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경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진 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도구입니다. 전쟁 수행 중에 적의 동태를 살피거나, 항해할 때 멀리 있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요긴하게 사용됩니다. 하지만
망원경의 발견이 인류 역사에 끼친 가장 큰 공로라면 역시 천체의 관측을 가능케 함으로써 우주를 연구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는 달에 켜놓은 촛불까지 확인이 가능한 망원경이 등장했다고 하니 앞으로 천체망원경을 통해 얼마나 먼 곳까지
볼 수 있게 될까요? 우주에 끝이 있다면, 공간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그 우주의 끝을 볼 수 있는 날이 과연 올까요?
망원경은 공간적으로 멀리
있는 것을 시각적으로 가까이 가져다 줍니다. 마치 망원경이 공간에 대해서 이러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시간에 대해서도 미래를 현재의 지평으로 끌어다가 알려줄 수 있는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요, 헛된 상상력의 소산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공간적 거리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는 물체를 망원경을 통해 보는 것은 인간에게 허락되었지만, 미래를 현재의 지평에서 미리 아는
것은 인간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단 하나의 예외는 있는데, 그 예외란 온 우주의 역사에서 모든 순간을 오로지 현재로 존재해 왔고, 지금도
현재로 존재하며, 미래에도 현재로 존재할, 즉 시간을 초월한
어떤 존재자가 자신의 미리 앎(예지, 叡智)을 귀띔해 준 경우, 즉 계시(啓示)의 경우뿐입니다. 하지만
시간을 초월하지 못한 인간이 계시를 통해서 미래를 아는 것은 보다 엄밀하게 말하면 예견(豫見)이지, 예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예견만
있을 뿐, 예지는 시간을 초월한 신의 영역에 배타적으로 있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삶이 한 순간씩
다가옵니다. 한 순간이 지나가야 다음 순간이 다가올 수 있으며, 각
순간은 의식으로 잡아낼 수도 없을 만큼 짧습니다. 우리에게 현재로 포착되어 의식된 그 ‘현재’는 이미 지나간 과거의 한 순간일 뿐이며,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미래’로
나아가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입니다. 이러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진행이라는 시간의 연속이야말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삶의 당연한 방식일 뿐 아니라, 모든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시간을 창조하셨으며 초월해 계신 신인 하나님은 우리처럼 시간에 매여 살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삶은 연속된 순간들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태초
이후의 모든 순간은 언제나 ‘현재’입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그 순간도, 그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순간도, 지금 제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고 이 순간도,
그리고 언젠가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그 순간도 하나님께는 현재입니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시간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해
다음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시간을 우리가 곧장 따라가야 하는 직선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 직선이 그려진 종이 전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직선의 일부를 한 걸음씩 밟아갑니다. 우리는 A를 지나야
B에 갈 수 있으며, B를 지나야 C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에서, 밖에서, 그리고 사방에서 이 직선 전체를 품고 계시며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이런 생각이 터무니없는
상상이 아니라면 시간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성이야말로 하나님의 예지의 근간이 되며, 따라서 예지가 하나님께
배타적으로 귀속된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예지란 낱말은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앎에 대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자신의 앎을 미리 ‘앎’으로서의 예지라고 표현하는 것은 모순이며, 그 분에게 앎은 그냥 ‘앎’일
뿐입니다. 제가 지금 의자에 앉아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지만, 한 시간 후에도 그러고 있을지 아니면 식사를 할지는 저의 자유의지이기에, 한
시간 후 저의 미래는 저에게는 불확정적입니다. 하지만 한 시간 후 저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적
앎은 확정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예지적 앎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인간은 과거를 반추하고, 현재를 의식하며, 미래를 예견함으로써 불완전하게나마 앎이 이룹니다. 인간의 앎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사건 자체에 있어서의 과거의 기억이나 현재에 대한 인식, 그리고 미래에 대한 예견이 틀릴 수 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과거에 발생했고, 현재 진행 중이며, 또한
미래에 일어나게 될 사건들의 의미를 대부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으려면 인간 역사의 시작과 끝을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아는 존재만이 어떤 사건의 의미를 정확하고
올바르게 해석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 먹을 것, 입을
것 아껴가며 열심히 건축헌금을 했었고 그런 과거의 사실을 알지만, 그 의미는 아직 잘 모릅니다. 교회의 개혁을 위해 현재 열심히 활동하고 있으며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아직 잘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예지적 앎으로 사건 그 자체와 의미를 진정
알 수 있으며, 그 사건을 이루는 나의 행동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예지만이 착오나 오해가 없이 완전합니다.
