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여름 아름다웠다. 눈앞엔 어스럼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고, 차창 너머 세상이 성큼 시야 한 가득 걸어 들어왔다. 붉고 푸르고 잔잔하고 선명한. 거짓말 안 보태고 광활하고 거대한 녹지가 우리 앞에 펼쳐져 있었다. 단 한 번도 이런 걸 본 적이 없다.아니, 서울 근교에 이런 곳이 있기나 했었나. 도대체 여기가.." 깼냐?" 창문너머로 내미는 엽이의 한 손엔 캔커피가 들려 있었다.엉겁결에 받아들며 두 눈만 꿈벅거리는 내게 나와, 엽이는 정확히 그렇게 말하곤 다시 앞으로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 ..... "엽이는 어느 틈에 커다란 원형의 녹지 한 가운데 존재했고, 한 손엔 생수통, 한 손엔 두터운 수첩을 쥔 채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있다. 뭔가를 찾는 거 같기도 하고 계산하고 추측하고 상상하는 것 같기도 한. 얼마나 잠이 들었던 것인지 여기저기 까치집을 지은 볼품없는 머리칼이 눈에 들어왔지만 신경쓰지 않는다.신경이 쓰이는 건, 이런 거. 오후 6시 20분. 여섯시? 하- 돌겠군.재빠르게 가방을 열어 휴대폰을 확인하고, 14통의 문자와 한 통의 부재중 통화를 내려보았다. 퇴근하는 민지를 데리러 가 저녁을 함께 먹을 요량이었다. 가능하면 영화도 한 편 볼 생각이었다. 그 애는 영화를 좋아하고, 나는 그 애와 함께 먹는 밥을 좋아한다. Rrrrr...역시나 전화를 받지 않는다. 어쩌면 아직도 근무중인지도. 마냥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은데.. Rrrr... " 애인?" 어느 틈에 와 있었는지 차 문에 기대선 엽이가 짖궂은 얼굴로 날 내려다보고 있다. " 여기가 어디야?"휴대폰 폴더를 닫으며 궁금한 걸 묻고 있는 내게, 엽이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보일듯 말듯 미소만 짓고 있었다. 내게 등을 돌린 채 물끄러미 정면을 응시하던 그녀의 시선은 보이지 않으니 알 수가 없는 것이었지만, 그녀 입가에 걸린 그 미소만큼은 어딘지 모르게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이 낯선 풍경은 나로서도 이유없이 속이 트이는 것이기도 했다. " 저거 다 편백나문가?"" 어? 용케도 알아보네. " 차 문을 열고 내려서는 나를 위해 한 쪽으로 비켜서던 엽이는 오른 손에 든 물병을 스윽 내 앞으로 내밀며 쓰고 있던 모자를 다시 고쳐썼다. " 어릴 때 우리 아파트 뒷산이 죄다 편백나무였잖아. 기억 안나?"" ..... "" 뭐.. 왜? " 갑자기 멀뚱히 날 바라보기만 하는 엽이가 이상해서 물었더니 " 이제 좀 친구 같아서." 란다. 흣. 실없는 녀석을 향해 실없이 웃어보였더니 앞으로 척척 걷기 시작하는 엽이다. " 어디가?"" 따라와." 그녀가 내민 물병을 손에 쥔 채 원형의 거대한 녹지를 살짝 비켜선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우리가 마주한 그것.5분 남짓 걸리는 그 짧은 거리안에 이토록 잘 만들어진 매끈한 건물이 있을 줄이야. 사유지일까..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 정도로 그 건물은 지나치게 위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둥글게 말아올린듯 거대한 통유리를 기둥으로 좌측으로 길게 뻗은 직사각형의 네모반듯한 2층 건물. 1층의 현관인듯한 유리문 앞으로 길게 노란 선이 드리워져있는 걸로 보아, 아직 채 완공이 안 된거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출입을 금한다는 엄한 경고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게 만드는 매혹적인 기운. 