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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4:1-3 내 의의 하나님이여 : 칼빈
다윗은 본 시편의 처음 부분에서 하나님께 도와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다음에 곧이어 그의 원수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에 대한 승리자로서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본을 통해서 우리가 역경에 짓눌리거나 아주 큰 고난에 부딪칠 때마다 구원의 소망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심사숙고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 방패로 우리 자신을 방어하면서 우리에게 공격을 가해 오는 모든 시험을 때려부수고 통과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 줍니다.
1. 본 시편의 표제는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네기놋)에 맞춘 노래"입니다.
본 시편의 작성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맥을 보면 이 때 다윗이 도망자나 망명객이었지 않나 추측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기를 다윗이 사울의 박해를 받던 시기로 봅니다.
하지만 이것을 압살롬의 음모에 쫓긴 나머지 도망하면서 안전을 추구하던 때로 보아도 우리는 그 문제로 논쟁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까지'(3절) 라는 표현에서 그가 장기간 시련을 겪은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런 표현을 사용하므로 우리가 이미 제시한 견해가 더 타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그의 원수가 되기 시작한 때부터 완전한 구출을 받을 때까지 숱한 시련을 당한 사람입니다.
본 구절에 니오는 단어에 대해서는 한두 가지만 간단히 언급하겠습니다.
혹자는 (람네차)를 '영원히'로 번역하면서 이것이 본 시편의 운율에 맞춘 노래의 시작으로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억지해석이므로 배척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좀더 실질적인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메네차)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능가하고 그 위에서는 탁월한 사람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주석가들 사이에는 여기서 이야기되고 있는 특수한 종류의 탁월성과 위엄에 대해서 일치된 견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악단의 지휘자나 그 악대장(president)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으로 우리는 만족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정복자'로 번역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본 시편의 주제에 일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동일한 히브리어가 나오는 다른 곳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편 4 편
우리는 둘째 단어 네기놋이 켜다, 또는 소리내다 라는 뜻의 (나간)에서 오는 동사이므로 그것이 하나의 악기였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본 시편은 음성뿐 아니라 악기에 맞추어 노래부르도록 지어진 것입니다.
또 이것은 악장에 의해서 지휘되고 통제되었다는 결론이 따릅니다.
2. 본문 1절은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입니다.
1) 이 말씀에는 더 없는 고통을 받은 다윗 아니 그보다도 계속되는 재난에 완전히 거의 압도되고 만 다윗이지만 그래도 다윗의 신앙은 슬픔 속에 잠기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구원자로 삼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낙심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모든 지상적인 도움이 완전히 박탈되었지만 그래도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소망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자신의 기도를 통해서 증거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의 하나님" 으로 부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자신의 권리의 옹호자' 로 부른 경우와 같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모든 사람들이 사방에서 자기를 저주하고 자신의 무고성이 자신의 원수들의 중상모략과 일반 백성의 사악한 판단으로 여지없이 압도당하고 말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당한 이 잔인 무도하고 부당한 대우를 세밀히 검토해야 합니다.
다윗이 무고하게 정죄 받을 뿐 아니라 못된 횡포와 중상을 당하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일도 없습니다.
잘한 일을 두고 악평을 듣는 것은 성도들이 날마다 당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의'란 다윗이 자신에 대한 인간들의 고의적이고 못된 행동을 불평하면서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떳떳한 주장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범을 통해서 어떤 경우에서든지 우리의 정직성을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낙담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그것은 하늘에 우리의 서원을 변호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도 인간 자신의 양심보다 더 나은 덕의 발판이 따로 없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우리를 상대로 못된 짓을 할 때 우리가 하나님과 천사들이 보는 앞에서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더욱 더 큰 위로가 됩니다.
바울은 바로 여기서 나오는 용기를 부여받은 사람이었습니다(고전4:5).
