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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하면 음식 맛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맛집 좀 소개해 달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전주 유명한 음식하면 비빔밥과 콩나물국밥이 전부인
줄 알고 있어 계절에 맞게 몇 번 알려주다 보면 같은
얘기를 반복하게 됩니다.
토박이들이 찾아가는 맛집을 생각해보니 여럿 되기에
한번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일단 30년 이상 된 집을 꼽았습니다. 전주 전체로 하면
50년 이상된 음식점도 여럿 되지만 차이나거리, 웨딩거리를
중심으로 구도심 안에서만 비빔밥과 콩나물국밥집은 빼고
추려보려 합니다.
그 시작점을 차이나거리와 약전거리가 시작되는 구
다가동 우체국에서 시작합니다.
▲조선과 일제시대 초기까지 전국 5대 약령시에 들었다
는 전주약령시(藥令市)가 있었던 거리로 지금은 대여섯개의
한약방, 한의원, 건강원, 약재사만 남아 그 시절의 흔적들을
추측하게 합니다. 옛 도청 자리에 전라감영이 복원되면 이곳에
전라감영 특성화 거리를 조성한다네요.
▲차이나거리로 들어섭니다.
바닥은 전주시의 부채를 가로등은 소주(蘇州)시의 용(龍)을
형상화해 조성했다고 합니다.
전라감영 복원이 완료(2019년 4월 예정)되면 이 거리를
음식점 특화거리로 조성할 계획이랍니다.
아시안 푸드 거리로~~
▲전주화교소학교와 오래된 한정식 집인 '백번(百番)집'이
보이네요.
▲근 55년을 이어오고 있는 전통 한정식만 고집하는 전주
에서 가장 오래된 두집 중 한집 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전주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면서도 한정식 음식만 내셨답니다.
'백번(百番)집'이라는 상호는 '백제땅의 주막', '꽉차는 숫자'로
'꽉꽉 들어차라'는 의미로 옛날 향교 어른신들이 지어준 이름
이라고 합니다.
처음 장사를 한 곳은 오래된 음식점들이 많이 남아 있는 중앙동
이었으며, 전동, 경원동, 동서학동을 거쳐 97년에 이곳 다가동
으로 신축 이전해 운영해오고 있답니다.
그때 IMF 금융위기 터지기 2달 전에 장사를 시작했는데, 오히려
손님은 이전 보다 더 늘어섰다고 합니다.
오랫 동안 한정식 집으로 유명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하니 좋은 음식 재료를 구입하는게 제일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가령 소금은 꼭 신안염전에서 천일염 300부대 씩을 구입해 간수
를 빼 김치를 담가야 맛이 쓰지 않고 단맛이 난다고 전주 음식
이 예전만 못한 것이 천일염을 안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름은 싸전다리 앞 단골 기름집에서 국산 기름만 계속 대
놓고 쓰신다고하며 기름집 이름까지 알려주시네요. 장을 담가서
쓰는 것은 기본중의 기본이구요.
▲방안이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이곳은 탁자가 없는 빈방들만 있습니다.
음식을 나르지 않고 상채 들여오는 옛날 방식을 지키고
있다네요.
방마다 글과 그림이 걸려있는 것은 당연하고요.
일전에 이 서화와 한정식의 푸짐함이 지주문화의 잔재
로 감영이나 군영, 큰 상단이 있던 곳의 중인들이 하는 손님
치레라고 한 얘기가 생각나네요.
10년전 '황석영의 맛있는 세상'이라는 책을 필사 해가며
재밌게 읽은 적이 있는데, 책은 작가가 소시적 부터 가출,
출가, 방북, 해외 유배 및 여행, 감옥에서 접했던 다양한
음식을 일화를 곁들여 얘기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전주에 가면 버스 차부 모퉁이에 있는 작은 주막엘
가 보아도 서화가 걸려 있었으며, 심지어 외딴 밥집 뒷간엘
가도 작은 산수화나 사군자가 걸려 있었다고 얘기합니다.
제 기억에도 어릴적 짜장면 집에서도 자주 본 기억이 납니다.
마루 위 서까래 아래나 사랑채, 이웃집 부엌에서도...
정말 아무데나 흔하게 본것 같습니다.
요즘은 복(福)을 불러온다해서 집안에 민화(民畵)을 많이들
걸어 두고 있습니다.
저자는 틀린 얘기도 합니다. 전주에 갔다가 '오모가리' 라는
민물고기로 끓인 찌개가 별나다고 생각했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이 '오모가리'는 뚝배기의 전라도 사투리로 민물매운탕을 뚝배
기에 담아 내오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도 한옥마을 부근의 한벽
문화관앞에 서너집이 민물매운탕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 사장님이 로타리 활동을 하시며, 같은 회원으로
계셨던 계원(桂苑) 선생님께 상품으로 받은 글씨라고 합니다.
영자인 '로타리'를 한자로 음차해 쓰셨답니다.
일할 로 '勞', 다를 타 '他', 대울타리 리 '筣'
▲ 이 동네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은 이용원 입니다.
이 건물이 일제시대 때 지어진거라네요. 안내판이 있어
내용을 확인해 보니
"전주 다가동
구 중국인 포목상점
등록문화재 제174호, 1920년 무렵 건립
전주 전동성당 건축에 참여했던 중국인 벽돌공들이 지은
상가 건물로 이곳에서는 상인들이 비단을 팔았다. 외관상
상점 2개가 연속된 형태이며, 각각의 상점 출입구 상부에
는 형태가 같은 작은 삼각형 박공을 두어 정면성을 강조하
는 등 중국 상하이의 전통적인 비단 상점 형태를 따라
지었다." 고 소개하고 있네요.
▲이 이용원은 제가 고등학교 다닐때도 있었는데...근 30
년은 넘은 가게네요. 아이에서 소년으로, 청소년에서 청년
으로 남자로 사내로 신사로 변해갈 수 있게 해준 곳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마치 그 시절로 시간여행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요즘은 한복이 잘 어울리는 남자 머리를 만들어준다네요.
이곳은 동네 사랑방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세 놓은 집이 어디며, 빈 방이 있는 원룸이 어디며, 옛날 유곽의
흔적인 돌기둥이 있는 곳은 어디고, 이곳에 유명한 서예가가
살던 곳은 어디며, 서문교회 종에 담긴 얘기며, 박남준 버들치
시인이『시인의 밥상』이라는 책에서 애절하게 찾던 은자씨가
운영하는 술집은 어딘지... 등등
이 동네의 내력을 이발하면서 들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 액자는 90년경 이곳 다가동에서 근 60년을 사시며 향토
사학자이자 서예가이시며, 시조시인으로 활동하셨던 고 작촌
조병희(1910~2002, 鵲村;趙炳喜) 선생님께 직접 받은 작품이
라고 사장님이 은근히 자부심을 보이십니다.
"교목상고풍(喬木尙髙風)
줄기가 높은 나무는 높은 바람을 숭상한다."
고 뜻풀이를 해주시네요. 그러면서 이 글씨를 받을때 선생님
곁에서 "제가 먹을 갈아드릴까요" 했더니, "아직 먹 갈 힘은
있네" 하셨다는 고인과의 추억을 덧붙입니다.
작촌 선생은 평소 초서 글씨 획에 즐거움이 있다하시며, 다수의
초서체 작품을 남기셨습니다. 작촌의 셋째 아들인 조정형씨는
문중에서 내려오는 가양주인 이강주(梨薑酒)를 재현해내 상품
화하고 있습니다.
▲ 작촌(鵲村) 조병희 선생 고택.
아무도 살지 않아 마당에 잡초만 무성합니다.
전주는 서예의 고장으로서 많은 서예인을 배출한 곳
입니다. 요즘 유명한 전북 출신 서예인으로 4.27 남북
선언 기념 식수 표지석의 글씨를 쓴 효봉(曉峰) 여태명
원광대 교수가 있습니다.
