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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그리스도인
23: 1-9
1.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2.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3.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찌니라
4.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찌며
5.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찌니라
6.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
7. 거짓 일을 멀리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9.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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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 국내의 최대 뉴스는 현대 자동차 정몽구 회장의 구속사건이었을 것입니다. 1200억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우리나라 제 2의 재벌 총수가 구속된 사건은 분명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검찰은 정회장 구속을 앞두고 여러 가지 고심을 한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혹시라도 어려운 국가 경제가 더욱 어렵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재벌 총수를 구속하는데 신중을 기하다가, 재벌 봐주기라는 국민들의 또 다른 여론을 의식해서 급기야는 정회장 구속이라는 결단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과 사법부의 공정성을 보여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시민법 중 오늘의 본문은 재판의 공정성에 대한 규례들입니다. 본문은 특별히 법정에서 재판이 진행될 때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죄악들을 금지하고 있는데, 이는 법정은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입니다. 재판 관련 규례 중간에 원수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평화롭고 살기 좋은 질서 있는 사회를 만드는 힘이 바로 사랑의 실천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교훈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에 보면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함께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허망한 풍설’이란 ‘헛된 소문’ 또는 ‘거짓된 소문’을 말합니다. 즉 일종의 유언비어로서 특정한 사람을 비방하고 그 사람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거짓으로 만들어 낸 이야기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풍설은 그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어 헤어나기 어려운 곤경에 처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 사람을 해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그 사람에 대하여 악의에 찬 소문을 만들어 퍼뜨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허망한 풍설을 특히 선거철에 많이 듣게 됩니다. 선거철만 되면 상대방을 무함하기 위해 조작된 무슨 북풍이니 총풍이니 병풍이니 하는 풍설들을 우리는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허망한 풍설은 단지 어느 개인만을 해치는 것이 아닙니다. 허망한 풍설은 사회 전반에 걸쳐 불신 풍조를 유발시켜 그 사회 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허망한 풍설은 사회적으로 볼 때 어떤 총칼이나 폭력보다 무섭고 사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직 진실만을 말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진실만을 말하게 될 때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눈앞의 유익을 위해 거짓을 말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에게도 해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거짓말로 결국은 자신을 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해치기 위하여 무함하는 말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피터 대제는 자기 앞에서 남을 비방하는 신하가 있으면 그의 입을 가로막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건 그렇고 그 사람에게 좋은 점은 없는가? 경이 그 사람에게서 발견한 뛰어난 점이 있거든 들려주시오. 나에게 진흙을 튀기긴 싫소. 짐은 그러기 보다는 다른 사람의 옷에 묻은 진흙을 깨끗이 터는 일을 도와주고 싶소.” 사랑하는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 여러분들도 남을 무함하는 말로 그 인격에 먹칠을 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오히려 그 사람에게 있는 좋은 점을 찾아서 그 인격에 묻은 진흙을 깨끗이 털어주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절에 보면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런 규례를 말씀하신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는 다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악들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다수의 여론에 따라 악을 행한 예는 허다합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유대 군중들의 소리 앞에 굴복했던 빌라도의 판결은 가장 유명합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 일을 행하기 때문에 그것이 악이라고 생각지 못하고 부지중에 악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고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금송아지로 우상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 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악인 줄 알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따라하지 않으면 자신이 해를 입지 않을까 염려하여 함께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아론은 금송아지로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이 죄인 줄 알면서도, 많은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사회 속에서 살다가 보면 이런 일들을 아마도 자주 접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다수가 행동하면 따라 하고, 손해를 입는 것이 두려워 잘못인 줄 알면서도 악을 행하시겠습니까? 우리는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의 기준은 ‘다수가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수로부터 불이익을 당하지 않은가?’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의 행동 기준은 오직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것인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행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면 결코 하지 말아야 하며, 아무리 많은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불이익을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름 받은 성도들의 올바른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3절에 보면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찌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가난한 자’란 물질적으로 빈핍한 사람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약자나 소외된 자들까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편벽되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어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라’는 말씀은, 가난한 자에 대한 동정심이나 관심 때문에 무조건 가난한 자의 편에 서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는 재판관이 재판할 때 가난한 자이며 사회의 약자라고 단지 그 이유만으로 그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
