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을 읽어 나가다 보면 자주 (왕하 14:4) 오직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는 구절을 읽게 된다(왕하 12:3, 14:4). 도대체 이 산당들은 무엇이며 왜 왕들은 이 산당을 없애지 못했을까?
산당은 원래 이방 종교의 예배나 제사 지내는 곳이었다. 산당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바마(bâmâh)는 높은 곳, 산당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높은 곳 산이나 진지 그리고 높은 곳에 있는 예배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중앙 성전 예배가 행해지기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런 산당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림으로 부조들이나 출애굽 이후 성소 시대와 성전 시대 사이에 산당 예배가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상 9:19) 사무엘이 사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선견자이니라 너는 내 앞서 산당으로 올라가라 너희가 오늘 나와 함께 먹을 것이요 아침에는 내가 너를 보내되 네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네게 말하리라
보는 바와 같이 사무엘은 자주 산당에서 여호와께 예배했고 오랜 세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산당이 저들의 신앙의 본거지와 같은 곳이 되었다.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전까지 이스라엘의 광야 회막이 기브온 산당이 있었다.
(대하 1:3) 솔로몬이 온 회중과 함께 기브온 산당으로 갔으니 하나님의 회막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것이 거기에 있음이라
그럼에도 성경에는 자주 왕들이 산당을 없애지 못한 것을 온전하지 못한 개혁으로 나타내는 그런 표현을 자주 사용한 것을 보면 그 산당의 예배가 정상적인 예배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는 나름대로 선정을 베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려고 노력한 왕이었다.
(왕하 14:3)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
여로보암은 악한 왕의 기준이라면 다윗은 선한 왕의 기준이다. 이는 여로보암은 사람의 마음을 얻어서 자기에게 관심을 집중시켰고 다윗은 비록 허물이 있어도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살아간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마샤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 하지만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다.”고 했다.
그 산당은 우상 숭배나 이방 종교 제사를 하는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산당은 하나님의 원칙에서 벗어나 명목만 여호와를 섬긴다고 하지만 많은 부분이 이방 종교처럼 되었고 이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불쾌하게 여기는 것들이었다. 후일에 히스기야는 모든 산당을 헐어버렸다. 소위 이스라엘의 산당 신앙과 같은 미신적인 기독교가 오늘날 교회라는 이름으로 드려지는 예배 가운데 난무하고 있다.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열광하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예배는 이스라엘이 산당에서 드린 산당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이용해서 흥분시키고 즐겁게만 하려는 그런 종류의 예배는 산당 제사다. 이런 예배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그분을 격노케 한다. 이교의 우상 숭배가 기독교 안으로 들어온 것과 같다.
오늘날 교회 안으로 각종 성경에 나오지 않는 이교의 축제일들이 성탄이나 부활 그리고 온갖 이름을 붙여서 들어왔다. 일종의 산당 제사 같은 것들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배하긴 하지만 말씀에서 벗어난 산당 예배다. 지금 우리는 말씀 중심, 원칙 중심에 치중해야 할 때다. 말씀을 더 깊이 연구하고 성경을 상고하면서 오시는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는 기독교와 비슷한 유사 기독교가 판치는 세상입니다. 간판만 교회지 그 속에서 행해지는 일들은 인간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사람의 감정을 이용해서 진정한 예배 대신에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하는 종교적 푸닥거리를 예배로 착각하게 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말씀 중심, 그리스도 중심,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지켜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우리 신앙이 산당 신앙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