건물의 외벽이라든가 마감재의 범상치않은 고급스런 색조 배합이 그러했다. 이건 필시 어느 돈 많은 자산가의 별장 내지 자택으로 꾸며놓아도 손색이 없을만큼 훌륭한 건축물이었다. 하지만 누가, 대체 왜- 라는 생각이 들고만 건 멋지게 지어진 건물 앞으로 아무렇게나 얼기설기 돋아나 있는 잡초들 때문이었다. 그건 누가 봐도 분명한 방치,였다.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고 오랜 시간 아무도 찾지 않는 곳. 그건 그런 느낌이었던 거다. " 대체 여기가 어디야?" 그래. 대체 여기가 어딜까. 너는 왜 아무런 말도 하질 않나. 엽이는 오늘 오후 불쑥 날 태우고 다섯 시간이 넘는 그 시간동안 단 한번의 언질도 주지 않고 여기까지 날 끌고 왔는데 어떻게 된 인간인지, 나란 놈은 이럴 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이 애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엽이는 길게 가로로 드리운 노란 선들을 휙, 하니 걷어치우곤 두개로 갈라져있는 입구의 유리문을 잡고 흔들었다. 덜컹덜컹-소리가 나고 당연히 그것들은 열려있지 않았다. 주머니를 뒤지는 엽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 그러고보니 말수가 적어졌구나. > 라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늘 같이 있을 때면 이야기를 끌어가는 건 엽이었다. 일단 화제를 올리고나면 그 다음부턴 내가 말할 기회가 많아졌지만, 그리고 곧잘 들어주는 엽이었지만 어쨌든 이야기를 끌어가는 건 엽이었다. 그래서, 그러니까, 그렇군..그럼 이건 어때, 라는 식으로. 그런 면에서 볼 때, 엽이 주위에 사람이 많았던 건 어쩌면 이런 이유일수도 있겠다. 늘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는 것. 어떠한 경우에도 허투로 듣지 않고 진중하게 들어주고 호응해주었다는 것. 그게 엽이의 가장 큰 장점이자 무기였었다. 이유없이 입을 닫거나 납득할 수 없게 화제를 돌리는 일. 이전의 엽이었다면 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복잡하지 않았고 그래서 보이는 그대로만 믿으면 되었다. " 이게 아닌가... " 주머니에서 꺼낸 열쇠꾸러미 중 여러개를 꽂아보던 엽이는 집중할 때면 삐죽 나오던 입모양을 그대로 유지한채 계속해서 중얼중얼-뭔가 뜻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 이리 줘 봐. " 엽이가 건넨 묵직한 열쇠꾸러미엔 옹기종기 각기 다른 열쇠들이 참 많이도 매달려 있었다. 도대체 이게 다 뭐람, 싶었지만 말없이 차근차근 하나하나 꽂아 보기 시작했다. 서너 번쯤 시도하자 생각지 않게 철컥-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 어라, 진짜 되네. " 그럼 안될 수도 있었단 얘긴가, 점점 모를 소리를 하는 엽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역시 데리고 오길 잘했어,라며 내 등을 팡팡 두어번 치고 있다. 그리곤 다시 받아든 열쇠꾸러미를 제 점퍼 주머니로 밀어넣으며 들어가자, 작은 목소리로 말하곤 현관문을 크게 열어젖혔다. 순식간에 훅-하고 끼쳐오는 탁하고 습한 먼지 냄새. 