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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함께하는 시인들 The Poet`s Garden 원문보기 글쓴이: 박정원
ⓒ 박정원_ 산수유꽃
크리스마스이브의 백석 (외 4편)
박정원
남편을 잃은 여자와 아내를 버린 남자가 커피 볶는 집에서 백석을 읽는다
소나무부부가 손을 꼬옥 잡고 드센 바람도 좋아라 유리창 밖에서 응앙응앙 울고
가는 눈이 간간이 뿌려지는 전봇대에 앉아 볶은 커피 향을 기웃거리는 직박구리 한 마리
강 건너 저편엔 천국행열차가 산그림자를 끌어내려 굼벵이처럼 지나가고
서서히 지워지는 마을들
하나 둘씩 불이 켜지는 만주벌판의 집들
여자는 말없이 백석과 동침하려 이불을 펴고
마침내 도착한 나타샤와 흰당나귀를 연신 스마트폰에 담아내는 남자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세상한테 지는 길이라네 내가 좋아서 버리는 거라네
눈도 푹푹 나리지 않는데 도무지 일어설 생각을 않는다
생막걸리
어제는 오늘
오늘은 내일
내일도 어제
어제도 내일
오늘은 오늘
퉁퉁 불었을 덩어리들 생짜박이로 나와라
깊게 파인 주름살, 호시탐탐 엿보는 비웃음들 찢어져라
오늘에서야 다 발효되지 않았느냐 시어터진 김치 한 장 우적우적, 절로 어깨 들썩이지 않느냐 단맛 신맛 떫은맛 쓴맛 매운맛 죄다 모이지 않았느냐
두고두고 삭혔을 너희들
연탄불꽃처럼 오종종 모였으니
낮게 깔린 구름지붕 저쪽으로 훠얼훨 날려 보내지 않겠느냐
분별없는 경제도 내 가난한 북녘 땅도 저 멀리 혼자서 외로움의 귀싸대기를 맞는 독도도
어서 오너라 다 모여라 앉아라 가득 부어라 어허허 웃어라
술술 넘어가지 않느냐 한 바가지 꺼억 들이켜지 않겠느냐
주모, 주모오!
아따, 연속극 그만 보고 라이브 채널로 돌려보소
여기∼ 동해에서 걷어 올린 게다짝 부침개 한 장 추가요 생생한 막걸리 열 병 추가란 말이요
소금꽃나무*
허공인데
둘러봐도 낭떠러지뿐인데
절벽을 치며 어둠뿐인 어둠을 헤치며
걷지도 못하면서 날 수도 없으면서
점점 어두워오는데 얼어붙기만 하는데
뼛속까지 드러낸 바람으로 숭숭 뚫린 뼈마디로
얼음꽃 빙빙氷氷 나무나무 가지가지
눈물방울 맺혀가며 뚜욱뚝 떨쳐주며
일어설 듯 주저앉을 듯 호롱불빛,
꽃기둥 정수리에서 저 홀로 숨을 쉬네
* 김진숙 산문집
똑똑과 삐딱說
지나던 풋중이 날 보더니 대뜸 시를 쓰지 말란다 시를 쓰지 않으면 살 수 없다니까 시를 쓰면 풍지박살 날 터이니 당장 끊으란다 당장 끊을 수 없으면 서서히 끊으란다 쓰지 않으면 살 수 없어요 자라목으로 여쭈니까 돌멩이 던지듯 냅다 (점잖지만 단호하게) (눈을 부라리고)
똑바로 살란다 똑바로
그날 이후
시의 마음이 시를 읽지 못한다 시의 끈이 끊겼다 이어졌다 한다
시로써 시를 꺼내지 못하고 박장薄章으로밖에 여물지 못하니 맥없는 시의 곁가지만 쳐댄다
바르고 바르지 못한 기준의 허물들이 죄 일어나 내 목을 바싹 조른다
똑
똑바로
바로 바로
똑바로
접두어 똑이 기운 바로를 또다시 밀친다
사전에 적힌대로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곧게) (틀리거나 거짓 없이 사실대로) 본다면
두 개의 똑이 허공에서 붕붕
중심을 잡지 못하고 떠다닌다는 얘기다
그래서 매일 밤 똑 소리 나는 똑이 울고 있다는 거다
두 똑의 세운 똑과 누인 똑의 기준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내 똑과 나를 먹여주고 재워주는 똑의 시발이 또 다른 똑의 좌표에서 삐꺽했으니
삐딱한 시가 제자리가 아니라는 얘기다
삐딱한 시 때문에 제자리가 있다는 얘기다
삐딱한 시만이 시라는 얘기다
장작불곰탕
활활 잘도 타는 구나 다시 올까 올 수 있을까 여기서 끝장인 단막극인가
죽도록 사랑하다가 죽지도 못하고 불꽃 앞에서 수음手淫을 한다
뜨거운 몸이여 너무 사렸구나 움츠렸구나 왜 그랬지 모두 빠져나간 내 곰국
아직은 성한 몸에다 성냥을 긋는다
내 속살의 송곳이 내 입술의 면도칼이 뿌지직 내려앉는다 바싹 마를수록 뿌연 공중에 다다르는 도원桃園, 한번 올라가면 내려가기 싫은 혓바닥이 불꽃을 타고 날름거린다
침목이었다가 마트로시카였다가 아이들의 바비였다가 죽은 내 어머니의 내 아버지의 십자가였다가 목탁이었다가
마침내 스러짐이여 타다 남은 방망이여
잿더미 속으로 드는 문門이로구나
알량한 소리
맛보지 못한 향기
색색의 빛깔들
다저녁 노을길로 바싹 따라가는구나
