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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의 문이라(요10:1-10)
우리가 유대나라 하면 우리는 양들이 초원에서 뛰놀고 목자들이 양을 이끌면서 이 언덕 저 언덕을 넘어 다니는 그런 목가적인 분위기를 연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스라엘에 가보면 양 있는 곳은 유대광야 뿐입니다. 요즈음에는 목자와 양이 어울려 다니는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성지순례에 갔을 때 목자와 양은 유대광야나 가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살고 계실 당시에는 예루살렘 주변과 갈릴리 일부 지역이 목초지로서 유명했습니다. 많은 목자들이 자기 양을 끌고 유유히 걸어 다니면서 풀을 뜯기고 물을 먹이는 그런 평화로운 모습들을 어디서든지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오늘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신 비유는 당시 사람들에게 전혀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익숙한 말이었기 때문에 왜 저런 말씀을 하실까 하고 그들이 의아해 했을 정도였습니다.
목자들은 하루종일 양을 먹이고 나서는 해가 기울고 어두움의 그림자가 다가오면 자기 양들을 몰고 공동우리로 온다고 합니다. 형편이 넉넉한 사람은 자기 개인 우리를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목자들은 여러 가정이 합해서 공동우리를 만들어놓고 양들을 그 우리 속에다 집어넣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돌담을 사각형 모양으로 둘러 만드는데 거기에는 문이 하나 있습니다. 목자들이 양떼들을 문으로 다 들이고 나면 목자들이 양 우리의 출입구에 누워서 밤새도록 양떼를 지켰습니다. 그래서 목자를 양의 문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아침이 되면 목자들은 하나 둘 나와서 문지기의 확인을 받고 우리 안에 들어가서 자기 양을 부릅니다. 수십 혹은 수백 마리 양 가운데서 눈으로 자기 양을 구분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자기 양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를 냅니다. 그러면 그 목자가 자기 목자라는 것을 아는 양들은 전부 그 목자 앞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참 멋있는 풍경입니다.
자기 양의 수가 조금 적은 경우에는 가끔 양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목자의 소리를 듣고 그 목자의 양들은 전부 모인다고 합니다. 이제 목자가 문을 나와서 초원을 향해 가면 그 목자의 양들만 우르르 따라 나갑니다. 그러면 또 다른 목자가 와서 자기 양들을 마찬가지 방식으로 불러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배경을 알면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양의 문에다 비유하시는 의미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막연히 생각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깊은 의미가 담겨있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본질적인 진리가 그속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은 왜 예수님이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는가를 깊이 깨닫고 그 은혜를 다시 한번 맛보기를 사모하는 시간이 되어야겠습니다.
왜 예수님은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실까요?
1. 자신이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그렇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들은 목자를 통해서만 양의 우리를 출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의 문이 되시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10절은 그 의미를 조금 더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10절,“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생명을 얻게 한다'는 말은 '구원을 얻게 한다'는 말을 쉽게 표현한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예수님은 우리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는 구원자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 치고 구원이 필요하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대부분 칠 팔십 년이면 다 소진해서 없어지고 말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육신의 생명은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육신의 생명은 일시적인 생명이요, 불완전한 생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영원히 사는 영혼이 있습니다.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 넣어주셔서 창조된 인간이 왜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습니까?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간단하고도 명확합니다. 죄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은 이 진리를 간결하고 또 확실하게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한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의 노예가 되었고, 그 결과 모든 사람 위에 죽음이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씨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에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의 씨를 안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한 사람의 예외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구원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못 속입니다.
제 아무리 죄인이 아닌 것처럼 가장해도 속이지 못합니다.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재물을 쌓아 놓고 있다고 해도, 성자나 위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다 해도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은 절대 숨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죄가 지금 온 세상을 뒤엎고 있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살기 좋은 시대가 되었어도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더욱 지능화되고 더욱 잔인해지고 더욱 노골화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만일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하면 단순히 육신의 생명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값을 하나님 앞에서 받아야 되는 무서운 형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나이가 얼마인지 상관이 없습니다.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상관이 없습니다. 재물이 많고 적은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한 사람의 예외없이 다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구원 못 받으면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 힘으로 받을 수 있습니까? 노력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노력하면 영적인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다시말하면 우리의 노력으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는 이미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입니다(엡2:5).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입니다.