난 나도 모르게 잔뜩 인상을 구리고 말았는데 엽이는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안은 온통 캄캄한 어둠속이었다. 양 사이드에 커다란 창이 몇 개나 있었지만 그것들은 두텁고 새까만 커튼에 드리워져 한 톨의 빛도 허락하지 않았다. 먼저 걸어들어간 엽이가 보란듯이 하나하나 커튼을 열어젖히자 엄청나게 많은 먼지가 순식간에 우리앞으로 쏟아져내렸고 그리고 믿을 수 없게 휘황한 붉은 빛이 일직선으로 남김없이 맹렬히 쏟아져 들어왔다. 눈이 부셨다. " ...... " 난 여전히 입구에서 한 발도 전진하지 못한 상태였고 넓디 넓은 강당같은 그 공간엔 단 하나의 움직이는 그림자, 엽이의 모습 뿐이었다. 액자 하나 걸려 있지 않았고 가구 한점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늦은 오후녘의 오렌지빛 햇살이 가져다주는 그 풍만함. 온 공간을 모두 채색해놓은 것만 같은 그 선명한 색감. 부유하는 먼지들을 하나하나 잡아내는 그 모든 정교함들이 아름다웠다. 그 안에서 움직이는 긴 그림자, 엽이의 모습마저 아름다웠다. 멍-하니 오래도록 바라만보고 싶을 정도로. " 어때?" 분명히 엽이는 묻고 있었는데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두 눈을 사로잡은 이 공간에만 탄복하고 있었다. " 야, 김자인! " 빈 공간에 쩌렁쩌렁 울리는 엽이의 목소리가 그제야 내 정신을 들게 했다. " 역시 같은 생각이지? " 걸어오던 엽이는 어느틈에 내 옆으로 와 같은 방향을 보고 섰다. 주변을 휘이- 한번 둘러보던 엽이는 만족스런 미소를 입에 건채로 한마디를 거든다. " 좋아할 줄 알았어. 보는 눈이 비슷하니까. "" 뭐 하는 데야? " 내가 묻자 이번엔 보다 분명한 대답이 돌아왔다. " 윤 해록이라고 알아? "" 윤 해록? 혹시 그..80년대 팝 컬럼니스트로 활동했던 그 분을 말하는 거야?"" 대단한데? 그래 맞아, 바로 그 사람이야. "" 그 분이라면 오래 전에 도미하지 않았었나, 어떤 첼리스트랑 스캔들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렌찌. "" 뭐?"" 렌찌라는 가명을 쓴 여자가 있었지. 스캔들이 있긴 했지만 정확하진 않았어. "" ..... ""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여자가 사실은 남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지구상엔 거의 없지."" 무슨..아니야.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 걸. 신문에도 나왔었어. 그 여자.."" 그러니까 그 여자가 남자였다고. "" 트렌스젠더란 말이야? "" 아니. 그건 그냥 트릭이었을 뿐이야." " 그럼.. "" 그저 좀 심하게 별난 장난기였다고 봐야지. 너도 신문에서 봤다면 알겠지만 워낙에나 미모가 출중했잖아. 아마 시대를 조금만 더 앞서 태어나고 또 그가 정말로 여자였다면 나라도 어찌해보고 싶었을거야." 엽이는 소리없이 큭큭거렸다. " 잘 이해가 안되는데. "" 그러니까 그 렌찌라는 가명을 쓴 여장남자가 윤해록을 보기좋게 홀렸다는 얘기야. 장담하건대 윤해록은 렌찌를 만나기전엔 게이가 아니었거든. 알잖아? 그 사람 충실한 약혼녀도 있었던 거."" 맞아, 그랬었어. 그래서 더 언론에서 크게 떠들어댔던 걸로 기억해. "" 코 앞에 결혼을 앞둔 대한민국 최고의 팝 컬럼니스트가 미모의 한 외국인 첼리스트랑 바람이 났다..기사를 쓰기엔 너무도 맛있는 소재지 않아? 사실은 그녀가 그,라는 사실마저 밝혀졌다면 그 옛날 홍 아무개씨도 나도 좀 더 일찍 커밍아웃을 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야. 