곧 사도는 자신에 대한 숱한 악평이 고린도인들 사이에 돌고 있을 때 하나님의 심판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역시 동일한 확신으로 무장한 가운데(사50:6, 7) 그의 원수들이 자기에게 내던지는 모든 중상을 무시해 버리고 있습니다.
시편 4 편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 어디에서나 공의를 발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인내에 대한 유일한 지탱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심판의 공평성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2) 하지만 인간의 순수함을 모두 합쳐봐야 하나님 앞에서는 한낱 오염에 지나지 않는데 어떻게 해서 경건한 자들이 자신들의 의를 그분 앞에 내어놓을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이 반론 형식으로 제기될 수 있을 줄 압니다.
다윗에게는 이것을 대답하기는 쉽습니다. 다윗으로서는 자기를 중상모략하는 원수들과의 관련에서가 아니고서는 자신의 의를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에게는 자기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좋은 양심의 증거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하나님을 자기 권리의 보호자와 방어자로 부르는 것은 무모한 짓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께 이 칭송을 돌리는데 그와 온 세상을 더욱더 쉽게 대조하려는 뜻에서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두 번이나 기도를 들어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다윗의 슬픔의 강도와 기도의 간절성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본 구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가 필요로 했던 것을 어디서 받았는가 하는 사실을 곧 하나님의 자비에서라고 제시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요청할 때에는 분명히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자주 아룀으로서 그분의 거저 베푸시는 선하신 의지에 따라서 '우리의 비참을 면해 주소서' 하고 간청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3) 본 절 하반에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혹자는 여기서 다윗이 아직 체험하지 않은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으며 소망을 기다리는 가운데 받을 하나님의 은혜의 징조를 예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과거에 받은 혜택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 혜택을 통해서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대해서 자신을 무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실한 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북돋아주는 일들을 기억하는 것은 흔히 있습니다.
후에 우리는 이외 비슷한 구절을 많이 대하게 될 터인데 그런 구절에서 다윗은 수많은 공포와 위험에 대항하여 자신의 신앙에 힘을 부여하는 뜻에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백성과 함께 계시며 결코 그들의 소원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터득한 여러 가지 체험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여기서 구사하는 표현방식은 은유적인 것으로서 다윗이 사방으로 포위되고 갇혀있을 때에도 돌파구가 열려 있었다는 암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언급한 곤란은 고통스런 외적 환경보다는 자신의 마음의 상태와 관련됐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역경을 당할 때 깊은 정신적 번민에 빠지는 것을 막을 정도로 무쇠로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편 4 편
3. 본문 2절은 "인생들이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 입니다.
1) 본문 2절 초두에 "인생들아"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는 데로 다윗의 기도의 행복한 결과는 그가 용기를 되찾아 원수들의 분노를 저지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도전하는 가운데 그들의 모든 음모를 두려움 없이 무시해버릴 수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확신이 굽히지 않은 채로 남아있게 하려면 악인들의 공격을 받을 때 다윗과 같은 갑옷으로 무장한 몸으로 결투에 임해야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다윗을 지키시기로 작정하셨으므로 그를 파괴시키려고 온 세상 사람들이 온통 몸부림친다 해도 허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그에게 가하려는 그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모릅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상대를 아담이나 일반적인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단지 '인간들'의 자식들로 부름으로서 다윗은 그들의 교만을 꾸짖습니다.
유대 주석가들은 이것이 귀족들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데 우리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에 대한 냉소적인 방관이지 이것을 통해서 다윗은 사실상 어떤 악한 기도를 그들에게 강요한 맹목적인 광기일 뿐인데도 그들 스스로를 고상하고 현명한 자로 여기는 주제넘음을 비웃습니다.
'언제까지' 라는 말로 다윗은 그들의 사특한 오만심을 정죄합니다.
