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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5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 : 다니 3,25.34-43
복 음 : 마태 18,21-35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자매님께서 젊었을 때, 남동생이 사고로 하늘 나라에 가버려서
어린 조카들을 맡아 키웠다고 합니다.
남의 자식을 함부로 대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고,
또 너무나도 사랑하는 남동생이기에 조카에게 자기 자식들보다도
더 먼저 챙겨주는 등 신경을 써서 키웠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녀들이 “우리가 의붓자식이야?”라며
어릴 적에 불만을 많이 표시했었다고 합니다.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남동생의 아들을 잘 키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조카가 성인이 되어 의사가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친척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오랜만에 만난 고모인 자기에게
인사는커녕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 무시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 자녀보다 더 신경 써서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본인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나 봅니다.
아무튼 이 자매님은 너무나 섭섭했습니다.
그래서 친한 친구에게 이 서운한 마음을 이야기했더니, 친구가
“만약 다시 남동생 죽었을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조카를 받을 것 같아?”라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이 자매님은 한참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조카가 커서 나를 섭섭하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맡을 거야.”
이 모습이 가치 있는 삶입니다.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
그냥 ‘사람’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진짜로 가치 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하시지요.
가치 있는 삶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한 없이 용서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따르는 우리 역시 한계를 두지 않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을 묵상해야 합니다.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사랑을 주시는 모습을 우리는 복음에서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에,
구원의 길에서 제외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큰 빚을 탕감받고도
동료의 작은 빚을 참지 못하는 못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한 모습으로, 절대 가치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가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모습은 어떨까요?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마태 18, 33)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사순시기’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리고 그 한편에는 “회개”가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제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마태 18,22)고 말씀하시고,
‘많은 빚을 탕감 받고도 작은 빚을 탕감하지 않은 악한 종’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대조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편에는 ‘조금만 참아달라는’ 종의 간청에 대해,
단지 참아 주는 것을 넘어서 청하지도 않은 빚을 그냥 아무런 조건 없이,
‘먼저’ 탕감해주는 ‘자비로운 왕’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동료의 간청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버리는” ‘무자비한 종’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 빚진 자라는 사실입니다.
죄에 있어 빚진 자이고, 사랑에 있어 채무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깊이 명심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이미 그 빚을 탕감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곧 용서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용서”의 특성을 세 가지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용서하되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은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표현됩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도 용서하라.”(마태 18,22)
몇 번 용서해 보고 그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미처 받아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렇게 죽기까지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둘째>, “용서하되 ‘먼저’ 용서하라”는 말씀은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표현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마태 18,33)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잘못을 고백하기도 전에,
아니 잘못했노라고 인정하기도 전에, 아니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당신께서는 ‘먼저’ 우리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랑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구원을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우리는 그 자비를 이미 입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서해야 할 궁극적인 이유는
‘먼저’ 우리가 용서를 통해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용서를 통해 타인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셋째>, “용서하되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은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표현됩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원망도 원한도 없는, 분노도 미움도 보복도 없는, 오직 사랑만으로 하는 용서 말입니다.
결국, “용서”란 오늘 <복음>에서, 왕이 빚진 종을
“가엾이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내는 것”(마태 18,26)으로 드러납니다.
이는 “용서”란 곧 “자비”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용서에 힘 입어 구원을 받았기에,
이제 우리 역시 이웃과 형제들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곧 이 은혜로운 사순시기에, 우리가 할 일은 바로 이 용서와 자비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되새겨 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마태 18,33)
<오늘의 말·샘 기도>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주님!
이제는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겠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셨으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고, 그가 잘되도록 기도합니다.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고,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아멘.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조욱현 토마스 신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해야 한다”(22절).
일흔일곱이라는 수의 신비는
이 특별한 수가 모든 세대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음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여기엔 한 세대도 빠지지 않았으므로, 십자가 안에서 주어진 하느님의 용서라는
충만한 선물을 받지 못한 세대는 하나도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용서해 주셨듯이, 우리도 서로를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셨다.
