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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절기상 이번 주일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이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한 주간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날이고 이 날로부터 금요일까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지시고 죽으시기까지 한 주간 예루살렘에서 수난을 당하셨던 것을 교회는 고난주간으로 지키며 함께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고난을 함께 하기 위해 교회마다 금식기도, 특별새벽기도, 특별저녁기도 등의 시간을 갖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육체적인 욕구를 죽이는 금욕의 훈련을 갖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고난의 시간을 가지며 예수님의 고난에 함께 하려고해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고난, 십자가에 대신 죽으신 희생제물의 고난에 비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오늘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이번 한 주간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참 예수님의 희생의 의미를 깨닫고 나를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그 일속에서 내가 받은 구원에 대해 감격하며 감사하는 은혜의 시간을 보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거쳐 부활절에 이르기까지 이 한 주간 가장 핵심적이며 신앙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여러 사건이 있습니다. 부활절이 있게 하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가장 핵심적인 사건이라면 고난주간에 가장 정점 크라이맥스는 십자가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종려주일을 생각하면서 종려주일의 의미를 가장 크게 보여주는 사건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성만찬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종려주일이 있게되는 가장 본질적인 사건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장면이겠지만 종려의 의미를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간중의 하나는 바로 성만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달려죽으시기 전날 밤에 행해진 만찬, 일명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의미를 가르쳐주십니다. 십자가죽음을 기념하면서 우리가 그 날을 성 금요일이라고 지칭하듯이 그 전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제자들과 함께 떡과 포도즙으로 마지막 식사를 나누는 만찬을 행하신 것을 기념하며 성 목요일이라고 지칭하기도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 고주리교회는 3년째 성찬예식을 못하고 있지만 그 의미를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고 진정한 종려주일, 고난주간의 의미를 성찬을 통해 깨닫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종려주일 감사예배를 드리면서 정말 예수님의 영광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떡과 포도주를 통해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생각해보고 진정한 고난의 예수님을 묵상하며 우리 또한 예수님의 희생의 삶을 닮아 영혼구원의 그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만찬에서 보여주신 희생의 길, 첫째는 떡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4장 22절입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떡과 잔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수님의 희생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떡과 잔을 먹고 마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희생의 능력, 죄로부터 자유할 수 있도록 예수님을 힘입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슐라이어 마허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사를 체험하는 통로가 세 가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성경 말씀이고, 또 한 가지는 기도이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성찬 예식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떡은 눈에 보이는 일반적인 평소에 먹던 떡이지만 그 의미는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곧 죽어질 몸입니다. 죄와 허물가운데 희생으로 죽어질 몸입니다. 또한 구원으로 이어질 영원한 몸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6장 49~51절입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우리 예수님은 인간들을 위한 영원한 양식으로 오셨습니다. 서로가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싸우는 이 세상에 예수님은 싸워서 채우는 것이 아닌 영원한 생명으로 채우는 양식, 생명의 떡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양식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섭취하는 사람은 끝없는 탐욕의 굶주림이 그치게 되고 영혼의 포만감을 얻어 남에게 자신을 아낌없이 주는 사람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의 인간을 위한 떡으로 오신 것을 증거합니다.
