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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을 사모하는 사람들(요14:1-6)
2012.10.7(김상수목사)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5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6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1-6)
인류는 역사 이래로 죽음이 없는 영원한 유토피아를 꿈꾸어왔다. 지금도 여전히 그 꿈들을이루어 보려고 시도들을 하고 있다. 중국의 무릉도원 한국의 청학동, 히말라야의 어느 깊은 계곡에 있다는 이상향 샹그렐라(티베트인의 이상향인 샴발라를 말하는데, 이는 고대 불교국가였다가 멸망한 구게(古格)왕국으로 추정된다)같은 것들은 그 실례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동안 고통없이 살고, 죽은 후에는 그 이상향에 가고 싶어했다. 그래서 지구상 어느 곳, 어느 민족이나 부족을 막론하고 무병장수, 행복을 위해서 나름대로의 갖가지 종교적인 행위를 한다. 우리 한국인들도 고대로부터 뭔가 사후의 영원한 세계가 있고, 인간의 사후에 심판이 있거나, 이 지구상에 종말이 있을 것이라는 의식이 있어 왔다. 그래서 그곳을 저승, 황천이라고 부르고, 개벽사상도 있고, 또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곳에 가면 심판자가 있는데 그분이 바로 염라대왕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은 그곳은 바로 천국이요, 심판자는 하나님이시며, 이 세상의 마지막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인 것을 명확히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왜 이런 소망을 품게 되었을까? 그것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그 중심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이다. 전도서 3장 11절 말씀을 보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라는 이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본래적인 사람의 축복된 모습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때를 따라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드셨다. 20대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각 나이마다 그 나이에 맞게 아름다움을 주셨다. 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인간에게 종교성을 주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은 영원한 세계를 그리워하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은 하나님 다음으로 존귀하게 만드시기는 하셨지만, 결국 인간도 피조물이기 때문에 피조물로서의 제한성(制限性)을 두셨다. 그게 뭔가?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始終)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라는 말씀이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다 안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신을 창조하신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신이 아니고, 신의 형상을 닮은 제한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도 마귀는 마치 인간이 신(神)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속였다. 그리고 그 거짓 메시지에 속아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죄와 사망, 고통 가운데 빠지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마귀의 음성이란 그런 것이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하나님처럼 되는 것은 고사하고,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아름다운 형상과 행복까지 다 잃어버렸다. 그래서 타락 이후에는 마치 뿌연 유리창으로 비친 먼 산의 광경이 흐리게 보이듯이 막연하게 나마 영원한 세계와 조물주가 계신 것을 느끼기는 하는데, 정작 그곳이 어디인지, 그분이 누구인지, 그곳에 가는 방법은 뭔지 정확히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지 인간의 스스로의 힘으로 영원한 세계를 만들어 보려고, 갖은 노력을 하고, 갖은 분석을 해보고, 철학체계, 종교적 교리를 창안해 냈다(사실은 이것도 마귀 사단이 그렇게 하도록 속인 것). 그러나 아무리 죽음을 향해 의미를 부여하고, 좋은 방향으로 분석한다해도,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내가 갖가지 이론과 논리, 분석을 통해서 빨강색을 검다고 증명한다 해도, 그 증명과 상관없이 빨강은 빨강일 뿐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사람들이 아무리 영원한 생명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논해도 결국 해결된 것은 없었다. 생명에 대한 문제는 머리 속으로 분석하고, 어떤 특별한 의미부여를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우리가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던 그 본래적인 모습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알려주셔야만 알 수 있다. 바로 이것을 계시( 열 개 啓, 보일 시 示)라고 한다. 예를 들어 목사님이 무슨 생각을 갖고 계신지 우리는 모른다. 무슨 생각을 갖고 있다고 알려주셔야 알 수 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이럴진대 하물며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을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열어서 보여주신(계시해주신) 방법, 그것이 뭔가? 물이 빠졌거나 늪 속에 빠진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고, 누군가가 와서 손을 잡아주거나 밧줄을 던져줘야 살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보내주셨는데, 그 분이 누구신가하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주신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라 생명줄을 우리에게 내려주셨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라는 죽음의 사선을 넘어 오시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도 우리 앞에 서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다. 그래서 이 사실을 믿고 마음의 문을 열면 된다. 그것이 바로 생명줄을 붙잡는 것이다.