려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즉 법정에서는 빈부에 관계없이 반드시 공의가 실현되어야 함을 말씀한 것입니다. 재판관은 자신이 동정심이 많고 선량한 자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편을 들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판관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으며, 항상 그 시선을 정의와 진실에 두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 역시 덮어놓고 부자의 편을 들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가난한 자의 편을 들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 양심에 따라, 가난한 자이든 부자이든 가리지 말고 오직 공정하게 대해야 할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 돌릴찌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찌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원수에 대해서 사랑을 베풀라는 가르침으로 성경 전체에 걸쳐 자주 나타나는 교훈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또 다른 관점에서 이런 규례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한 사회를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원수나 평소에 미워하는 사람이 곤경에 빠진 것을 보고도 모른 척하고 지나간다면 상대가 어떤 마음을 품겠습니까? 아마도 자신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상대에 대해 또 다른 미움과 복수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복수할 기회를 노리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원수나 미워하는 사람이 곤경에 빠졌을 때 도움을 준다면, 상대도 잘잘못을 떠나 결국 서로 관계가 개선되어 다시금 좋은 사이가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한 사회를 평화롭게 만드는 것은 강압적인 힘이나 무서운 법과 형벌이 아닌 오직 사랑의 실천인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에는 잘 발달된 법이 제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법을 어긴 사람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형벌이 집행됩니다. 그런데도 갈수록 범죄가 늘어갈 뿐 아니라 사람들은 더욱 흉폭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 줍니까? 사람이 만든 법과 형벌로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거 해줍니다. 이 세상을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은 사랑의 실천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고 감싸 준다면, 그는 반드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철천지원수이고 미워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사랑을 베풀 때에는 그 마음속에 미움이 눈 녹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유럽 대륙을 제패한 바 있는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평생을 걸쳐 총과 칼과 대포로 이루지 못한 세상 정복을 예수 그리스도는 단 삼일 만에 이루어냈다. 바로 그의 사랑의 힘으로!” 그렇습니다. 사랑이야말로 불신과 다툼, 미움과 복수심을 정복하고, 이 세상을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구속의 은총을 입은 우리가 먼저 사랑을 실천함으로 세상이 보다 살맛이 나는 세상이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6절에 보면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라고 했습니다. 이는 3절의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가난한 자를 동정하여 부당하게 편들지 말라는 말씀과 반대로,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그들을 무시하고 부당한 판결을 내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규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사람이란 그의 경제적인 능력이나 사회적인 지위, 또는 외적인 능력과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서 모두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외모를 보고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진 채 대하지 말고,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해야 합니다. 물론 오늘날 세상의 법률도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회 속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차별들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민주적이라는 미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흑인과 백인간의 인종 갈등입니다. 이것의 가장 큰 요인은 사회가 백인과 흑인을 차별 대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를 보아도 이런 일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그 사람이 어떤 지방 출신인가? 또는 어떤 학교 출신인가에 따라서 차별 대우하는 것입니다. 또한 배운 사람들은 못 배운 사람들을 무시하고, 돈 있는 사람들은 가난한 자를 무시하고,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은 자기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무시하고, 힘 있고 잘난 사람들은 약하고 못난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거스르는 죄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난한 자이건 부자이건, 배웠건 배우지 못하였건, 아무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시며 존귀한 하나님의 창조물로 여기십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외적인 조건들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며 차별하는 것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그를 공평하게 대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견으로 그들을 바라보지 말고, 나와 똑같은 존재로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재판관은 절대로 뇌물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밝은 자’란 날카롭게 사리를 판단하는 자란 뜻이며, 이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 잘잘못을 가리는 명석한 재판관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의로운 자’란 부당한 판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시정을 촉구할 만큼 깨어 있는 양심과 용기를 겸비한 법관을 말합니다. 그런데 뇌물이란 이 양자를 모두 망하게 합니다. 즉 뇌물을 받기 전까지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무흠하게 행하기를 힘썼던 자들이, 뇌물을 받고부터 진실을 제대로 인정치 않고 그릇된 판단과 비뚤어진 재판을 일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뇌물은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하고, 명철한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어서 결국에는 그를 죽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뇌물을 절대로 받지 말라’고 명함으로써 뇌물의 유혹은 처음부터 아예 멀리해야 하고 또 단호히 물리쳐야 할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뇌물을 주고받는 일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뇌물 공화국이라는 부끄러운 말도 있습니다. 가장 공정해야할 법정에서까지 ‘유전 무죄 무전 유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뇌물이 성행합니다. 실제로 재판관들이 뇌물을 받고 부당한 판결을 함으로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인들이 뇌물을 받고 특정한 사람에게 특혜를 줌으로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 중에서도,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에서도 뇌물이 성행하고, 그로 인해 군인과 교사들이 불의한 일을 저지름으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직장에서 뇌물을 받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일들이 암암리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뇌물은 처음에는 '선물'이란 이름의 탈을 쓰고 접근해옵니다. 그래서 선물인지 뇌물인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뇌물과 선물은 엄연히 다릅니다. 선물이 ‘선’뜻 주는 것이라면 뇌물은 '뇌'를 굴리며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어떤 기대 효과를 바라고 미리 주는 것이라면 틀림없이 뇌물입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뇌물에 경고가 많습니다.