죽도록 사랑해보지도 못하고 죽을 수도 없고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불길이여 후룩후룩 국물만 넘기는 목마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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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작금의 현실이, 내 직업이, 도대체 시를 그냥 놔두지 않는다. 우물우물, 은근슬쩍 그냥 넘어가는 일이 도처에 널려 있다. 그것들을 날것으로 놔두고 시를 쓴다는 것이 과연 어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같은 하늘 아래의 지구별에서 같은 세대에 태어나 함께 웃고 울고 사랑하고 밥 먹고 잠자다가 같은 세대에 죽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나를 위하여 쓰는 것은 아닐까. 시의 정치성, 경제성, 사회성, 문화성 등은 차치하더라도, 우리의 민생경제는 어렵고 어려운 가운데 나누는 온정의 물결은 그 어느 때보다도 팍팍하다. 여유롭지 않는 가난이 사랑을 먹여 살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IMF때 모든 걸 잃은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세무서 8급 공무원으로 취직 좀 할 수 없냐고. 요즘 되는 게 없다며 너는 딴 맘 먹지 말고(지랄하지 말고) 국세청에 끝까지(정년까지) 다니라고. 시만 쓰는 것은 절대로 아름답지 않다. 요즘 들어 부쩍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결코 현실에 안주하면 안 되리라. 막걸리 한 사발 시원스레 들이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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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삐딱한 시’ 위에 핀 ‘호롱불빛’
- 박정원의 시
오홍진
‘삐딱하다’란 말을 들으면 지젝의 『삐딱하게 보기』(시각과언어, 1995)라는 책이 먼저 생각난다. 삐딱하게 보는 것은 다르게 보는 것이고, 다르게 보는 것은 이미 일상화된 관점을 ‘새롭게’ 보는 것이다. 새롭다는 건 무엇일까? 세상에 새로운 것은 과연 있을까? 아니 시로 쓰여지지 않은 새로운 것들이 과연 있기나 할까? 박정원의 「똑똑과 삐딱說」을 읽으며 나는 ‘똑바로’라는 말과 ‘삐딱한 시’라는 말 사이에 드리워진 아찔한 거리를 생각한다. 똑바로 사는 건 어떻게 사는 것일까? 삐딱한 시는 어떻게 쓰는 것일까? 끊임없이 떠오르는 질문들 앞에서 “바르고 바르지 못한 기준의 허물들이 죄 일어나 내 목을 바싹 조른다”(같은 시)는 ‘아찔한’ 경험을 나는 반복한다. 시 속의 나와 이 글을 쓰는 나를 구태여 구별할 필요가 있을까? 무언가를 쓰는 주체는 똑바로 사는 길과 삐딱하게 보는 눈(관점) 사이에서 변함없이 무언가를 쓴다. “시를 쓰면 풍지박살 날 터이니 당장 끊으”(같은 시)라는 ‘풋중’의 말에는 아랑곳없이, 쓰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는, 나는, 시인은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글(시)을 쓰는 게 무엇이기에 이토록 몸조차 사리지 않고 쓰는 것일까? 박정원의 신작시 5편은 무엇보다 이러한 질문에 어떻게든 답변해 보려는 시인의 시적 시도로 읽힌다. 대답할 수 없는 것을 대답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온몸으로 시작(詩作)을 실천한 김수영의 몸짓과 상당히 닮아 있다. 물론 김수영이 박정원은 아니고, 박정원 또한 김수영은 아니다. 온몸으로 무언가에 덤벼든다는 건 그 행위가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어떤 가치를 향한 도정 위에 시(쓰기)가 있는바, ‘삐딱한 시’에 대한 박정원의 진술은 실상 죽음도 막아설 수 없는 시 쓰기의 욕망을 그대로 예증하는 것이라고 봐야 하겠다. 요컨대 시 쓰기는 그에게 ‘목숨을 건 도약’을 요구한다. 「똑똑과 삐딱說」에 나오는 풋중의 얘기가 그것이 아닌가. 시를 쓰지 말라는 건 돌려 말하면 목숨을 걸고 시를 쓰라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없으면 쓰지 말라는 것, 그것이 삐딱한 시가 자리하고 있는 일차적 토대라면, 시를 삐딱하게 하는 기준, 그러니까 일차적 토대 위에서 피어나는 진짜 꽃은 무엇일까?