이밖에 창암 이삼만, 석정 이정직, 벽하 조주승, 유재
송기면, 효산 이광렬, 설송 이규상, 석전 황욱, 강암
송성용, 남정 최정균, 여산 권갑석, 아산 송하영 등등
이루헤아릴 수 없이 많지요.
전주에서 서예관은 강암서예관(1990,전국 최초의 개인
서예관;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관,1988) 한 곳 뿐이니,
이 고택과 옆의 창고 건물을 엮어 기념관을 만들어 관광
명소로 사용하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신축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얘기도 있으니
시, 도청에서 먼저 나섰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또 이곳은 예전 전주부성의 서문인 상서문(相西門), 패서문
(沛西門)이 있던 곳으로, 1907년 신작로를 뚫으면서 문이 헐리
게 되었다는 내용의 빗돌이 사거리 한 쪽에 세워져 있습니다.
우측이 예전 다가동 파출소 모습이며, 이 사거리에서
차이나거리와 웨딩거리가 만납니다.
▲전주시와 중국 강소성 소주(蘇州)시의 자매결연(1996.03.21)을 기념
하기 위해 세운 "소주가" 패루(牌樓) 모습.
▲패루(
있습니다. 저 고등학교 졸업 때만 해도 기와집이었는데, 이렇게
신축 했네요.
▲제 인생에서 처음 소바를 먹은 곳인데, 그때 느꼈던 간장의
풍미와 간간하면서 감칠한 끝맛, 약간의 파향과 와사비의 매운
기운을 코로 내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곳은 봉평메밀을 사용하여 사리 반죽을 하는데, 메밀가
루와 밀가루 비율이 7:3으로 사리를 육수에 적시지 않고
먹어보면 메밀의 진한 풍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육수 또한 다시마, 멸치 .....등등 최상의 재료만을 엄선하
여 만든다고 합니다.
▲이 소바집은 현재 3대째 가업으로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음식점 두 곳중 한 곳으로 시청에서 인증
받은 곳 입니다. 1969년 부터 납세한 기록이 있다네요.
일제시대 일본에서 음식 기술을 배워와 처음에는 서울에서
소바집을 하다가 고향인 전주에 소바집을 다시 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호가 '서울소바'라고 하네요.
▲소주가와 웨딩거리가 만나는 사거리에 남아 있는
중국풍 건물.
안내판을 보니
"전주 중앙동
구 박다옥(搏多屋)
등록문화재 제173호, 1923년 무렵 건립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상업지역에 들어선 우동집으로,
전주에서는 처음으로 생긴 대형 일식집이었다. 건물 오른쪽으로
치우쳐 주 출입구와 계단실을 설치하였고, 주 출입구 상부
의 외벽에는 타일과 인조석을 교대로 사용하였으며, 상부는
삼각형의 페디먼트(pediment)로 장식하였다."고
되어 있네요.
▲사거리에서 본 웨딩거리 모습.
80년대 초까지 전주에서 가장 번화가였던 중앙로 현 웨딩거리.
예전에는 이 거리를 중심으로 근처에 홍빈관, 풍남반점, 홍
콩반점, 신흥반점(구 용문각), 이중본, 갈매못, 베네치아, 한마당,
바나나숲...등등 중국요리집과 경양식 레스토랑들이 밀집해 있던
곳 이었습니다.
지금도 오래된 맛집이 남아있는 곳 입니다.
가족회관, 중앙회관, 성미당, 송림일식, 죽림식당 등...
▲사거리 모습.
▲이 '진미(真味)' 중국음식점은 산둥성에서 건너오신 화교분이
운영하시는 곳으로 1969년 부터 납세한 증명이 남아있어
전주에서 오래된 음식점 중 하나 입니다. 현 운영자 분이
화교소학교을 운영하시던 교장선생님으로 부터 가게를 인
수받아 1985년부터 이어오고 있습니다.
사장님이 직접 주방을 책임지고 계시며, 산둥성에서 요리
사를 데려다가 전통 산둥성 요리를 고수하고 있답니다.
사장님께 중국요리를 선택하는 몇가지 Tip을 배워습니다.
화목한 가족을 위해 주방에서 가장 좋은 재료로만 만든 "전
가복"요리, 승진이나 합격을 위한 "샥스핀"이나 "홍문기"요리
(상어 지느러미가 방향성을 제시하고, 닭벼슬이 있는 닭
요리로 합격을 기원), 여유로운 삶을 위해 물고기요리
(도미, 복어), 자양강장을 위해 해삼, 제비집요리를 선택하면
의미 있는 식사를 즐길 수 있다네요.
조선 후기 부터 약령시에 약재를 사러오는 중국인들이 하
나둘 정착하기 시작해 일제시대인 중국 국공합작 시절에
중국을 탈출하는 화교들이 늘어나 70~80년대에는 70가구
넘게 살았던 이 동네에서 이제는 11가구 남짓 남으니 차이
나거리를 조성한다고 안타까워하십니다.
인천이나 부산도 화교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뿔뿔이
흩어진 후에 차이나타운이 조성되었다고 하네요.
이외에 현재 화교분들이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인 대보장,
일품향, 영흥관 등이 주변에 남아 있습니다.
▲전주에서 오래된 음식점들은 서화 한두 점씩은 걸려 있
는데 이곳에도 있네요.
이 '후덕당' 당호(堂號)는 오은 선생님 글씨라고 합니다.
▲큰 그림은 청나라때 소설『홍루몽(紅樓夢)』삽화에 나오
는 그림으로 재산을 많이 불리라는 의미에서 똑같은 집을
계속 이어붙여 그린 것으로 이 집 이름을 '대관원(大觀園)'
이라 한다네요.
소설 속에는 정원(庭園) 이름으로 나옵니다.
또 그 옆에 글씨는 치당 선생님 글씨라고 합니다.
강암, 작촌 선생과 같이 활동하시던 이 지역 서예가분들이랍니다.
▲구 전주 우체국(현 경원동 우체국) 사거리 모습.
70년대 까지 이 사거리 주변에 전신 전화국, 경찰서, 시청
이 모여있던 가장 번잡한 상권이였습니다.
이 사거리 근방에 이창호 국수(國手)의 생가인 이시계점이
있습니다. 드라마『응답하라 1988』속 택이네 금은방
'봉황당' 설정도 이 곳을 반영한 거라고 하네요.
이창호의 조부님이 현 이시계점의 건너편에 이시계포를
낸 것이 1940년대였다고 합니다. 그 때는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시계포만 있었는데 조선사람이 전주에서 처음
으로 연 시계포였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 익힌 시계수리 기술을 밑천삼아 시계수리와
판매에서 절대 속이지 않는 신용과 친절로 재산을 모아
알부자 소리를 들으셨던 조부께서 현 이시계점 자리에
건물을 올리시고(1970년1월10일 완공 허가)
아들 이재룡씨에게 물려주었다고 합니다.
이창호 국수는 이 건물 안쪽 지금은 세공작업실로 쓰고
있는 방에서 태어났는데(1975년생), 이재룡씨의 삼형제
자식 중 둘째로 4.8kg의 우량아로 태어나 모 분유회사의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입상했다고 합니다.
그런 창호가 어려서 할아버지를 따라 집 근처 설(雪)기원
(현 전주안과 자리)에 다니는데 창호가 바둑을 이해하고
재밌어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에 조부께서 어느 날 "창호에게 바둑을 가르쳐 프로기사
를 만들겠다."고 선언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데리고 좋은 선생이
있다면 천리길도 멀다 않고 바둑을 가르치기 위해 돈을
물쓰듯이 하셨담니다. 그러다 창호의
어릴 적 스승인 설雪기원의 유형옥옹(아마 5단)이
"이제 전주에서는 더 이상 창호를 가르칠 사람이 없으니
하루 속히 서울로 보내자"고 하여 우여곡절 끝에 바둑황제
조훈현 9단의 '내제자(스승댁에서 숙식하며 배우는 제자)'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때 창호가 국민학교 2학년 때라고 합니다.