하하" 아무렇지 않게 웃어제끼는 엽이의 말들이 도통 현실감있게 들리질 않았다. 사실 나는 그를 꽤 좋아했었다. 막 사춘기가 찾아와 음악과 영화에 빠져 살았던 그 때, 그는 꽤 유용한 탈출구가 되어 주었었다. 나는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를 들으며 자랐고 좀 날카로운 인상이긴 해도 가끔 티비에 나오셔서 해외 팝 음원이나 뮤직비디오를 소개해주실라 치면 그 말씀들이 그렇게나 귀에 쏙쏙 잘 들어오고 마치 재미있는 구전동화라도 듣는 것처럼 흥미로웠던 것이다. 그랬는데 사실은 그가 게이였다고? 그저 아름다운 어떤 외국인 여성과 만나 단순히 열렬히 사랑에 빠져버린 로맨틱하고 드라마틱한 삶의 주인공만이 아닌 우리와 비슷한 더듬이를 지닌, 혹은 시대의 아픔까지 품고 있을법한 그런 비운의 삶을 살았다는? 뭐 그런 이야기야? " 그런 표정 할 거 없어. 그는 꽤 영리한 사람이었으니까 말야. " 내 표정이 너무 심각해보였던지 툭,하고 한 쪽팔을 건드리던 엽이는 웃음기없는 예의 그 얼굴로 돌아와 이야길 계속했다. " ..... "" 언론이 더 깊이 밀고 들어오기 전에 그는 보기 좋게 자취를 감춰버렸어. 약혼녀에게 뭐라고 설득했는지 몰라도 그 쪽에서도 그에 대해선 지금까지도 함구하는 걸 보면 보통 수완은 아니었던 거지. 언론에선 미국행이다 뭐다 떠들어댔지만 사실 그들은 이탈리아에 있었어. 렌찌 부모님의 고향이 이탈리아였거든. 하여간에 그는 공중파와 언론을 상대로 장난을 치는게 퍽이나 재미있었던 모양이야. 지금까지도 렌찌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대한민국 그 어느 언론사도 밝혀내질 못했잖아."" 그 정도로 관심이 없었던 걸수도 있지. 달리 다른 생각을 어찌 할 수 있었겠어..그 시대에..대단한 스타들도 아니었고.."" 빙고! 렌찌가 노린 게 그거였어."" 그래서 두 사람은 어떻게 됐는데?" 난 원래의 의도완 달리 그저 이 둘의 이야기에 몰입되고 있었다. " 어떻게 됐냐고? 이게 참 웃긴 게 말야. 너무너무 행복하게 잘 살았단 얘기야. 해피엔딩! 알아? "" ..... "" 이 사람들이 얼마나 잘 살았냐면, 무려 영국에 사 들인 땅만 일만 에이커야. 일만 에이커면..와, 말이 다 안 나와. "" 무슨 수로? 그들이 그렇게 부자였어?"" 일개 개도국 국가의 팝 컬럼니스트가 뭘 얼마나 벌었을까.. 일개 한 오케스트라의 단원에 불과했던 첼리스트가 벌면 또 얼마나 벌었을까. 여기에 희생이 하나 따랐단 말이지. "" ... ?"" 윤해록은 자존감이 강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거에 반해, 렌찌는 달랐어. 렌찌는 그를 위해 소중한 걸 포기할 수도 있었고 그를 위해 온전히 자신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이지. 놀라운 건 그도 윤해록을 만나기 전엔 게이가 아니었다는거야. 누나가 많은 집안에 예쁜 막내아들로 태어나 가끔 누나들이 장난삼아 렌찌에게 여장을 시키며 놀았다는 것? 그래서 여장에 별 거부감이 없을 뿐더러 놀라울만치 그것이 자신에게 잘 어울린다는 걸 자각하고 있다는 정도였을 뿐 그도 사내를 사랑하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하더군. "" 근데 넌 도대체 이런 걸 다 어디서 들은거야?" 궁금했다. 난데없이 찾아온 이곳. 난데없이 들려주는 기가 막힌 이야기. " 내게 이 집 열쇠를 쥐어 준 사람이 렌찌거든. "" ........ " 뭔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놀랐달까, 그냥 딱 다물려진 입이 좀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 렌찌는 그토록 좋아하던 첼로를 윤해록을 위해 포기했대. 