두 개의 똑이 허공에서 붕붕
중심을 잡지 못하고 떠다닌다는 얘기다
그래서 매일 밤 똑 소리 나는 똑이 울고 있다는 거다
두 똑의 세운 똑과 누인 똑의 기준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내 똑과 나를 먹여주고 재워주는 똑의 시발이 또 다른 똑의 좌표에서 삐걱했으니
삐딱한 시가 제자리가 아니라는 얘기다
삐딱한 시 때문에 제자리가 있다는 얘기다
삐딱한 시만이 시라는 얘기다
- 「똑똑과 삐딱說」 부분
‘똑바로 살라’는 풋중의 말을 듣고 시인은 ‘똑바로’라는 말을 향해 집요한 사유의 그물을 던진다. 똑바로 세우는 게 있으면, 똑바로 눕는 게 있다. “세운 똑과 누인 똑”은 ‘똑바로’라는 말에 펼쳐진 의미의 맥락을 예시하고 있거니와, 그것은 기준점이나 좌표에 따라 ‘똑바로’의 의미 역시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내포한다. 단 하나의 똑바른 길만 있는 게 아니라, 수없이 많은 똑바른 길이 있다. 똑바른 것은 그러므로 다른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그것은 일상인의 관습화된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삐딱한 것은 분명 똑바른 것이 아니지만 삐딱한 것 때문에 똑바른 것이 있다. “삐딱한 시 때문에 제자리가 있다”는 시구는 정확히 이 지점을 가리킨다. 비딱한 것은 똑바른 것이라는(그 역도 마찬가지다) 역설이 시를 가능하게 한다. 풋중의 ‘똑바로 살라’는 말을 ‘삐딱하게 시를 쓰라’는 말로 재해석하는 시인의 위트(wit)가 돋보이는 이 시에서 ‘똑똑과 삐딱’은 쓰는 일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존재의 내면을 흐르는 삶의 기준점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생막걸리」라는 시를 참조한다면, 이러한 삶은 “두고두고 삭혔을 너희들”의 발효된 삶과 다르지 않다. “단맛 신맛 떫은맛 쓴맛 매운맛” 등 삶의 온갖 맛들이 다 모인 삶터에서 민중들은 “어서 오너라 다 모여라 앉아라 가득 부어라 어허라 웃어라” 하면서 술술 막거리를 들이마신다. 술을 마시면 흥이 돋고, 흥이 돋우면 노래가 나온다. 노래와 춤이 어울려 질펀하게 벌어진 술자리의 향연은 가난하기에 서러울 수밖에 없는 민초들의 삶을 그대로 반영한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생막걸리 한 잔에 서러움을 털고, 노래 한 곡에 실어 남아 있는 서러움을 털어내면 어제와 같은 내일의 삶을 다시 살아낼 수 있는 힘을 그들은 얻게 된다. 일상이란 게 원래 반복되는 것 아닌가. 생막걸리처럼 똑바른 술(모든 술은 발효된 술이다!)을 마시며 삐딱한 시의 길을 걸으려는 시인의 모습을 우리는 이 시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발표된 신작시 5편 중에서 다소 이질적으로 보이는 「크리스마스이브의 백석」은 생막걸리의 신명으로도 해소할 수 없는 삶의 또 다른 면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데서 주목할 만하다. 백석의 대표시인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 빗대어 쓸쓸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의 삶을 구현하고 있는 이 시는,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나타샤와 더불어 마가리(깊은 산골)로 가려는 원시(原詩)의 시적 화자의 삶을 현대적으로 각색하여 표현하고 있다. 강 건너 저편을 지나가는 천국행 열차가 보이는 카페에서 “남편을 잃은 여자와 아내를 버린 남자가” 백석(의 시)을 읽고 있다. 그들은 백석의 시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천국행 기차를 타고 마가리로 가고 싶었을까? 아니 에두르지 말고 직접적으로 물어보자. 