현재 이시계점을 운영하시는 사장님이 말합니다.
"이창호 국수는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그리고 그걸 알아본 창호 조부님 덕이라고....."
이 이시계점을 일궜드시
사람을 속이지 않는 '신용'과
친절하면 손님은 다시 돌아온다는 '믿음'을 실천한
창호 조부님이 '국수(國手, 나라에 필요한 재주를 가진 손)
을 키우신거라고.
이런 창호 조부님이 이창호가 프로자격을 획득하고 3개월
이 채 못 되어 별세하셨는데. 병명은 암이었다고.
의사가 추정하는 발병시기는 공교롭게도 "창호에게 바둑
을 가르쳐 프로기사로..."라고 선언하던 그 시점과 맞아
떨어진다니 하늘의 뜻이 아니었는지?
올 7월 소설『국수』전6권을 완간한 김성동 작가의 말이
생각납니다.
'국수(國手)'는 바둑에서 쓰는 말로 주로 알려졌지만, 애초
소리, 악기, 무예, 글씨, 그림, 의술 등 나라 안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예술가나 일인자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작가는 설명합니다.
이는 재주가 뛰어난 자에게 바치는 '민중의 꽃다발'이라고...
이시계점에서 시계수리 기술을 배운 직원들이 익산, 김제,
부안 등등 인근지역에 이시계점을 열었드시, 전주는 많은
'재주를 가진 손'을 키워낸 고장입니다.
옻칠장 박광용, 방짜유기장 이종덕, 한지장 김혜미자,
침선장 이정희, 부채장 김동식, 이신잎 등등 모두
국수(國手)의 경지에 오르신 분들이지요.
이 점은 <춘향가>에도 나와 있습니다.
"경상도 산세는 산이 웅장하기로 사람이 나면 정직하고,
전라도 산세는 산이 *촉(矗)하기로 사람이 나면 재주
있고, 충청도 산세는 산이 순순(順順)하기로 사람이 나면
인정이 있고, 경기도로 올라 한양 터를 보면 자른 목이
높고 백운대 섰다. 삼각산 떨어져 북주(北主)가 되고
인왕산이 주산이오. 종남산이 안산이라 왕십리 청룡이요,
만리재 백호로다. 사람이 나면 선할 때 선하고 악하기로
들면 벼락이 지상이오."
*촉(矗) : 우거지다, 가지런하다, 길고 곧은 모양, 높이 솟은 모양
이시계점 아니 전주에서 프로포즈하면 건강하고 재주
많은 아이를 얻을수 있다는 이시계점 사장님의 장담은
어떤 연유에서 오는 감(感)일까?
전주가 지킴의 땅이어서인가?
조선 왕조의 개국자인 태조 어진을 위봉사로 옮겨 지켜낸 사람들.
조선 왕조 실록을 지켜낸 사람들.
왜란으로 부터 호남을 지켜낸 사람들.
천주교 박해에 굴하지 않고 종교적 신념을 지켜낸 사람들.
외세에 맞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외친 사람들.
전주 향교를 지키낸 한옥마을 사람들.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이 사는 땅. 언약의 땅.
이 곳에서 언약하면 맺어지고 언젠가는 결실을
얻을 것만 같음은 무엇인가?
누군가의 말처럼
'꽃심을 지닌 땅'이라서 아니면
'세월이 지날수록 깊은 맛이 나는 곳'이라서 그런걸까?
나 자신과의 약속을 위해 여행오는 곳.
더딘 시간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곳.
세상의 중심이 '나'임을 확인하러 오는 곳.
그이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영혼의 지문을 남기기 위해 오는 곳.
그리고 사랑의 고백도 프로포즈도 청혼도
루갈다 이순이의 동정고백에서 용기를 펼쳐
새벽이슬처럼 순결한 시작을 약속하는 곳.
그 약속의 믿음이 살아있는 곳.
이 곳은 전주니까요.
"전주그이!" 가 함께 합니다.
https://youtu.be/JwHHG6laEDg
▲이제 찾아가려는 "동락일식" 표지판이 우측으로
보이네요. 표지판을 따라 골목길로 들어갑니다.
▲이 집은 부자간에 주방을 책임지며 운영하는 곳 입니다.
소시적 광주에서 일식 요리를 배우신 사장님이 1983년부
터 운영해 오고 있는 곳으로 토박이들에게는 민어요리가
맛있기로 소문난 곳 입니다.
여름 보양식인 민어요리를 하는 곳이 별로 없기에 더 애착
이 가는 곳으로 목포에서 5kg 내외의 민어를 받아 피를 빼
고 내장을 제거하여 숙성시켜 사용한답니다.
주로 회, 탕으로 요리를 내놓으며, 회는 쫀득한 식감과 포
근한 뱃살의 맛이 일품이고, 탕은 맑은탕(지리)이나 매운
탕이나 내장과 부레에서 나오는 적당한 기름기의 진득한
국물이 입맛을 사로 잡습니다.
▲80년대에는 '동락(同樂)' 하는 술꾼들의 집합소였다고 합니다.
그때는 술값만 받고 안주값은 안받을 때였다고 사장님이 옛추억
을 꺼내 놓습니다. 그 시절에는 상호만 일식집이지 함박스테이
크며 치킨튀김이며 온갖 음식을 다내놓았다고...
또 여기는 겨울에는 오뎅탕으로도 유명합니다.
사골로 우린 육수에 7가지 오뎅, 양배추 마끼, 유부주머니, 토란,
두부,곤약을 꼬치에 꿰어 냄비 채 나오는 오뎅탕은 그 시원한
국물과 함께 식사 대용으로도 먹을수 있는 훌륭한 안주가
되어줍니다. 이외에 광어, 복어도 맛볼 수 있습니다.
▲전주 스쿼어 모습 입니다.
이곳은 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오래된 기와집들이 있던
곳으로 대개가 음식점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유명했던
"향리(鄕里)"라는 음식점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바로 뒤 로터리 옆으로 이전해 있습니다.
▲영화의 거리 모습, 이 로터리 부근 우측 입니다.
▲여기 '향리(鄕里)'는 이곳으로 이전하기 전부터 시청이 가까워
공무원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정치인들의 출입이 잦다고 합니다.
문재인대통령도 2014년에 다녀가시고 남긴 사진과 서명
이 남아 있습니다.
알이 밴 덕자 병어를 사장님이 직접 다데기를 만들어 짜글
이식으로 국물이 자박자박하게 끓여 나오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여름철이 제맛이라고 합니다.
고추, 마늘, 생강, 젓갈... 등등 다데기 재료가 중요해서 손수 손질
해서 예전 전주식으로 물고추를 쌀밥과 함께 학독에 갈아 쓰던
방식으로 만들고, 여기에 꽃게, 미더덕, 보리새우로 우려낸 특별
한 육수가 더해져 한번 맛보면 계속 생각나게 한다네요.
저는 전주의 푸짐한 음식 인심이 남아있는 몇 안되는 곳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전 전주분들은 음식 장사를 하면서 많이 남겨 큰돈 벌기 보
다는 먹고 살 정도의 돈만 벌고 덕을 쌓는다는 마음으로 장사
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지요. 이런 생각이 푸짐한 음식을 낼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작약산방"
일붕(一鵬) 서경보(1914~1996) 스님의 작품 입니다.
제주 출신이신 일붕 스님은 한때 완주 위봉사에서 수행하
신 인연으로 이 글씨를 쓰셨다고 합니다.
▲여태명 교수님의 글귀도 있네요. ~ "백복자집"
전주 특산물이 무엇인지 아시는가요?