주님은 ‘떡집’이라는 뜻을 가진 도시 베들레헴에서 나셨고 태어나시자마자 말에게 먹일 모이를 모아두는 말구유에서 뉘우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태어나신 장소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을 위한 양식으로 오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온 몸으로 고난을 당하시고 육신이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는 것은 이 땅에 영원한 양식으로 자신을 내어주시고 우리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14장 22절에 “떼어”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래 헬라어는 “에크라센”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부서지다”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몸을 찢으심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단어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그 어떤 그 무엇으로도 영생을 얻을 수 없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이시기에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몸을 찢어 죽으심으로 이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47,48절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우리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 주신 그 몸으로 곧 사랑과 희생적 헌신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지 아니하면 구원과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의 신앙의 목적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번 주간 2022년 고난주간을 보낼 때 정말 희생과 헌신, 고통을 경험하신 예수님의 몸을 묵상하시며 또한 그 희생과 고난의 몸이 영광의 몸이 되시고 영생의 몸이 되신 것을 기억하시고 예수님 몸을 기념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만찬에서 보여주신 희생의 길, 둘째로 포도주담긴 잔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4장 23,24절입니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며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 죽으심과 생명의 부활을 가르쳐주시고 다시 포도주잔을 주시며 의미를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에 포도주를 담아 주시며 그 포도주가 “우리를 위해 흘리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할 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을 통해 구원함을 얻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집 현관문에 발라져 있으면 그 집은 죽음에서 모면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집은 죽음이 임하지 않고 건너뛰는 것입니다. 한자어 ‘유월절’이라는 단어에서 ‘유월’은 ‘건너뜀’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어로는 ‘PASS OVER’라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어떤 예쁜 집, 어떤 웅장한 집, 어떤 휘황찬란한 장식이 있는 집, 어떤 권력을 가진 명문가의 집이라서 건너뛰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라져 있는 집이 죽음을 모면하고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의 본질은 우리의 겉모양이 웅장하거나 예쁘거나 권력이 있거나 남들에게 내세울 학벌이 있어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가 있으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교회도 화려한 건물, 멋진 장식, 온갖 아름다운 옷들, 장엄한 의식, 어떤 직분을 가졌냐 이런 것으로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구원을 확실히 경험하며 죽음이 건너간 생명을 소유한 인생이 가득차있는 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가 가운데 임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제자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포도주잔을 받을 때 예수님과 새로운 언약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 20절입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출애굽을 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짐승의 피로 죄씻음의 예식을 통해 십계명을 주시는 일을 통해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것을 옛언약이라고 합니다. 옛 언약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씻기 위해 온갖 짐승을 희생의 제물로 드리고 그 피로 속죄함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제 한 번의 영원한 희생의 피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성만찬의 잔을 주시면서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14장 25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지금 성찬식을 계속 거행하며 포도주를 계속 마시고 있는데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성찬예식을 제정하시며 성찬의 의미를 가르치시면서 이제는 포도주를 다시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어를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주어가 뭘까요? 누가 다시 마시지 않는다는 말씀일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왜 예수님일까요? 그렇죠. 예수님께서는 이제 곧 예수님을 잡아 죽일 대제사장과 군병들에게 잡혀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제 이 성만찬이 끝나면 이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서 죽게될 예수님의 상황을 말씀하시며 이제 예수님이 자신이 이 성만찬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일이 없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잔을 마지막으로 드시고 자신이 세상을 떠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자들과 함께 새 것으로 마실 때까지 다시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성만찬을 진행하며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기념하며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선포하는 성만찬을 거행하지만 이 거룩한 예식의 완성은 우리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며 우리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 예수님에 베푸시는 어린양 혼인잔치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와 그 잔을 마시며 천국에 들어갈 것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12절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13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구원을 얻은 영생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고 그의 피를 힘입어 우리가 성결함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우리의 몸에 간직하면 우리는 거룩한 산 제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항상 예수님의 피를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항상 예수님의 피에 대한 감격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예수님짜리 인생,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희생과 헌신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만찬에서 보여주신 희생의 길, 마지막 셋째는 감사의 찬송과 기도로 결실을 맺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4장 26절입니다.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가니라”
