서적들을 연구하는 강학회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 이벽이 합류하면서 실학 강학회는 천주학 강학회로 전환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천주실의에 대한 이벽의 강학이 큰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주실의 속에는 공자와 맹자가 지은 본원유학에서 깨달은 인격적인 하느님을 천주로 소개하고 있었는데, 이벽이 처음으로 이를 알아본 것이었습니다.
중국의 유학자들이나 조선의 선비들이 수백, 수천 번씩 읽어보았던 공자의 저술에서 마테오리치가 하느님의 인격적인 면모를 발견한 일도 기적이지만, 이를 읽은 이벽이 보유론적인 바탕에서 마테오리치보다 더 해박하게 천주교 교리로 풀어내어 ‘성교요지’를 지은 일도 기적이며, 또 권철신을 비롯한 남인 선비들이 이를 신앙의 진리로 받아들여 대거 입교한 일도 기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동생인 권일신과 함께 권철신의 그 문하생들이었던 여주의 윤유일과 김건순, 포천의 홍교만, 내포의 이존창, 충주의 이기연, 전주의 유항검, 진산의 윤지충 등과 이벽의 동서지간이었던 이승훈, 사돈지간이었던 광주의 정약전·약종·약용 3형제, 약현의 사위 황사영 등이 일거에 천주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메마른 무신론적 사변 일변도의 성리학 세계에서 족히 수백, 수천 번 읽어보았을 ‘천’(天)의 관념으로부터 물리적인 자연의 하늘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느님을 알아보게 하시어 이 땅에 신앙의 진리를 들여보내신 하느님의 섭리가 실로 오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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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2.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신부님, 제 기도만 들어주시면 성지에 큰 봉헌을 하겠습니다.”
갑곶성지를 처음 개발을 할 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저에게 어떤 분이 와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솔직히 이 말을 듣고서는 기분이 많이 안 좋았습니다. 자신이 커다란 봉헌을 해야지만 성지가 개발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하느님을 멸시하는 태도입니다. 하느님의 능력 부족으로 성지개발을 직접 못 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불가능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봉헌을 통해서만 성지개발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커다란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창기에 경제적으로 너무나 힘들어서 이분께서 봉헌을 해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기도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봉헌은 없었고 또 그 뒤로 뵐 수도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사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인데도 말이지요. 어쩌면 스스로 하느님 영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기에, 자신이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도 겸손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듯이, 이 땅을 사는 우리 역시 겸손한 모습을 간직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겸손의 모습으로 엎드려서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마귀들이 그랬듯이,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임을 알아봅니다. 그래서 죄인의 몸으로 거룩하신 분 앞에 있음을 두려워하며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주님을 알아본다는 것은 두려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성인·성녀들은 주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머리를 들어 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에 반해 마귀들은 어떠했습니까?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루카 4,41)라고 소리만 지릅니다. 그들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래서 소리를 질러서는 안 되는 대상을 향해 감히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마귀를 향해서는 함구령을 내리시지만, 두려워하며 겸손의 모습을 갖춘 베드로를 향해서는 사람을 낚는 큰 사명을 내려주셨음을 기억해 보시길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있을까요? 혹시 하느님을 내 밑에 두고서 명령을 내리는 하인 취급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두려워하며 겸손한 모습을 갖춘 사람만이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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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에 성공하는 비결은 단 하나,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디어도어 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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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삶으로….
코로나 사태가 생기기 전, 강의가 참 많았습니다. 외부로 나가서 하는 강의도 있고, 성지에서 하는 강의도 있었습니다. 또 신학교, 방송국까지 눈코 뜰 새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강의하면서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탈렌트를 더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몇 년 전, 평소 존경하는 분에게서 들었던 말이 기억납니다.
“나이 50이 넘으면 강의하는 것 아냐.”
이 말을 들었을 때가 딱 50세였습니다. 더 이상 강의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그래도 내가 잘하는 것인데….’라는 생각과 함께 서운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묵상을 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는 것도 없는데, 마치 많은 것을 알고 깨달은 듯 강의를 했었구나. 세상에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강의한답시고 내 공부만 하고 있었구나.’
그 뒤 신학교와 방송국 강의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로 외부와 성지에서의 강의도 저절로 멈춰진 것입니다. 역시 새로운 삶을 살라는 주님의 메시지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자기 자리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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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2.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려서 형님이 부러운 것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형님은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전문적으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재능을 타고 난 것 같았습니다. 글을 잘 썼습니다. 물론 필체도 좋았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사물을 보는 집중력이 좋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글을 잘 쓰는 것은 책을 가까이 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지금도 형님이 그렸던 고궁의 수채화가 기억납니다. 형님의 필체가 정갈하게 적혀있던 편지가 생각납니다. 요즘 하는 말이 있습니다. ‘부러우면 지는 거야.’ 하느님께서는 제게는 또 다른 재능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며칠 전에 읽은 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우리 회사의 원칙은 2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사적인 일은 공적인 업무에 우선합니다. 그러니 꽃피는 봄에는 꽃구경을 가세요. 둘째는 모든 회식은 회의에 우선합니다. 그러니 좋은 날에는 회식을, 우울한 날에도 회식을 하세요.’ 맞습니다. 아직 오지 않을 불안 때문에 걱정하기 보다는, 오늘을 즐겁게 지내는 것도 삶의 지혜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도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늘의 새도 하느님께서는 다 먹이시고, 들판의 꽃도 하느님께서는 다 입히십니다. 여러분은 하늘의 새보다, 들판의 꽃보다 더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걱정하기보다는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을 생각하십시오.” 사람들도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동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유대인들도 단식하고, 요한의 제자들도 단식합니다. 그런데 왜 당신들은 단식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신랑이 와서 혼인잔치를 하는 동안에는 단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보와 발전을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치와 다름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진보와 발전은 낡은 것과 새것을 구분합니다. 낡은 것의 자리에 새것들이 들어옵니다. 가치와 다름은 비틀즈의 음악과 BTS의 음악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문, 혈연, 능력, 재력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이야기하십니다. 땅에 떨어진 씨앗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 닮음을 보셨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가치와 다른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어부 시몬에게 그물을 다시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물을 던진 시몬은 그물이 터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경험과 기술로 고기를 잡던 시몬은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말씀으로 고기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두려워진 시몬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두려워하는 시몬에게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인생 머 있습니까? 새로운 것을 보았던 첫 번째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런 묘비명이 있다고 합니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런가 하면 이런 묘비명도 있다고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우물쭈물 하는 사람은 배와 그물을 버릴 수 없습니다. 자유로운 사람은 기꺼이 배와 그물을 버릴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사람은 욕망이라는 배를 버릴 수 있습니다. 걱정이라는 그물도 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던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모든 영적 지혜와 깨달음 덕분에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져,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면에서 그분 마음에 들고 온갖 선행으로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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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2.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나의 겸손
-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
-“푸른 하늘은
바다
흰구름은
섬
바다 안 가고도
바다 여행
제주도
바다가는 형제들에게
당부하다
“가슴에 바다 가득 담아 오세요.”