그래서 용서해야 한다는 의무는 면제되는 것이 아니다.
임금이 그에게 일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과 셈을 시작한다.
종은 많은 돈을 맡고 또 빌렸지만,
주인에게 아무런 이득도 가져다주지 못하고 많은 돈을 잃은 듯하다.
이익을 내기는커녕 엄청난 돈을 잃어 많은 빚을 지고 말았다.
임금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을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탕감받는 빚이 얼마인지 정확하게 알려 줌으로써 그를 가르치고자 했다.
그도 그와 같은 자비의 마음을 가지도록 가르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했는가?
종은 무릎을 꿇고 참아달라고 탄원한다.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27절).
주인은 종이 이 일에서 배워 동료 종들에게 관대해지고 자신의 불행에서 깨달음을 얻게 하려고,
그가 큰 망신을 당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책임을 지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탕감해 주기는커녕
참아주지도 않고 그를 옥에 가두어 빚을 갚게 하였다.
이 사실을 알고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34절).
이는 영원히 고문 형리에게 맡겨졌다는 뜻이다.
그는 결코 그 빚을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하실 것이다”(35절).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아버지라고 하셨다.
하느님을 이렇게 사악한 사람의 아버지라고 불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내가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께 용서받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내 형제를 받아들이고 용서해 주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댈러스에 와서 처음 만난 교우는 이발소 형제님입니다.
전임 신부님도 그 형제님 이발소를 이용했다고 합니다.
저도 첫인상이 중요할 것 같아서 이발소를 찾았습니다.
이발소 형제님은 제가 오기 전에 부제님도 왔었다고 합니다.
부제님도 첫인상이 중요할 것 같아서 왔다고 합니다.
뉴욕에서는 미장원을 이용했는데,
이발소에 오니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노련한 이발소 사장님이 젊은 제자를 두었습니다.
드디어 제자가 처음으로 손님을 받았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손님의 머리를 깎았는데 조금 길게 깎았습니다.
손님이 ‘이거 너무 길게 깎은 것 아닙니까?’
제자가 안절부절 하고 있을 때 사장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머리가 조금 기니까 예술가처럼 보입니다.”
손님은 만족해하면서 돌아갔습니다.
다음 손님이 왔을 때는 머리를 조금 짧게 깎았습니다.
손님이 ‘이거 너무 짧게 깎은 것 아닙니까?’
제자가 안절부절 하고 있을 때 사장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머리가 짧으면 강인해 보인답니다.”
손님은 만족해하면서 돌아갔습니다.
다음 손님이 왔을 때는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손님이 ‘이거 너무 오래 걸린 것 아닙니까?’
제자가 안절부절 하고 있을 때 사장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중한 것을 위해서는 시간을 아끼지 않는답니다.”
손님은 만족해하면서 돌아갔습니다.
다음 손님이 왔을 때 시간이 너무 짧게 걸렸습니다.
손님이 ‘이거 너무 대충한 것 아닙니까?’
제자가 안절부절하고 있을 때 사장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간은 금이랍니다.” 손님은 만족해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첫 미사를 마치고 사목위원, 구역장님들과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어떤 분은 4월에 성지순례를 가는데 같이 가주면 좋겠다고 합니다.
본당의 일정과 보좌신부님의 일정을 보고 알려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9월에 성령대회를 하는데 참석해 주면 좋겠다고 합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5월에 꾸르실료 교육이 있는데 제가 지도신부라고 합니다.
뉴욕에서 아직 오기 전인데 중남부 사제 모임에서
제가 지도신부가 되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뉴욕에서도 꾸르실료 지도신부를 했기에 도움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분은 구역 모임이 있는데 참석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시간이 되면 언제든지 함께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함께 하는 날들 중에 맑은 날도 있을 것입니다. 흐린 날도 있을 것입니다.
바람이 부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비가 오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다 눈이 오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게 꼭 필요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불행은 불평과 불만의 문으로 들어오기 마련입니다.
