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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에 찾은 희생의 십자가(요12장23-26)
성경본문; 요한복음12:23-26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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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밀이 떨어지는 아픔!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흔히 ‘희생’을 이야기할 때 인용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정작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11장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던 사건과 연결해 보아야 합니다.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은 이미 죽어 장사된 지 나흘이나 지나 냄새가 나는 시체를 향해 명령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사람들은 죽어 냄새가 나는 시체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일어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많은 무리들과 종교지도자들이 그 된 일을 보려고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정작 그런 기적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예수님과 나사로조차 죽이려고 모의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목격한 무리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환영하며 외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호산나,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여”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 일은 십자가를 지시기 한 주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종려주일’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런 왕 되심을 선포하는 일을 보시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 유명한 24절의 말씀입니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는데, 그 때에 예수님이 죽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죠.
아무리 세상이 환호해도 피 흘림이 없이는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 질 수 없음을 명백히 하신 것입니다.
종려주일은 왕 되신 주님을 선포함과 동시에, 그 분의 죽으심을 선포하는 날 입니다.
예수님은 미리 고백하셨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7, 18)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오늘날 교회에서 참 많이 오해하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노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의 자리가 무엇이냐면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렇게 배우고 있지 않나요?
“기업이 크게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영광을 돌리고,직장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가서 영광을 돌리고,대통령이 되거나 국회의원이 되어서 영광을 돌리고. . .
그런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성공과 자리에서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뭔가 신앙적 본질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명과 연결 지어 본다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는 희생이 있어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물으시는 것은 ‘어떻게 썩을 것이냐?’는 것이죠.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참 명백한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피 흘림과 박해 그리고 고난이 없이 어둠을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피 흘림에 있는 것이지, 피 흘림으로 얻는 열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난해 4월 필리핀에 있는 UMC 신학교 졸업식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설교자인 저를 소개하기 위해 학장이 묻더군요. “어떻게 소개할까요?”
그래서 “만나교회 목사라고 소개해 주세요!”라고 했더니, 교회 규모를 이야기 해 달라는 것입니다.
신학생들과 손님들이 듣기를 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사람이 모이고, 한국에서 그런 정도의 규모면 랭킹이 몇 위정도 되는지 알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저에 대해 소개를 하자 신학생들이 “와 우!”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이 보인 반응을 하나님께서 원하실까요? 예수님께서는 많은 무리가 모였을 때. 제자도를 말씀하시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는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다고 하셨는데. . .”
말씀을 묵상하며 ‘영광’과 ‘축복’은 다른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축복은 감사한 것이기는 하지만 영광스러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말입니다.
축복은 ‘효율성’을 생각합니다.
축복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장 보이는 열매가 없어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했던 많은 사람들은 효율성이 아니라 ‘무모한’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때, 기꺼이 한 알의 밀이 되었기에 생명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밀알’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흘려야 할 피가 필요하다면
죄인을 대신하기 위해 희생의 재물 필요하시다면
내 생명 제단 위에 드리리
주 영광 위해 사용하소서
생명이 또 다른 생명 낳고 주님 볼 수 있다면
나의 삶과 죽음도 아낌없이 드리리
죽어야 다시 사는 주님 말씀 믿으며
한 알의 밀알 되어 썩어지리니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하소서
딱 일 년 전의 일입니다.
‘한 셈 치고’ 헌금을 기억하시나요?
그때 저는 폭발사고로 인해 오랫동안 병원 생활을 하고 수술을 해야 하는 한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1부 예배에 참석했던 한 부부가 저를 붙잡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그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싶어요.
우리 아들이 지난 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이 죽기 전 한 달에 얼마씩 적금을 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얼마가 지나면 돈을 찾을 것이라고,그런데 아들이 죽고 나니 그 돈이 생명 보험이었습니다.
아들의 생명으로 얻은 돈을 그냥 쓸 수 없어서 기도하고 있는데 오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들의 생명으로 그 가정을 살리고 싶다는 마음을 강하게 주셔서, 그 보험금을 헌금 하려고 합니다. 빨리 결정해서 제대로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헌금합니다.”