소망한다
하늘같은 마음, 바다같은 마음”-2021.8.30.
제주도에 공동실습차 간 수도형제들에게 바다 사진을 받았습니다. 모두를 비워 겸손의 하늘이, 모두를 받아들여 겸손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예수님은 물론 많은 성인들이 예수님을 만나 닮아 비워 겸손의 하늘이, 받아 들여 겸손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자기를 잊고 노동에 몰두하는 겸손한 모습도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어제 외출 후 열심히 예초 노동을 하는 원장 수사의 모습이 좋아 사진에 담아 나눴고 메시지도 전달했습니다.
-“Good work!
‘십자가의 길’이 아름답네요! 수고많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의 특징은 1.한결같고 2.자유롭고 3.정의롭고 4.겸손하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제가 20대부터 눈여겨 온 분들중 그런 분이 무위당 장일순 선생과 권정생 동화작가 그리도 이현주 목사입니다. 제가 볼 때 이 세분들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요 한결같고 자유롭고 정의롭고 겸손한 분들입니다.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도가의 관을 쓰고 유가의 신발을 신고 불가의 옷을 걸친 사상가였고 어느 틀과 논리에 얽매이지 않은 “제일 잘 놀다 간 자유인”이었으며 “그윽한 골짜기에 피어 알려지기 바라지 않았던 난초”같은 분이 바로 무위당 장일순 선생입니다. 어제 ‘마음건강법을 인생멘토에게 묻다’(한겨레) 라는 제하의 <순천사랑어린학교> ‘마음공부 교사’ 이현주 목사와의 인터뷰 기사를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무위당 장일순은 어떤 분이었나?”
“이 지상에서 경험한 마지막 선생이었다. 그 뒤론 스승이 없었고, 예수님만이 남았다. 지리산 천왕봉에 가려면 많은 봉우리를 넘어야 하듯이 마지막 봉우리가 무위당이었다. 내가 뭘해도 부정적인 말을 안했다. 마흔 살 때 다른 여자와 스캔들이 생겨 힘들 때, 반성하며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툭 치더니 ‘일 저질렀구만. 괜찮아. 수습 잘해’라고 했다. ‘교회에서 쫓겨났다’고 하면, ‘왜 쫓겨날 짓을 했느냐’고 물어야 내가 말이 길어질 텐데, ‘자 네가 목사질 제대로 하겠다’고 말했다. 그분은 관점이 달랐다.”
-“장일순은 가톨릭 신자로서 동학의 해월 최시형을 사숙해 한 살림 운동을 펼쳤는데, 그의 종교관은 어땠나?”
“종교인으로서 출발했지만, 종교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분이라고 믿는다. 종교는 하나의 틀일 뿐이다. 애벌레가 고치에 들어간 것은 그 그 속에서 영원히 살려는 게 아니다. 봄이 되면 나비가 되려고 들어간 것이다. 한 종교의 울타리에 들어간 것도 마찬가지다. 크리스천의 목표는 크리스천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장일순이 그랬다.”
-“권정생은 어떤 분이었나?”
“정생이 형이 죽기 얼마 전 나를 가만히 보더니 ‘거, 남 가르치려고 하지 마래이’라고 했다. 무위당도 ‘남이 묻지 않은 말에 답하지 말라’고 했다. 남을 가르치려 드는 나를 바로 잡아 준 유언들이다. 참 고맙게 생각한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저 또한 수없이 강론했지만 가르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고 다만 진리를 나누는 마음으로 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참 만남을 갈망합니다. 모두가 만남을 갈구하지만 우리는 잘 만날 줄 모릅니다. 겸손해야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만나야 겸손입니다. 참으로 만남은 은총입니다. 어느 인문학자의 고백에 공감했습니다.
“이 감동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는 이를 ‘만남의 황홀’이라 부른다. 그 황홀은 결코 예측할 수 없이 찾아온다. 그 황홀은 깊은 만남의 순간에 솟구치는 기쁨과 공감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의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렇습니다. 주님과의 결정적 운명적 만남이요, 만남의 황홀입니다. 오늘 복음중 예수님과 베드로의 일련의 대화를 다시 나눕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바로 예수님 없는 삶의 허무와 무의미를 상징합니다. 극도로 가난하고 겸손해져 마음이 텅 빈 베드로를 찾아 오신 예수님이요, 예수님의 개입으로 상황은 반전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하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았고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베드로의 전광석화같은 반응입니다. 순간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그대로 예수님과의 결정적 축복의 황홀한 만남입니다. 예수님 거울에 환히 드러난 죄인으로서의 참나를 발견한 베드로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참나를 만납니다. 죄인으로서의 자각이 나를 참으로 겸손하게 합니다. 주님과 아브라함의 만남(창세18,27)이, 욥의 만남(욥42,6)이, 이사야의 만남(이사6,5)이 그랬습니다. 겸손이야 말로 모든 덕의 어머니이자 영성의 잣대요, 주님을 만났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지난 주일 삼종기도시 교황님의 강론중 인용한 내용도 참 유익합니다.
“초기 교회의 교부들은, 수도승들은 그들이 ‘무엇이 거룩함의 길입니까?’ 질문 받았을 때 그들은 늘 첫 단계로 ‘자신을 꾸짖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렇게 내 탓이라하며 나를 꾸짖는 것이다. 다른 이를 비난하는 것, 그것은 야만이다. ‘자신을 꾸짖는 것을 배우는 것(learning to blame youself)’, 그것은 지혜다. 너에게도 좋고 나에게도 좋고 누구에게나 좋다.”
참으로 나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주님과의 황홀한 만남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만나 참 나를 발견하여 겸손하고 지혜로워진 베드로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사명을 부여하였고, 베드로와 일행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여정에 오르니 만남에 이은 따름입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주님과 만남의 여정이자 따름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죽는 그날까지 날마다 주님을 만나 늘 새로운 따름의 여정에 오르는 우리들입니다.