시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시체가 스스로 몸부림친다고 살아납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한다고 구원받습니까? 천만에요. 우리가 노력한다고 영적 생명을 얻습니까? 천만에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만나야 됩니다. 구원의 문이 되신 예수님 앞으로 와야 됩니다. 그리고 그문을 들어가야 합니다.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영적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를 믿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고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생명의 씨를 심어 주십니다. 그 생명이 우리 안에 자리를 잡음과 동시에 우리 눈이 열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의 귀가 열려 드디어 우리의 구원자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게 됩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는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우리를 부활하게 하실 때 이 생명으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문이 되십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로 확실히 믿지 못하고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주님께서 오늘 귀한 말씀을 바로 여러분에게 들려주셨다고 봅니다. 예수님을 지금 이 시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요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그렇습니다. 진정으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늘도 사랑하는 여러분들을 오라고 부르십니다. "나에게 오면 내가 영생을 주겠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놀라운 구원을 주시는데 여러분이 돌아서면 안됩니다. 우리 모두 다 구원을 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중에 예수믿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도제목입니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권면하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 생명의 복음이 절실하게 필요한데 그것을 안다면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그들도 값없이 얻는 축복을 누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만이 세상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행 4: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이 세상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양의 우리에는 문이 하나밖에 없습니다.(요 10: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만일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담을 넘어가면 그는 강도요 절도입니다.
(요 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자기보다 앞에 온 모든 사람은 강도요 절도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예수님 당시에 자칭 '메시야'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던 사람들을 두고 강도요 절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양우리의 문은 하나 뿐입니다. 누구든지, 심지어 목자라 해도 그 문으로 들어와야 됩니다. 양이 그 문으로 들어가야 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문 말고는 우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담을 넘어가는 자는 참 목자가 아니라 강도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을 보십시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믿고 따르는데, 세상사람들은 바로 이것 때문에 독선주의니 배타주의니 하며 기독교를 비방합니다.
그들 생각에는 다원주의 사상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이 종교에도 구원이 있고 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따라서 어느 종교를 믿든, 그 종교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면 좋겠는데, 기독교는 유달리 타종교를 배척하고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구원자라고 주장하니 독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인들 중에는 이런 독선이 싫어서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리는 하나입니다. 타협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각 종교에는 나름대로의 훌륭한 가르침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수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억지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진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나 말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양보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독선이 아닙니다. 바른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말하는 것이 바른 진리라면 설혹 그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이나 미움을 받는다 해도, 심지어 순교를 당하게 된다 해도 우리의 주장을 굽히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훌륭한 장로였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유대 당국자들에게 체포되어서 재판을 받을 때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가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 솔직하게 말하라." 이에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라 뜻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 못된 놈, 참람하고 건방진 놈."하고는 야고보를 끌어다가 저 높은 벼랑에서 집어 던졌습니다. 야고보는 그렇게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라고 하는 것은 그것 때문에 순교를 당한다 할지라도 굽혀서는 안될 진리라는 것을 여러분이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만이 구원자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상하는 분이 계십니까? 관용이 많고, 너그러운 것은 좋은 일이지만 진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타협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하인간에게 구원을 얻은 말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영생의 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신 구원자이십니다. 이것은 변함이 없는 지리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이 사실에 대해서 확신이 없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신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3.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가 그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구원 곧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꼴을 얻는다"는 말은 쉽게 말해 푸른초장으로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께로 출입하는 자는 푸른 초장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좀 더 다른 비유로 설명하는 것이 10절입니다.
