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켄지 선교사
교회 신학강좌 예배에서 하는 3주차 강의에서 교수님께서 맥켄지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선교사들의 입국과 한국정착에 대한 내용의 7군데가 있는데 1)미국 북장로뢰 2)미국 감리회 3)영국성공회 4)호주 빅토리아 장로회 5)미국 남장로회 6)마국 남감리교회 7)캐나다 YMCA와 캐나다 장로교회이다.
맥켄지의 나라인 캐나다는
1888.12 게일: 토론토 YMCA/ 1889 팬윅:토론토 실업인
1890.09 하디: 1893.07 에비슨, 토론토 의과대학 YMCA후원
1893.12 매캔지 (W.J. McKenzie): 메리 타임즈 장로교학교 선교협회
1898.09.07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 3인 그리어슨, 멕레, 푸트의 내한
이란 내용으로 듣다가 세 번째인 맥켄지에 대하여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었다. 황해도 솔내 교회에서 현지 주민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고 더울 때나 추울 때나 관계없이 전도사역을 하고 뜨거운 날 전도를 하고 돌아와 일사병에 걸려 고생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이다.
강의를 듣고 매켄지 선교사에 대한 책과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맥켄지 (William John McKenzie) 선교사(1861-1895는 캐나다 케이프 브레톤 출생으로 델하우지 대학과 장로교 대학을 졸업하고 매학시절엔 라브라도에서 1년6개월 간 개척전도를 하고 목사안수 후 로어스튜위액(Lowerstewiack)에서 2년간 목회를 하였으며 한국선교를 위하여 핼리팩스에서 의학공부를 하였다. 한국선교에 대한 뜻으로 캐나다 장로회 해외선교부의 문을 두드렸으나 그 당시 선교부에서는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상태여서 한국선교는 불가능하다고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맥켄지는 뜻을 굽히지 않고 여러 교회를 다니며 선교의 중요성을 역설을 하고 친구 및 후원자들로부터 모금을 하여 개인자격으로 조선으로 출발을 하게 되었다. 1893년12월12일 매켄지는 제물포에 도착하였으며 서울로 가서 조선말을 배우고 선교지를 탐색하던 중 서상륜, 서경조 형제가 자생적으로 설립한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갯마을에 위치한 솔내교회의 초대 목사로 1894년2월3일 부임하게 된다.
맥켄지는 한국인들과 같이 지내며 한국 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 한국 음식을 먹으며 한국 문화와 풍습을 익히는 등 한국사람과 같이 아니 한국인으로 살아갔다. 그러던 중 성탄절에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성탄절 선물이 왔는데 그것은 케이크, 과일, 야채, 차, 우유, 설탕 등의 음식과 의복이었으나 자신은 한국인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하며 그 선물들을 교인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 또 1895년7월 솔내교회를 신축하여 헌당식을 하고 교회를 개방하였으며 교회 내의 공간을 교육의 장 및 환자들의 병실로도 사용을 하게 하는 등 주민들을 위한 일을 먼저 하였기에 솔내 주민들에게 폭 넓은 인정과 존경을 받았다. 목회 당시 동학군이 솔내 마을을 휩쓸고 지나갔는데 주민들의 보증으로 전혀 해를 입지 않게 되었을 정도였다.
맥켄지 선교사는 동학군 요새를 직접 찾아가 피투성이가 된 동학군들을 치료해 주기도 하였다고 하여 이후 동학군 지도자들이 솔내를 지나갈 때는 솔내교회로 가서 맥켄지 선교사를 찾기도 하였다고 한다.
매일매일을 주민을 위하고 주변의 마을을 다니며 전도를 하는 등 추우나 더우나 언제라고 다니며 전도사역을 하였는데 한 여름에 일사병으로 쓰러지게 되었다. 이는 계속되는 극심한 과로로 몸은 지쳐 기력이 쇠하게 되고 한여름에도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어도 전도사역으로 많은 곳을 다녀 뜨거운 햇볕에 장시간 노출이 되고 부실한 음식물로 인한 영양결핍과 풍토적 타이에 따르는 몸의 거부 반응 등 여러 가지 요인이 합쳐져 고생을 하다 결국은 일사병에 걸려 스러지게 된 것이다. 그래도 속히 일어나 사역을 하려고 하였으나 정신이 혼미해져 이를 이기지 못하고 갖고 있던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죽음을 맞이 하며 갖고 있던 남은 돈 172불을 교인 중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교회 부근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였다. 한국에 온지 1년 반 솔내에 온지 10개월만에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맥캔지의 약혼녀는 맥컬리인데 그녀는 한국으로 가려고 태평양을 건너며 맥켄지의 바보를 접하게 된다. 조선에 입국하여 바로 솔내로 가서 비석을 세우 고 그의 유산을 솔내교회에 기증하게 되는데 이는 솔내 제일학교 설립기금으로 쓰이게 된다. 이후 그녀는 귀국을 하지 않고 함경도 원산 지방으로 가서 선교활동을 하게 되었다.