그 예수님께서 지금도 죄 가운데서 지옥불을 향해 달려가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며 말씀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이 어떤 길인가하면 아버지께 가는 길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언급한 아버지가 누구신가? 바로 창조자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곳, 그곳이 바로 천국(天國)이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는다 해도 또한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야한 상황이 온다해도 근심하지 말고 주님을 믿으라는 말씀이다. 왜 그런가?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내 아버지 집” 천국이다. 그 천국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주님이 다시 와서 주님이 계신 곳(천국)에 우리도 있게하겠다고 하셨다. 여기서 ‘다시 와서’라는 말이 크게는 우주적인 종말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또한 각 개인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김집사를 위한 처소가 예비되면 주님께서 김집사에게 와서 그를 위해 예비하신 처소에 데려가고, 이집사를 위해서는 또 그렇게 하신다. 우리는 이 천국을 사모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지금부터 약 190여년 전인 1820년 미국 뉴욕주에서 태어난 유명한 여류찬송 작사가 화니 제인 크로스비(Fanny J. Crosby,1820-1915)이라는 분이 계시다. 그녀는 생후 6주 만에 돌팔이 의사의 잘못으로 실수로 소경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아이가 8살쯤 되었을 때 어린아이임도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만족하는 삶을 살겠다’는 신앙적인 마음의 결심을 하였다. 그리고 그 결심은 그녀의 삶 전체를 변화시켰다. 그 후 95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약 8000여편 이상의 찬송시를 남겼다. 그녀의 이름은 우리 찬송가에도 그녀의 찬송이 23편 정도가 있다(“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의 영원하신 기업”,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언제 주님 다시 오실는지”,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주가 맡긴 모든 역사 힘을 다해 마친 후” 등).
어느 날 화니 크로스비가 간증을 마쳤을 때, 누군가가 그녀에게 질문했다.
“화니..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토록 많은 은혜를 주셨지만, 시력을 선물로 주시지 않은 것은 참으로 유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화니 당신도 당신이 장님이 아니기를 바라죠?”
그때 그녀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아니요. 만약 내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 해도 나는 하나님께 소경으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할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훗날 천국에 갔을 때, 내가 가장 보고 좋아할 수 있는 첫 번째 얼굴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이야기 하니까, 어떤 사람은 “천국? 죽어봤어요? 그것을 어떻게 알아요?”라는 말한다. 그러나 죽으면 늦는다. 안산에 있는 어느 큰 교회 목사님이 CBS에서 간증 중에 처음 예수님을 믿으려할 때 “내가 예수를 부인하다가 만약 진짜 천국이 있다면, 죽은 후에 낭패를 보지 않겠는가? 그러니 최소한 믿는 것이 안믿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신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매주 토요일 마다 전도사역을 나가고, 전도폭발을 하는 나를 보면서 나름대로 진보적이고 똑똑하다는 어떤 선배가 약간 비아냥 거리는 말투로 이런 말을 했다.
“형제는 단지 천국가려고 예수 믿나?”
