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북에 오른 이태전 오늘 글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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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포의 새벽 편지-209
동봉
제1장 법회인유분3
여섯째는 상주법회常住法會입니다
느닷없이 왠 상주입니까
절에서 쓰는 도구道具를
대개 상주물이라 표현합니다
상주물에는 개인 소유가 있고
공공의 소유가 있습니다
법당이나 요사 화장실 등은
어느 개인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3벌 가사와 바리때
물거르는 주머니 좌구 등
비구육물比丘六物은 개인 소유지요
이들 개인소유와
사원의 공유재산을 일컬어
시방十方상주와
현전現前상주로 나눕니다
가사는 스님네 승복입니다
3벌이란 같은 디자인이 아니고
용도가 각기 다른 옷들입니다
쓰임새 때문에 3벌이 필요하지
여벌로 지니고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여벌을 얘기한다면
바리때도 좌구도
물거르는 주머니도
모두 다 여벌이 있어야겠지요
모든 생명에게 있어서
먹는 문제는 입는 것에 앞섭니다
못 입고 못 쓰더라도
목마르고 배고픔을 해결하는
섭취의 본능이 먼저 고개를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기인 바리때는 고작 1벌인데
몸에 걸친 옷은 무릇 3벌이라고요
바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자이기 앞서 사람이라면
예의염치禮義廉恥가 필요합니다
예절 의리 청렴 부끄러움은
사람이기 때문에
배우고 때로 익히는 것이지요
문상할 때 옷이 있고
파티Party복이 따로 있듯 말입니다
파티도 종류에 따라
입는 옷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가든 파티
고별 파티
댄스 파티
런치 파티
이브닝 파티
카드 파티
선물 파티
축하 파티
티파티가 있고
심지어 이혼 파티
칵테일 파티 등이 있습니다
이들 다양한 파티에서
같은 빛깔의 옷을 입을 수 없고
같은 디자인을 고집할 수 없지요
왜냐하면 사람이니까요
사랑이 동물과 다른 게 무엇입니까
문명입니다
문화입니다
문화 문명의 '문文'은
문명의 역사가 옷에서 기인함입니다
상형문자가 뜻하는 문文은
옷을 제대로 갖춰입은 모습이지요
걸식할 때는 대가사를 입습니다
걸식 그 자체가 장엄한 법회입니다
걸식에서 돌아와 공양할 때
대가사를 벗지 않습니다
입을 통해 말說하고
귀를 통해 듣는聞 법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걸식으로부터
반사법회가 끝날 때까지는
몸에서 대가사를 벗지 않습니다
일곱째는 발씻기입니다
우리 인간의 몸 중에서
힘든 일이란 일은 도맡으면서
대우받지 못하는 곳이 곧 발입니다
평생을 살아왔고 또 살아가면서
발이 있기에 오고 갑니다
인생도 하나의 길이지요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불도佛道도 깨달음에로의 길입니다
수행자도 마찬가지로
마음을 닦고修 몸으로 걷行습니다
이 소중한 발을 위해
발씻기 법회가 매일 열립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있어온
가장 일상적인 발씻기 법회
요즘 우리는 발씻기를 잊었습니다
차라리 물건을 잃듯 잃었다면
오히려 덜 서운할지 모르지요
잊음과 잃음은 다릅니다
잃음이 소유와 물질의 세계라면
잊음은 정신의 세계며
문명의 세계며
문화의 세계입니다
불교고유의 세족洗足 문화가
불교에서는 사라지고
지금은 이웃 종교에서 펼치고 있습니다
이른바 '마운디Maundy'라고요
날개를 가진 조류라든가
또는 작은 곤충들은
발의 소중함이 사라졌을까요
매와 독수리 따위가 날개를 써서
공간을 이동하고
먹이를 향해 달려들지만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발이 없다면
이빨 빠진 호랑이가 아니라
발톱 빠진 독수리일 것입니다
나비도 벌도 모기도
날개로 꽃을 찾아 이동하지만
그들에게 다리이자 발이 없었다면
꽃가루를 수정시키는 일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물고기의 지느러미에 해당하는 발
발이 있기에 우리는 움직입니다
우리는 곧잘 말합니다
"으음, 이 차는 나의 발이야!"
새 차를 구입했을 때
얼마나 사랑을 쏟습니까
털고 닦고 조이고 기름칩니다
티가 묻으면 입김을 불어가며 닦습니다
진짜 발에도 정성을 쏟는다지요
페디큐어Pedicure 사업이 괜찮다지요
그러나《금강경》첫머리에서
발씻기 법회를 펼칩니다
매일같이 하는 일이라
특별할 게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은 소중하고 소중합니다
여덟째는 자리 깔기입니다
앞서 7가지가 움직임법회였다면
자리 깔기는 고요로 가는 법회입니다
자리 내면의 세계를 향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법회입니다
우리 이《금강경》은
조계종 소의所依경전입니다
조계종의 종지宗旨가 무엇입니까
곧바로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룸이지요
금강경은 반야의 경전이고
바라밀의 경전입니다
경전 어디를 살펴보더라도
선종과 관련지을 만한 곳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다만 역사적으로
남종선의 시조이자 중국선종의 제6조
훼이능慧能(638~713)선사가
출가하기 전 시장에서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게 되지요
그리고 마음을 내고 출가했는데
나중에 차오씨샨曹溪山에서
불법을 크게 펼칩니다
차오씨따스曹溪大師란 이름도
그래서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조계종의 종명에서 보듯
우리는 육조의 남종선을 이어왔고
육조가《금강경》과 관련이 있기에
금강경이 대한불교조계종의
소의경전으로 들어앉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금강경에는
선禪과 연결될 만한 곳이 없을까요
왜 없겠습니까
있습니다
바로 이 '자리 깔기법회'입니다
시내에 나가 음식을 빌고
기수급고독원으로 돌아와
여법하게 공양을 마치고
조용히 발을 씻고
자리를 깔면서 선은 시작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금강경이 태동하게 된 동기입니다
법회法會는 곧 법의 모임입니다
그러나 법이란 딱히 '이것'이라고
지목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법의 모임'이라고 하는
개념과 용어 자체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문자반야를 빌려
법회라는 말을 쓰게 되었지요
앞서 말했듯 금강경이 설해진 배경은
작게 보면 기수급고독원이지만
우리 인간의 세계 만이 아닌
하늘의 세계
신들의 세계입니다
크게 보면 삼천대천세계고
더 크게 보면 은하계며
은하단이며
초은하단이며
초초은하단이며
수백억 광년을 가로지르는 우주입니다
우주가《금강경》이 설해진
가장 포괄적인 동기因由입니다
07/28/2015
곤지암 우리절 선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