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 찾기
장흥출신 인물 중에 김양천 이승만 대통령 비서실장 겸 경호실장 경무대경찰서장을 겸한 분을 찾습니다. 관산읍 고마리 고마마을 인물 중에 김양천 비서실장 이름 있어 이장님과 통화하였는데 전혀 알지 못해 이렇게 인사를 드립니다. 김양천 부인 추정 김분옥 여사는 3.1만세운동 전날 유관순 열사와 이화학당 같은 반으로 6인 결사대를 조직하여 남대문역 앞 시위를 주도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여자 경찰서장 총경을 역임하였습니다.김양천 씨는 94년에 돌아가신 것으로 부음란에 있는데 후손들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김분옥 여사 묘지는 망우리공원에 1966년 미국에서 한국에 일을 보려 왔다가 급환으로 돌아가시어 모시었습니다. 비문 내용으로는 김양천 씨는 김해 김씨로 미국 유학 중에 만나 결혼하고 다섯 자식들도 미국 유학을 하였다고 새겨져 있습니다. 경찰 기록을 뒤져봐도 정확하게 두 분이 부부인지 해석상 애매하여 이렇게 연락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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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연혁사를 보니 김해김씨로 여겨진다. 마을에서는 김양천 씨를 현대의 인물 공직자로서 경력이 경무대 비서실장을 역임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 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장 2대 김양천(金良千), 임기는 1948년 10월 ~ 1949년 6월 1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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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1994년 1994.12.30 부음 기사(중아일보 기사 발체)
[초대대통령 비서실장 金良千(김양천) 씨 별세
-1994.12.30 00:00
초대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김양천(金良千)씨가 29일 0시1분서울고려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89세.
金씨는 48~50년까지 이승만(李承晩)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고 한국전쟁후에는 주한유엔사령부에서 통역담당관을 지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李복순(66)씨와 3남1녀.발인 31일 오전9시.장지는 경기도 용인공원묘지.(730)9699.]
¤ 김양천과 이복순 나이 차이가 23살이나 된다.(김양천 졸년 1994, 당시 89세이니 생년은 1905년생이다)
¤ 김분옥의 비문에 九ㅇ三이라고 새겨있다. 이는 1903년생이라는 것이다. 중앙일보 부음 기사에 의하면 김양천 생년도 1904~1905년생이다. 셈을 하니 나이가 1년 차이다. 거의 동시대 사람이다고 봐야 한다.
¤ 고마리는 1구 고마마을과 고마리 2구 장환마을, 고마리 3구 포두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고마리 1구 고마마을은 본래 섬이었다가 간척사업으로 장환마을과 연륙되었다. 고려시대 때는 고마도였다. 고려원종 7년 (1276년)과 충렬왕 7년(1281) 2차례에 걸쳐 일본 정벌을 위한 려원연합군의 발전기지 역할을 했던 섬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장환도를 병합하여 고마리라 하였다. 개촌연대는 1920여년경으로 추정되며 성씨는 금성변씨, 밀양박씨, 평택임씨, 전주이씨, 김해김씨, 안동장씨 등이다.
¤ 비문 판독
1903년 음 11월 12일 평남 강면군 주부 김극서씨 2녀로 탄생했다. 어려 영특하여 한국여성의 무지미개함을 통탄하고 속히 현대교육을 받아서 부녀계몽을 하겠다며 ㅇ결심하고 12세 때 상경하여 이화학당에 입학하시다 성적이 우수하야 여러번 월반도 하고 늘ㅇㅇ의 수위를 차지하셨다. 재학시는 방학 때마다 농촌계몽운동과 전도강연에 바빳고 삼일운동에 ㅇ류관순과 같이 민족운동의 선봉이 되었다. 학교당국에서는 그 재질에 상하야 이화대학을 졸업ㅇㅇ 장학생으로도미유학을 시켜 가사과를 전수케 하였고 귀국후는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가사과 창설에 공을 남겼다. 미국에서 김해후인 김양천씨와 알게되여 1930년 귀국하야 결혼하고 3남 2녀를 두어 부락한 가정분위기 속에서 자녀교육에 전심전력 하시와 오남매 전원 도영유학시켰고 밖으로는 산업발전에 힘써 국가경제의 재건을 꾀하고 안으로는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하였고 ㅇ치산에 능하셨다. 조국해방 후는 국가사회에 몸을 바쳐 경제면과 부녀운동에 헌신노력하여 ㅇ의 공을 남겼으며 동기간이나 친지간에 우애가 깊어서 남을 돕고 협조하는 정신이 풍부하였다. ㅇ년에 부군을 따라 도미하여 재미중인 자손들을 고루 만나본 후 고국에 유류공급의 원활을 ㅇㅇ하여 조국경제를 돕고자 모국 방문 여행 중 불의의 병으로 신음하다가 약석의 효를 얻지 못하고 1966년 4월 13일 독실한 신앙을 올갖이고 영면승천하시다. (ㅇ는 사진에서 음영이 있어 판독불가 표기이다)
主后 1966년 4월 30일 건립
동생 (晩軾 지음)
¤ 비문 옆면은 夫에 김양천이고 3남 3녀로 나온다. 염두해야 할 것은 남자가 성공한 경우 이른바 작은 각시를 두는 경우가 꽤 있다. 그러니 김분옥이 김양천의 본처가 아닐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한다.