콜로새서의 바오로 사도 역시 주님을 만난 분입니다. 얼마나 주님과 깊은 만남의 경지에 있는 바오로인지는 오늘의 제1독서 그의 콜로새 교회를 위한 기도에서 잘 드러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난 체험의 반영입니다. 내용이 깊고 아름다울뿐 아니라 깊은 묵상감이라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 공부하는 마음으로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1.여러분이 모든 영적 지혜와 깨달음 덕분에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져,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면에서 그분 마음에 들고 온갖 선행으로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기를 빕니다.
2.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에서 오는 모든 힘을 받아 강해져서,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 내기를 빕니다.
3.기쁜 마음으로, 성도들이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분에게 주신 아버지께 감사하십시오.”
얼마나 좋고 진실하고 고무적이고 긍정적인 내용입니까! 주님과의 깊은 만남의 체험을 우리 모두와 나누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마지막 고백도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이미 용서 받고 아드님의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앞당겨 사는 우리들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주님과 만남의 체험은 우리에게는 선물이자 평생과제입니다. 바오로의 체험이 우리의 체험이 될 수 있도록 참으로 주님과 깊은 만남의 은총을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 모두 참 나의 겸손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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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2.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원 받기 전 우리가 어떤 처지였는지 일깨워 주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마태 5,4)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당신께 몰려든 군중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는 중에 베드로의 배 위에 올라 계속 가르치십니다. 이윽고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밤새도록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고 허탕 친 어부들에게 이렇게 조언을 하시지요.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고기잡이 전문가들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지요.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가 잡힌 겁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자아와 고집, 지식과 경험을 내려놓았기에 예수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베드로가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그는 엄청 놀란 데다 두려움까지 느낍니다. 그저 평범한 어부에 불과한 자신과, 기적을 일으키시고 하느님 말씀을 가르치시는 존재가 나란히 설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듯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자각은 하나의 선물입니다. 이는 지나친 죄책감이나 죄의식으로 짓눌리지 않으면서 스스로의 실존을 겸손하고 건강하게 가늠할 수 있는 은총이지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10)
예수님은 베드로의 "죄인"이라는 자기 고백을 만류하거나 부인하지 않으시고, 지워버리지도 않으신 채 그 위에 소명을 얹어 주십니다. 죄인이라는 진실이 부르심을 회피할 사유는 되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실패를 아는 사람입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밤새도록 빈 그물만 끌어올리다가 피곤에 절어 새벽을 맞아본 이는 허탈감과 절망만 배우지 않고 그에 더해 만물의 주인 앞에서 응당 지녀야 할 두려움까지도 소유하게 됩니다. 한 인간으로서 겪어낸 이 나약함과 부족함, 어두움의 깊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신 건 아니었을까 묵상해 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 신자들에게 참으로 아름다운 축복과 기원을 나열하면서 우리가(그들이) 본시 어떤 존재였는지를 일깨웁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콜로 1,13-14)
원죄에 물든 우리는 본시 어둠에 속했었고 죄에 갇혀 있었습니다. 빛이신 분께서 오셔서 우리를 빛 한가운데로 불러내셨고,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 희생 제사를 올리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지요. 우리는 주님을 만남으로써 어둠에서 빛으로, 죄에서 구원으로 건너온 이들입니다.
영적 삶에서 빛과 어둠, 죄와 구원은 생략 불가, 월반 불가한 요소들입니다. 원죄에 물든 인간이기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지요. 그런데 악은 욕구를 충동질하고 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며, 그 수치심으로 사람을 무너뜨려, 결국 절망으로 주님을 떠나게 만들지요. 그저 송구하고 겸양한 말뿐이 아니라, 진짜로 주님께 "떠나 주십시오." 하게끔 조장하는 겁니다. 악은 하느님과 인간 관계를 분리하고 끊어내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 죄인이라는 겸손하고 건강한 인식은 우리를 그분과 더 가깝고 친밀하게 이어줍니다. 바로 그 이유로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사랑하시며 도구로 쓰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으로 다정히 우리를 어루만지십니다. 우리가 끌어안고 있는 실패와 결핍의 빈 그물 앞에서 주님이 무어라 하시는지 귀담아 듣고 따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미소함과 어둠, 죄와 실패가 우리를 주님께 이끌었으니 주저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그분께 나아갑시다. 겸손한 죄인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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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2.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5,11)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수(갈릴래아 호수 또는 티베리아스 호수)에서 고기잡이 기적을 일으키시고,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5,4)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자,
시몬이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5,5)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가 잡히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5,8)
그러자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5,10)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예수님 말씀을 따르니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기적체험을 한 이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 안에서, 내 안에서 일어나야 할 모습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 말씀에', 그리고 '너를 통해 들려오는 예수님 말씀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있고, 그 말씀을 얼마나 잘 따르고 있는가?
피조물 보호를 위한 창조시기 둘째 날입니다.
피조물 보호는 신앙인의 핵심과제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창세1,26-28 참조)
피조물 보호를 위해 작은 것부터 실천하기로 다짐을 했고, 어제 다짐한 것들을 실천했습니다. 지구와 우리 모두의 생명을 위해 제가 다짐한 것들, 비록 작은 것이지만 이를 계속해서 실천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오늘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고,
그래서 작은 기적들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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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2.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듭니다. 그분께서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목말라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하십니다. 그렇게 하여 많은 물고기를 잡은 시몬 베드로는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두려움에 휩싸여 자신도 모르는 말을 내뱉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뿐 아니라 그의 동생과 동료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예수님을 그리워합니까? 얼마나 보고 싶어 합니까?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신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우리도 곧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났을 때 베드로와 같이 자신도 모르는 말을 하지 않으려면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불신을 버리고 주님께 도움을 청하며(마르 9,24 참조), 신랑을 맞으러 나간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애덕을 통하여 등잔에 기름을 준비하고(마태 25,4 참조),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들의 믿음의 아버지가 된 아브라함처럼(로마 4,18 참조)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음을 바탕으로 한 희망을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우리가 준비해야 할 자세이며, 신자들이 살아가는 ‘덕’입니다. 언젠가 주님을 만났을 때 베드로 사도처럼 두려워하지 말고 이렇게 말합시다. “주님, 이 순간을 위하여 제 삶의 등불을 밝히고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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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2.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라
예수님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셨는데, 회당에서 예수님을 쫓아내자 이제는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배에 앉으시어 가르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복음 전파는 회당이라는 어느 장소에 한정되지 않고 필요하다면 어디에서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의 배를 빌어 육지에서 배를 조금 떼어 그 배에서 군중들을 가르치신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4절) 하신다. 베드로는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5절) 하고 대답하였다. 즉 인간적인 경험, 지혜, 노력을 다 써 봤지만 기대하던 결과는 이 경우에는 헛수고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 일생을 고기 잡는 일로 잔뼈가 굵었고, 고기 잡는 일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 앞에 모든 오만을 버리고 자신을 낮출 줄 알았다.
