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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에서 호크 아이(다니엘 데이 루이스)
[ 영화 <라스트 모히칸> ]
이 영화는 18세기 중엽 북미대륙 쟁탈을 위한 영국과 프랑스간의 전쟁인 <프렌치-인디언 전쟁(1755-1763)>을 그 배경으로 합니다. 원래 이 영화의 원작은 미국작가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1789-1851)의 소설 <모히칸 족의 마지막 전사>였습니다.
작가 쿠퍼는 병상에 누워 있는 아내에게 영국소설을 읽어주다가, 이렇게 재미없는 소설들보다는 차라리 내 자신이 직접 쓰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책을 쓰면서 갑자기 소설가가 된 특이한 이력의 사람입니다.
18세기 중반 프랑스와 영국의 대륙 쟁탈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미국에서 인디언 손에 자란 영국계 백인 용사 호크 아이(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투쟁과 사랑을 그린 영화 <라스트 모히칸>은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한번쯤은 읽거나 들어보았던 명작 소설 <모히칸족의 최후>를 원작으로 만든 스펙터클 대작입니다.
* 의형제 사이인 호크 아이와 웅카스
원작에선 인디언과 백인처녀와의 사랑과 비극을 그린 것에 비하여 영화에선 백인이 주인공이고 해피엔딩으로 그려져서 원작을 훼손하였다는 비판의 말도 들었지만 반대로 대단한 찬사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미국 개척시대의 웅장한 풍광을 배경으로 가슴을 후비는 영화음악과 주연배우들의 열연으로 이 영화는 한편의 거대하고 멋진 서사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번에 걸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나의 왼발’과 ‘링컨’)에 빛나는 명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백인이지만 진짜 인디언 같은 카리스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을 위하여 무참하게 희생된 인디언 웅가스를 위하여 장렬하게 절벽에 몸을 던지는 여주인공의 동생 앨리스의 모습은 많은 관객들의 눈시울을 적시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취향의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라스트 모히칸>은 오히려 여성 팬들에게 더 많은 인기를 모았습니다. 그건 영화 속에서 백인 인디언 호크 아이로 등장하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하여 온몸을 불사르는 치명적인 매력이 특히 돋보였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마이클 만 감독은 이 영화 제작에 대한 인터뷰에서 1946년에 이미 제작된 조지 사이츠 감독의 동명의 영화를 바탕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밝혔습니다. 물론 이 영화 모두 1826년의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 악역의 인디언 마구아
[ 간략한 줄거리 ]
18세기 중반... 주인공 호크 아이(원래 이름은 나다니엘)는 백인이지만, 고아가 된 후 모히칸족 추장 칭가지국에게 거두어져 인디언으로 성장합니다. 호크 아이는 칭가지국의 친아들인 웅카스와는 친형제나 다름없는 절친한 사이입니다.
이 시기 미대륙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 한창이었습니다. 한명의 병력이 아쉬웠던 영국군은 인디언들과 개척민들을 민병으로 모집하였고, 적대 관계인 휴런족이 프랑스 쪽에 붙자 모히칸족과 인근 개척민들은 마을이 위험해지면, 다시 돌아가겠다는 조건부로 영국군에 협력하였고, 이들은 몬로 대령이 지휘하는 윌리엄 핸리 요새에 배치됩니다.
하지만 호크 아이는 애초부터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에 민병들이 끼어드는 것을 영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지라 수수방관하는 입장입니다.
몬로 대령의 두 딸(코라&앨리스)이 영국에서 건너오게 되고.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코라의 약혼자 비슷한 입장의 던컨의 호위 하에 모히칸 인디언을 길잡이로 윌리엄 핸리 요새로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길잡이로 나섰던 마구아는 모히칸족이 아니라, 적대 관계인 휴런족 첩자였습니다. 마구아는 이들을 함정으로 유인하였고, 숨겨둔 병력으로 공격합니다.
* 헨리 요세의 영국군 항복, 왼쪽이 프랑스 몽클람 장군, 오른쪽이 영국의 몬로 대령
위기의 순간 삼인방(호크 아이, 칭가지국, 웅카스)이 나타나 이들을 구했고, 이들 셋은 윌리엄 핸리 요새까지 함께 가기로 합니다. 여정 중 삼인방은 휴런족에게 공격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마침내 도착한 윌리엄 핸리 요새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고, 프랑스의 압도적인 화력에 의해 항복 직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간 몬로 대령은 올버니에 있는 웹 장군에게 지원 요청을 해달라며 전령을 보냈지만... 그 전령들은 전부 프랑스 쪽에게 당해서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몬로 대령은 웹 장군이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있는 에드워드 요새로 진지를 옮겼다는 말에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또다시 전령을 보냅니다.