그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한국 예술 종합학교를 졸업하고 찬양을 하며, 귀한 재능을 가지고 장래가 촉망되는 아들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일까요?
그런데 그 아들의 생명이 땅에 떨어져 썩어지더니 또 하나의 생명을 낳습니다.
그 아들의 죽음과 그 부모의 아픔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다른 생명을 살리시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것이 영광입니다.
효율성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일들입니다.
한국의 선교역사가, 양화진에 뼈를 묻은 많은 선교사들의 죽음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기에 선교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효율성이 떨어지는 곳에서 사역을 했나요?
6.25를 전후에 참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피를 흘리고 죽었습니다.
좀 더 안전한 곳, 효율적인 곳, 열매가 드러나는 곳에서 선교하는 것이 좋다고 누군가 그들에게 조언하지 않았을까요?
“떨어짐의 위대함”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떨어진다는 말 자체만으로 우리는 낮아짐을 생각합니다. 그것이 죽음일 수도 있습니다. 온전한 헌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낮아짐’ 만으로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는 충분한 도전이 있습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는 ‘신자의 낮아짐이 신앙의 상승’이라는 진리를 염소들을 통해 배웠다고 합니다.
어느 날 쯔빙글리는 스위스의 산 위를 걷다 좁은 산길에서 두 마리의 염소를 보았는데 한 마리는 위로 올라가려고 하고 또 한 마리는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워낙 좁은 길이라 두 마리가 다 오르고 내려갈 수 없었습니다.
서로 팽팽히 맞선다 싶은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올라가려던 염소가 길가에 누웠고 그 위를 밟고 위에서 염소가 내려왔습니다.
그런 다음 누웠던 염소가 일어나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폭삭 엎드리는 사람이 은총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조동천목사 설교 중에서)
낮아져야 올라가는 것입니다.
땅에 떨어져야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원리와 반대가 아닌가요?
그러고 보니 성경에서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의 인생에는 낮아짐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왕자에서 도망자로 살았던 시간들,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았으나 무명의 목동으로 살아야 했던 시간들,요셉이 노예로 팔려가 지내야 했던 고난의 시간들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낮아져야 했던 시간들처럼 말입니다.
낮아짐과 땅에 떨어지는 밀알을 통해 예수님이 보셨던 하나님의 영광이 이런 것은 아닐까요?
낮아져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리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자연적인 원리도 그런 것 같습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질 때 에너지가 생성됩니다.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공기가 이동할 때 바람의 힘이 생깁니다.
낮아짐이 창조의 원리라는 것도 참 새롭지 않으신가요?
우리는 올라가는 것이 힘이라고 생각하는데, 오늘 주님은 낮아짐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를 쓰시는데, 겸손해지지 않으니 우리를 낮추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고백하는 것이 바로 낮아짐과 떨어진 그 자리가 ‘은혜의 자리’라는 것이죠.
우리는 떨어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적인 법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종려주일이 우리에게 다시 찾아주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낮아짐의 자리를 두려워하기보다는 기꺼이 낮아짐의 자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낮아짐의 자리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이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쓰셨던 가시관을 ‘영광의 면류관’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 가시관을 쓰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모슬포에 가면 ‘대정교회’가 있습니다.
1934년 세워진 대정교회가 특별한 것은 제주도 1호 목사이자 순교자인 이도종 목사의 순교 성지이기 때문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혹독한 핍박을 지나 해방이 되었지만, 제주에 남아 있는 목사는 은퇴한 이도종 목사와 현역으로 일하는 조남수 목사뿐이었습니다.
이도종 목사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제주 노회가 굴복하자 교회를 사직하고 1942년 귀농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해방 후 이도종 목사를 부른 이는 아들 뻘 되는 조남수 목사였습니다.
둘은 합심하여 제주도 교회 재건에 나섰고, 목회자가 청빙되기 전까지 산북 지역은 이도종 목사가, 산남 지방은 조남수 목사가 순시하며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1948년 4.3 사건 때 여러 교회를 순회하며 목회하다가 길에서 마주친 재산무장대에 의해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이도종 목사의 신앙이력은 제주 선교 역사와 궤를 같이 합니다.
