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2.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 금요일>
<루카17,26-37>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26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28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29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30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31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32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33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3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36)·37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자,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루카17,30)
그날이 오늘 일수도 내일 일수도 있는데, 천둥과 번재가 치듯 누구나 다 압니다.
주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노아의 날처럼 순간순간을 먹고 마시고 장가들도 시집가는 일에만 써서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는 것.
순간을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구원이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는 날 롯의 아내는 뒤돌아 보지요. 소금기둥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9,62)는 것입니다.
손에 쟁기를 들고 밭을 가는 자의 유일한 목적은 곧은 고랑을 내는 일이며, 그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 외에 다른 일에 신경을 써서 뒤를 돌아 본다면 고랑은 곧게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역시 이 목적의식을 잠시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을 향해야 하는데 그렇디 않으면 땅을 향한 롯의 아내처럼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면서 임종을 앞둔 사람을 보면,
처음에는 굉장히 당황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혹시 내가 잘못한 것이 있나?”
“다른 사람보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분노하고,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그때 사제들이 가면 사제들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더 시간이 지나면 하느님과 타협을 합니다.
“주님 이 병을 낫게 해주시면 앞으로 열심히 봉사하며 살겠습니다…..”
이때 쯤에 병원측에서 제안을 합니다. ‘독한 약을 보험도 안 되는 약을 맞을지, 아니면 호스피스 병동으로 가서 마지막 삶을 잘 정리할지….’
가정 형편이 안 되어서 삶을 정리하는 사람도 있지만,
보험도 안 되는 약으로 병이 호전되지 않고 점점 나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환자 가족 병원 모두 힘든 상황이 됩니다.
처음에는 나아서 여행좀 해보았으면…..
걸어서 산책 좀 할 수 있다면…
화장실만 다녀올 수 있다면…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다면…
숨만 편하게 쉴 수 있다면….
이처럼 소망이 점점 작아집니다.
생명이 꺼져가면서 안타깝게 바라보는 가족들
그 끈을 놓지 못하는 환자들을 보면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아닌, 주님 보시기에 좋은 삶이 최고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들듯이,
죽음이 있는 곳에 심판이 있기 때문이지요.
내것을 어떻게 썼느냐에 따라 하느님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내것은 순간인데,
그 순간을 어떻게 살았느냐?
지금 여기가 순간이고 천국인데,
지금 여기를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의미를 두고 이 순간을 봉헌하며 살았느냐?
아니면, 물질만능, 하느님이 왕인 아닌 내가 왕이되어 먹고 마시는 일에,
세상에 대한 육신에 대한 꺼져가는 생명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뒤돌아보며 사느냐?
이것은 우리의 선택인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지요.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10,28)
끝까지 하느님을 향하게 되면 그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생기지요.
평화롭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뜻을 내가 찾으며 살면 그 사람은 평화롭고, 죽음의 순간도 행복할 수 있지요.
지금 나는 행복한가? 한 번 물어보십시오.
그래야 죽음의 순간에도
육신만 어찌하는 자를 두려워 말고, 영혼까지 어찌하는 하느님을 두려워 하여라.
사심판은 영-혼이 하느님께 가서 심판을 받고, 육신은 무덤에 묻히게 됩니다.
공심판은 무덤에 묻힌 육신이 부활하여 영-혼-육이 하느님 앞에 다시 서게 됩니다.
산 사람들 역시 산채로 하느님 앞에 불려가 영-혼-육이 하느님 앞에 서게 됩니다.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아무리 칭찬 받는 삶이라도 하느님 앞에서 심판 받을 때 멸망으로 간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그 죽음이 멸망이 아닌 새로운 삶으로 가는 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롯의 아내처럼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9,62)는 것입니다.
손에 쟁기를 들고 밭을 가는 자의 유일한 목적은 곧은 고랑을 내는 일이며, 그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 외에 다른 일에 신경을 써서 뒤를 돌아 본다면 고랑은 곧게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역시 이 목적의식을 잠시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분의 뜻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실행하며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그 평화를 전하는 일이 바로 복음전파 입니다.
<Luke17,26-37>
26 As it was in the days of Noah, so it will be in the days of the Son of Man;
27 they were eating and drinking, marrying and giving in marriage up to the day that Noah entered the ark, and the flood came and destroyed them all.
28 Similarly, as it was in the days of Lot: they were eating, drinking, buying, selling, planting, building;
29 on the day when Lot left Sodom, fire and brimstone rained from the sky to destroy them all.
30 So it will be on the day the Son of Man is revealed.
31 On that day, a person who is on the housetop and whose belongings are in the house must not go down to get them, and likewise a person in the field must not return to what was left behind.