행복은 이해와 용서의 문으로 들어오기 마련입니다.
노련한 이발소 사장님처럼 불평과 불만의 문은 꼭 잠가놓고
이해와 용서의 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면 하는 일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믿습니다.
용서는 내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워야 한다고 하십니다.
宗敎란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한자입니다.
Religion은 엉킨 실타래를 푸는 의미가 있는 영어라고 합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으로 세상사의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이 종교라면
그리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그리하여 참된 구원의 문에 도달 하려면
꼭 是非를 가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법과 규정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도 용서와 사랑으로 해결되는 것을 봅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갈등과 아픔이 있다면 그것까지도 놓아버리고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따라서 용서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우리는 용서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우리는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걸맞은 노력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어느 한순간 걸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도
아무의 도움도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넘어지는 이유를 보면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야고4,1-2).하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도 탐욕과 어리석음과 성냄이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독이라고 가르칩니다.
욕심 때문에 남과는 물론 심지어 형제와도 등지게 되기도 합니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서로를 힘들게 하고 자유를 억압하며 담을 높이 쌓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담을 허물어야 합니다.
담을 허문다는 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용서하는 것은 말 같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듯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과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성찰해 볼 때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삶을 살아온 날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바른길을 가려 노력하겠지만,
인간의 연약함으로 넘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왔고,
앞으로도 분명 용서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내가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 용서 덕분에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유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당신을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하고
기도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며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7,60). 하고
애원하였던 스테파노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선물로 주어졌지만, 만약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담고 있게 되면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고립되게 되고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건강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용서는 결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선행도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만큼 우리도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설령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이라도!
어느 날, 내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3,9).
주님 안에서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용서니 뭐니,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고, 그저 밥먹듯이 용서하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복음서는 온통 하느님 아버지의 흘러넘치는 자비와
우리를 향한 측량할 수 없는 너그러운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저지르는 무거운 죄와 악습, 치명적인 실수와 허물이 떠올라
괴로울 때마다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는 즉시 복음서를 펼쳐 드는 일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용서와 관련된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이후
그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공동생활을 시작한 베드로였습니다.
성장 배경이나 출신 성분이며 모든 것이 다른 사도들이 함께 동고동락하다 보니,
너무나도 당연히 충돌할 일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공동체 역시 우리와 비슷한 공동체였습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삐그덕거렸을 것입니다.
더구나 수제자로서 사도들과 예수님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수행했던 베드로는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유난히 미운 마음이 드는 사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한 상처가 컸던 베드로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런데 나름 고민한 흔적이 있습니다.
마음 크게 먹고 심호흡도 한 후,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하면서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베드로 사도를 뒤로 나가떨어지게 할 정도였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일곱이란 숫자는 충만함, 완전함이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곱도 아니고 일흔일곱 번이라니!
일흔일곱 번 용서하라는 말씀은 결국 용서니, 뭐니,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고,
그냥 습관처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삼시 세끼 밥 먹듯이 틈만 나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내면 깊숙이 차곡차곡 쌓아둘 때,
우리 영혼과 육신에 끼치는 악영향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한두 번, 일곱 여덟 번,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절대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수시로, 숨 쉬듯이 용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용서를 통해 충만한 대자유를 누릴 것인가?
아니면 차곡차곡 쌓아둠을 통해 혹독한 고통 속에 살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마태오는 산상설교(5-7장), 파견설교(10장), 비유설교(13장)에 이어 공동체 설교(18장)를 엮었다.
예수께서는 공동체설교를 통하여 제자들 간의 공동체는 물론이고
앞으로 세워질 교회공동체 안에 지켜져야 할 규범들을 제시하신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1절)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엮어진 공동체 규범에는
‘어린이와 같이 되라,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라,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라, 형제가 잘못하면 타일러 주어라’는 등
온통 ‘서로 간의 자비로운 사랑의 법칙’으로 가득 차 있다.
오늘 복음은 용서에 관한 규범으로서 공동체설교의 마지막 가르침이다.
결론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22절)는 것이다.