그는 “스승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겠습니다.”(5절) 하고 실행에 옮겼다. 베드로는 전능하신 분의 말씀을 따랐다. 그 결과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다고 하였다. 고기 잡는 일에 그렇게 경력이 있고 능력 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른 결과는 지금까지 자기 생애에 보지 못했던 엄청난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예수께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8절) 하였다.
베드로는 자신의 모습이 주님 앞에 아무것도 아님을 느낀다. 자신의 죄를 생각할 때, 불결한 인간으로서 순결한 분을 감히 모실 수 없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예수님은 그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10절) 하셨을 때,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신다.
베드로가 자신의 오랜 경험 등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을 때, 커다란 체험을 하였듯이 때로는 우리도 우리 자신의 고집을 버려야 할 때가 많을 것이다. 더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이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하는지 오늘 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진정으로 우리 안에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살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항상 말씀이 강생하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말씀을 강생시키는 삶, 여기에서 근본적인 우리의 변화를 가질 수 있다. 베드로와 같이 자기 생각이나, 고집, 고정관념을 주님의 말씀 앞에 모두 버렸을 때, 기적을 체험했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체험케 하고 하느님 안에 자녀로서의 기쁨과 구원을 체험하게 해줄 것이다. 우리 안에 강생하시는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을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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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2.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 11)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이다.
벗어나야
제대로
볼 수 있다.
버려야
길을
제대로
만나게된다.
따르면서
진리를
만나게되고
버리면서
진리를
깨닫게된다.
우리가
갈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다.
따르는 길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이다.
새로운
삶의 전환이
간절히
필요한 때이다.
새로운
삶의 전환은
주님과 함께
주고받는
삶으로 우리가
바뀌는 것이다.
하느님을 위한
버림이며
하늘 나라를 위한
따름이다.
버리지
않고서는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도
버리고 떠나는
삶으로
우리에게
복음이 되셨다.
영원한 생명은
버리고 떠날 때
주어지는
새로운 생명이다.
새로워지기 위해
버리고 떠나는
새로운 만남이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어리석고
나쁜 삶을
멈추는 것이며
깨끗한 삶으로
다듬어지는
것이다.
이끄시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 삶의
참된 복음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야 할
하느님의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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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2.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버림과 따름 >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루카 5,4-6).”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기 전에 먼저 기적을 행하신 이유나
목적이나 의도는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부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의도를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1) 어부들은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의 권능을 생생하게 체험했고,
예수님을 주님으로(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 체험과 믿음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을 것이고,
그래서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했을 것입니다.
어부들이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일”은,
자기들의 힘만으로는 인생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을
상징하는 일로 해석할 수 있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해서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된 일”은, 예수님과 함께라면
못할 일이 없음을 믿게 된 것을 상징하는 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깨달음과 믿음 때문에 어부들은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을 것입니다.
2)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어부들의 모습을,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예수님을 따랐다면,
11절의 ‘모든 것을 버리고’ 라는 말과 모순됩니다.
(가진 것이 하나도 없으면 버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 주신 일은,
그들이 능동적으로 ‘버림’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일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3)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적은 ‘버릴 것’을 주신 일인가?”
겉으로만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것이다.” 라는
깨달음을 주신 일이라고 생각하면, 단순히 ‘버릴 것’을 주신 일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애착심을 버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일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버리다.’ 라는 말은, 쓰레기를 버리듯이 버리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는 일, 소유물에서 자유롭게 되는 일,
세상일을 초월하는 일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다는 말은,
‘예수님만을’ 따르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버림’이란 ‘뒤를 돌아보지 않음’입니다(루카 9,62).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루카 5,8-9).”
여기서 베드로 사도가 한 말은,
이사야 예언자가 하느님을 뵙고서 했던 말과 비슷합니다.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이 말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동시에 표현한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라는 말은,
진짜로 자기에게서 떠나 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저 같은 사람은 감히 함께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주님은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이 말은 자신이 주님의 권능에 압도되었음을 고백하는 말이기도 하고,
주님에 대한 경외심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라는 말은, 실제로 죄가 많다는 뜻이 아니라,
“위대하신 주님에 비하면 저는 정말로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고백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일반적인 스승과 제자의 관계와는 다르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물론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하긴 했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 일은 어떤 학문을 배우기 위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이신(주님이신) 분으로 믿고,
자기 인생을 모두 예수님께 맡겨 드린 일”입니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요한 13,13).”
제자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모두 예수님께 맡겨 드린 것은,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기면서
자신의 인생을 예수님께 모두 맡겨 드린 사람들입니다.>
“......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0-11).”
사람을 낚는다는 말은, 물속에(죽음 속에) 있는 사람을
물 밖으로(생명으로) 끌어낸다는(구원한다는) 뜻입니다.
1) 예수님 말씀을 좀 더 풀어서 표현하면,
“너는 이제까지는 물고기를 낚아서 먹고사는 어부의 인생을 살았지만,
앞으로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도로서 살게 될 것이다.”입니다.
2) 사도들이 첫 번째로 낚아야 할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이 먼저 ‘생명 속에’ 있어야
‘죽음 속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모든 신앙인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3) 사도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 ‘모든 것’을 버린 일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필요 없는 것들과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버린 일입니다.
버려야 하는 것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을 방해하는 것들을 버리는 것은
모든 신앙인이 실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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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2.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무소유와 사랑으로 사람낚는 어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기에 앞서 가르치시고 고기를 많이 잡는 이적을 보여주십니다. 군중이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는 예수님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호숫가에 배를 대놓고 그물을 씻고 있던 시몬의 배에 올라 앉아 군중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마치신 다음 시몬에게 이르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5,4) 그러자 고기잡이 전문가인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쳤고 그물이 터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습니다. 이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밤의 어둠 대신 대낮의 빛이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5,8)라고 말합니다.
시몬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5,10) 하십니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5,11). 오늘 복음의 소명사화를 통해 우리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과정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가르침과 이적을 통해 그분을 알고 체험했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그들은 그분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하늘나라의 진리와 기쁜 소식을 이해하고 깨달았던 것이지요. 또한 그분의 치유와 더러운 영의 축출, 고기를 많이 잡는 것을 통해 자비의 체험을 했던 것입니다.