32 Remember the wife of Lot.
33 Whoever seeks to preserve his life will lose it, but whoever loses it will save it.
34 I tell you, on that night there will be two people in one bed; one will be taken, the other left.
35 And there will be two women grinding meal together; one will be taken, the other left."
37 They said to him in reply, "Where, Lord?" He said to them, "Where the body is, there also the vultures will g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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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여섯 번째_
필요한 정보만 골라 담는
정보 습득의 기술
공부의 첫 번째 단계는 정보를 습득하는 것인데, 꼭 필요한 정보만 골라내 선택적으로 습득해야 한다. 읽기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창조적 압축 공부를 위한 독서의 기술, 바로 창조적 독서법이다./
대충 읽기
시간은 부족하고 봐야 할 것은 많은데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는 것은 무리다. 물론 정보 습득의 효율성도 떨어진다.
책을 샀으면 일단 목차를 읽어 보고 전체를 파악한다. 분량을 가늠한 후 어느 정도의 시간에 걸쳐 읽겠다는 목표를 정하자.
공부는 핵심만 파악하면 된다.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핵심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대충 훑어보다가 어려운 부분은 건너뛴다. 시간이 없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만 자세히 읽자.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187-188)
밑줄 그으며 읽기
읽다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는 밑줄을 그어라. 밑줄을 긋는 데에도 속도가 필요하다. 자 대로 예쁘게 그으려고 하면 시간 낭비. 나만 알아보면 된다. 중요한 부분이 많으면 일일이 밑줄을 긋지 말고 전체 부분에 네모 같은 것을 쳐 두자. 내용의 중요도에 따라 별/표 몇 개 등으로 구분해 두면 복습할 때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시간이 없을 때 별표 많은 부분만 다시 읽으면 된다. 낙서도 좋고 책장을 접어 두는 것도 좋다.
책을 아껴 보는 것이 아니다. 특히 공부용 책은 깨끗해서는 안 된다. 하도 읽어서 너덜너덜해진 책을 보면 그만큼 열심히 공부했다는 성취감이 생기지 않는가. 밑줄과 네모로 지저분한 책은 그만큼 열심히 공부했더는 증거다. 이렇게 지저부분한 부분은 외우기도 쉽고 시험 때 낙서한 것까지 이미지로 떠올라 답이 쉽게 떠오른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p.18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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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인간공동체
321 그리스도인이 완벽한 개인주의자가 될 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공동체를 지향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결코 완벽한 개인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1877-1880, 1890-1891]
하늘 아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함께하는 이들과 잘 사는 것입니다.(아시시의 에지디오 복자(1262년 사망),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친한 친구 중 한 사람)
모든 인간은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받고 다른 이들을 도우며 모든 이의 이익을 위해 자기 재능을 펼칠 의무가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므로, 어느 정도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냅니(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260)/
다. 하느님은 본래 혼자가 아니라 삼위일체이므로, 생명과 사랑, 대화와 나눔을 이루십니다. 결국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핵심 계명은 사랑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모든 것을 함께 하고 근본적으로 서로 의존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22,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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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인류 공동체
->1877 인류의 사명은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고 성부의 외아들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 사명은 각자가 하느님의 행복으로 들어오라는 요구를 받고 있으므로 개인적 형태를 취하면서도, 인류 공동체 전체에 관련되기도 한다.
제1절 인간과 사회
I.인간 소명의 공동체적 특징
->1878 모든 사람은 동일한 목적, 곧 하느님 자신을 향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신적 위격의 결합과 진리와 사랑 안에 있는 하느님 자녀들의 결합에는 유사성이 있다.(사목 헌장, 24항 참조).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분리할 수 없다.
->1879 인간에게는 사회 생활이 필요하다. 사회 생활은 인간에게 덧붙여진 우연한 그 무엇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요구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거래, 상호 의무, 형제적 대화 등으로 인간은 되도록 자신의 모든 재능을 키우고 자기 소명에 응답할 수 있다.(사목 헌장, 25항 참조)
->1880 사회는 인간 개개인을 초월하는 일치의 원리에 따라 유기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의 총체이다. 가시적이며 동시에 정신적 집합체인 사회는 시간 안에 존속한다. 사회는 과거를 이어받아 미래를 준비한다. 인간은 사회를 통해서 ‘상속자’ 가 되고(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696)/
‘재능들’ 을 받게 되는데, 그 재능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풍요롭게 하며, 인간은 그 재능을 발휘하여 적절한 성과를 거두어야 한다(루카19,13.15 참조). 개인은 마땅히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헌신해야 하고 공공의 선익을 책임지고 있는 공권력을 존중해야 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697)/
간추림
->1890 하느님의 세 위격이 이루는 일치와 사람들끼리 이루어야 하는 형제애 사이에는 어떠한 유사성이 있다.
->1891 인간은 자기 본성에 적합하게 발전하기 위해서 사회 생활이 필요하다. 가정이나 국가 같은 어떤 사회들은 인간의 본성에 더 직접적으로 부합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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