10절 중간을 보십시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예수님은 우리를 구원시켜 줍니다. 하늘의 생명을 주십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가 그 생명을 더 풍성히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려놓고 손을 떼시는 분이 아닙니다. 물에서 건져 주고는 "이제 당신 맘대로 하시오."하고는 일어나지도 못하는 사람을 그대로 눕혀 둔 채 그 자리를 떠나는 냉혹한 구조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셨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두들겨 맞고 다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의 몸에 포도주와 기름을 붓고 싸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당신이 알아서 집으로 돌아가시오."하고 일어나지도 못하는 사람을 그대로 내 팽개치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약대에다가 그 환자를 싣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간호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공무상 부득불 떠날 수밖에 없게 되자 그는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어 자기 대신 건강을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간호해 달라고 신신당부하고 떠났습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곧 예수님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는 손을 털고 나 몰라라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이 우리 안에서 풍성하도록 계속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한번 마음속에 양의 문을 드나들면서 목자를 따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함을 받는 양의 행복한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다윗은 그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그가 나를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2). 날마다 목자를 따라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으며 생명의 풍성함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날마다 풍성한 은혜가운데로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신다는 말을 오해하고는 예수님께서 만사형통케 하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십시오. 예수를 믿었다고 만사형통한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현실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믿고 만사형통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어리석은 짓은 절대 안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나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만사형통하게 되면 영적인 생명이 건강해지기보다 병들어 버릴 가능성이 십중팔구로 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사형통하게 해 주시지는 않으시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보십시오. 그렇게 권능있는 사역자로서 순교적 신앙을 가지고 선교사사명을 감당하셨지만 육체의 가시라고 하는 질병이 늘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세 번이나 기도했지 않았습니까? 그 응답은 이것이었습니다. 고후 12:7-9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좋으니까 만사가 형통하다는 말은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시험은 감당할 수 없는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자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환란이 와도 찬송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코 환경에 눌린 자가 아니라 환경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영권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의 빛되신 예수님이 너희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는 것입니다.
또 주님은 우리가 그 문으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면 그 생명의 풍성함을 맛본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손에서 은혜의 말씀을 열심히 받아먹고 성령의 생수를 맘껏 들이키며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날마다 받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활력이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저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처럼 영적인 식물일 수 없습니다. 바드시 교회생활이나 하고 아무런 영적인 생명을 누리지 못하면 그는 영적으로 병든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생명이 과연 풍성한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불안이 있습니까? "주여 믿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불안이나 두려움이 떠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자유함이 없습니까? 번번이 죄의 유혹에 넘어가 죄에게 끌려 다닙니까? 그런대로 살고 있는데도 만족함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생명은 아직 어린 생명입니다
영적 생명이 어리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얻어야만 평안과 자유와 만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생명이 더 풍성해지면 우리는 젊은이들과 같이 약동하는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생명과 더불어 우리의 믿음 역시 매우 풍성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설혹 내가 원하는 대로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도 우리 마음에서 평안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만족합니다. 어떻습니까? 영적 생명이 풍성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원하는 것이 손에 다 들어오지 않아도, 바라는 것이 다 이루어지지 않아도, 어떤 경우에는 고통이 떠나지 않아도 그것이 그 사람을 억압하지 못합니다. 그 생명의 불을 끄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는 늘 평강이 가득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고 믿으니까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절대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서 모자라는 것도 많지만 자족합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이 그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많이 받아 먹으시기 바랍니다. 순간순간 주님을 생각하면 영적 교제를 통해 성령의 생수를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우리가 매일매일 받다보면 주님이 나에게 심어주신 생명이 점점 더 풍성해집니다. 그러다 보면 이제 보이는 세상의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 나를 다스리게 될 때 진정한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강이 내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누가 범하겠습니까?
그 사람을 누가 꺾어 놓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데도 기뻐하고, 찬송하고, 감사하고, 자유하는 사람을 누가 감히 범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그 사람만큼 강한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 모두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좀 더 풍성한 삶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