겐네사렛 호숫가의 어부들은 말씀과 이적을 통한 해방 체험과 사랑 체험을 통해 모든 소유를 버리고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우리 내면을 변화시켜 주님께로 중심이동을 하게 합니다. 사랑과 자유는 그렇게 그분을 따르고 차지하기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이끕니다. 하느님을 체험한 그들은 곧바로 하느님께 고착되어 투신의 길을 떠납니다.
이렇듯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은 예기치 못한 엄청난 선물을 받게 되지요. 이것이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의 행복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나를 사랑으로 부르고 계시고, 사랑을 실천하도록 이끌어주시며, 사람 낚는 어부로 삼아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어려움 중에도 낙심하지 말고, 시몬처럼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5,5) 하며 주님을 따라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일터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나를 부르시는 주님 사랑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도록 해야겠지요. 사랑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사랑 밖에는 없습니다. 주님 사랑에 응답하려면 우리를 위해 모두를 내놓으신 예수님처럼 온갖 애착을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 것에 대한 애착과 탐욕을 지닌 그만큼 하느님의 사랑이 머물 여백은 줄어들겠지요. 우리는 ‘무엇이 되기 위해서’나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사람이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지요. 따라서 나를 탐욕의 길로 나를 내몰고 하느님을 망각하게 하여 비참의 계곡으로 떨어뜨리는 것들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받기보다 ‘먼저’ 사랑하고, 사랑의 부르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단순히 응답하며, 모든 애착을 내려놓고 자유와 생명을 가져다주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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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2.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2019년 9월 5일
에파프라스가 그의 고향인 이곳에 공동체를 세웁니다.(4,12)
수인이 된 바오로는 에파프라스 편에 골로새 공동체의 어려운 처지의 소식을 전해 듣고 티키코와 오네시모스를 그곳으로 보냅니다.
사도 바오로는 비록 감옥에 있지만 골로새 공동체를 세운 그의 제자 에파프라스(4,12)나 후에 그곳으로 파견했던 티키코스와 오네시모스 편(4,8)으로 그곳의 어려운 처지에 대한 소식을 여러차례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심정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 관한 소식을 들은 날부터
여러분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간청하고 있습니다.”(콜로 1,9)
사도 바오로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그 공동체가 영적지혜와 깨달음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모든 면에서 주님의 마음에 들 뿐 아니라 온갖 선행을 통하여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아는 지식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뜻을 또한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스런 능력으로 모든 것을 참고 견딜 수 있기를 사도는 격려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콜로 1.13-14)
루카는 예수님께서 요르단에서 세례를 받으시고(3,21-22), 광야로 가시어 사십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신 일(4,1-13)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으로 나자렛 회장에서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여러 회당을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을 쫒으실 뿐 아니라 병자를 고치시며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갈릴래아를 떠나 유다의 여러 회당을 다니시며 전도여행을 하십니다.(4,42-43)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군중을 가르치실 때에 호숫가에 배를 대어 놓은 두 척의 배를 보십니다.
주님께서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뭍에서 조금 저어 가달라고 하시고 배에서 군중을 향해 가르치십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사몬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라고 말씀하십니다.
시몬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주님의 말씀대로 하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가 잡힌 것입니다.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두 배에 고기를 가득해웁니다.
이것을 보고 시몬은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4,10)
그들은 배를 저어가 뭍에 대고 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사도 바오로가 자신을 가 본적이 없는 콜로새 공동체를 걱정하며 서간을 보내는 모습은 ‘어디서 저런 열정이 나오는 것일까?’라는 말과 함께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주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배에 오르시어 군중을 가르치시는 그 모습을 새겨봅니다.
하느님 나라 선포의 열정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이지요.
우리도 우리의 부족함에 머물지 말고 주님과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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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2.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솔직히 인정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참담한 실패의 새벽녘, 갈릴래아 호숫가, 허탈해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조용한 해결사로 다가오신 예수님,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시어 당신의 신성을 거침없이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크게 비교되고 있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너무나도 높은 벽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앞에 너무나 캄캄해 그저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산산조각 난 유리조각처럼 깨어지고 망가져 더 이상 손써 볼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인간의 끝에서 주님께서 시작하십니다. 놀랍게도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솔직히 인정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따라서 한쪽 문이 완전히 닫혔다 할지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아야하겠습니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다보면, 주님께서 조용히 우리에게 다가오시오 슬그머니 다른 쪽 문을 열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비참한 내 인생,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고 외치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조용히 다가오십니다.
나즈막한 목소리로 희망의 메시지를 건네십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열어주십니다.
‘철저한 실패로구나. 쫄딱 망했구나.’라며 좌절하고 울부짖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다가오십니다.
그저 함께 현존하십니다.
딱 한 말씀으로 그간의 어려웠던 국면을 180도 전환시켜주십니다.
다 끝난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조금 기다려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거짓말처럼, 기적처럼, 주님께서 다가오실 것입니다.
새 출발의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끝까지 희망해야겠습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의 삶에 대해 너무 쉽게 포기해버립니다. 너무 쉽게 체념해버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우리 삶에 개입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은 우리의 상상이나 능력 밖의 일들,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일들을 이루시기를 즐기십니다.
우리 삶이 아무리 하찮아보일지라도, 우리가 아무리 죄 속에 빠져있다 할지라도, 우리 나날이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일지라도, 결코 낙담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주께서는 이런 우리 삶에 기꺼이 참여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당신 뜻의 성취를 통해 우리에게 희망과 기쁨과 웃음을 선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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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2.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설교자의 포인트: 거기가 정말 물 반, 고기 반인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그물을 씻는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올라 설교를 하시고 다시 그물을 쳐볼 것을 권하십니다.
베드로는 그물까지 다 씻었고 밤새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자존심상 그렇게는 못 하고 자기주장을 펼쳐야 당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배에서 예수님께서 설교하시는 내용을 들어서인지 그는 순종해봅니다.
그러자 놀랄 만큼 많은 물고기가 잡혀 깜짝 놀랍니다.
그물을 칠 때는 그저 한 번 속아본다는 마음으로 친 것이 분명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설교가 설득력 있었다는 뜻도 됩니다.
모든 설교자가 지향해야 하는 방향은 ‘일단 한 번’ 해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확신하지 못하는 일을 해보도록 설득할 수 있을까요?
부모가 “난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너는 한 번 읽어봐!”라고 하면 아이가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한 번 해보겠습니다.”라고 할까요?
내가 해보고 확신이 생긴 것만 설득력을 가집니다. 설득하는 사람의 기본은 본인이 먼저 설득당했어야 합니다.