그는 정말 마가리를 향해 발길을 옮겼을까? 백석의 시에 나타나는 시적 화자는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시며 나타샤를 생각하고 있다. 세상이 더러워 그는 마가리로 가려 하지만, 그것은 다만 머릿속의 상상일 뿐이다.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마가리를 향해 가지만, 정작 현실 속의 시적 화자는 카페에 앉아 소주만 마시고 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백석」에 나오는 시적 화자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천국행 열차를 타고 “만주벌판의 집들”로 갈 수 없는 존재들의 비애에 이 시의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눈도 푹푹 나리지 않는데 도무지 일어설 생각을 않는” 연인의 삶은 삐딱하게 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존재들의 쓸쓸함을 명확히 보여준다고 하겠다.
한쪽에는 민초들의 신명(「생막걸리」)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천국행 열차에 오르고 싶지만, 그 일을 실천할 수 없는 연인들의 쓸쓸함이 있다. 신명과 쓸쓸함의 서정 사이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박정원의 시는 그럼에도 여전히 신명의 시학으로 저울추가 기울고 있다. 신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희망이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것이 신명의 흥겨움이라면, 박정원의 시는 무엇보다 쓸쓸한 삶의 이면에서 여여하게 살아 숨 쉬는 신명난 삶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세상의 논리로 보면 그것은 ‘삐딱선’을 타는 것이다. 삐딱하다는 것, 그것은 경계를 넘어 새로운 경계를 만드는 생성의 기호로써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허공인데
둘러봐도 낭떠러지뿐인데
절벽을 치며 어둠뿐인 어둠을 헤치며
걷지도 못하면서 날 수도 없으면서
점점 어두워오는데 얼어붙기만 하는데
뼛속까지 드러낸 바람으로 숭숭 뚫린 뼈마디로
얼음꽃 빙빙氷氷 나무나무 가지가지
눈물방울 맺혀가며 뚜욱뚝 떨쳐주며
일어설 듯 주저앉을 듯 호롱불빛,
꽃기둥 정수리에서 저 홀로 숨을 쉬네
- 「소금 꽃나무」전문
이육사의 「절정」을 연상시키는 이 시의 핵심은 역시 “일어설 듯 주저앉을 듯 호롱불빛,”이란 부분에 있을 것이다. 허공-낭떠러지-어둠 등의 불길한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꽃기둥 정수리에서 저 홀로 숨을 쉬”는 호롱불빛의 형상은 ‘똑똑과 삐딱’을 동시에 실천하는 시적 원형으로 제시되고 있다. 시인은 ‘소금꽃나무’를 김진숙의 책 『소금꽃나무』에서 빌려왔음을 밝히고 있다. 김진숙은 300일이 넘게 진행된 한진 중공업의 크레인 농성을 이끈 인물이다. 희망나무로도 불리는 소금꽃나무는 자본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끝내 희망의 옷자락을 움켜 쥔 수많은 노동자들의 의지를 상징한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정규직이 아니라는 이유로 인간 대접을 못 받는 그들을 향해 김진숙이 기록한 외침을 시인은 장르를 달리하여 표현하고 있다. 까마득한 크레인에 올라가 그들은 무엇을 외쳤을까? 자본의 힘이 노동자들의 생존권마저 잠식해버린 지금, 그들은 자본에 맞서 꺼지지 않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이 허공이고 낭떠러지이고 어둠뿐인 곳이라고 해도, 그들은 목숨을 걸고 그곳에 서서 희망을 외치고 있다. 풋중의 말처럼, 그들의 외침은 시를 쓰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시인의 시 쓰기를 그대로 빼닮았다.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이 엄청난 비극이 시를 시답게 만드는 원초적 경험에 해당되는 셈이다.