그때 그 질문을 받고 스스로에게 되물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왜 예수님을 믿는가?” 이 땅에서 복 받고 잘살고 싶어서? 맞다. 삶을 의미있게 보내고 싶어서? 그것도 맞다. 복음으로 이 땅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맞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 모든 축복과 인생의 의미를 발견한다. 그러나 내가 내린 결론은 가장 큰 이유는 영혼의 구원을 받고, 천국가기 위해서다. 그리고 나 뿐만 아니라,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도 그렇게 되게하기 위해 나는 전도도 한다. 우리의 믿음의 결국이 무엇인지 베드로전서1장9절의 말씀을 보라.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for you are receiving the goal of your faith, the salvation of your souls)”(벧전1:9)
그리고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자문자답(自問自答) 해봤다. “그렇다면 나는 그 천국에 왜 가려하는가?“ 그곳은 더 이상 고통도, 슬픔도 죽음도 없는 영원한 곳이기에? 맞다. 그곳은 황금 길, 황금집이 있고, 놀라운 실과들이 있는 곳이기에? 그것도 맞다. 어머니를 비롯해서 일찍 하나님 나라에 가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기에? 그것도 맞다(”이 세상을 일찍 떠난 사랑하는 성도들 내가 올 줄 기대하고 있겠네...“ 그곳에 가면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선진들도 다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천국에 가야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곳에 이성봉목사님의 말처럼 주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14장 3절 말씀에서도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다. 천국은 주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가야한다. 그곳에서 내가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주님을 찬송하여 영원히 사는 것이다. 천국이 천국일 수 있는 이유는 황금길, 금은보석으로 장식한 집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거기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인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선진들이 바로 이러한 신앙을 가졌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천국을 사모하는 신앙이 있었다.
“13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
이들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적게는 수 백년에서 많게는 이 천년 전 이상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주님의 십자가를 멀리서 보고 환영하는 삶을 살았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자신들을 이 땅에서의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생각하고,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삶을 살았다. 바로 이러한 믿음이 그들에게 있어서 의(義)가 되는 것이다. 이 믿음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천국)을 예비하셨다.
지금 우리들도 동일하게 주님의 십자가를 멀리서 바라보지만, 믿음의 눈으로 천국을 사모하는 믿음으로 본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오늘 주신 말씀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처소를 예비하신다. 우리의 삶은 바로 이 천국을 사모하는 삶이어야 하며, 이 천국복음을 증거하는 삶이어야 한다. 어느 책의 제목처럼 천국이 그렇게 좋은 곳이라면 “천국 혼자갈 수 없잖아요”인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존재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있어서 지옥은 가만히 있어도 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천국은 아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던지신 생명의 밧줄을 붙잡아야 갈 수 있다. 그러므로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미 영접한 사람들은 주님 안에서 더욱더 천국을 사모하는 삶을 살자. 천국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자. 죽어봐야 알겠다는 사람들에게 죽으면 늦는다는 것을 말해주자. 불신자는 신자가 되고, 신자는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얼마전 유튜브에서 화제가 되었던 짧막한 1분짜리 동영상 하나를 보고 기도하자. 지난 달 27일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의 보도에 의하면 뉴질랜드 출신의 모험가이자 화산학자 ‘제프 맥레이’가 남태평양의 셰퍼드 제도의 화산섬에 위치한 바누아투 활화산의 용암호수에 소방 호흡장치와 내열 옷을 입고 용암의 30m 지점까지 접근해서 이글거리는 용암을 촬영했다 한다. 그는 "온도가 1,150도까지 올라가 30m 부근에서는 단 6초밖에 서 있지 못했다... 조금 떨어진 절벽으로 이동하여 40분 이상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지켜봤다"라고 말했다고 한다(한국아이닷컴 장원수 기자 jang7445@hankooki.com).
** 동영상은 원래 화면에 자막과 사진을 덧붙여서 편집한 것이다.
이 동영상을 보면서 여러생각들을 했다. 지옥의 불속도 연상이 되고, 반대로 용암보다 더 뜨거운 성령의 불길도 생각해 봤다. 온도가 1,150도나 되는 마그마들이 끓는 장면을 보면서, 만약 저것이 진짜 지옥불이라면 어떨까 생각해보라. 예수님을 믿고 않고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상상해 보자. 바로 그 무서운 지옥불에서 건져 내시고, 천국백성되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이 천국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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