곧 다윗의 의도는 그들이 단지 갑작스런 충동에 이끌려서 자기에게 대적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해를 끼치고야 말겠다는 완고한 의도가 그들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악랄한 성품 때문에 그들이 이해력을 상실하지 않았던들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윗의 대변자로 주장한 많은 경우를 보아서라도 감히 다윗에게 그런 짓을 하려고 덤비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왕좌에 높이 올려놓은 다윗을 폐위시키기로 단단히 작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들이 언제까지 '자신의 영광을 수치로 바꾸려는' 노력을 계속 고수할 것인가 고 묻습니다.
또 주목할 점은 비록 높은 자와 낮은 자 모두의 온갖 수모를 받고 있는 다윗이였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약속하신 사랑을 베푸시고 왕권의 영광과 영예를 담대하게 고수하시며 원수들이 제아무리 다윗을 허세로 조롱하며 비웃고 없애려 하나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다윗에 대한 자신의 권리로 옹호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4 편
2) 본절 후반부는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 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다윗은 자기 원수들이 경건한 열의에 이끌려 이런 일을 하는 것처럼 꾸며대지만 다윗이 보기에는 그들을 강요하고 있는 원수들의 사특한 열정을 비난하고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사실상 하나님께 대항해서 사우면서도 성공할 것처럼 오판하고 의기양양해 하는 그들의 우매성을 조소합니다. 이것은 더없이 쓰린 비난입니다.
악한 자들은 지독하게 천박한 악의를 품고 온갖 사악한 행위를 저지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피하려고 온갖 기만적인 소리를 재잘거리며 자신들을 위로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들이 자신들의 눈을 고의적으로 감아버리고 자신들의 불의에 기만적인 색채를 덧칠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외칩니다.
악한 자들은 사실 갖가지 소리를 다 늘어놓으면서 자신들을 스스로 기만하지만 정말 시련을 당하게 되면 그때야 그들이 속은 유일한 이유가 처음부터 그들 스스로 기만적인 행동을 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우리는 악인들에게 지혜와 계략면에 뒤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요지부동의 인내라는 방패를 잡아 쥐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그들이 무슨 무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덤비든 우리에게 선한 양심의 증거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편에 서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이 결코 그분은 이길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상처를 더 많이 입힐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들의 계략과 그것에 따르는 부수적인 수단이 항상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또 그것이 더없이 현명하게 짜여져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고안해 내는 것은 모두 거짓과 허영에 지나지 않습니다.
4. 본문 3절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입니다.
이 말씀은 앞 구절에 대한 확증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왕국의 기초자인 하나님께 의존했다는 데에 그의 용기와 담대함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실상 우리가 맡은 직무나 우리가 관여하고 있는 일에서 하나님의 소명만 확신한다면 원수들을 상대로 안심하고 승리를 구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의 힘이나 재물, 또는 군대를 통해서 자기 나라를 얻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 대신 다윗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므로 그의 원수들의 모든 계략이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상대할 수 없는 능력의 소유자인 하나님이 그들과 적대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4 편
먼저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받았음' 을 지적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인간의 뜻이나 자신의 야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명으로 왕좌에 오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팔라)라는 히브리어에는 '구별되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것이 영광과 위엄에 대한 구별과 관련됩니다.
이것은 다윗이 '너희들은 너희들의 투표에 의해서 선택하지 않은 사람, 곧 너희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는 왕으로 여기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뜻에 맞는 사람을 선택할 대권이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 것이나 다름없는 내용입니다.