처음엔 먹고 살기 위해서. 보다 풍족하게 누리기 위해서. 나중엔 그 윤해록이 좋아하는 곳에 윤해록이 좋아하는 집을 지어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가 마지막 생을 보내게 하기 위해서. "" ........ ""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부동산업으로 돈을 좀 만진 모양이야. 윤해록은 현재 알츠하이머라는군. "" ... "" 이쯤되면 비극같아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아. 물론, 이제 그들은 연인이랄 수 없는 관계지. 윤해록은 렌찌를 철저하게 친구로만 대하니까. "" 그럼.. "" 윤해록의 고향이 안동인지라 여기에 터를 사고 집을 짓기 시작했대. 공사는 이미 5년전에 시작되었고 거의 마무리가 되어갈 무렵, 윤해록에게 그런 일이 생긴 거지. 이런 저런 이유로 방치되다시피한건 그간 렌찌가 윤해록의 병을 어떻게든 돌려놓고 싶었던걸거야. 어쨌든 그들은 지금 행복해. ""..... "" 그런데 그가 널 어떻게 알아?"" 그게 말이지. 이게 좀 희한한 일인데..나 커밍아웃하고 대대적으로 언론에서 마구 때리는 통에 플래시 좀 받았던 거 기억나나 모르겠네. 나 그 때 제법 유명인사였는데 ㅎ.. 암튼, 그 때 다 짤리고 그대로 추락할뻔 한 걸 구해낸 게 그 윤해록이야. 방송국 윗머리 중에 그가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나본데 날 자르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더라. 왜 그랬는진 모르겠어. 안면도 없는 분이 그냥 같은 게이라서 싸고 돌았던 건지. 암튼 사직서 들고 찾아갔더니 국장이 그러대. "" ..... "" 너같이 운 좋은 놈 처음본다고, 흣흐. 모르는 사람들은 순전히 내 능력으로만 여기까지 온 줄 알지만 천만에 인생의 9할은 운이 지배한다고 봐, 난. 인생이란 게 그래. 지나치게 극적이어서 난 되려 소설이나 드라마보다 훨씬 드라마틱하다고 생각될 때가 많거든? 게다가 최근들어 그런 경험을 여러차례 하고 있기도 하고. 이렇게 너랑 다시 만난 것만 봐도 그렇고. " 엽이는 슬쩍 내 눈을 한 번 쳐다보곤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주시했다. 그리고 말했다. " 여기서 공연을 할 거야. "" ..! "" 다른 곳은 안돼. 무조건 여기여야 해. ""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대한민국의 모든 게이, 레즈비언들까지 다 모이게 할거야. 그리고 공중파로 내보낼거야. 가장 긴 시간 가장 아름답고 가장 생생하게 제대로 내보낼거야. "" 하.. " 늘 추진력이 끝내주는 녀석인건 알겠다. 늘 언제나 기가 막히게 운이 따랐던 것도 알겠다. 하지만, 그 기가 막힌 운 뒤엔 언제나 네 부단한 수고로움과 책임이 따랐던 걸 나는 모르지 않는다. 영광된 자리엔 변함없는 노력이 있었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엔 뼈아픈 댓가도 치렀다는 걸 나는 절대로 모르지 않는다. 너는 늘 그걸 묵묵히 견뎌왔고, 지금도 그리하고 있고, 그래서 나는 널 영원히 외면할 수도 없음을 어쩌면 네가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 자인아. "" .... "" 사랑... 그거 믿냐? " 엽이는 손에 쥔 물병을 입가로 가져가며 물 한 모금을 꿀꺽 삼켰다. 