욥 15:34에 보면 “사곡한 무리는 결실이 없고,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은 불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는 어떤 일이 있어도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성도가 누구입니까?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 보여야 할 사명을 받은 자들이 아닙니까?
그런 우리가 뇌물을 받고 불의한 일을 저지른다면 어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우리가 은밀하게 뇌물을 주고받음으로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더럽고 부정한 손을 다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어떤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절대로 뇌물을 받지 말고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하여 공의롭게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공정한 재판에 관한 교훈들입니다. 즉 재판의 과정에서 송사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의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또한 부자이거나 가난한 자이거나를 막론하고, 신분에 관계없이 공정한 재판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조선 세종 때 문신 정갑손은 곧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일찍부터 임금의 두터운 신망을 얻었습니다. 왕에게 강직함을 인정받아 좌승지로 발탁된 뒤 예조참판, 이조판서, 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거치고 중종 때는 청백리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는 나라 일뿐만 아니라 집안에서도 강직한 성품으로 식솔들을 단속했으며,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감사로 임명되어 함경도에서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한번은 임금이 그를 불러 한양에 다녀오느라 잠시 관헌을 비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보고서가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보고서를 보자마자 책임자를 불러다 야단을 쳤습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고을 관리를 뽑는 시험이 있었는데, 합격자 명단에 공부를 썩 잘하지 못하는 자신의 아들 이름이 올라와 있었던 것입니다. 감사의 아들을 낙방시킬 수 없었던 시험관들은 눈치를 보며 정갑손의 아들을 합격시킨 것입니다.
정갑손은 시험관을 문책했습니다. "평소 우리 아이가 학업에 충실하지 않음을 내가 잘 아는데 어찌 요행으로 임금과 백성들을 속일 수 있겠는가? 자네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이것은 직무를 태만히 한 것이다." 결국 그는 시험이 공정하지 못한 것을 지적해 아들의 합격을 취소시켰습니다. 그리고 부당하게 채점을 한 시험관에게 관리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내쫓고 말았다고 합니다.
중국에 전해 내려오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진나라 기해가 나이 많아 수상자리에서 물러날 때 진왕 도공이 그에게 후임 수상을 천거하도록 했습니다. 그 때 기해는 평소 자신의 정적이었던 해호를 추천했습니다. 왕은 깜짝 놀라 “해호는 그대의 원수가 아닌가. 어찌 그를 후임 수상으로 추천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 말에 기해는 “왕께서 신에게 물은 것은 이 나라의 수상될 재목이 누구냐는 것이요, 신의 원수 되는 이가 누구냐를 물은 것이 아니므로, 신은 왕께서 물으신 뜻에 합당한 자를 추천한 것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에 왕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해호 이외의 적임자는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기해는 “그 다음은 오가 적임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왕은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이유는 오는 해호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해호의 아들 오는 당대 최고의 재상감이었습니다. 왕은 기해의 공평무사에 탄복하고 기해의 조언과 충언을 훗날에도 수용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던 사람들 중에도 이렇듯 공정하고 공평무사한 사람들이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어떻게 살며, 주님의 교회를 받들어 섬길 때 어떤 자세로 섬겨야 하겠습니까? 우리 모두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판단하는 것이 항상 공정한 것이 되기를 바라고, 그리고 교회의 일을 할 때에도 치우치지 않고 깨끗하고 공정한 마음의 자세로 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