호크 아이는 여정 중 발견한 공격받은 모히칸 마을에 대해 언급하지만, 병사 한명이 아쉬웠던 몬로 대령은 애초에 민병들에게 했던 약속을 깨고 민병들의 이탈을 금합니다. 이에 호크 아이는 민병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마을로 돌아가고자 하는 몇사람의 탈영을 도왔습니다. 호크 아이는 보복을 당할 줄 알면서도 요새에 남았고, 결국 영국군에게 체포됩니다.
호크 아이는 교수형 위기에 처하지만, 코라의 만류로 그 시기를 늦추게 되고... 그 사이 웹장군이 지원군을 거절하면서 몬로 대령은 결국 프랑스군에 항복하게 됩니다. 항복이라지만 프랑스군 또한 그간 피해가 컸던지라 그냥 요새를 넘기는 선에서 영국군이 무기며, 국기며 모든 것을 가지고 떠날 수 있게 허용하는 것으로 타협합니다.
하지만 몬로 대령에게 원한이 있었던 마구아는 영국군을 그냥 보내주는 프랑스군의 조치에 반발하였고, 퇴각하는 영국군을 독자적으로 공격합니다. 기습을 받은 영국군은 지리멸렬하게 당합니다. 전투 중 몬로 대령은 전사하고, 두 딸만 삼인방 및 던컨과 함께 탈출하게 됩니다.
* 호크 아이의 연인, 코라
마구아와 휴런족의 추격은 계속되었고, 궁지에 몰리자 호크 아이는 후일을 기약하며 두 여자를 남기고 떠나게 됩니다. 코라와 앨리스는 휴런족으로 끌려가게 되고, 호크 아이는 주변을 살피며 둘을 구출할 기회를 엿봅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호크 아이는 휴런족 족장과 담판을 짓기 위해 단신으로 휴런족 마을로 들어갑니다. 호크 아이는 나름의 명분으로 설득하였지만 족장은 마구아에게 몬로 대령의 큰딸(코라)를 불태워 죽여 원한을 갚고, 둘째(앨리스)를 부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만 원한을 끝내라고 결정합니다.
*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러...
이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마구아의 손아귀에서 두 여인네를 구하려 했던 호크 아이에게나 여자는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하던 마구아에게도 만족스럽지 못한 결정이었습니다. 그 때 던컨이 자신이 희생하겠다고 나섭니다. 족장은 호크 아이를 코라와 함께 떠나도록 허락합니다.
마을을 벗어난 호크 아이는 산채로 불타 고통받던 던컨의 숨을 끊어 고통을 덜어주고... 웅카스와 함께 앨리스 구출 작전에 나섭니다. 그러나 웅카스는 마구아에게 살해당합니다. 웅카스에게 마음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마구아와 사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판단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앨리스 또한 절벽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합니다.
바로 그때 칭가지국이 나타나 마구아에게 아들의 복수를 하고 호크 아이와 코라는 포옹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 프렌치 인디언 전쟁(북미 대륙 영불 쟁탈 전쟁) ]
* 주요 전쟁터
영화 <라스트 모히칸>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프렌치 인디언 전쟁(1755 - 1763)은 유럽에서 7년전쟁이 일어나고 있을 때,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오하이오 강 주변의 인디언 영토를 둘러싸고 일어난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 전쟁입니다. 영국 측에서 볼 때 프랑스가 인디언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고 합니다.
북아메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대결은 이미 17세기부터였습니다. 1689년부터 1697년까지 <윌리엄 왕 전쟁>이, 1701년부터 1713년까지 <앤 여왕 전쟁>이 이어졌으며, 앤 여왕 전쟁에서 프랑스가 대패하고 노바스코샤와 뉴펀들랜드 등 상당한 영토를 할양한 뒤에는 한동안 잠잠했으나, 1744년부터 1748년까지 다시 <조지 왕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북아메리카는 4대 세력이 할거하는 태세였습니다. 스페인은 멕시코뿐 아니라 텍사스와 뉴멕시코 등 지금 미국의 남서부와 플로리다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북쪽으로는 루이지애나와 캐나다를 보유한 프랑스가 13개 식민주와 프랑스에게서 새로 빼앗은 북방 영토를 가진 영국과 맞서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땅에 흩어져 살던 인디언들 중에는 이로쿼이 연맹의 세력이 가장 강대했는데, 모호크, 세네카, 카유가, 오논다가, 오네이다 5부족이 연합한 이들은 허드슨 만에서 미시시피 강까지 프랑스령을 종단하는 지역에서 무시못할 힘을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 프랑스 몽클람 장군, 영화에서도 헨리 요새를 함락하는 장군으로 나옵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은 1749년, 이로쿼이와 영국이 힘을 합치는 일을 두려워한 프랑스 쪽에서 오하이오 계곡에 새로운 요새를 구축하면서 촉발되었습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군비경쟁을 벌이면서 점점 긴장을 고조시켜 갔으며, 마침내 1754년에, 유럽에서의 전쟁(7년 전쟁)보다 2년 먼저 전쟁이 발발하는데 그 첫 국면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미국 초대 대통령이 될 조지 워싱턴이었습니다.
