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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란 무엇인가?
(히브리서 4:14~16)
기도 생활은 성도의 신앙 생활의 중심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신앙생활을 유지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기도를 쉬는 죄를 범치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무엘의 독특한 죄에 대한 견해인데 그는 기도를 쉬는 그 자체를 죄로 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쉬지 않고 기도를 계속하고 계십니까? 새신자가 많으니까 그것을 고려하면 혹시 기도를 한 번이라도 해보셨습니까? 아니면 기도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신앙생활이 기도에 의해서 좌우되는데 그런만큼 기도에도 위험성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중요한 것은 항상 그 속에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기도할 때 자기가 무엇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또 기도하면서 자기는 하나님과 늘 대화한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도 일리는 있지만 잘못된 가능성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기도할 때 소리를 듣고 환상을 보고 신비로운 체험을 한다고 그럴 때 우리는 일단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수시로 하나님과 대화한다고 할 때에 잘못하면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예언과 신유, 방언의 은사가 오늘날도 일어나지만 그래도 우리는 예언 기도와 방언기도를 교회 내에서 조심스럽게 해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비로 은사의 이러한 부작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 참된 기도가 무엇인지 몰라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기도란 무엇인가? 도대체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세 가지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참된 기도는 우리의 부족함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진실한 기도라는 것은 우리의 부족함과 잘못됨을 아뢰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히브리서 4장 15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다”라는 구절의 의미는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지 않는 분이 아니다. 우리 연약함을 매우 동정하는 분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아픔을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충분히 우리 삶에 공감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본성과 운명을 매우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너무 연약합니다. 너무 쉽게 죄를 짓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무너지는 죄된 본성을 갖고 있는가!를 예수님께서는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향하여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7절에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3장 25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간과하다”는 말은 ‘너그럽게 보아주신다’라는 의미입니다. 죄 때문에 다 죽을 수 밖에 없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너그럽게 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부족함을 주님께 아뢰면 주님께서 우리를 너그럽게 보아주시고 동정하시고 우리를 이해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의 본질은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부족함을 아뢰려면 우선 자기의 부족함을 깨달아야 하는데 대부분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여러분!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께 절대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제가 사람들을 만나보면 자기가 많은 죄를 짓고도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죄만 지적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분들은 지적질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죄에도 순서가 있는데 다른 사람의 죄보다도 먼저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기도는 자기의 부족을 아뢰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 수도원의 수사들의 기도는 가슴을 치면서 하루 종일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가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상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에는 절박한 심정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아뢰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장터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의 심정으로 절박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얼마나 애타게 하나님을 찾아야 할까? 자기의 부족함을 아뢸까? 그런 심정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께 우리의 부족함을 아뢸 때 예수님으로부터 긍휼하심을 받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긍휼’이라는 헬라어의 원의는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사랑’을 의미합니다. 긍휼이란 이 단어는 본래 여성들의 자궁을 의미하였습니다. 옛날 아이를 낳을 때 산고를 느낍니다. 아이와 산모 중 택일을 하라고 하면 대부분 아이는 살리고 산모는 죽음을 택합니다. 연어가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난 후 죽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그러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긍휼은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의 부족함을 기도로 아뢰면 우리에게 긍휼을 주시겠다고 하는 것은 어머님의 심정으로 우리를 보호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산모냐? 아기냐?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는 기로에서 아기를 살리는 심정으로 우리를 살려주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기도란 바로 하나님께 은혜를 갈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영어성경인 NIV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Let us then approach the throne of grace with confidence, so that we may receive mercy and find grace to help us in our time of need” 여기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라는 구절을 “find grace to help us in our time of need”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을 또 다시 직역하면 “우리가 어렵고 도움이 필요할 때 은혜를 발견하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기도란 무엇인가?를 정의하자면 ‘기도란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좋을 때보다는 어렵고 힘들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때로는 자기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는 바로 이렇게 도움이 간절히 필요할 때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한계 상황으로 규정지었습니다.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란 바로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7장 12절에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라는 구절을 ‘에벤에셀’이라고 합니다. 이 에벤에셀이 나온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성적인 고통과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블레셋과의 전쟁이었습니다. 블레셋은 몇 백 년을 이어오면서 대대로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의 언약궤마저 블레셋에게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한계상황을 경험했습니다. 도저히 그들의 힘으로는 블레셋을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그때에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을 미스바로 소집합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금싞하며 회개하고 여호와께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블레셋 군대를 물리쳐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은 에벤에셀이라는 기념의 돌을 세웁니다. 그뜻은 전술한대로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기도란 하나님께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혹은 힘들 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사면초가나 진퇴양난의 상황에 몰릴 때 혹은 한계상황에 처할 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셋째, 기도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보좌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마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기도의 중심은 성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이스라엘 성전 방향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기도합니다. 기도의 중심이 예수님으로 바뀐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이 순교합니다. 그가 순교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7:55~56에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스데반의 기도는 가장 진실한 기도입니다. 여기서 스데반은 기도하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기도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이 스데반의 기도 전통을 따라 기도할 때 손을 크게 들고 하늘을 우러러 하늘 보좌 앞에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기도의 중심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바로 이것이 기도를 너무 잘 설명해 주고 있는데 기도란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좌 앞이 가리키는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 앞에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기도입니다. 여기에 보면 담대히 나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담대하게”라는 단어의 원의는 ‘예절 없이’, ‘무리하게’라는 의미입니다. 즉 예절 같은 것을 차릴 새도 없이 곧바로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 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들어갑니다. 지성소는 죄가 있는 자는 결코 생존할 수가 없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대제사장이 자신의 죄를 다 고하지 않고 속죄함을 받지 않은 상태로 지성소로 직행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자신의 죄를 먼저 속한 후에 지성소로 들어가서 예식을 거행합니다.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의 죄로 인하여 죽을 수도 있기에 옷 말단에 방울을 달고 발목에는 줄을 묶고 들어갑니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갈 때 대제사장은 두려움에 떨며 머뭇거리기도 합니다. 그곳에 들어기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우리 죄를 대속하셔서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나아가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자식들이 부모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어떤 때는 뻔뻔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부모는 자식의 청을 다 들어줍니다. 기도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십자가만 바라보며 은혜의 보좌 앞에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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