우리가 성찬식에서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이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말씀하시며 성찬의 의미를 가르쳐주시고 성찬식을 제정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성찬식이 더욱 거룩해질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성찬식이후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신 이 일 때문입니다. 죽음과 희생의 자리로 나아가면서 그 죽음과 희생의 길로 가는 길에 찬양이 있었고 기도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만찬 후 주님과 제자들은 다시 감람산으로 갔습니다. 이곳은 만찬 전에도 주님께서 자주 들리시던 곳입니다. 거기로 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기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묻기 위한 것이고 말씀을 듣기 위한 것이고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성만찬을 했다고 금방 모든 것이 달라지고 새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죄 가운데 있습니다. 육신의 소욕이 그대로 우리속에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이 계속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성찬식을 참여하는 것이 우리를 완전히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불완전하기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사해주시며 우리를 위해 대신 죽어주신 것을 믿고 우리가 천국가는 자격을 얻었다고 해서 이 땅에서 우리가 선한 천사로 단번에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육신이 있고 아직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성만찬에 참여하여 다짐하고 결단했다고 그대로 살아가도록 사탄마귀가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의 삶이 필요합니다. 찬양이 필요하며 기도가 필요합니다. 육신의 소욕을 죽이고 성령을 거스르는 정욕을 제어하는 그 길은 바로 기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29절입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먹이신 것은 예수님의 희생을 기억하고, 너희도 세상의 삶 가운데 나를 기억하며 희생하며 살라는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의 적용을 이제는 예수님의 희생을 닮아가며 찬양과 기도로 예수님처럼 희생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식구 가운데 누구 하나는 희생을 해야 다른 식구들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주부의 역할은 참 큰 것입니다. 남편을 위해서, 아이들을 위해서, 때로는 부모님을 위해서 희생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희생을 한 사람에게는 이름표가 없습니다. 즉, 다시 말해서 희생한 사람을 잘 알아주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희생이란 고통이 배가되는 것입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는 것이 정치인, 사회지도자, 경제지도자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진정한 이 나라를 사랑하고 이 나라를 세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중 간절히 나라를 위해 걱정하며 희생하며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 한 이 대한민국이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름도 없이 희생한 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피와 땀 그리고 기도가 오늘 우리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믿고 간절히 더욱 기도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찬양과 기도로 가정을 세우는 사람, 찬양과 기도로 교회를 세우는 사람, 찬양과 기도로 우리 직장과 사회를 세우는 사람, 찬양과 기도로 우리 대한민국과 열방을 세우는 하나님의 택함받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리빙스턴이라는 선교사가 16년간의 아프리카 선교사 생활을 마치고 자기 고향에 돌아 왔을 때, 이미 그는 27번의 열병에 시달려 모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고, 사자에게 물린 한 쪽 팔은 무기력하게 매달려 있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한 대학에서 자신의 후배들에게 강연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고독한 선교사 생활 중에서 나를 지탱해 준 것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이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사람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사실 그는 인간적으로는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의 권력이 아주 큰 시대에 살았던 이스라엘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이 그 영토를 가장 넓게 확장해서 한참 힘이 세어지는 때의 왕이었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면 모두가 떨었고, 그는 말 한마디로서 가능한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명예를 가졌고, 권력을 가졌고, 재물을 풍부하게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져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여전히 부족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나와 함께 하실 때에 비로소 나에게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나 교회의 역사 가운데 나오는 신앙의 큰 인물들을 우리는 강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강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강한 것은 그 사람 자체가 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많이 가졌다고, 인격이 고상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존경한다고, 그것이 어떤 한 사람을 강하게 하지 못합니다. 신앙의 큰 인물들이 강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 가운데 그들이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찬식을 제정하시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 몸과 그 피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떡을 먹으며 예수님의 몸을 생각하고 잔을 마시며 예수님의 피를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기억하게 하시고 인류구원의 힘을 불어넣어주신 것입니다. 떡과 포도주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우리가 얻은 구원에 감격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찢기신 십자가, 예수님의 피가 쏟아진 그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셔서 이루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의미는 바로 “죄를 씻고 주님과 날마다 친밀히 동행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제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한마디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내가 죽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한몸되어 사는 삶’인 것입니다. 성찬식에 참여하여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새로운 피조물로서 예수님을 닮아가야하는 사람입니다. 이제는 성찬식을 대할 때마다 진실된 믿음의 눈이 열리고 그 성찬의 의미가 얼마나 무거운 지 깨닫고 참다운 구원의 역사속에서 살아가며 우리가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소명을 받고 담대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