저는 한동안 물을 적게 먹는 것이 좋다는 것에 설득당한 적이 있습니다.
토끼는 풀을 먹으며 그 안에서 수분을 충분히 흡수한다고 합니다.
오히려 물을 마시면 병이 걸려 죽는다는 것입니다.
아기는 몸 안에 90%의 수분이 들어있어서 병균에 매우 취약하다고 합니다.
어른은 70%이지만 죽기 직전에는 50%까지 수분이 빠져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같은 용적 안에 백혈구와 같은 면역 세포들이 더 많이 활동할 수 있어서 모든 병균을 다 잡아먹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럽 인구의 1/3을 죽인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그냥 관에 넣고 묻은 사람들이 죽고 나서 관속에서 다시 깨어나 관을 긁다 죽은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묘지를 옮길 때 관속에 많은 시체가 손톱이 빠지고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 ‘드라큘라’로 여겨 심장에 말뚝을 박는 일까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간도 채소를 통해 수분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어서 굳이 소화액도 묽게 만드는 물을 마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도 신학생 때 유학할 때 4년 동안 거의 물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체중도 줄고 감기와 같은 것도 단 한 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았을 때 살 때문에 무릎이 좋지 않은 한 은퇴한 의사 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저기 몸이 아프다기에 건식식사를 제안해 드렸습니다.
물을 마시지 말아야 몸에 좋다는 이야기를 자신 있게 말씀드렸고, 그분은 사흘 동안 물 한 방울 마시지 않아 탈수증으로 구급차에 실려 갔습니다.
후배 의사들은 도대체 어떤 놈이 물을 마시지 말라고 했느냐고 추궁했지만, 그분은 함구하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물을 적게 마신 덕분에 나중에 통풍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물을 많이 마셔야 좋다고 확신하지만, 그때는 나의 확신이 의사 선생님까지도 전염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먼저 확신하면 많은 사람을 확신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확신이 물을 마시지 않는 게 좋다는 식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낚시하는 사람이라면 물고기가 많은 곳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이라면 하느님을 만나게 할 수 있는 포인트를 알아야 합니다.
제가 아일랜드에 영어를 배우러 갔을 때 고마우신 분들의 초대로 한 가정에서 두 달 동안 머문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저를 당신들 지인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는데 그분은 낚시에 도사셨습니다.
바닷가에서 낚시를 던지기만 하면 바로바로 커다란 돔들이 걸려 올라왔습니다.
그곳은 전복과 굴, 해초들이 많아서 밀물 때 돔들이 몰려든다는 것입니다.
그냥 던지면 올라오는 포인트였던 것입니다.
그것들을 잡아서 바로 바위 위에서 회를 쳐서 양주를 섞은 기네스맥주와 함께 먹었는데, 그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우러러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이런 포인트를 아시는 설교자셨습니다.
설교는 설교는 하나의 ‘도움의 은총’입니다.
도움의 은총은 생명의 은총을 지향합니다.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이 생명의 은총입니다.
예수님은 설교로 베드로를 설득하고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기적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포인트를 아셨기 때문에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바꾸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은 사람들을 어떤 포인트로 이끌어야 할까요?
그 포인트는 반드시 물 반, 고기 반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고 또 다른 복음 전파자가 됩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추천하는 것은 ‘기도-단식-자선’입니다. ‘마귀-육신-세속’을 이기기 위해 주님께서 추천하는 방식입니다.
자아를 벗어날수록 주님과 만남이 가까워지니 설교자는 일단 한 번 믿어보고 기도-자선-단식을 실천해보도록
유도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는 자선에 대해서는 ‘십일조’를, 절제에 대해서는 ‘단식’을, 그리고 기도에 대해서는 ‘성체조배’를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외도한다는 자매들에게 성체조배를 하루 한 시간씩 하라고 했더니 남편이 돌아오던가 자신이 남편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등의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당사자들이 더 큰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단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먼저 간헐적 단식으로 살을 빼니 주위 많은 분이 따라 하고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무엇보다 정신이 맑아지는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반만 먹으면 두 배로 오래 산다는 책도 있습니다.
십일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저는 신학생 때부터 십일조로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흘려보냈습니다.
그랬더니 돈이 부족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십일조는 모든 것이 주님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의 시작입니다.
제 유튜브에 ‘신 소화 데레사’란 분이 자신의 체험을 공유한 것이 있어서 함께 나눕니다.
“신부님 말씀처럼 십일조를 봉헌하니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 것 같고, 가진 것을 다 팔아 땅속에 보물이 묻혀 있는 밭을 사고 있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영적 서적구매나 성경공부, 성지후원 등을 할 때도 그런 것 같고요. ^^)
열등감을 채우려고 아이들 학원, 예쁜 옷, 더 큰 집, 좋은 차, 맛집 인증샷, 여행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을 땐
십일조를 내가 굳이 내야 하나, 내가 부자도 아닌데 하는 무분별한 상태였고 그땐 시기 질투로 늘 불안했고 화도 났고 성당에 가도 부담스러웠었습니다.
그런데 십일조를 봉헌하고부터는 주님께 받은 은혜가 많아 십일조를 낼 수 있는 게 감사하고
건강한 것도 감사하고 아이들이 공부 못하면 어떠냐 건강한 것만도 감사하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덤으로 아이들도 하느님께서 지혜롭게 잘 자라게 해주실 거란 믿음까지 키워주셨습니다.
제가 이쁜 옷을 하나 사 입어도 십일조를 봉헌하고 나서 사 입으면 마음이 편안하더라고요.”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게 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말씀으로 할 수 있는 한계는 바로 순종의 문 앞까지 데려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문을 열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손해 봐야 얼마나 되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옳은지 시험해 보도록 부추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자선-단식에 대해 설교하는 이부터 확신을 지녀야 합니다.
나를 설득하지 못한 것으로는 누구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저희 고모는 불교를 믿어 종교가 다른 저희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임종 직전에 제가 대세라도 드리려고 했더니 거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을 들여보냈더니 그때는 대세를 받아들이셨습니다.
내가 먼저 확신만 가지고 있으면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부터 기도-자선-단식을 실천하며 나 자신을 설득시킵시다.
그러면 나중에 그 경험으로 많은 이들을 설득시켜 신앙을 갖게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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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2.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두려움은 중요한 감정입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위기 상황이나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
두려움은 나를 보호하도록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늘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순간에도 두려움이 오지만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나를 넘어서는 놀라운 일에 그저 피하기만 한다면,
삶의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소중한 사람이 찾아와도 두려워 피한다면
그와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멀어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두려움을 바라보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것이 나를 위협하는 두려움인가?