'자비로운' 또는 '너그러운' 이라는 단어를 써서 다윗은 틀림없이 이것이 자신에게 속한 특성이었다는 사실을 들어서 자신의 왕권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다윗으로서는 자신의 부르심에 대한 표지, 곧 배지를 내놓은 셈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은 '자비가 왕에게는 극히 잘 어울리는 미덕이다' 라는 옛 속담에 있는 말 그대로 잘 표현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이 영광을 베풀 자격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자들에게 그들의 직무 수행에 있어서 필수적인 재능을 부여하시는 것은 그들이 죽어버린 우상과 같이 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혹자는 (하시드)라는 단어를 수동적인 의미로, 곧 혜택을 베푸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호의에 의해서 왕좌에 앉게 된 자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의미로 쓰이는 예를 찾지 못했으므로 보다 일반적인 주석을 따르는 것이 더 안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왕을 선택하실 때 자비롭고 자비심이 많은 자를 세울 뿐 아니라 부르심에 합당하게 높은 지위를 감당할 자질과 성격을 소유한 자를 선택하신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 요청할 때마다 응답을 받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무엇보다도 자신의 작품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가 일단 호의를 베풀기로 작정한 자들을 계속적으로 보호하심으로서 자신의 신실성을 입증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일을 할 때는 그 일이 무엇이든 무효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기에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당당하게 우리의 갈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는 곧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들의 갈 길을 걷는 자들에게는 결코 자신의 도우심을 철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합니다. 이 위로가 없다면 신실한 자들은 매순간마다 필연적으로 절망과 낙담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시편 4 편
시4:4-8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기도로 시작하여(1-2) 원수들을 경고하는데 주력하고(3-5) 다시 여호와에게로 향하여 부르짖으며 여호와 자신의 하나님을 신뢰합니다(6-8).
다윗의 신뢰는 주의 성령으로 하나님 자신의 본성에서 발원된 영원하신 그분의 뜻을 깨달아 그분의 뜻, 그분의 본성에 매달려 그분과 교통하며 기도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응답이 있을 줄 믿고 평안히 잡니다(8).
믿음으로 평안히 자게 되는 자는 경건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입니다(시127:2).
1. 본문 4절은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입니다.
1) 본문 4절 초두에 "떨며" 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다윗은 그의 원수들에게 그들의 광기가 전적으로 교정 불가능한 것만 아니라면 회개할 것을 권면합니다.
먼저 다윗은 그들에게 '떨 것을' 곧 '괴로와 할 것을' 권합니다.
이 단어를 통해서 다윗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아무 두려움이나 위기 의식 없이 자신들의 악한 행로를 무턱대고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꾸짖습니다.
사실상 불경건한 자들로 하여금 겁 없이 하나님께 도전해 오는 그들의 건방진 행동은 자기 안일에 도취되었기 때문이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데서 연유하며 그들이 경솔하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를 우매한 짓에 내던지고 더욱 완고해진 가운데 하나님과 자신들을 망각하고 정욕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들의 광기를 치료하고 더 이상 '죄를 짓지' 못하게 할 최선의 대책은 그들을 무기력한 상황에서 일깨워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너희들이 졸음과 무감각을 떨쳐 버리는 순간 죄짓고 싶은 욕망은 가라앉을 것이다'라고 하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불경건한 자들이 선한 자들과 소박한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고 숱한 혼란을 초래하는 것은 그들이 너무나 스스로 안이한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2) 다윗은 이어서 그들에게 '그들의 잠자리에 누워 심중에 두고 생각할 것'을 권합니다 이것은 곧 조용한 때에 아주 호젓한 곳에서 반성할 것을 권하는 말씀입니다.
시편 4 편
이것은 그들의 오만불손하고 방자한 정욕의 탐닉과는 정반대 되는 시련입니다.
본 구절의 마지막에 가서 저자는 그들에게 '잠잠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잠잠하라는 이유는 바로 앞에서 그가 언급한 괴로움과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들이 넋을 잃고 당돌하기 때문에 급히 죄에 빠질 경우가 있는데 그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돌아서는 첫걸음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 두려움과 떪으로 돌아서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 후에 침착하고 심각한 묵상이 따르게 되며 그때에야 그들은 어떤 위험에 자신들을 내맡기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을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그 어느 것에도 위축하지 않던 정신의 소유자인 그들이 마침내 질서정연한 평화 가운데 지내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최소한 자신들의 광적인 횡포를 삼가게 될 것입니다.