영국 식민지군의 청년 장교였던 그는 오하이오의 프랑스 요새들을 정찰 및 공략하려 버지니아에서 출발했으나 니세서티 요새에서 프랑스군에게 패배하고 항복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 전쟁의 양상
전쟁의 초기 국면은 프랑스의 우세였는데, 본토의 정규군이 아니라 식민지에서 모집한 군대인 영국군에 비해 프랑스군은 수는 적어도(총 인구수로 볼 때 프랑스 식민지 인구는 영국 식민지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정예였으며, 이로쿼이 연맹을 제외한(그들도 일단 영국 편에 서기는 했으되, 프랑스와 정면 대결은 되도록 피했다) 거의 모든 인디언들이 프랑스 편에 붙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인디언들이 반영, 친프랑스의 자세를 보인 것은 프랑스인들이 인디언의 문화를 관용하고 수용했으며, 프랑스인에 비해 영국인들의 토지 욕심이 더 지독했던 점이 원인이었습니다.
* 당시 퀘백 풍경
프랑스에서는 1756년에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의 명장 몽칼름이 이끄는 원군을 보냈는데, 몽칼름은 캐나다 방면군 총사령관으로서 영국의 오스위고 요새와 윌리엄 헨리 요새를 함락시켜 명장의 이름값을 했습니다. 윌리엄 헨리 요새가 함락되었을 때 몽칼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편이던 알곤킨 족이 영국군 포로와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했는데, 이 사건은 후에 제임스 쿠퍼의 소설 <모히칸 족의 최후>에서 등장합니다.
영국군 쪽은 내분 양상마저 보였습니다. 영국 본토의 입장과 식민지인들의 입장 차이가 갈등의 주 원인이었습니다. 1757년에 새로 영국 국무장관이 된 윌리엄 피트가 식민지 주민들에게 강제징용령을 내리고, 군사용으로 쓰게끔 민간의 집이나 물자를 대가 없이 징발하도록 조치하자 식민지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결국 1758년에 다급해진 피트가 징병권을 식민지 의회에 넘기고 징발한 물자는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도록 함으로써 사태는 진정되었습니다.
* 카릴리온 전투에서 승리하는 프랑스군
그리고 이제 승리의 바람은 영국 쪽으로 불기 시작했습니다. 피트는 1758년에 대규모의 영국 정규군을 아메리카로 보내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는 제프리 앰허스트, 제임스 울프 같은 뛰어난 장군들도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세인트로렌스 강 북쪽에서 출발해 프랑스령 캐나다의 요새들을 하나씩 무너뜨려 나간다는 작전을 세웁니다.
* 영국 앰허스트 장군
이들은 7월에 루이스버그 요새를 점령했고, 얼마 후에는 뒤켄을 함락시켰습니다. 한편 몽칼름은 티콘데로가 전투에서 고작 4천의 군대로 1만 6천의 영국군을 무찌르고 티콘데로가 요새를 점령하는 위업을 달성했지만, 병력 지원이 뜻대로 되지 않아 소수 병력만 남겨 놓고 물러나자 요새는 이듬해에 앰허스트에게 재점령되고 맙니다.
* 퀘백에 상륙하는 영국군
그리고 몽칼름은 프랑스령 캐나다의 핵심인 퀘벡 방어에 나서게 됩니다. 제임스 울프가 이끄는 8500명의 영국 정규군이 루이스버그에서 퀘벡으로 접근 중임을 보고받은 몽칼름은 세인트로렌스 강을 타고 내려오다가 세인트찰스 강으로 갈라지는 쪽에 돌출된 북쪽 구역에 방어력을 집중했습니다.