더운지 귀밑으로 송글송글 땀이 맺혀있다. " 아버지 돌아가실 때 가장 서럽게 울고 가장 극진하게 보살폈던 게 엄마였어. "" ...돌아..가셨어?"" 어." 왜 연락하지 않았냐고 물을 수 없었다. " 너도 알겠지만 두 분 사이 별로였잖아. 흣.. 후련할 줄 알았거든? 엄마도 그럴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가봐."" .... "" 사람이 사람을 그토록 극진하게 보살피는 거 처음 봤어. 한 번도 물어보진 못했는데 아버지 돌아가시던 날 엄마는 안 우셨거든. 꽤 오래 앓았었고 그 와중에도 성질은 있는대로 부려서 내 꼭지를 돌게 했던 사람이 우리 아버지야. 모르는 사람들은 독하다고 뒷말도 많았는데 근데 삼일장 끝나고 엄마가 방에서 안 나오시는거야."" ..... "" 아버지 가방을 꼭 끌어안고 그대로 한참을 우시더라. "" ..... "" 우리 엄마 보기보다 독해서 잘 안 우는 사람이었어. 아버지가 그렇게 모질게 행패부려도 혼자서 음악을 듣거나 정신과를 찾았으면 찾았지 울지는 않으셨어. 그래서 되려 의사나 나나 엄마가 저러다 잘못되지나 않을까 걱정됐을 정도니까. "" ..... "" 한참을 우는 엄마 옆에서 뭘 어째야 좋을지 몰라 천장만 쳐다보고 누워있는데 엄마가 그러대."" .... "" 사랑한다.."" ..... ""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고, 우리 아버지 출장 가방한테 하는 말이었어. " 엽이는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낸 것이 머쓱해졌는지 흠흠- 두어번 헛기침을 했다. " 뭐..잘 모르겠어. 부부라는 게 그런 걸지도 모르고. 내가 모르는 뭔가가 그들에게도 있었겠지."" .... " 그리고 이 사람들을 만났는데 이 분들이 또 날 흔드는거야. "" .... "" 너야 어쩌면 누구보다 날 잘 아니까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난, 사랑 그거 안 믿었어. 안 믿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고. 근데 그랬더니 정말로 그 사랑이란게 나한텐 너무 비현실적인 일이 돼버리더라. 그리고 정 반대로 사랑을 분명하게 믿었던 사람들은 또 희한하게 그 사랑이란 걸 쟁취하며 살더라고. 그것도 믿을 수 없게 오래도록 한결같이. "" ...... "" 무슨 말이냐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나도 이젠 내 사랑을 좀 믿어 보려고. "" ..... "" 내 인생에도 사랑은 분명히 있을테니 그거 나 좀 믿고 기다려 보려고. "" ..... "" 네가, 내 현재의 증인이 돼 줬음 싶은 거야. " 엽이는 정작 하고자 했던 말이 이것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올 여름에 있을 공연 장소를 알려주기 위함이었는지 나로선 당체 종잡을 수 없는 말과 행동들로 날 혼란에 빠뜨렸다. 그렇지만, 전혀 무리도 아니라는 생각. 일단 엽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건 나로서도 큰 충격이었다. 아저씬 내가 기억하기로 무척 건강한 분이셨다. 이토록 갑작스레 돌아가셨다는 건 무슨 큰 병에라도 걸리셨던 걸까. 도대체 무슨 병이셨길래. 하지만 지금의 나로선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지난 우리들의 암전같은 시간들이 결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너는 내게 연락하고 싶었을까. 함께 곁에 있어 달라고 도움을 청하고 싶었을까. 