맥켄지 선교사의 비석의 후면에 있는 글은 그의 약혼녀 맥컬리가 썼는데 그 내용은
“1893년에 맥켄지 목사가 캐나다로부터 여기 내류할 때 동포는 외인을 살해하려고 하고 교인은 몇몇 안되는 때라 폭염에 열심히 전도하더니 열병에 정신없이 기세하여 일동이 애석해 하며 다 주를 믿는지라. 주의 말씀에 말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열매가 많다 함이 옳도다. 솔내 교회는 조선의 처음 열매요 목사의 몸은 여기서 자도다”
맥켄지의 소천 후 솔내교회 교인들은 캐나다 장로회 해외선교부에 후임 선교사를 보내 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때도 캐나다 장로회 해외선교회에서는 선교비 부족으로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멕켄지 순교의 소식을 들은 신학생 몇 명이 선교 잡지에 한국 선교의 중요성에 대한 글을 싣자 캐나다 여선교회 연합회에서 선교사 1명의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하고 캐나다 동해안 대회 때 여러 노회에 이 안건을 회부하자 돕자는 결정으로 캐나다 장로회 해외선교부에서는 한국으로 선교사 파송을 결정하여 푸트 목사부부(W.P.Foote), 던컨 맥크레 목사(D.M.McCrae), 로버트 그리어슨 부부(R.G.Grierson)를 파송하게 되고 이들은 1898년 9월8일 한국에 도착하여 원산으로 가서 함경도와 북간도 지역에 선교를 하게 된다. 함경도 지역은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 지역이었으나 북장로교 측은 캐나다 선교회에 이 지역을 인계하게 된다.
-솔내교회-
맥켄지 선교사가 사역을 한 솔내교회는 서상륜, 서경조 형제가 세운 한국 최초의 자생적인 교회다. 서상륜과 서경조는 로스가 만든 성경책을 들고 만주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다 적발디어 의주 감옥에 투옥이 되는데 의주부에 근무하던 교인인 김호순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나오게 되나 의주에는 도피할 곳이 없어서 외가이며 당숙이 사는 황해도 장연 땅인 갯마을 솔내로 가서 자생적 기독교교회당인 솔내교회를 세우게 되나 담당 목회자가 없는 상태였다
목회자가 없는데 세례를 받고 하는 교인인 최명운, 전공빈이 있어서 그들을 데리고 언더우드를 찾아가 1887년 봄 세례를 받기도 하였으며 1887년 가을에는 언더우드가 솔내교회로 와서 7명에게 세례를 주기도 하였는데 이때 서경조의 아들인 서병호가 유아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이는 한국최초의 유아세례로 기록이 되게 된다. 솔내 교회는 북한 땅에 있어서 현재 상태는 확인을 할 수가 없으나 총신대 양지 캠퍼스 내에 그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이 되어 있어서 찾아볼 수 있다.
-한국 땅에서의 최초의 세례-
언더우드 선교사가 들어와 선교를 시작하면서도 얼마간 조선 조정으로부터 세례는 허용되지 않았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의주에 머무를 당시 서상륜 형제 등이 와서 세례를 베풀어줄 것을 요청하자 언더우드는 조선에서 금하고 있어서 안된다 하니 서상륜은 압록강 건너편에 가서 세례를 주면 아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하여 언더우드 선교사와 서상륜 일행은 압록강을 건너가 중국땅에서 언더유드 선교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는데 그 수가 34명에 이르렀다. 그 후에도 세례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기 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으나 얼마 후 한국 당에서 한국사람의 세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참고로 한국 땅에서 가진 한국 최초의 세례는 노도사라 불리던 노준영으로 이는 기독교를 배척했던 사람인데 그 배척하는 문서로 기독교에 대한 지식을 쌓고 알렌의 집에서 한문으로 된 누가복음을 갖다 읽고 언더우드에게 성경공부를 받았으며 성경전서, 교리서 등을 빌려서 읽고 외국인의 예배에 찾아가 참석을 하였다. 그 후 언더우드에게 세례 문답을 거쳐 세례를 받게 되는데 이 대는 조선 조정에서 세례를 합법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상태였으나 언더우드는 1886년 7월18일 주일 헤론의 집에서 언더우드 집례로 세례를 받아 노준영은 국내 개신교 최초의 한국땅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자가 된다.
같은 개신교인 감리교에서도 한국 땅에서 베푼 첫 세례자가 나왔는데 장로교보다 먼저인 1886년4월 부활절에 셰려를 주었는데 그는 한국인이 아닌 일본 영사관의 직원인 일본인이었다. 감리교에서는 1887년10월 권선의 아내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이는 찬국 최초인 여성세례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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