전주는 콩이 특산물 입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콩을 이용한
음식이 발달 했습니다. 비빔밥, 콩나물국밥, 콩국수, 두부,
콩비지, 청국장... 등등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콩을 주재료로
하는 전주 음식을 내놓는 음식점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올해로 10주년 되는 "함씨네 밥상"이라는 한식뷔페 식
당입니다. 이곳 사장님은 콩에 대한 공부가 깊으셔서 건
강한 밥상에 대한 강의도 하고 계십니다.
좋은 콩을 먹으면 건강해져 콩의 꽃말처럼
"꼭 오고야말 행복" 이 이루어진답니다.
일절 국산콩으로 장류를 담그고, 청국장환으로 특허 출원도
하고, 여러 공로상들도 받으셨다고 합니다.
▲겉보리를 직접 띠우셔서 엿기름을 만드시고, 그 엿기름
으로 조청, 식혜, 고추장을 만드신다네요.
▲자율음식 외에 별도 주문으로 조기구이,고등어구이,
된장삼겹, 홍어 등을 맛볼 수 있습니다.
▲전주식으로 담근 6종류의 김치가 나온다네요.
막걸리 집으로도 유명한 전주에서 탁주 맛을 뒤받침하는
안주가 이 다양한 김치라고 합니다.
▲직접 띠운 청국장 찌개, 매일 국산 콩으로 만드는
모두부, 앉은뱅이 밀로 만든 술빵.
▲이곳 사장님께서 얘기하시는 '건강한 밥상'은
건강한 재료를 가지고 제대로 된 약 같은 양념으로
제철 음식을 내는 것이라고 강조하시며, 여기 음식을
드신 손님은 속이 편해서 다시 찾아온다고 합니다.
▲약 같이 생각하고 쓰는 양념을 만드는 장독대.
▲엿기름, 버섯, 가죽나물, 고사리 등을 직접 말리는 모습.
저는 이상의 전주 맛집들에서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
했습니다.
모든 업주분들이 직접 음식을 하시거나 엄선된 재료를
구입하시는 수고를 마다하지않고 계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 전주 음식 맛의 비결이 3가지 정도로 추려졌습니다.
음식점마다 직접 담가쓰는 장류와 신안염전이나 부안염전
에서 가져다쓰는 천일염 및 곰소젓갈, 국산깨로 직접 짜서
쓰는 참기름, 들기름, 깨소금 등으로 정리할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이 비결들이 잘 유지 되어가기를 기원해 봅니다.
◆
...
곰삭은 전주 맛,
전주 음식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전주 사람들이 그렇듯 언
제나 은근짜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맛이 새록새록 솟아나
는 중간색 입니다.
.....
전주는 땅이 옴팡진 분지(盆地) 입니다. 덕진 쪽만 빼놓고 사방
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풍수가들은 '배가 막 떠나려는
듯한 행주형(行舟形)'이라고 합니다. 용머리고개가 뱃머리이
고, 툭 터진 덕진 들판 쪽이 배꼬리인 셈입니다.
.....
뱃머리를 동여맨 밧줄은 저 멀리 평지돌출한 모악산에 단단히
비끄러 매져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주 사람들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나부대지 않습니다.안온하고 튀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난리치지 않습니다.
전주 밥상은 품위가 있고 풍요롭습니다. 넉넉하고 여유가 있습
니다. 반찬 하나하나마다 곰삭고 깊은 맛이 우러납니다.
강그럽습니다. 간간하고 은은합니다.
곤곤하고 조선간장 맛이 배어 있습니다.
.....
전주 음식은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묵은 장맛이
우러납니다. 하지만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은 몰라도 요즘 젊은
이들은 그런 맛을 못 느낍니다. 은은하거나 곰삭은 맛을 싫어하
거나 아예 그럼 맛을 느낄 혀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아주 맵거나 톡 쏘는 등 자극이 강한 음식을 좋아합니다.
전주 음식은 싱싱한 것보다는 곰삭은 것 위주입니다. 소위 삭임
새가 있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철따라 나오는 신선한 것들이
적습니다. 해산물도 갈수록 가짓수가 줄어듭니다.
새만금 때문에 개펄이 죽어서 그런가요?
.....
전주에서 한 음식 한다는 숙주들은 이젠 주방에만 머물러 있으
면 안됩니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쯤은 전국의 소문난 집에 가서
남의 손맛도 봐야 합니다.
그런 곳도 한번쯤 돌아보며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비빔밥이란 게 뭔가요? 천하의 모든 음식을 한데 섞어 하나로
만드는 것 아닌가요? 시대는 변합니다. 사람도 바뀝니다.
입맛도 따라 변합니다.
◆
...
살아 숨쉬는 밥
전주 밥집들 밥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김이 무럭무럭 나고 기름
이 자르르 흐릅니다. 굳이 소문난 집을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어쩌면 뒷골목 허름한 밥집이 더 어머니 손맛이 납니다. 자글자
글 끓고 있는 된장 뚝배기.그 속에서 두께두께 썰어 넣은 두부와
애호박이 자꾸만 어깨를 들썩입니다. 햐~아! 그만 "꼴깍!" 침이
넘어갑니다. 아무래도 이번 토요일엔 식구들 데불고 전주 한번
내려가야 하겠습니다.
『김화성 _ 전주에서 놀다』에서 발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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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근방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를 소개할까
합니다. 귀신사(歸信寺)를 아시는가요?
제가 이 절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년 전쯤
IMF 금융위기가 터지고 직장에서 평생을 땀 흘려 일한 사
람들이 대량으로 실업자가 되어서, 집에다가 퇴직 얘기는
하지도 못하고 자신만의 뒤뜰에서 서성이던 사람들을
『숨은꽃』이라는 자전적 소설의 등장인물들과 대비시켜
서 그들이 이 세상을 지탱하던 숨은 꽃이었다는 신문 기획
기사를 보고 나서었습니다.
전주가 고향인 저도 금산사만 알았지 귀신사는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금산사 가는 길에 얼핏 절의 이정표를 본 것
이 전부였지요.
제 첫 귀신사 방문은 소설을 구입하여 읽고 난 다음이었습
니다.구입한 소설책 뒷면의 발행날짜가 초판31쇄-1998년
7월15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해 가을인것으로
기억됩니다.
1.
그는 귀신사(歸神寺)에 있었다. 나는 그를 귀신사에서 만났다.
십오 년 만이었다. 물론 나는 그 십오 년의 세월을 첫눈에 걷어
내지는 못하였다. 그가 먼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이 돌연한
만남이 십오년의 시간을 경과한 후에 비로소 일어났다는 사실
조차 확인되지 않았을 터였다.
그랬다면, 만약 그와 나 두 사람 중의 어느 누구도 세월의
두께를 젖히고 상대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우리는 서로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하늘 향해 키를 겨누고 서서 연초록 잎을 피워 올리고 있는 껑충
한 미루나무나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시들어 가는 진달래 잎사귀
나 한 번 더 만져보고, 나는 그만 돌아섰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이 소설은 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한 거인의 목소리를 채집하는 행운을 영원히 놓쳐 버릴
수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행여 하고 갔다가 역시 하고 돌아오는 허망함을 어떻게 가누
었을지 생각만 해도 막막한 일이었다. 어쩌면 그는 내가 거기에
가야만 했던 까닭을 미리 알고 먼저 그곳에 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 같으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비웃었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없는
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해 버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태도일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말해 버렸다.
귀신사에서 나는, 그렇게 말해 버리는 법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사실을 말하면, 이곳에 오면 제일 먼저 귀신사의 텅 빈 적요 속
에서 두어 시간쯤 앉아 있고 싶었다. 무작정 떠남에 있어 가장
많은 유혹을 던졋던 곳도 귀신사였다. 귀신사, 거기에는 무언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지난 가을에 귀신사(歸神寺)는 우선 이름으로 나를 사로 잡았다.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
본당의 문을 열어 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한 금동불상을 보
기전에는 여느 여염집으로 여기고 지나치기 십상인 외양
이어서 그때도 그 흔한 관광객 한 사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면 상당히 많은 말을
하고 있는 절이 귀신사였다. 드러나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낡고 허름한 귀신사의 풍경은
여행중의 온갖 화사한 기억을 다 물리치고 가장 오래도록
내 마음에 머물러 있었다.