나는 엽이의 커다란 키를 마주하며 오롯이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 " 지후가 좋아. "" .... " 그리고 듣는다. 이 애가 지금 뱉고 있는 이 많은 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똑똑히 듣는다. " 시작이 어떠했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그렇지? 그 애 곁에 있는 건 나고, 그 애를 현재 지킬 수 있는 것도 나야. "" ..... ""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어. 근데 걷잡을 수 없이 그 애가 좋아져. 그 애가 웃는 걸 보고 싶고, 그 애가 나한테 기대는 걸 보고 싶어."" 지금도 충분히 그러고 있잖아.. " 불쑥 뱉은 내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엽이는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 우리들은.. 온전치 않아. " 온전치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 같이 산지도 제법 되었어. 아무런 문제도 없지. 이제 더 이상 그 앤 날 멀리하지 않아. 날 노려보는 일도 없고 가끔 날 보고 웃기도 하면서...흠, 그래. 나쁘지 않아. " 엽이는 한숨을 쉬듯 빠르게 말을 뱉어냈다. " ......"" 프로포즈를 할 거야. 뭐 캐나다도 아니고 결혼까지야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할 거야. 꼭 내 사람이 되어달라고. 그럼 평생 너 하나만 보고 살겠다고 프로포즈를 할거야. "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왜 내게, 불쑥 나타난 너는 이런 말을 하는 걸까. " 이번 공연만 끝나면 나 지후랑 떠날거다. 그 애가 좋아하는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꼭 그 애를 데려갈거야."" ...... "" 거기서 살고 싶어. 렌찌처럼 부자가 아니어서 그 애가 원하는 모든 걸 다 갖게 해주진 못해도 그 애가 좋아하는 부다페스트의 하늘만큼은 마음껏 보여줄 수 있을 거야. "" ....." 언제부터였을까, 네 사랑은. " 그러니까 네가 우리들의 증인이 되어줘. " 언제부터였을까, 내 심장이 이토록 무뎌지고 만 것은. " ..그래. 그러자. " 엽이는 말없이 내 눈을 보았고, 내 등 뒤의 문을 보았고, 내 어깨를 지나 내 가슴께까지 뻗은 손을 휘이-두르며 어깨동무를 했다. 한 차례 저항도 없는 세월의 간극. 안 보고도 살았고, 안 보고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던 지난 시간들이 무색하게도 또 성큼 너희들은 내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엄마가 보고 싶어진다. 지연이의 된장찌개가 그리워진다. 민지의 해사한 눈웃음도 생각이 난다. 내 심장은 숨을 죽여 고른 호흡소리를 내고 있다. 두근. 두근. 두근.
첫댓글 세사람의 관계가 자리를 잡았군요 ^^ 이렇게도 되는군요.. 전 곁에서 스쳐지나가는 인연들이 모두다 아깝고 아쉬워..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데.. 그렇게 곁에서 흘러가도록 놔두니.. 자연스레 자리를 잡네요 ..
오래 기다렸습니다. 한 이십여일쯤 되었지요? 간만에 올리신 글에 많이 기쁘고, 좀 죄송스럽습니다. 그리고, 잘 읽었습니다. 기다린만큼 성의있게, 오래도록. 헤헤..
왜 죄송스러우신지요 안그러셔도 됩니다. 성의있게 오래도록 쓰고싶군요. ^_^
제가 좀 귀찮게 해드렸어야지요 ㅠ.