*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 참여했던 미국의 국부인 조지 워싱톤 모습
영국군은 윌리엄 왕 전쟁과 앤 여왕 전쟁에서도 같은 루트로 퀘벡을 점령하려다 실패한 적이 있었고, 그때 그들이 상륙할 만한 지점은 북쪽뿐이라는 결론이 났던 것입니다. 만일 영국군이 세인트찰스 강을 따라 더 남하해서 상륙하려 한다면, 북부의 보포르 방어선과 강 반대편의 포인트 레비에서 십자포화를 받고 궤멸될 것이 예상되었습니다.
하지만 울프는 포인트 레비 쪽의 수비가 허술함을 꿰뚫어보고, 그곳을 먼저 공략하여 프랑스군이 밀집된 퀘벡 북부를 정면으로 겨누게 했습니다. 그리고 포인트 레비의 엄호사격을 받으며, 영국 선단은 프랑스군의 사격을 뚫고 세인트찰스 강을 타고 내려가 퀘벡 남쪽에 상륙해 버렸습니다.
* 영국군과 인디언의 백병전
프랑스군은 수비력을 북쪽에 집중시킨 탓에 남쪽은 힘없이 무너졌습니다. 이에 따라 몽칼름은 이제 북쪽으로 기세등등하게 쳐올라 오는 영국군과 에이브러햄 평원에서 맞붙어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급해진 그는 섣부른 일제돌격 명령을 내렸다가 영국군의 침착한 사격에 많은 부하들을 잃었으며, 이어진 전투에서 화력, 병력, 사기에서 모두 앞선 영국군은 프랑스군을 압도했습니다.
* 인디언들의 매복
몽칼름 본인도 치명상을 입고 달아났는데, 영국군은 승리했으나 울프 장군이 저격당해 전사하는 바람에 진격을 멈췄습니다. 몽칼름도 하루 만에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숨졌습니다. 영국군은 퀘벡 성벽을 겹겹이 포위하고는 인정사정없이 포격을 가했으며, 사흘 후인 1759년 9월 18일에 퀘벡은 항복했습니다.
퀘벡 전투로 북아메리카에서 영국의 승리는 굳어졌으며, 1759년 11월에는 프랑스 함대를 영국 함대가 키브롱 만에서 공격하여 철저히 분쇄함으로써 프랑스가 아메리카로 지원군을 보낼 수도, 영국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도 없게 함에 따라 프랑스는 더 이상 역전의 기회를 꿈꾸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 프랑스군과 인디언간의 동맹 체결 광경
퀘벡 전투로 프렌치·인디언 전쟁은 사실상 끝이 났습니다. 이듬해에는 최후의 요새인 몬트리올이 함락되었고, 프랑스 캐나다 총독은 캐나다에 프랑스가 갖고 있던 모든 영토를 영국에 넘긴다는 항복문서에 서명했습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식민지의 모든 문제가 최종 타결된 것은 유럽에서 7년 전쟁이 끝나고 열린 파리 강화회의(1763)에서였습니다.
* 파리 강화회의 결과, 영국이 미시시피강 오른편을 모조리 지배하게 됩니다
프랑스는 뉴펀들랜드 연안과 카리브 연안의 몇몇 섬을 제외한 신대륙의 모든 식민지를 영국에게 빼앗겼다. 프렌치·인디언 전쟁은 여타 전쟁에 비해 소규모로 볼 수 있지만 결과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우선 전쟁의 와중에 식민지들이 처음으로 단결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죠.
본국(영국) 정부의 중재가 있기는 했지만 1754년 6월에 식민지 대표들은 뉴욕 주 올버니에 모여 상호연맹의 절대적 필요성을 확인하고, 벤자민 프랭클린이 기초한 연맹규약을 채택했습니다. 이 규약은 중앙정부의 조세권과 방위권을 명시함으로써 훗날 세워질 독립국가의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두 번째로, 프렌치·인디언 전쟁의 승리로 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간섭이 본격화되기 시작합니다. 전쟁 중 식민지들은 의용군도 차출하고 물자 보급도 담당하는 등 나름대로 기여를 했으나, 프렌치·인디언 전쟁은 근본적으로 영국 혼자 치러낸 전쟁이었습니다.
영국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당연하다는 듯이 식민지에 막대한 전쟁 비용에 관한 보상을 요구하면서 간섭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여기서 비롯된 갈등이 결국은 식민지의 독립 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미국 독립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 같은 독립전쟁의 영웅들이 이 전쟁에 참전하면서 귀중한 실전 경험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영국은 자신의 피를 흘려가며 식민지인들의 독립심을 고취시키고 실전경험을 쌓게 하는 등 미국 독립으로 가기 위한 길을 닦아준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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