경내도 좁고 볼 만한 석탑 하나 갖고 있지 않은 이유도 오
랜 시간 마음으로 보고 마음을 채워 가라는 속뜻을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였다. 한바퀴 휘 둘러보고 나와 버리려
는 자는 '사절'이라는 팻말을 어디선가 본듯싶다는 황당한
착각도 얼마든지 품게 만드는 그런 절이었다.
아마도 나는 착각 속의 팻말에 충실하기 위해 여기에 다시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는 단지 스쳐 지났을 뿐이다.
마음에 담을 것을 제대로 주워담지 못하고 왔다는 생각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그때 절 마당에 피어 있던 이름 모를 가을꽃은 지금 뿌리로만 견
디겠지. 위태위태한 아름다움 대신 넉넉하고 다정한 꽃송이가 참
푸근했었는데, 가을의 그 마지막까지도 꽃잎 한 점 뭉개지지 않고
송이송이 많이도 피어 있었지.
다알리아 꽃.
개망초꽃.
지금도 처마끝에서 풍경이 바람 소리를 내며 흔들거리고 있을까.
너무 낡아 단청 빛깔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그저 세월에 바랜
나무의 단아한 갈색만이 흔들리는 풍경과 그 위의 푸른 하늘을 받
아 내고 있었다.
절뒤의 작은 동산에서 홀로 열매를 맺고 있던 오래된 감나무들은
이 봄에도 새잎을 틔우며 하늘 향한 해바라기에 골몰하고 있을
텐데. 꼭대기 가지에 열린 감들은 수십 년을 두고 산새들이나 입
을댈까, 사람의 손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을 걸.
길의 왼쪽은 단감나무 과수원이고, 오른편으로 대여섯 채의 집을
지나 모퉁이를 돌면 절이 보일 것이다. 길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는
다. 길의 끝까지 가서 몸을 돌려야 비로소 절의 옆구리가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흙에서 풍기는 향내를 맡으며 천천히 길을 올라갔다.
바로 그때었다. 곧 보게 될 귀신사의 모습에만 몰두하고 있던 내
귀에 찢어질 듯한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그리고 이내 귀신사 쪽에
서 죽어라고 달려오는 여자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따지고 보면 바로 그 남자와 여자가 나타난 순간부터가 이 여행의
첫 시작이었다. 이제까지는 반년 전에 있었던 가을 여행의
연장이거나 그것의 반추에 불과했지 한 번도 새 경험에 마
음을 후르르 떨어 본 적이 없었다. 발가락 어디가 아팠다면,
그것은 꿈속인 줄 알고 여지없이 꼬집어 봤다가 느닷없이
껴안게 된 생살의 아픔일터였다.
나는 기어이 거기에 가야 할 이유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자 또
렷하게 절을 떠받들고 있던 예전의 적요가 떠올랐다.
그랬다. 나는 아직 적요을 만나지 못했다. 나는 교교한 고
요 속에 온몸을 담그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목
밑까지 흠뻑, 몸속의 모든 것을 다 증발시켜 버리고 남을
만큼 오래.
「웃기는 일입니다. 대체 뭐하러 이 짓을 합니까? 목수하
고 이 절에 처음 온 날이 마침 비 오는 날이었어요. 첫눈에
야, 이건 굉장한 절이다,라는 느낌이 확 들었지요. 전국의
이름난 절들을 나도 숱하게 봤지만 이런 절은 처음이었거
든요. 작가 앞에서 문자 쓰기 거북하지만, 뭐 생사를 초월
한, 그런 인생 무상 같은 게 가슴을 찍어 누르대요.
그런 절을 싹 뜯어서 울긋불긋하게 만들겠다니 얼마나 웃
기는 짓이에요. 말도 안되는 짓을 한다길래 첨엔 이 일에
손뗄라고 그랬지요. 그런데 왜 마음을 바꾸었는지 아십니
까. 조금이라도 덜 웃기게 만들기 위해선 내가 있어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지요. 이건 정말이지 순수한 내 충정입니
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짓이긴하지만, 그래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구요.」
나는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 남자도 그렇게 느꼈던가.
귀신사에 대해 그도 남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던가.
『양귀자_숨은꽃』에서 발취
◆
...
푸른 댓잎으로 남은
'혁명아 정여립'
배롱나무 붉은 꽃이 우르르 피었습니다. 길가에도
피고, 절 마당에도 피었습니다. 매끄러운 줄기 끝에
다발로 핀 꽃. 여름 내내 피고 지고, 지고 핍니다. 왜 배롱나
무는 껍질을 훌훌 벗어 버렸을까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에 붉은꽃. 섹시합니다. 옆구리에 간지럼 밥 먹이
면 까르르 까르르 온몸을 비틉니다. '간지럼 나무'입니다.
김제 금산 청도리 귀신사(歸信寺) 대적광전 앞마당에도 배롱나무
붉은 꽃이 화르르 피었습니다. 한때 금산사보다 몇 배나 더 컸던
가람. 이곳저곳 다시 짓고 고치긴 했지만, 아무래도 낡고 손때가
묻어 여기저기 검버섯이 피었습니다. 곱게 늙은 절. 배롱나무도
뼈만 남았습니다. 세속의 모든 껍질을 훌훌 털어 버린 깡마른 몸매.
가만히 귀 대어 보면 노승의 마른기침 소리가 들립니다.
해탈 꽃인가요? 어떻게 저런 나이에, 저리도 고운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절간 뒤란의 수런거리는 소리.
키 작은 야생 차나무들이
마른 몸을 서걱대고 있습니다. 텅 빈 공터에 뎅그러니 서
있는 돌탑과 남근석(男根石). 수백 살 늙은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애들은 가라"며 빙그레 소 같은 웃음을 짓고 있습니다.
팽나무와 느티나무 사이 돌계단에 앉아 앞쪽 너머 백운동
올라가는 길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우리 땅 구석구석을
메주 밟고 다니듯 걸어 다니는 신정일 선생의 명당자리
입니다. 신선생은 우울하거나 답답할 때마다 이곳에 앉아
백운동 올라가는 길을 몇 시간이고 하염없이 바라봅니다.
미륵도인들이 용화세상을 꿈꾸며 살았던 동네. 지금은 대
부분 떠나고 예닐곱 집만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후천개벽의 세상을 찾아 또
어디론가 떠난 것일까요?