예견은 인간의 몫으로서, 현재의 지평에서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래에 펼쳐질 지평을 바라보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그 추측에 믿음의 요소가 추가된 경우, 그것은 예지적 성격을 띨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절대적인 존재의 절대성에서 기인한 것이어서 조그만 의심의 여지조차
없다면, 그것은 이제 예지와 구별이 되지 않을 만큼 완벽한 예견이 될 것입니다. 성경이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의 계시의 책이라면, 성경에 기초한 믿음에서
비롯된 인간의 예견은 하나님의 예지와 정확히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예견이 하나님의
예지에 보다 근접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기초한 믿음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기초한 올바른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우선됩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른 텍스트와는 달리 성경은, 마치 법률
조문처럼, 그 이해가 해석을 통한 이해로 끝나지 않고, 적용의
문제로까지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보편적 진리를 개별적인 삶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개별적인 삶을 성경의 보편적 진리에 합치시키도록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전인격적인 노력과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한 믿음, 그리고 그 믿음에 근거해서 미래에 대해 올바른 예견을 갖는 것은 참으로 어려워 보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하며, 알고 싶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예견합니다. 대학 입시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수험생은 시험을 통과하여 대학생이 되어있을 자신의 모습을 예견합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사람은 앞으로 1년, 5년, 그리고 10년
후에 그 사업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을지를 예견합니다. 교회 갱신의 현장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사람들도
교회와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예견은 죽음 이후에 자신의 존재가 어떤 상태에 처하게 될 것인가에 관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러한 예견이
기독교인에게는 구원에 관한 문제로 다가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말을 해 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절대적으로 신뢰할 만한 존재가 구원에 관해 계시할 경우에만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관해 제대로 예견할 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인간은 그러한 계시의 책인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성경이 기록된 목적이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이름에 힘입어 영생, 즉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조건이나 자격에 대해서 직접적, 혹은 간접적 방법으로 반복해서 알려줍니다.
직접적으로 구원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을 몇 군데 인용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골 1:22-2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이 외에도 성경에서 구원에 대해 하신 말씀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위의 말씀 모두는 하나님의
뜻이 계시를 통해서 드러난 것으로 믿을 수 밖에 없는 확고한 진리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말씀에
기초해서 자신의 구원을 예견하고 이루어야 합니다. 누군가 저에게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겠지만, 그것은 저의 의지적 표현일 뿐, 감정적으로까지
확신하지는 못합니다. 물론 간혹 감정적 확신이 동반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신학이나 교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물론 구원에 관해서
기독교 내에서 있어왔던 대립이나 갈등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어거스틴, 칼빈, 마틴 루터, 요한
웨슬리 등의 신실한 믿음의 선배요, 영적인 대스승들의 구원론이 강조하는 부분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인간의 믿음이 구원의 핵심임은 모두가 동의하는 진리인 것 같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고 원죄를 부정하는 펠라기우스식의 구원만 아니라면 말입니다.
인간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는 일반적으로 예지보다는 예정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인간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예정에 인간에 대한 예지적 앎을 포함시키는 것이 더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예정은 예지가 배제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기에 그에 관한 것은 물음표를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구원의 조건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가 어느 정도의 기여를 하는지 예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여겨집니다. 사람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육체와 영혼이 각각 몇 퍼센트씩 차지하고 있는지 묻는 것과 유사해 보입니다. 앞에 놓인 사과를 두고 누구는 “이 사과는 빨갛다”라고 주장하고, 누구는 “이
사과는 둥글다”라고 주장하며 서로 다툰다면 그 어리석은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싸움은 시작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 같습니다. 만일
그런 싸움을 거는 사람이 있다면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저에게 너무 버거운 주제로
글을 시작한 것 같아 중간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몇 차례 들었지만, 부족하게나마 끝까지 왔습니다. 부족한 글이기에 오히려 텍스트를 넘어서는 좋은 질문들과 해석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생겨날 것을 위안 삼으며
글을 맺습니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예지(叡智)와 예견(豫見)는 성경에서 신구약을 통하여 말씀하셨고,
하나님께서 태초 이후의 모든 순간은 언제나 ‘현재’입니다.라는 필자의 의견에 절대 공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자유의지를 주심이 축복인데 순종과 불순종에서 결과가 나누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집사람이 글을 읽고는 글의 요지가 도대체 뭐냐고핀잔을 주더군요.
격려의 댓글을 읽으니 힘이 납니다.ㅎㅎ
감사합니다.
예지와 예견에 대한 소중한 글 감사합니다.
절대적인 성경 말씀과 성령님을 통한 하나님의 예지가 인간의 예견과 일치한다고 이해하면 되겠군요.
이 글은 어떤 주제를 정해놓고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예견에 대해서 사고의 흐름에 따라서 기술해 나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글의 요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도 글을 다 쓰고, 다시 읽어보면서 인간의 예견이 하나님의 예지를 만나야 할 곳인 '성경'이 글의 요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바램대로 엉성한 텍스트를 뛰어넘는 훌륭한 해석을 해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보기에 제시글은 매우 훌륭한 글입니다. 어느 신학자도 그 이상은 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시간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시간은 1차원으로 규정하셨기 때문에 앞으로만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하나님께서 시간을 멈추거나 뒤로가게 하신 것은 창조의 능력을 보여주신 것이겠지요.
예지와 예견을 구원의 문제에까지 도입하셨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요.
오늘 강남에서 설교하신 한국성서대학교의 이민규 교수가 바로 이 문제를 가지고 설교하셨는데,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 그래서 구원을 얻은 사람도
심판대에서 선악간에 행한대로 심판을 받을 때,
행함이 없거나 악한 사람은 벌을 받을 것이 분명한데 인간으로서는 믿음과 행함이 만남으로 구원의 확신을
얻는 그 지점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서는 제시글에서 다 말씀하셨고
그래서 우리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고 신앙생활을 기쁨으로 할 수 있는데
이민규 교수는 "선악간에 행한대로"에 대한 해석을 명료하게 해 주신 것이 꽤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악이란 것이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도덕적인 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판단에
따른 악이란 것, 즉 하나님 나라에 보탬이 되지 않는 인간의 생각대로 행한 모든 것은 악에 속한다는 것이지요.
참으로 속이 시원한 설교였습니
이민규교수의 행함에 대한 설교에서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명쾌한 답을 주셨습니다. 저 역시 인상적이고 속이 시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