3) 본절 끝에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의 일반적인 관습과 체험에서 따온 표현법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우리가 낮에 사람들과 교제하는 동안에는 우리의 생각이 산만해지며 경우에 따라서는 외형적인 모습만 보고 속는 나머지 무모한 판단을 내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적하게 되면 무엇이든 더 면밀하게 검토하기 마련이며 더욱이 자신의 잘못을 수치심 때문에 위장해 가며 생각하는 일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원수들에게 공적인 자리에서 자신들의 행동을 증거하고 판단한 사람들에게서 물러나서 홀로 있는 가운데 더욱 더 진실하고 정직하게 자신들을 반성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권면은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합니다.
우리 각자는 자기 마음 속을 들여다 보며 혼자 생각해 보기 전에는 공연한 찬사로 서로를 속이는 경향이 더 농후합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에서 이 문단을 인용하면서 아니면 최소한 다윗의 의도를 빗대어 지적하면서 칠십인역을 따라 '너희는 분은 내되 죄는 짓지 말라' 는 식으로 말씀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것을 아주 기술적으로 적절하게 자신의 의도에 맞게 인용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인간들에게는 자신들의 화를 이웃들에게 못되게 퍼붓는 대신 스스로에게 화를 내면서 죄를 삼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들에게 스스로 초조해 하고 스스로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화를 내는데 그 사람들에게 회를 낼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을 두고 화를 낼 것을 명령합니다.
시편 4 편
2. 본문 5절은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입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은 다윗이 그의 원수들에게 회개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고 권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제사가 인간들에게 명령되고 있는 이유 가운데 일부는 인간들로 하여금 새로운 생활을 하도록 유도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다윗을 반대한 사람들의 성격을 고찰해 본다면 우리는 그가 여기서 그들의 위선을 질책하며 터무니없는 자랑을 반박하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다윗은 그가 도망자로서 광야의 굴 속과 험한 산 속을 그리고 자기의 고국을 떠나 외지를 헤맬 때 언뜻 하나님의 교회로부터 유리된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때 사람들은 그를 성도의 조직과 교제에서 떨어져나간 회원으로 여겼습니다.
그와 동시에 언약궤는 그의 원수들의 손에 있었으며 바로 이들이 성전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제사를 드리는 면에 있어서도 주도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가 아는 대로 위선자들이 우쭐대는 바로 그 만용과 뻔뻔스러움으로 다윗에게 대들면서 어깨를 으쓱거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 참 예배자 행세를 했겠지만 그러나 정작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만하게 남용한 자들이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7:4) 여호와의 성전에서 불신자들의 거짓 확신을 질책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순수한 제사만을 요청하신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단지 외적인 의식에 의해서 자신을 달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부정합니다.
이 말에는 의의 제사와 하나님에 대한 거짓 예배자들이 스스로 만족해 하는 모든 헛되고 쓸데없는 의식에 대한 대조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약하면 '너희들은 건방지게 허세를 부리며 마음대로 제단에 제물을 바칠 수 있다 해서 하나님이 너희들 편에 있는 것으로 자랑하며 내가 성지에서 추방되어 성전에 가까이 갈 수 없다고 해서 너희들은 내가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들이 그분의 손에서 무슨 혜택을 바란다면 너희들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제단을 더럽히며 바치는 부정한 제물은 너희들을 유리하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그분의 진노를 격발 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그 자신들의 입술로 계속 부르면서 그들의 외형적인 예배의식을 가지고 허세를 부리며 진실한 신앙을 훼손시키는 자들과 싸울 때, 그들이 올바른 제사를 드리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마음놓고 그들의 허세를 질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시편 4 편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는 경건에 대한 헛된 가장이 우리 속에 참된 소망 대신에 거짓되고 악한 확신을 조장하는 일이 없도록 단단히 경계해야 됩니다.
3. 본문 6절은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입니다.