“1907년 이른 봄, 어느 날 육지에서 기독교미션스쿨인 경신학교를 다니던 이웃마을 출신인 조봉호라는 청년이 금성마을 사람들에게 한양 소식과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면서 전도를 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의 친척들과 이도종 가족 등 몇 사람이 양석봉씨 집에 모여 처음으로 예배를 드렸다. 이 날이 1907년 3월10일 주일이었다.”
앞에서 보았던 제주의 신앙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청년 이도종은 국권을 잃은 민족의 비극 앞에서 고민했고, 나라와 민족의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기독교 선진 교육을 배움으로 구국의 길이 열릴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추천서를 들고 평양 숭실 학당에서 공부한 그는 1926년 34세의 나이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김제 중앙교회를 설립하므로 안수를 받고 목회자로서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평소에 민족의식이 특출했던 그는 김제지역 유지의 결혼식에서 시국과 관련된 발언으로 인해 일제에 연행되었고, 1929년 복음의 불모지였던 제주도로 돌아옵니다.
그렇게 그는 제주 출신 첫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남다른 복음전파의 열정은 한 곳에서 목회하기보다는 목회자가 없는 교회를 끊임없이 순회하도록 만들었습니다.
1948년 4월 3일에 시작된 사건으로 인해 제주도는 양민과 폭도를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학살이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토벌대의 중심을 이룬 서북청년단은 외지인인 데다 기독교인들이 많아서 무장대들은 교회를 상대로 복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이도종 목사는 심방을 멈추지 않았고 공비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날은 1948년 6월 18일 금요일 이었습니다. 1919년 군자금 모금 사건으로 구속되어 고문을 심하게 받은 후 후유증으로 다리를 약간 절었던 이목사는 자전거로 제주 곳곳을 다니며 심방을 했습니다.
이도종 목사의 조카인 이인신 권사의 증언에 의하면, 그날 순교를 예감했던 것 같습니다. 동생 기종을 만나 ‘내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동생이 집안을 잘 돌보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갔습니다.
토벌대 차들이 내려오다가 고밭이라는 입구에서 이 목사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순경들이 “목사님 위험해서 못갑니다. 우리 같이 차타고 내려갑시다. 우리가 지금 탄환이 다 떨어져서 총을 더 쏠 수 없어서 철수하고 내려옵니다.
목사님 위험합니다. 내려갑시다.” 하는데, 이 목사님께서는 “나는 죽는 한이 있어도 교회를 가야 한다. 나를 믿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있다. 나는 가야한다”. 하면서 완강히 거부를 하셨답니다.
(이인신 권사, 이도종 목사 조카)
이 목사는 자전거를 타고 좁은 산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속칭 ‘고린다리’ (대정읍 무릉리 인향동 부근)근처에 다다랐을 때, 숲속에서 허름한 옷을 입은 공비들이 튀어나와 길을 막았습니다. 누구냐고 묻는 말에 이도종 목사는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목사라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공비들은 “목사는 우리와 원수요, 반동이니 죽여야 한다. 죽여라!”고 외쳤고, 마지막에 기회를 주었습니다.
“좋소, 당신이 목사라면 이번 난리 중에 우리 측이 승리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할 수 있겠소? 그러면 당신을 살려줄지 모르지. . .”라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이도종 목사는 이렇게 말을 하고 순교했습니다.
“나는 이쪽 편도 저쪽 편도 아니라 하나님의 종일뿐이다. 하지만 나 살기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거짓되게 드릴 수 없다.”
이 일은 1년 이 지난 후 ‘뭉치’라는 무장대원이 잡혀서 취조 받는 중에 알려지게 된 사실입니다.