아니면 새로운 세상을 향하는 망설임인가?
오늘 베드로와 동료들은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 피하려 했습니다.
자신들이 경험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에 응답한 베드로와 동료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새로운 세상, 곧 하느님과 함께 하는 충만함으로 나아가는
하느님 사랑의 손길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응답할 수 있었던 것은
두려움을 잘 식별했기 때문이며
예수님을 따랐을 때의 결실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함께 기도합니다.
우리 안에 찾아오는 두려움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손길과 마귀의 유혹을 식별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하느님 안에서 충만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참 제자가 되는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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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2.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베드로는 가장으로서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왠지 고기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일진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허탕만 치고 말았습니다. 때는 이른 새벽이나 이른 아침 무렵이 될 것 같습니다. 일단 배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배를 조금 뭍에서 옮겨가자고 하시면서 이동 후에 뭔가 가르침을 주셨다고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 말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깊은 곳에 내려서 고기를 잡아봐라고 말씀을 하셔서 그렇게 했을 뿐인데 그렇게 하자마자 그물 안으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얼마나 많은 고기를 잡았던지 루카복음사가는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라고 말할 정도라고 합니다.
이때 시몬 베드로는 그만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을 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이런 모습에 주위 다른 제자들도 놀아움을 금치 못했던 것입니다. 놀라움을 넘어서 베드로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시면서 이제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배를 다시 뭍에다 대어 놓고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은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게 오늘 전체 복음의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을 새벽에 묵상하면서 좀 이색적인 묵상을 해봤습니다. 베드로는 고기를 많이 잡은 것은 보고 왜 예수님께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는지 그 의문을 가지고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는 데 저는 오늘 복음 전체 묵상을 하는 데 할애를 했습니다. 그럼 저와 함께 떠나보실까요? 예전부터 이게 많이 궁금했는데 오늘은 그 해답을 마치 찾은 것 같습니다.
원래 갈릴리 호숫가에서는 고기를 잡으려고 하면 수심이 깊은 곳에서는 고기가 없다고 합니다. 실제 오늘날 연구를 해보면 그렇다고 합니다. 오늘날은 그렇다고 한다고 하고 그럼 그때 당시도 그랬을 거라는 전제를 두겠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질까요? 지금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밤새 고기를 잡는다고 애를 쓰고 허탕만 치고 내일을 위해서 그물을 손질하고 돌아갈 채비를 할 상황에서 주님의 말씀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상상을 해봅니다. 예수님 참 딱하십니다. 고기잡는 거라면 이 바닥에서 그래도 제가 잔뼈가 굵은 사람인데 지금 깊은 곳은 더군다나 고기가 지나가는 길도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고기가 없는 곳인데 그런 곳에다 그물을 내리라고 하시니 그게 말이나 될 법이나 하신 말씀인지 하고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을 겁니다.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묵상이니 정황상 그럴 개연성이 높습니다.
그랬는데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고기가 많이 잡히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한평생 고기를 잡아왔던 그들 나름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무릎을 탁 치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잠시 되돌아가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잘 보면 예수님께서는 배를 조금 이동하신 후에 뭔가 가르침을 주셨다고 하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신 연후에 그물을 내리라고 지시를 하셨던 것입니다. 복음에는 단지 이 사실만 언급됐지 무슨 가르침을 주셨는지는 언급돼 있지 않습니다.
저의 오늘 복음 묵상의 단초는 여기서부터 사실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추측컨대, 여기서 예수님은 ‘순종과 죄’에 대한 설교를 잠시 하셨을 거란 묵상을 해봅니다. 제가 그런 추론을 하게 되는 배경은 고기가 잡히지 못할 장소에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 말씀에 베드로는 자기의 생각과는 맞지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을 했는데 고기가 많이 잡히게 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배운 게 없었지만 아마도 영적인 감각은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이해는 되지 않지만 단순히 생각해보면 그건 그렇다치고 지금 당장은 먹고 사는 세상적인 기준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냥 그런 현상을 이상한 현상이라고 치부를 하고 말았다면 복음에 그런 내용이 담긴 의미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겁니다.
근데 베드로 사도는 달랐습니다. 바로 그 현상을 영적으로 바라보는 깨달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기의 교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보다도 고기를 잡는 것만큼은 예수님보다 더 월등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랬던 그 자신보다도 더 예수님이 고기의 물길을 꿰뚫고 계시다는 걸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잠시나마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던 그 마음을 가지고 뉘우친 것 같습니다. 달리 죄인이 아니라 그런 불손한 마음을 가진 게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베드로 사도는 순박했던 것 같았습니다. 아니 할 말로 그냥 이렇게도 넘어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안면몰수하고 “오늘 예수님 덕분에 고기를 많이 잡게 됐습니다.”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베드로 사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그런 기적도 기적이지만 그 속에서 바로 예수님의 신성을 발견할 수 있는 영안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생업을 던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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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2.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cpbc TV. 매일미사
https://youtu.be/Q3oo4wPUyFo 33:28
2021. 9. 2.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강규원 토마스아퀴나스 신부 (서울대교구 성산2동 본당 보좌)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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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2.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제1독서 (콜로1,9-14)
"또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에서 오는 모든 힘을 받아 강해져서,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 내기를 빕니다. 기쁜 마음으로 (11) 성도들이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분에게 주신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12)
주님께 합당한 콜로새 성도들의 구체적인 삶을 위한 사도 바오로의 세번 째 기도 제목은 하느님의 영광의 힘을 받아 강하게 되는 삶이다.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에서 오는 힘'에 해당하는 '토 크리토스 테스 독세스 아우투' < to kratos tes dokses autu ;his glorious might(power)>라는 표현은 하느님 자신 속에 존재하는 내적 능력 혹은 감추인 위엄을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영광 속에 존재하시는 당신 자신(이사33,17)을 나타내 보일 때에 형체가 아닌 힘으로 나타내신다(탈출19,16-25; 신명4,12.15).
여기서 '힘'을 나타내기 위해 쓰인 '크라토스'(kratos)는 신약에서 12번 사용되었는데, 그중에 인간에 대해 사용된 것은 한번도 없고 마귀에 대해 사용된 한번(히브2,14)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느님께 대해서만 사용되었다.