1) 여기서 다윗이 원수들이 게걸스럽게 자기 생명을 찾아 헤매기 때문에 그들의 잔인한 악의를 불평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마음에 불타고 있던 단 한가지 소원을 거의 모든 인간들이 홀려 있는 여러 가지 소원과 대조시키는 것으로 우리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호의에 관심있는 자들이야말로 참으로 행복하며 소망과 인내를 통해서 때가 찰 경우에 더 나은 생활을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이방인으로 살아야 옳다는 원칙을 주장하면서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므로 그들은 좋기는 하지만 멸망하고 없어질 것들로 만족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외적인 번영만 누린다면 하나님에 대한 큰 관심에 대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천한 짐승들처럼 잡다한 목적을 이리저리 추구하는 가운데 거기서 최상의 행복을 찾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다윗은 아주 훌륭한 근거에 따라서 자신을 그들과 구별하며 정반대의 목표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여기서 자신들이 당하는 어려움을 이겨낼 힘이 없이 기진맥진해서 초조하게 쉴 것을 바라며 불평불만에 빠진 자신의 추종자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한 말이라고 보는 주석가들과 다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의 도움만으로 만족한 가운데 타인들이 그처럼 간절하게 바라는 목적을 아예 무시하고 거기에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않고 있다는 뜻으로 보고 싶습니다.
다윗의 소원과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소원에 대한 비교에는 신실한 자들은 현재의 좋은 것들을 낮게 평가하는 가운데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호의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아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다는 중요한 가르침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말에는 먼저 번영을 원하면서 하나님의 호의를 무시하는 자들이 모두 얼마나 바보짓을 하는지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곧 그들은 이 일은 소홀히 하면서 이리저리 가려 보다 더 높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육신의 안이와 쾌락에 전적으로 치우치고 이것을 누리는 것만으로 안주하거나 만족하는 천하고 지상적인 사람들의 악을 질책합니다.
시편 4 편
또한 그들은 그들의 욕심에 맞는 것만 채워질 경우 하나님에 대해서 아예 필요 없다는 식으로 무관심하게 되고 맙니다.
반대로 다윗은 자신에게 비록 모든 좋은 것이 결핍된다 하더라도 하나님 아버지로서 사랑 하나면 나머지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려도 그 이상 충분히 보충하고도 남는다는 사실을 증거 해 줍니다.
그러므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게겔스럽게 현재의 쾌락과 혜택만 찾아 급급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호의를 받는 것만을 완전한 최상의 복으로 주장합니다'라는 뜻입니다.
2) 다윗은 '하나님의 얼굴빛' 이라는 표현을 써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분노에 대한 상징을 보여주실 때 그의 얼굴이 흐려지고 어둡게 보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평온하고 유쾌한 얼굴, 곧 그분의 호의와 사랑의 표현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비유로 이야기되고 있는 이 빛은 그것이 우리 마음에 비췸과 동시에 신뢰와 소망을 낳을 때 '들어 올려지는' 것입니다.
이 사랑에 대한 의식이 우리 마음에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무의미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비취심으로서 참되고 확고한 기쁨을 주십니다.
이 구절은 확고부동한 결심으로 하나님 안에 포근히 쉬게 되고 그 안에서 모든 지상적인 혜택이 흘러 넘침에도 불구하고 그분 안에서 만족을 취하지 못하는 자들은 비참하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반면에 신실한 자들이 비록 무수한 역경에 처하여 이리저리 밀려다니지만 그들이 행복한 것은 오직 흑암을 빛으로 변화시키는, 사망 그 자체마저도 생동하는 생명으로 부활시키는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의 광채가 그들에게 비취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4. 본문 7절은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입니다.