▲둔덕 위 계단에 앉아 바라본 백운동 마을(오디마을)
백운동 올라가는 길은 선천 시대에서 후천개벽의 시대로
가는 길입니다. 모두가 함께 잘사는 대동세상으로 가는
통로입니다.구불구불 실오라기 같은 길이 산너머 아득히
사라집니다. 마치 그곳에 도솔천이 자리 잡고 있는 듯한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일자 한자 늘어놓겠습니다 무식이 배짱입니다
성리학 주리노선은 천지 음양 귀천 상하의 계급노선입니다
바로 이 화담 율곡 주기론을 이어 정여립은
그것을 더 발전시켜 허균의 자유주의와는 또 달리
앞장선 천하 평등노선을 강화합니다
주자는 다 익은 감이고 율곡은 반쯤 익은 감이고
또 누구는 숫제 땡감이라고 원조와 은사 할 것 없이
그리고 선배 따위 닥치는 대로 평가합니다
그는 동인 계열입니다 정철과 대결하다가
그놈의 늪 같은 권세 때려치우고 낙향해 버립니다
천하는 공공한 물건이지 어디 정한 주인 있는가
어허 위태위태한지고 이 말은 곧 존왕주의 주자학을
마구 거역함이 아닌가 될 말인가
어디 그뿐인가
인민에 해되는 임금은 살함도 가하고
인의 부족한 사대부 거함도 가하다
이런 칼 휘둘러 치듯 하는 우렁찬 말 듣고
오종쫑한 재상 도학자들 한꺼번에 크게 감동키도 했습니다
그는 대동계 세워 양반 양민 상민 사천노비 할 것 없이
상놈이 양반더러
먹쇠가 마님더러 야 자 해도 되는
대동계 세워
문무쌍권의 공부 시키니
때마침 왜구 침노하는 갯가 나가서 다 격퇴했습니다
임진왜란은 이미 그때부터입니다
그 이전 신라 고려 때부터입니다
호남 전역 해서 전역
대동계 식구 늘어나서 임진왜란 전 백성이 모여들었습니다
헌데 이 민족자결세력 늘어나자
조정의 정철은 대동계 일당과 선비 1천여 명을 검거합니다
천하 대역죄 먹여 홍살문턱 닳았습니다
정여립은 막판에 진안 죽도에서
아들하고 자결한 것이 아니라
서인 관헌 암살패에 의해 처참하게 죽은 것입니다
3백 년 뒤에나 5백 년뒤에나 그 이름이 알려질 뿐이라고
이것이 전 민족의 항성을 묻고 변성을 키우는 짓거리라고
한탄하는 단재의 말마따나
- 《만인보》1권 〈정여립 〉전문
일부 학자들은 정여립을 조선왕조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말
합니다. 영국의 공화주의자 올리버 크롬웰(1599~1658)
보다도 50여 년이나 앞섰다는 것입니다. 영국 공화정은
정여립이 죽고 60년 뒤인 기축년(1649)에야 비로소
처음 실시됐습니다.
▲둔덕 위에서 바라본 정여립 생거지가 있는 제비산 모습.
전북 김제 금산사 부근엔 정여립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
다. 금산사는 후천개벽을 외치는 미륵신앙의 중심지입니
다. 정여립의 출생지는'전주 남문 밖'으로만 되어 있어 정
확한 위치가 불분명 합니다.
하지만 그는 한동안 금산사 아래 구릿골(동곡마을)에 살면
서 이곳에서 처음으로 대동계를 조직했습니다. 그의 집터
는 지금도 금평저수지 앞 제비산 월명암 부근에 남아 있습
니다. 그가 죽은 후 조선시대 제비산엔 그 어떤 건물도 지
을 수 없었습니다.
구릿골은 강증산이'구릿골 약방'을 차려 놓고 천하를 구제
하던 곳이며 그 부근 일대는 동학 김덕명포의 중심지였습
니다. 또 녹두장군 전봉준이 그 인근 황새마을에서 청소년
기를 지냈던 곳이기도 합니다.
정여립이 타고 다니던 '용마(龍馬)의 무덤'이란 곳도 있습니다.
구릿골 아래 김제시 금산면 쌍룡마을 앞 논 가운데 무덤이 바
로 그것입니다. 정여립은 상두산에서 6킬로미터쯤 떨어진 김제
황산으로 활을 쏘았는데, 용마가 빠르게 달려가 그 화살을 물
어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화살을 쏘았는데 용마가 화살
을 물어 오지 못했습니다. 정여립은 화가 나서 곧바로 그 용마의
목을 베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살펴보니 화살이 용마의 엉
덩이에 꽂혀 있었습니다. 정여립은 크게 자책하며 그의 칼과 함
께 용마를 그곳에 묻었다고 합니다. 확인되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그만큼 이 지방에선 정여립의 영향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반증합
니다.
『김화성 _ 전주에서 놀다』에서 발취
이어서 정여립의 생질 소녀인 '홍도'와 '자치기'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다룬 뮤지컬이 초연되었다고 해서 소개해볼까합니다.
□ 시놉시스
○ 프롤로그 _ 대동가 (과거)
진안 천반산 아래 <죽도>에서 대동계원들이 대동가를 부르며 춤을 춘다.
○ 1장 대동세상(과거)
대동계원들은 한 줄로 늘어서 춤을 추듯 모심기하며, 메기도 하며
'농부가'를 부르며 조선의 부조리를 풍자한다. 그리고 정여립과 함께
대동사상을 담은 ‘대동가’를 부르며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 4장 죽도할아버지(과거)
어린홍도, 아버지 이진길, 홍도 할머니가 죽도에서 정여립을 만난다.
죽도 할아버지 정여립이 당나라 시인 설도를 닮았다하여 이름을
‘홍도’로 지어준다.
○ 6장 재회(과거)
과거의 한양어물전에서 홍도는 자치기와 다시 재회한다.
자치기는 홍도에게 농을 걸며 홍도에게 다가가고, 어물전 장돌뱅이에게
소금과 바꿔 홍도가 좋아하는 고등어를 사준다.
그리고 자치기는 그 동안 정여립을 스승으로 모시고, 대동계원들과 왜구
들을 물리친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이야기 한다.
○ 7장 역모_중상모략(과거)
동인과 서인들이 서로를 질시하며 선조를 두려워한다.
서인들 중 정철과 송익필이 대전에서 항간에 떠도는 '목마망 정읍흥'
노래를 알리며, 정여립과 대동계를 역모로 몰아세운다.
○ 11장 혼례(과거)
자치기가 꾸린 피난민들이 모여 대동세상을 열어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홍도와 자치기는 마을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혼례를 치른다.
○ 12장 삶과 죽음(과거)
자치기와 홍도가 혼례를 치르고 초야를 보내는 밤에 관군이 마을을 습격
하여 대동계 잔당이라 하며, 모두를 척살하려 한다.
자치기는 대동마을 사람들을 모아 대항하고.....
이 뮤지컬《홍도》는 전북관광문화재단이
청년 신규 일자리 창출과 젋은 예술인들의 지역 유입을
위해 공개 오디션을 통해 역량 있는 단원들을 모집하였다
고 합니다.
창작 뮤지컬이라 알려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재미있는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면에서는 훌륭한 공연이
라고 생각됩니다.
직접 관람해보니 예상보다 높은 수준에 놀라기도 했으며,
앞으로 좋은 뮤지컬로 발전할 가능성이 보여 전주 한옥마
을을 찾는 관광객에게도 색다른 추억거리가 될거라고
기대합니다.
전주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이성계의 본향으로'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했으며, 전주 객사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고 했답니다.
실제로 전주객사 주관 앞면에는'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현판
이 걸려 있습니다. 이 현판은 조선에 온 중국사신 주지번(朱之蕃)
이 익산의 선비 표옹(瓢翁) 송영구를 찾아가던 중 이곳에 들렀다
가 쓴 글씨라고 합니다.
'풍패(豊沛)'란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劉邦)의 고향에서 비롯된 것
으로 건국자의 본향(本鄕)을 일컫는거라고 합니다.
'풍패(豊沛)'에서 '풍'을 따 전주부성의 남문을 '풍남문(豐南門)',
서문을 '패서문(沛西門)'이라 지었답니다.
저 호남제일성 편액은 창암 이삼만(蒼庵 李三晩) 선생의 수제자인
호산(湖山) 서홍순의 글씨라네요.
이 풍남문 코앞에 '행원(杏園)'이라는 카페가 있습니다.
이곳은 90년대 초 까지 요정이 있던 곳이랍니다.
일반 한옥과 달리 중정(中庭)이 있는 일본식 한옥구조로 된 곳으로,
1928년 지어진 행원은 전통예술을 가르치고 예인들을 배출해내던
전주국악원 '낙원권번'이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풍류객들이 모이는 요정으로, 1990년대에는
한정식 음식점으로 운영되다가 최근 카페로 재단장했다고 합니다.
여기 주인장이신 성준숙 명창의 <적벽가>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무형문화재 집 제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정원을 바라보며 앉을 수 있는 좌식 테이블도 있고,
입식테이블도 있습니다.