뭉치라는 사람에 의하면, 서슬 퍼런 공비들 앞에서 이도종 목사는 담대하게 마지막 설교를 하고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너무 잔인한 일이지만 공비들은 일제 때 참호로 파놓은 구덩이에 이도종 목사를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 순간 자신의 가방을 잠시 달라고 하더니 성경책과 찬송과 그리고 회중시계를 꺼낸 후 공비들에게 주고는, 그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순간 공비들은 흙과 돌, 가시덤불과 풀 가지들을 단단히 덮어씌우기 시작했고, 희미한 기도소리와 함께 이 목사의 모습은 점차 사라져 갔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서야 생매장된 이도종 목사의 시신을 발견하게 되었고, 제주 출신 1호 목사요 1호 순교자인 그의 유해는 대정교회 마당 유해 봉안비 아래에 모셔져 있습니다.
우리 팀들이 방문한 순교성지 대정교회 마당 성경책이 펼쳐진 모양의 봉안비에는 이런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그는 그렇게 제주 땅에 떨어져 한 알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떨어지는 기쁨!
이도종 목사의 순교의 씨가 뿌려지고, 한 알의 밀이 되어 떨어져 죽었습니다.
아직은 열매가 보이지 않지만, 죽어야 열매를 맺는 진리를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25절과 26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세상과 다른 진리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이제 십자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주제 ‘기쁨’에 대하여 말씀 나누려고 합니다.
십자가는 포기할 때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질 때 찾아오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들에게 이 두 가지의 가능성을 늘 열어놓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교회에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 중에 하나가 “은혜”라는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은혜를 누리는 사람의 특징이 있다면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 십자를 통해서 왔다면 우리들 크리스천들이 누리는 기쁨 역시 십자가를 통해서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묵상하는 시기인 사순절에 ‘기쁨’을 생각하며 우리는 또 다른 본질적인 신앙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기쁨이란 과연 무엇이며, 언제 기쁘십니까?
“오늘 성경의 본문이 우리들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서 그 기쁨을 충만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들은 ‘헌신’이라고 할 때, 고통의 순간들과 희생의 아픔만을 생각하시나요?
그러나 주님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보셨습니다.
본문 25절과 26절을 보세요.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헌신의 끝이 아니라, 헌신의 시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에 떨어져 죽는 종점이 아니라,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이 만들어 내는 생명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헌신은 기쁨과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말씀의 제목이 좀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순절 하면 ‘십자가’ ‘금식’ ‘절제’ 뭐 이런 단어가 떠올라야 정상 아닌가요?
아니,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기쁨"하면 "출생의 기쁨" "승진의 기쁨" "합격의 기쁨"이라든지 아니면 "성탄의 기쁨" "부활의 기쁨" 이렇게 해야 맞는 표현이라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그런데 오늘 우리는 사순절을 지나며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넘치는 기쁨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순절의 기쁨은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기쁨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습니다.
채워짐의 기쁨이 아니라 비움의 기쁨입니다.
나의 것을 이루는 것으로 찾아오는 기쁨이 아니라, 그 분의 뜻에 순종할 때 찾아오는 기쁨 말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본문 한 절을 가지고 자꾸 읽고 또 읽고 묵상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11
1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서 그 기쁨이 또한 우리에게 충만하게 넘치는 일말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이 무엇인가요?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계명은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그 분이 우리들에게 명하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셨던 것입니다.
그 사랑 가운데 고난이 있었고, 그 사랑 가운데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랑이었기에 그것을 깨달아 아는 순간 기쁨이 넘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쁨은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사랑을 깨달아 아는 순간 우리들에게 물밀듯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잃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그 길을 걸으라]
이 책에 멋진 말이 나옵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줄 곧 천국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나는 길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사순절 특히 고난 주간을 지나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가장 큰 기쁨과 평안함은 우리가 가고 있는 그 길이 천국을 향해 하고 있는 길이기에, 그 길을 즐기며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목표를 향해 힘들고 어렵게 달려가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등산을 하며, 아니 차를 타고 아름다운 곳을 지날 때, 그저 목적지를 향해 지도만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가면서 만나는 모든 것들을 즐길 수 있습니다.
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천국을 향해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희생의 십자가는 무엇이고, 왜 희생이 기쁨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일까요?
우리가 사명을 피하고, 우리의 안전과 평안함을 얻기 위해 선택했던 삶이 아니라,때로는 작은 십자가를 지려는 마음으로 시작한 우리의 삶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할 수 없는 기쁨 말입니다.