또 다른 비교를 통해서 다윗은 자기 마음의 기분을 더 잘 표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대망한 좋은 것을 이미 얻은 사람인 만큼 다른 사람들의 재물과 향락을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고 자기 처지로 완전히 만족해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자기에게는 곡식 창고에 곡식이 가득하고 지하실에 포도주가 가득한 경우보다 하나님의 화해로운 얼굴이 자기에게 비취는 편을 더 만족스럽게 여긴다는 내용입니다.
시편 4 편
주석가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때에' 로 해석하는 (메엣)라는 단어에 대해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그들의 곡식과 포도주가 증산된 '때' 이후로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기쁨을 두셨나이다'라는 식으로 번역하는데 이것은 다윗이 마치 '나의 원수들이 이 세상에서 번창하는 것을 보고 내가 기뻐합니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내용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앞의 해석이 더 적합한 것으로 보입니다. 곧 그 견해에 따르자면 다윗은 지상적인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열망하는 모든 지상적인 혜택을 누리게 될 때 즐거워하는 것보다 자신을 하나님의 호의 한가지를 더 즐거워한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다윗은 앞에서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서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을 정도로 세상적인 번영 추구에 빠져 있고 거기에 중독되어 버렸다는 것으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포도주와 곡식에 대한 풍성한 증대를 두고 기뻐하는 그 기쁨보다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에 대한 자신의 기쁨이 더 크다는 사실을 덧붙입니다.
이 구절에는 아주 유익한 가르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대로 세상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면서 일시적인 쾌락에 빠져서 옴짝달싹 못하면서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 쾌락이 아주 풍성하기 때문에 그들의 욕망이 더욱 더 불타게 되며 따라서 풍요한 쾌락 속에서이지만 은근한 불안이 그들의 마음을 편치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호의가 우리에게 비취기 전까지는 우리는 결코 흐트러지지 않는 평화와 확고한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신실한 자들 역시 그들의 세상적인 쾌락과 욕망을 추구하지만 그들이 무절제하고 거칠데 없는 열정으로 그것들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대상이라는 사실만을 안다면 그러한 쾌락들 없이 지내는 것을 참을성 있게 견딜 수 있습니다.
5. 본문 8절은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입니다.
다윗은 결론 부분에 가서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마치 지상의 모든 경비대의 경호를 받는 것만큼 안전하고 침착하다는 사실을 피력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모든 두려움과 근심이 주는 고통과 번민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은 가장 바람직한 복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다윗이 하나님 아버지로서의 사랑의 빛이 가져오는 기쁨을 다른 모든 목표보다 더 반겨하는 것이 옳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앞 문장에 대한 확증입니다.
시편 4 편
마음의 내면적인 평화야말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복을 훨씬 능가합니다.
이 구절이 다윗의 소망을 곧 그의 원수들이 자기와 화해하며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훼방이나 소란없이 편히 쉴 특권을 주심으로서 자신이 그들과 평화롭게 잠들게 되기를 소망한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주석가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방어해 주시기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 틈에 있는 때나 마찬가지로 마음을 턱 놓고 안전하게 살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잠들겠습니다' 를, 곧 '무수한 사람들과 함께 잠들겠습니다' 라는 식입니다.
혹자는 (레바닷; alone)을 하나님께만 적용하면서 '오 주여 당신께서만 홀로 나를 안전 속에 두셨나이다' 는 식으로 번역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전혀 동의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함께' 와 '......만' 에 대한 대조를 제거할 경우 이 문장의 미가 상당히 감소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하심만이 충분했으며 그 아래서 그는 비록 그에게는 모든 인간적인 가호는 없었지만 계속 그를 지켜주며 경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그는 사방으로 큰 무리들의 방어를 받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이 맘을 푹 놓고 잠잔다는 사실을 자랑삼아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의 본을 통해서 하나님께 이 영예를 돌려야겠습니다.
비록 우리에게 사람들의 도움이 전무하더라도 오직 하나님의 손길 아래 있을 경우 우리는 수많은 군대의 경호를 받는 것이나 다름없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지내는 셈이라는 사실을 믿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