중정에는 철쭉, 모과나무, 살구나무,적단풍나무들이 아늑
한 분위기를 만들어줍니다.
특히 비오는 날 빗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는 운치는 느
긋느릿한 감정이 절로 생기게 합니다.
그러면 문득 시 한귀가 떠오르겠지요.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절대 모르실겁니다.
또한 한 겨울 눈내리는 밤이면 여기가 어느 세상인지 궁금
해져 누군가에게 전화 통화를 하고 싶게 만드는 곳이기도
합니다.
"얼음 위에 댓잎 자리를 보아
임과 나와 얼어죽을망정
정 둔 오늘 밤 더디 새오시라
더디 새오시라"
-작자미상, 고려가요'만전춘'중에서
이 곳이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예학원으로 남아 있는 곳
입니다. 예전엔 충경로 사거리 풍년제과 본점 옆 건물 2층
에 있었습니다.
제가 중학생 때인걸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 학원은 많은 수강생으로 분비는 곳이었습니다.
조용히 들리는 먹 가는 소리와 은은하게 풍기는 먹향에 까
불던 그 시절의 저도 차분하고 가라앉은 자세로 붓질을
했었지요.
문득 떠올리면 흐뭇한 추억입니다. 행복한 시절이었네요.
서예가 기본 소양이었던 시절로 아리따운 누님들, 신부수
업 받는 결혼을 앞둔 아가씨, 서화 백일장에 나가려는 중
년의 주부,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 청년 서예가들이 어
우러져 활기 넘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전주는 묵향(墨鄕)" 입니다.
제 기억에 전주는 서예의 고장으로 각인돼 있습니다.
한옥마을 곳곳에서 이 지역 출신들의 글씨를 볼수 있어
해찰하며 건들건들 걷기 좋은 곳 입니다.
거리를 걷다 보면 화방이나 필방, 표구사, 화랑들도
심심치 않게 보입니다.
많은 전북 출신 서예인들이 우리나라 곳곳에서 활약하
는 소식을 접하면 그 무엇보다 뿌듯함을 느낍니다.
이곳 동방서예학원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시고, 대학에
도 출강하시는 석인(石人) 강수호 서예가가 있습니다.
두 권의 작품집을 내셔서 선생님의 허락을 얻어
소개해 보려 합니다.
석인(石人)의 서예 세계는
"대중성을 띄운 실용 작가 정신으로 옛 판본 서체들, 필
사본들을 현대적 정서에 맞는 캘리그래피적 요소를 담뿍
담은 작품화로 한글 서체의 변형, 결구, 조형성, 공간미
등이 뛰어나다."
2015년 인사동 경인 갤러리 전시평 입니다.
판본체, 조화체를 중심으로~~
실용적인 필체와 형태미가 현대적이고 도회적인 정서를
느끼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김용택 시인의 시귀 작품은 제 방에 걸고
싶어집니다. 금란(金蘭)도.....
전주 여행은 볼거리, 먹거리는 엔잔헌디, 살거리가 빈약하
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그런데 잘 모르셔서 그렇치
믿을 수 있는 기념품을 파는 좋은 곳이 있습니다.
전라북도 관광기념품 100선 판매관이라고 들어보셨는지
요? 전북공예협동조합 소속의 공예인들이 2015년부터
매년 선정공모에 참여하여 4년 동안 25선씩 100선을 선
정해 인증마크 부여와 생산장려금 및 홍보, 판매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가 마지막으로 7월경에 일반인 심사, 전문가 심사를
거쳐 25선을 선정할 예정입니다.
▲텀블러. 전북의 14개 시, 군 이미지를 화가가 그려 제작
한 보급형 입니다. 전주 방문시 하나 사서 들고 다니면
한옥 분위기와 어울리겠죠. 여행하는 동안 사용하고 기념
품으로 남기도 하니 실용적인 아이템 입니다.
▲옻칠과 자개로 장식한 고급형 텀블러.
커피를 좋아하시는 분께 생일 선물로 적당할 것 같네요.
▲보급형 부채(단선). 무형 문화재 방화선 명인이 현대적
인 디자인으로 제작한 것으로 한복의 소품으로 사용 후 방문이나
벽에 걸어둬 인테리어 장식품으로 사용 가능한 제품입니다.
그냥 걸면 밋밋하니 이런 문구를 써 넣으면 어떨까요?
"후회는 언제하든 늦지 않지만 안할수록 좋은 것"
이건 짧게 쓴거구.
길게 쓰면
" 홀가분하다. 하지만 한편 아쉽다.
더 열심히 했어야 했는데. 그때 놀지만 않았으면
시험을 더 잘볼 수 있었는데. 후회가 더 많이 쌓이는
지난 세월. 왜 그 상황속에 있을때는 뼈저리게
못느끼고 지난 다음에야 알게 될까. 다음엔 정말
최선을 다해야지 다짐한다. 그러나 살다보면
「다짐」은 늘 잠깐이고 매번 후회하게 된다.
후회는 언제하든 늦지 않지만 안할수록 좋은것. "
오목대 관광안내소 뒤편에 가면 무료로 붓글씨를
써주는 곳이 있으니.
전주 여행 후 힘! 힘! 받아서 뭐든 열심히 화이팅~
하시길 !!!!!! 바랄께요.
▲우드 스피커. 자작나무로 만들었으며,
나무의 울림을 이용한 증폭효과가 상당하답니다.
실제 사용해 봤는데 음악이 엄청 크게 들렸습니다.
좀 길지만 가벼워서 휴대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장점은 전원이 필요없다는 것이지요.
5월 25일/9월14일(금), 18시~새벽2시, '전주문화재야행'
축제가 열립니다. 그때 조용한 전주 천변을 찾아 우드스피
커로 달큰하고 섹시한 음악을 들어도 괜찮을 거 같네요.
희망사항이죠.
Ellie Goulding(엘리 골딩)의 "Love Me Like You Do(당
신이 하던대로 날 사랑해 주세요)"나 오래된 곡이지만
Maxwell(맥스웰)의 "Whenever Wherever Whatever
( ~할 때면 언제든 무엇이든)"을 들으며,
보고 싶은 밤, 생각나는 밤, 그리워지는 밤 되시길.....
두아 리파(Dua Lipa)의
"Blow Your Mind" (넌 나한테 완전히 빠졌어)
두아는 95년 8월생 영국여자, 모델 겸 가수, 걸크래쉬
생일이 안지났으니
만 22살. 정도의 감성과 감각에 맞는 경쾌한 곡입니다.
이 노래를 우드스피커로 들어봅니다.
가사가 이효리의 "10minute" 을 능가 하네요.
음악적 장르는 EDM(전자 댄스 음악). 테크노와 하우스가
섞여진 몽환적인 부분도 가미된 트랜스와 힙합적인 트랩
음악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이번 5월 7일에 내한 했었죠.
▲향한복. 한복 소재로 만들고 지리산 허브(로즈마리, 페
퍼민트, 라벤더, 레몬그라스)를 넣은 유리나 거울, 옷장에
붙여 사용하는 방향제로 2018년 전주 여행 대표 기념품
이랍니다.
▲수향낭. 옛날 사향주머니 같은 것이죠.
이게 아주 실용적 입니다. 봄나들이 할때 몸에 향수를 뿌리
면 종류에 따라 곤충들이 달려들거든요. 그런데 이 수향낭
을 몸에 지니기도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녀도 되니 편하거
든요.헤스페리데스라는 아로마향과 편백나무 알갱이가 들
어 있습니다.아로마향을 주머니안에 뿌려 사용하면 됩니다.
저는 여행지에서 무엇이든 사서 사용하면 그곳을 더 잘
느낄수 있드라구요. 특히 전통시장을 좋아합니다.
시장을 가면 그곳의 현재를 알수 있다네요.
미래를 알고 싶으면 대학으로, 과거를 알고 싶으면 박물관
으로 가라. 여행 고수왈 입니다.