자인일거라 생각했었는데, 이런 엇나가버렸네요...ㅎㅎ 기다린 보람이 있었네요...잘 읽었습니다. 덧, 휴가는 즐거우셨는지요... ^^
옙.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수확이었달까요, 주말 잘 보내시길 :)
10화 언제나오나 했습니다. 잘 봤습니다^
자인이 너무 불쌍해요 ㅠㅠ 자인이가 지후랑 쌰바쌰바 해야대는데 다른 소설에선 그러더라고요 ㅋㅋㅋㅋ저 maktoob님 글 팬이에요 ㅋㅋㅋ 그중에서 cest 로 시작하는게 정말 좋아요 ㅋㅋㅋㅋㅋㅋㅋ
후훗~ 드뎌나왓군요 ㅋㅋㅋ 기다림의 시간이 아깝지않은 글이엇어여 ㅋㅋㅋ 다음작도 기다리고 있을게요^^
여기까지 단숨에 몰아읽고 인사 올립니다. 마크툽님 글에서 익숙하고 그리운 향기가 나네요...hotel africa..제가 아는 그 분이라면 무슨 뜻인지 아시겠고, 아니시라면...그냥 너그러이 넘어가 주세요^^ 어쨌든, 팬할래요. 마크툽님 글이라면 뭐든 읽고 싶네요~ 시간이 허락한다면...^^
어찌 알아보셨습니까 ^_^ 이 곳에서 그리운 곳의 그리운 분들을 뵙게 될줄은 몰랐는데 정말 반갑습니다. 미흡한 글이지만 언제든 시간날 때 즐겨주시길. 인사남겨주셔서 감사했어요 :)
알게 되는 데 별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ㅎㅎ글에서 풍기는 분위기, 쓰이는 단어, 그런 것들...사실 저는 리플 달고 나서 후회했었어요 경솔하게 아는 척하는 거 같아서 지우고 싶었는데 일하는 중이어서 못 들어오고 있었네요 너그럽게 받아주신 마크툽님 감사하구요..늘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세사람의 관계가 자리를 잡았군요 ^^ 이렇게도 되는군요.. 전 곁에서 스쳐지나가는 인연들이 모두다 아깝고 아쉬워..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데.. 그렇게 곁에서 흘러가도록 놔두니.. 자연스레 자리를 잡네요 ..
오래 기다렸습니다. 한 이십여일쯤 되었지요? 간만에 올리신 글에 많이 기쁘고, 좀 죄송스럽습니다.
그리고, 잘 읽었습니다. 기다린만큼 성의있게, 오래도록. 헤헤..
왜 죄송스러우신지요 안그러셔도 됩니다. 성의있게 오래도록 쓰고싶군요. ^_^
제가 좀 귀찮게 해드렸어야지요 ㅠ.
자인일거라 생각했었는데, 이런 엇나가버렸네요...ㅎㅎ 기다린 보람이 있었네요...잘 읽었습니다. 덧, 휴가는 즐거우셨는지요... ^^
옙.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수확이었달까요, 주말 잘 보내시길 :)
10화 언제나오나 했습니다. 잘 봤습니다^
자인이 너무 불쌍해요 ㅠㅠ 자인이가 지후랑 쌰바쌰바 해야대는데 다른 소설에선 그러더라고요 ㅋㅋㅋㅋ
저 maktoob님 글 팬이에요 ㅋㅋㅋ 그중에서 cest 로 시작하는게 정말 좋아요 ㅋㅋㅋㅋㅋㅋㅋ
후훗~ 드뎌나왓군요 ㅋㅋㅋ 기다림의 시간이 아깝지않은 글이엇어여 ㅋㅋㅋ 다음작도 기다리고 있을게요^^
여기까지 단숨에 몰아읽고 인사 올립니다. 마크툽님 글에서 익숙하고 그리운 향기가 나네요...hotel africa..제가 아는 그 분이라면 무슨 뜻인지 아시겠고, 아니시라면...그냥 너그러이 넘어가 주세요^^ 어쨌든, 팬할래요. 마크툽님 글이라면 뭐든 읽고 싶네요~ 시간이 허락한다면...^^
어찌 알아보셨습니까 ^_^ 이 곳에서 그리운 곳의 그리운 분들을 뵙게 될줄은 몰랐는데 정말 반갑습니다. 미흡한 글이지만 언제든 시간날 때 즐겨주시길. 인사남겨주셔서 감사했어요 :)
알게 되는 데 별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ㅎㅎ글에서 풍기는 분위기, 쓰이는 단어, 그런 것들...사실 저는 리플 달고 나서 후회했었어요 경솔하게 아는 척하는 거 같아서 지우고 싶었는데 일하는 중이어서 못 들어오고 있었네요 너그럽게 받아주신 마크툽님 감사하구요..늘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