조금 전에 읽은 요한복음 15장 11절의 말씀처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서 “이것”이란 요한복음 15장 10절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 .”
Living Bible에 보면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When you obey me you are living in my love. . ."
그렇습니다. 희생하는 자, 순종하는 자,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우리는 몇 주 전 사순절에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던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광야의 시험가운데서 당신이 누구신지, 그리고 당신이 감당해야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육신이 원하는 영광스러운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나아가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험에 대한 승리의 결과가 무엇인가요?
마태복음 4장 11절을 보세요.
11-“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사순절의 기쁨은 바로 유혹과 죄를 이기고,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기쁨인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참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것처럼 우리 딸 아이는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어쩌면 평생을 사는 동안 우리 부부가 가장 염려하고 기도해야 하는 제목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누나를 둔 동생 역시 동일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유치원 때부터 늘 아픈 누나를 돌봐야 했기에,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습니다.
어쩌면 누나가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엄마 아빠라기보다는 늘 옆에 있었던 동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도 누나가 아프거나 문제가 생기면 동생 웅기를 찾아가 말을 하고,
선생님이 바뀌고 학년이 바뀌면 이놈이 선생님을 찾아가 누나에게 대하여 말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픈 예진이의 기도를 참 잘 들어 주셨습니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동생이 외고를 간다고 하니까 자기와 함께 학교를 다녀야 되기에 열심히 기도를 했더니, 외고 시험에서 떨어지더니 급기야는 같은 학교에 배정을 받았거든요.
제가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왔기에 아이들을 초등학교 6학년 겨울 방학 때 미국에 보내서 공립학교에 잠깐 공부를 시켰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미국에 살던 고모는 웅기가 1년만 학교를 여기서 다니면 영어를 잘 할 수 있겠다고 맡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공부를 하고 있었던 고모 부부에게 예진이 까지 맡기는 것은 무리가 있었고, 웅기를 맡아 주겠다고 했지만,혼자서는 학교를 다니기 힘들었던 누나 때문에 포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가끔 아들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 때 1년 만 미국에 있었더라면 영어를 아주 잘 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부부가 믿는 것이 있습니다. “웅기야! 네가 누가 때문에 포기한 그 1년을 하나님이 기쁘게 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알아서 갚아 주실꺼야!”
그리고 믿는 것이 있습니다.
이놈이 누나를 돌보면서 보냈던, 때로는 가슴 아팠던 시간들 때문에 이놈이 목회를 할 때에는 훨씬 더 깊은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저의 가슴 속에는 잔잔한 기쁨이 솟아오릅니다.
어쩌면, 때로 자신이 져야할 부담과 십자가를 뿌리쳤더라면 결단코 맛볼 수 없는 그런 기쁨 그리고 충만한 마음 말입니다.
바로 오늘 저의 마음에 생각나는 찬양이 있습니다.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
날마다 주를 섬기며, 언제나 주를 기리고
그 사랑 안에 살면서 딴 길로 가지 맙시다."
헌신한다는 것,희생한다는 것은 그렇게 무겁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희생의 십자가를 지며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잔잔한 기쁨 같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깊은 기쁨은 저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샘물 같은 것이라는 것을 희생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김종우 선교사의 이야기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는 늘 환한 얼굴로 꿈을 이야기 하던 젊고 열정 많은 남아공 선교사였습니다.
땅을 사 놓고 학교를 시작하고 누군가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잘 하지 못했던..그가 밀알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의 기도편지입니다.
그에게는 항상 고민이 있었습니다.
땡볕에 그을려 얼굴이 여기 사람들처럼 거매져도,여기 사람들의 음식을 김치찌개보다 더 좋아했어도,그는 늘 어떻게 하면 그가 진정한 남아공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런 고민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소원이 바뀌었습니다.
많은 현지인들이 그에게 답해줬습니다.
당신이 여기서 죽은 후에 우리 땅에 묻히면 남아공 사람이 되는 거라고요.
그는 마침내 그가 그리도 소원했던 남아공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우리에게 자기가 힘껏 쥐었던 바톤을 넘겨주었습니다.