똑바로 사는 게 삐딱하게 사는 것이란 역설의 시학은 이 지점에서 제 의미를 발산한다. 낭떠러지가 높을수록, 어둠이 깊을수록 피어나는 호롱불빛의 희망은 목숨을 건 도약의 시적 맥락을 분명히 보여준다.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상황에서도 “강철로 된 무지개”(「절정」)를 상상한 이육사의 경우처럼, 박정원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대상)들은 저마다의 시련을 저마다의 방법으로 꿋꿋하게 견디려고 한다. 「장작불곰탕」에 시화되는 장작 또한 “뜨거운 몸”으로 더욱 뜨겁게 ‘활활’ 타는 인생의 절정을 표현하고 있는바, “바싹 마를수록 뿌연 공중에 다다르는 도원桃園” “잿더미 속으로 드는 문門” 등에 나타나는 ‘목숨을 건 도약’의 서정적 순간들은 이 세상 모든 생명들의 가슴에 새겨진 생에 대한 본능, 요컨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희망(생명)의 정서를 에둘러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중요한 것은 그토록 뜨겁게 자기 몸을 살랐으면서도, 장작은 여전히 “죽도록 사랑해보지도 못하고 죽을 수도 없고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불길이여 후룩후룩 국물만 넘기는 목마름이여”라고 애타는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제 몸을 태워 재가 되는 상황 속에서도 장작은 무엇에 그리 목말라 하는 것일까? “침목이었다가 마트로시카였다가 아이들의 바비였다가 죽은 내 어머니의 내 아버지의 십자가였다가 목탁이었다가” 이제는 “타다 남은 방망이”로 스러져가는 저 장작의 파란만장한 삶은, “불꽃 앞에서 수음手淫을 한다”는 시구에 드러나는 대로, 스러져가는 순간에도 여전히 뜨거운 욕망과 이어져 있다.
수음은 살아 있음을 나타내는 징표이다. 정신이 알아채기 이전에 살아있는 몸이 먼저 반응을 한다. 장작의 목마름은 그러므로 살아 꿈틀대는 몸의 목마름과 다르지 않다. 그것을 생에 대한 본능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백석」에 등장하는 연인들이 멈춘 자리에서 ‘타다 남은 방망이’가 된 장작은 “아직은 성한 몸에다 성냥을 긋는다”. 죽기 아니면 살기 아닌가. 자기 몸을 완전히 태워 재가 되지 않는 한 장작은 제 몸에서 꿈틀대는 욕망을 결코 외면할 수 없다. 그것이 생막걸리의 생리이고, 크레인에 올라가 노동해방을 외치는 노동자들의 생리이다. 『삐딱하게 보기』를 쓴 지젝은 ‘자신의 욕망을 끝까지 욕망하라’고 외쳤다. 욕망의 끝자리는 무엇일까? 죽음일 것이다. 생체적으로 죽지 않는 한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박정원의 ‘삐딱하게 보기’는 바로 생명을 생명답게 만드는 이러한 욕망의 시학과 다르지 않다고 하겠다.
■ 오홍진 : 문학평론가.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공저로 『경계와 소통, 탈식민의 문학』등이 있음. 충남대 교수.
- 『詩文學』2012년 4월호/ 집중, 이 시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