요즘은 좋은 전통술이 많아졌다는 생각이듭니다.
전주에서 새로운 전통술이 출시 되었다기에 확인해 보았
습니다. 3번 담근, 발효시켜 만든 삼양주 입니다.
찹쌀과 물과 누룩으로만 3번 빚어 만든 "오늘'이라는 약주
와 탁주 입니다.
제가 직접 구입해 시음해 보았습니다.
첫 모금 강한 향과 산뜻한 맛에 눈이 크게 떠지더군요.
"오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다음의 스토리펀딩
'불의 물방울' 한주 르네상스 9화를 보고서였습니다.
처음엔 전주에 이런 술이 정말 있나싶었죠.
구하고 싶어 여기저기 알아보니 한옥마을내 전통술박물관에서
구할 수 있었습니다.
양조장이 어딘가 궁금해 찾아가 보니 전주 중앙시장내 상
가 안에 있었습니다. 미리 전화로 약속을 하고 찾아가 생산자를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 저것 많은 걸 물어보고 술을 발
효시키는 것도 보고 3번 발효된 술을 자연침전시키는 모습도
볼수 있었습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이런 술을 담그는 것이 신
기하게만 보였습니다.
이곳에서 시음을 해보니 풍미가 끝내주더군요.
돌아오며 생산자분이 하신 살아남는 술이 되어 생명력을
얻기를 바란다는 말이 귓가를 맴돌더군요.
집에 와서 이 술에 맞는 안주를 만들어봤습니다.
드라이한 맛이 강하고 끝맛에 단맛이 느껴지고
발효주 특성상 처음 입에 들어갔을 때의 저항감도 있고
이런 강한 풍미의 술에는 어떤 안주가 좋을까. 고민해 보
니 생소고기구이가 맞을 것 같아 안심 스테이크를 해보았습니다.
먼저 달궈진 두터운 후라이팬에 발사믹 식초를 붇고 식초
를 쫄이드시하며 안심고기의 옆면을 둥굴려가며 색을 냅
니다. 그러고나서 다른 후라이팬을 달궈 식용유를 붇고
뜨거워지면 약간 타드시 표면을 뒤집어가며 굽습니다.
(시어링) 구워지면 고기위에 후추와 굵은 소금을 뿌리고
뚜껑을 덮습니다. 한동안 나두었다가 고기를 뒤집어 똑같
이 굽습니다. 다 구어지면 고기를 접시에 담아 레스팅 합
니다. 그리고 가니쉬를 준비해서 접시에 올립니다.
고기를 한점 썰어 입에 물고 "오늘" 한잔을 입에 머금고
고기를 씹어가며 맛을 음미 합니다.
예상대로 산미가 강하고 바디감이 약간 가벼운듯하니 양
념이 안돼있거나 연한 소스의 소고기에 어울릴것 같네요.
입안 감각이 강한 드라이한 맛에 적응되면 그 다음 부터는
술술 들어갑니다. 와인잔이 다비워질 때 까지 진한 풍미가
살아있어 보통의 와인보다 향으로는 훨씬 낫더군요.
전체적인 평가로는 2~3만원대 와인은 충분히 커버가 가능하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디감이 약한것은 쌀로 빚은 술의
태생적 한계지만, 아무튼 산미가 강해 가벼운 안주라도
같이 놓고 마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몬테스알파,안투,샤토네프뒤파프,1865의 까베네쇼비뇽 보다는
나은 것 같더군요. 이 와인들 보다 고기맛을 살려주고 개운한
뒷맛이 좋았습니다. 좋은 술인것 같네요.
참고로 이강주(梨薑酒)는 해물찜, 굴찜, 대게찜... 등
양념되지 않은 해물요리와 잘 어울림니다.
배향과 생강의 뒷맛이 비린내를 싹 가시게 해주거든요.
오늘을 위해 "오늘"을 찾으시길.....
이상 "오늘" 약주 시음을 마칩니다.
▲J매거진. 전주에 오시면 이 여행 안내서를 먼저 찾으셔
야 후회를 하지 않을겁니다. 이 안에 전주 여행의 모든 재
미와 즐거움이 들어있으니까요. 토박이인 제가 봐도
정말 잘 만들었네요. 애용도 하고 탐닉도 하시길...
복이 그대에게 오나니 ?!!!!!!!!!
마지막으로 맛있는 로스터리 커피솝을 소개할까합니다.
남고산성 만경대로 산책을 갔다오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 입니다. 처음 먹은 커피는 스페셜티인 에티오피아 코사
로 직접 로스팅한 콩으로 사장님이 직접 핸드드립으로 내
려주시더군요. 중간 정도의 바디감과 적당한 밸런스로 오
랜만에 맛있는 커피를 마셔 다음에 커피만을 마시러 또 방
문하게 되었습니다.
두번째 방문때는 하우스 브렌딩 커피인 새벽과 노을이 있
는데 노을을 마셨습니다. 첫맛은 입안에 침이 괼 정도로
산미가 있어 괜찮았는데, 끝맛이 좀 거시기 하더군요.
그리고 세번째 방문을 해서 새벽이라는 커피를 마셨습니
다. 지난번 새벽과 비슷한 산미를 느낄수 있었습니다.
둘다 에티오피아 아리차를 베이스로 블렌딩 한다고
하네요.
먼저 양해를 구하고
포스팅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과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경력을 쌓으신 것 같은데, 어떻게 전주에서 샵을
운영하게 되었는지 물으니 고향이라 내려왔다고 합니다.
여기가 한옥 마을과 가까운 서학동 예술촌이라 평일에는
뜸하고 주말에는 손님이 조금 있다고 하네요.
앞으로 가게를 운영하면서 소망이 있냐고 그러니 이 가게
를 꾸준히 오래 운영해 나가는게 희망이라고 합니다.
저도 고개가 끄덕여지더군요.
프랜차이즈 매장 보다는 이런 커피기술자분들의 가게가
더 번창했으면 하는 바램을 저도 늘 하고 있으니까요.
얘기를 마치고 콜롬비아커피를 아이스로 테이크아웃 해달
라고 부탁합니다. 여기 사장님이 강한 신맛이 어떤때는 강
한 쓴맛으로 느껴지기도 한다고 하더군요. 맞는 말이라 수
능이 가더군요. 저는 강한 산미의 커피는 아이스로 마시거
나, 진한 맛을 내는 그 어떤 것과 같이 마시면 좋더군요.
달지 않은 치즈케이크나 초코렛, 야채고로케, 클럽샌드위치...
이상 이렇게 긴 포스팅을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갈수록 어려운 것만 찾는 절 보며 덕후적인
면이 갈수록 농후해지는게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한
이율배반적인 마음에 구원이 있기를 바라며,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이라는
술, 커피, 인생을 찾아 열심히 힘내야겠지요.
여러분도 산뜻한 예가체프 향기처럼
향긋한 삶 이어가시길 바라겠습니다. ^^~
첫댓글 예향의 도시 전주
방문했을 때의 좋은 느낌이 오래도록 남아있는 도시입니다.
맛있는 음식이 그렇고 도시 전체에 살아있는 문화의 향기가 그랬습니다.
애정을 가진 좋은 글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고향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고향을 잘 알지 못하죠.
저는 고향을 사랑하려는 행위 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나니...
50년 이상된 식당이라니,,,
무조건 들어가야죠 망설이지말고,,,
전주 여행에 참고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전주에 가면 항상 모주를 마시는데 말입니다,,,ㅋㅋ
제 글이 부디 전주여행을 오셨을 때
마음으로 보는 견문의 단초가 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모주를 좋아하시는 군요.
저도 겨울산행 때 종종 만들어가곤 합니다.
오리지널 레시피를 알고 있으니
기회가 되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산미예가 감사합니다 기대됩니다 모주 레시피...
저 이글 보고 이끌려서 까페 가입한 1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