바톤을 받는 순간 그것이 플라스틱으로 된 가벼운 것이 아니었음을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17년 동안 이 땅을 사랑했기에 그는 바톤을 놓지 못했습니다.
때론 천천히 때론 빨리 때론 무식하게 그렇게 달렸습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바톤을 쥐고 달렸습니다.
옆에서 그와 함께 달리면서 그는 늘 이야기 했습니다.
잘 버텨보자. 버텨보자.
그 분이 사랑함으로 끝까지 인내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잘 버텨보기라도 하자고요.
그는 늘 허허 벌판에 서서 나에게 눈을 감으라고 했습니다.
눈을 뜨면 아무것도 안보이지만 눈을 감으면 다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 땅의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도, 찬양하는 모습도, 가정들이 회복되는 모습도, 교회들이 연합하는 모습도 다 보인다고 늘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린 늘 눈을 감고 살자고 했습니다.
우리 동네에 오려면 큰 산을 넘어야만 합니다.
어느 날인가 그는 운전을 하며 나에게 물었습니다.
저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저는 대답했습니다.
저 산 너머에는, “저 산을 이미 넘은 우리”가 있다고 말입니다.
한발 한발 다시 산을 넘어보겠습니다. 그가 나에게 준 바톤을 가지고 말입니다.
저에게 온 바톤에는 그의 땀 냄새가 흠뻑 배어 있습니다.
그 땀 냄새는 쉬이 없어질 것 같진 않습니다.
제가 쥐고 달릴 그 바톤은,그가 쥐고 달린 것보다 가벼울지, 더 무거울지 저는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그가 나에게 남겨두고 간 나머지 경주를 힘을 다해 달리겠습니다.
아마 그처럼 빨리 달리지는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보다 더 빨리 달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그의 손에 있었던 하나님의 꿈들,마지막 순간까지 손으로 고등학교 건물을 그려가며 흐뭇해했던 그의 미소,그 꿈들로 인해 현재의 어려움을 웃음으로 견디었던 그..
쉬지 않고 뛰었던 그의 경주는 이제 끝이 났습니다.
그는 이제 모든 일에서 자유해 졌습니다.
누군가는 말하더군요. 선교사는 삽질하는 사람도 아니고 배관을 고치는 사람도 아니고 페인트를 칠하는 사람도 아니고 설교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저 현지인과 친구가 되는 것이라고요.
그러나 그는 함께 삽질을 하며 페인트칠하며 현지인들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3000개나 되는 못을 박은 후 수저도 들지 못할 정도로 떨리는 손을 바라보며
이렇게라도 사랑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나눌 사랑이 부족하니 그저 그 자신의 땀이라도 주고 싶어 했습니다.
이제 그는 모든 일에서 자유해 졌습니다.
비전을 나누며 후원자들을 일으킬 일도, 미련하다고 손가락질 하는 누군가들의 시선에서도
그는 자유 합니다.
잘한다고 말해주는 모든 격려로부터도 완전 자유해 졌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들을 섬기고 하는 모든 일에서 자유해 졌습니다.
그저 그는 이제 하나님과 커피를 마시며 놀기만 하면 되겠지요.
몇 년 전, “왜?” 라는 질문을 하나님께 더 이상 하지 않기로 결심했었습니다.
몇 년 동안 하나님과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요새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왜요, 왜요..
대답은 없으십니다. 아니 대답을 이미 하셨는데 제가 못 알아들었겠죠.
그러나 그분의 신실하심을 가슴에 담고 다시 이 땅의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안고 있습니다.
“땅 끝에서 주님을 뵈오리, 주께 드릴 열매 가득안고”
그는 아프리카 최남단 땅 끝 바닷가에 뿌렸습니다.
우리가 늘 그 땅 끝에서 불렀던 찬송을 부르며 그를 하나님께 양보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한 줌을 뿌리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주께 드릴 열매는 그가 사랑했던 남아공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사랑한 바로 종우였다고요.
그리고 한 음성 더,참으로 애썼다 내 아들 종우야 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