이 말씀을 7 곱하기 70해서 490번을 용서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규범의 진정한 의미는 ‘용서의 무한정’이다.
예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23-24절)를 통하여
믿는 이들 사이에 ‘무한정 용서의 규범’이 얼마나 합리적인가를 맑혀주신다.
비유를 살펴보자.
마태오 특유의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비유 속에 언급된 채무 금액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주인공역을 맡은 종이 왕에게 빚진 금액은 일만 달란트였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은 1데나리온(마태 20, 2)인데,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1달란트는 노동자 한 사람이 안식일만 빼고 20년을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따라서 1만 달란트의 빚이란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이다.
왕은 종의 이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었다.
반면 다른 종이 이 종에게 진 빚은 100데나리온이었다. 이 금액도 적은 돈이 아니다.
그러나 왕이 탕감해 준 1만 달란트(6천만 데나리온)에 비하면 鳥足之血도 안 된다.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1만 달란트를 탕감받았으니,
그 종이 다른 종의 100 데나리온을 탕감하는 일이 권리에 속하겠는가?
아니면 당연한 의무에 속하겠는가?
바로 여기에 오늘 비유의 합리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탕감받은 일과 탕감하는 일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 이웃에, 더러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유에서 빚진 돈을 ‘죄’로, 탕감을 ‘용서’로 바꾸어 생각한다면 분위기는 달라진다.
용서함은 용서받기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우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비유 속에 등장하는 왕이
빚진 종에게 행한 것처럼 우리에게 하실 것“(35절)이므로 먼저 용서를 베풀라는 것이다.
따라서 용서받기 위해 용서해야 하는 것은,
용서가 권리이기보다 용서받기 위한 조건, 또는 의무라는 점이 강조된다.
용서가 의무라는 점은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다.
베드로는 스스로 아주 마음이 넓은 사람인 양 과시하면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다.
베드로의 말속에는 이미 용서가 남에게 해 줄 수 있는 권리로 자리 잡고 있다.
예수님의 대답을 보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는 예수님의 대답 속에는
용서의 무한정과 함께 용서가 해 줄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의무‘라는 강력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용서가 의무로서,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언제 어느 때나
그 잘못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이제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들 일상 체험은 무조건적이고 무한정의 용서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때로는 거의 불가능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용서를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용서를 놓고 가지각색의 태도를 취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 사전에 용서는 없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번에는 용서하지만 다음에는 국물도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태오는 다른 복음서에서 볼 수 없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어
무조건적인 용서의 합리성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용서는 적어도 용서받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조건이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용서는 결코 권리가 아니라 의무인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조건 없는 용서(容恕)를 말씀하십니다.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의 비유로 이러한 가르침을 주시는데,
만 탈렌트는 ‘일억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일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라고 할 때
백 년을 일하여야 벌 수 있는 금액이 삼만 육천오백 데나리온입니다.
그런데 일억 데나리온을 빚졌다면,
이는 평생을 일하여도 다 갚을 수 없을 만큼 막대한 빚입니다.
결국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줍니다.
한번 상상을 하여 볼까요?
빚을 갚을 길이 없어 자신은 물론이고 ‘아내와 자식까지 팔아야 하는’ 채무자에게,
채권자가 “가엾은 마음이 들어” 이를 모두 탕감하여 준다면 그는 어떤 심정이 될까요?
그러나 이 종은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자, 그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주인은 종의 빚을 탕감하여 주었는데,
같은 종들 사이에서는 이런 자비와 탕감이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간절함을 아시고(제1독서, 아자리야의 기도 참조),
가난을 볼모로 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느님 자신을 희생하시어 인간을 가장 안전한 상태에 있도록 배려하시지만,
인간은 상대의 간절함을 이용하고 착취하며 파괴합니다.
같은 동료에게 가혹하게 굴었던 종의 소식이 전해지자, 비유는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주인은 종에게 베풀었던 용서와 탕감을 거두어들입니다.
우리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하여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상대가 회개하였거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