비문에 나온 자식을 보자. 아들은 해리, 해영, 해승이고 딸은 애련, 애라, 애다이다. 다 돌림자이다. 비문에 이렇게 오른 경우는 대개 남편의 자식인 경우이다. 김분옥이 본처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면 나이가 비슷하고 자식 돌림자가 그렇다. 비문의 주인공이 전 비서실장 김양천이 확실하다면 중앙일보 부음기사의 23살 차이나는 부인 이복순은 후처라고 봐야 한다.
남자는 권력에 있어 어쩌면 제2의 부인이 존재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는 남자 생활권에 현지처 존재도 허다했다. 게다가 김분옥이 자식 따라 미국생활을 했고 신지식인 여성답게 직업도 남자 못지 않는 듯하다. 비문에도 대한민국에 석유공급 문제로 일시 입국한 내용이 쓰여있다. 당시는 남자의 허리 아랫도리는 흠이 아니었고 외려 후처는 부의 과시었다.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 오해가 있을 수 있어 덧붙인다. 김양천과 이복순이 나이 차이가 무려 23살이다. 이는 이복순이 본처가 아닐 수 있다. 지금으로 보면 딸 나이 때이다. 이는 후처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당시 결혼 적령기는 남자 25세 안팎이었다. 김양천이 사회적 성공자였는데 굳이 결혼을 늦게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장흥출신 김양천이 비문의 동일 인물이면 본처가 김분옥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실 후손들 나이만 보면 금세 추정이 가능하기는 하다. 김분옥도 사회적인 성공을 이루었다. 이에 부군도 그에 상응한 사회적인 최소한 지위는 있었으리라 예상해볼 수 있다. 김양천이 김분옥을 발판삼아서 성공을 했을 수도 있다. 김분옥은 당시 여성으로서 남자 이상의 신지식인이었으니 남편 의도대로 살지 않았을 것이다. 김분옥은 자식을 위해, 또는 본인을 위해 외국살이를 했을 수도 있다. 혹여 김양천을 따라 도미했다는 내용은 아마도 유학공부 시절이 아니었을까. 살아도 잠깐 아닐까 싶다. 남자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수구초심의 성향이 강하다. 그 연장선상에서 짐작하면 김양천이 아이들을 김옥분한테 떠맡긴 후 나홀로 귀국하여 이복순과 살았고 자식을 낳았다. 아니면 아예 외국살이를 잠깐 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김양천이 고대병원에서 장례를 치른 점이다. 이는 당시 시대상으로 보더라도 김양천은 말년에 서울에서 살았을 듯하고 서울에서 결국 임종했으리라 보인다. 끝으로 더 언급하면 보통 본처 소생들이 항렬자와 돌림자를 쓰는 경우가 더 많다. 이건 시대적인 유행과 집안의 성향이 있을 수 있겠지만 장자손이나 큰집손들은 대게 대를 잇고자 하기에 본인이 작명 외에도 부친이 더 관여를 많이 한다. 당연히 이름에 항렬자 또는 돌림자가 많이 들어간다.
¤ 김분옥/정종배
유관순 서명학 김희자 김복순 국현숙 김분옥
3.1운동 전날 이화여고 1학년
6인 결사대 한 분
김분옥 묘역
망우리공원 소재를 파악했다
봄 돌배나무 꽃 흐드러져 찾아들어가
묘비를 찾아 읽다
유관순과 독립운동 함께 했다
새로운 중학가정 1972 김분옥 김영옥 이인희 지음
문과부 점정필
고등학교 실업 가정과 새로운 가정 장명욱 김분옥 김임복 이인희 현기순 황순조
김분옥金芬玉 -m.blog.daum.net="">http://m.blog.daum.net/jjb3467/777?tp_nil_a=2" target="_blank" rel="noopener" data-mce-href=" http://m.blog.daum.net/jjb3467/777?tp_nil_a=2"> http://m.blog.daum.net/jjb3467/777?tp_nil_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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