이런 용례에서 살펴보면, 이 단어는 단순한 물리적 힘이 아니라 권능과 권세를 나타낸다. 본문에서는 하느님께서 영적 존재이신 당신 자신에게만 있는 그 권능(크리토스)을 따라 당신 백성들을 모든 힘(뒤나미스; dynamis)으로 능하게 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
여기서 '강해져서'로 번역된 '뒤나무메노이'(dynamumenoi; strengthened)의 원형 '뒤나모오'(dynamoo)는 '권한을 부여하다', '강하게 하다', 말하자면 연약한 가운데 있는 어떤 것을 강하게 만든다는 뜻이다(히브11,34).
본문에서는 현재분사로 쓰였는데, 이것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신앙의 여정 내내 지속적으로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원문은 2인칭 복수 수동태로서, 성도들이 능력을 계속적으로 공급받음으로써 내적 심령이 하느님에 의해 강해지는 것을 보여준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온전히 추종하는 자들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을 상기시키거나, 또는 성령님의 역동적 활동을 통해 그들을 강하게 하신다.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 내기를 빕니다. 기쁜 마음으로'
본문은 전치사 '에이스'(eis; so that ~ may~)를 통해 앞 문장과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강한 힘을 의지하는 믿음의 소유자들은 어떠한 어려움과 환난 가운데서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잃지 않고 인내하게 된다는 것이다.
방향이나 결과의 의미를 지닌 전치사 '에이스'(eis)로 시작하는 본문에서 '에이스'는 결과의 의미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권능을 따라 능력으로 가득한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고 인내하며,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야고보 서간 1장 2-4절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때에 기뻐하라고 권고했듯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시련과 시험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마지막 승리를 바라보며 담대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보다 더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인격으로 성숙될 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견디어 내기를'로 번역된 '휘포모넨'(hypomonen; patience)의 원형 '휘포모네'(hypoone)는 '~아래에'(under)를 뜻하는 전치사 '휘포'(hypo)와 '머물러 있다'(remain)를 뜻하는 동사 '메노'(meno)에서 유래한 합성어로서 환경적 어려움에 굴복하거나 피하지 않고 그 환경에 적극적으로 맞서면서 견디어 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참고'로 번역된 '마크로튀미안'(makrothymian; longsuffering; endurance)의 원형 '마크로튀미아'(makrothymia)는 대인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 가운데서 복수하지 않고 오래 참는 모습을 가리킨다.
사도 바오로가 구체적으로 기도하며 바라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한 삶의 세번째 모습은 어떠한 환경적 또는 대인 관계의 어려움 앞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권능의 힘을 받아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기다리는 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만을 신뢰하는 자가 가지게 되는 강한 능력이고 힘이며, 동시에 흔들림없는 모습이다.
'성도들이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 주신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 합당한 삶을 사는 콜로새 성도들의 구체적 삶을 위한 사도 바오로의 마지막 기도 제목이 나오는데, 그것은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삶이다.
여기서 '빛의 나라에서'로 번역된 '엔 토 포티'(en to poti; in light)는 '빛 안에서'라는 뜻으로 하느님의 영광, 은총, 사랑 등과 같은 개념이며 종말론적으로는 빛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사도 바오로가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성도들이 빛의 나라에서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주셨기 때문이다.
'상속의 몫을'로 번역된 '텐 메리다 투 클레루'(ten merida tu klleru; the partakers of the inheritance)에서, '상속'(기업)으로 번역된 '클레루'(klleru; inheritance)의 원형 '클레로스'(klleros)는 구약적 개념으로 제비뽑기로 얻게 된 '몫', '분깃'을 뜻한다.
이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입성하면서 분배받은 땅과 관련된 표현이지만, 신약 이후로는 구원 및 마지막 종말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된 상급을 상징한다.
사실 모든 성도들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러한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고, 하느님의 계명을 그 사랑에 대한 사랑으로 응답하며 믿음을 실천하는 자들에게 이러한 분깃이 허락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진 이러한 은혜로 말미암아 자연적으로 감사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감사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동인 동시에 사도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을 생각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이 감사 ('유카리스툰테스; eucharistuntes; giving thanks)인 것이다.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복음(루카5,1~11)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스승님'에 해당하는 '에피스타타'(epistata; master)는 신약 성경에서 루카 복음사가 만이 사용하는 독특한 단어이다(루카8,24.45; 9,33.49; 17,13).
루카 복음사가는 일반적으로 '선생'(teacher)에 대한 묘사로서 사용되는 '디다스칼로스'(didaskalos)나 율법 교사에 대한 존칭어인 '랍비' (rabbi)라는 단어보다는 '에피스타타'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에피스타타'는 다른 사람보다 신분이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권위를 나타내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 17장 13절의 나병 환자 열 사람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제자들의 입으로 고백된 경우처럼, 이 용어는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개인적 인식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도 베드로는 다만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권위를 느껴서 예수님을 '에피스타타'로 불렀다.
그러나 이 호칭은 기적의 체험 후에는 신앙 고백적 호칭인 '퀴리에'(kyrie) 즉 '주님'(Lord)으로 바뀐다(루카5,8).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이 구절은 베드로의 믿음과 순종의 태도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그러나'로 번역된 접속사 '데'(de)는 여기서 'but' 혹은 'nevertheless'의 의미를 지닌다.
말하자면, 전문 어부로서 고기잡이와 관련된 갈릴래아 호수에 대한 사정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며, 전날 밤 밤새도록 그물질을 해보았지만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고, 또 날이 밝은 아침(오전)에 고기가 없는 깊은 데로 저어 가서 그물을 내린다는 것도 상식에 맞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지가 베드로에게 있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전폭적인 순종의 의지는 '제가 ~내리겠습니다'로 번역된 '칼라소'(chalaso; I will let down)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단어는 미래 능동태 동사로서 자신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는데, 마지 못해서나 억지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순종을 하겠다는 베드로 개인의 의지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말씀대로'에 해당하는 '에피 ~ 토 레마티 수'(epi ~ to remati su; at your word; because you say so)는 '당신의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뜻이다.
여기서 '스승님의 말씀'은 루카 복음 5장 4절의 명령 뿐만 아니라 5장 3절에 기록된 '가르침의 말씀'까지 다 포함되는 것이다.
즉 베드로는 자신의 배 위에서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고, 거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고 진실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기에,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해야 하겠다는 모종의 결심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깊은 데로 저어 나아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5,4)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떄, 베드로는 그 명령이 비상식적으로 들렸으나 즉각적이고 능동적으로 순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 in spite of)의 믿음과 그 믿음은 바로 주님의 가르침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이기에 능동적으로 기쁘게 순종하는 믿음은, 평소 주님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과 주님의 성품과 덕성을 체험하지 않고는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성숙한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듣고, 전폭적으로 믿고 따르겠다는 의지와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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