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임재 안에 늘 살게 하소서’라는 제목의 찬송(290) 가사 중에, “꿈꾸듯 내 인생 생각할 때에(Each time when I dream of the goodness of life)”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가사처럼, 저는 가끔 지나간 인생을 돌아볼 때가 있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오직 산만 보이는 시골에서 태어나고 거기서 자란 제가 어쩌다가 미국까지 와서 지금 이런 복된 삶을 누리게 되었는지요! 어떤 때는 주님을 향해서 눈물이 날 만큼 깊은 감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외적인 환경이 좋아서만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1) 인생의 의미를 몰라 방황하던 20대 청년기에 하나님의 뜻과 사람 사는 목적을 아는 열쇠인 하나님의 경륜을 알게 된 것, 2) 제 안에 여전히 인간 타락의 요소와 하나님의 구원이 공존하지만,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쉽게 주님과의 연합을 회복하게 되는 것, 3) 주님의 몸 안에서 다른 지체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비결을 알게 된 것, 4) 아래와 같은 다소 어려운 말씀도 조금만 묵상하고 추구하면 쉽게 이해되도록 전체 성경의 맥을 잡게 해 주신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저의 공로가 아니며 주님의 긍휼입니다. 또한 머리로부터 그 몸 안으로 흘러내리는, 바르시는 영의 축복의 결과입니다(시 133:2).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이시자
다윗의 씨이십니다.
나의 복음이 바로 이것입니다(딤후 2:8).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인격(person)과 일(work)을 알고, 믿고, 실천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제가 이분을 전보다 더 넓고 깊게 이해하게 된 데는 아래와 같은 두 번 정도의 계기가 있었습니다(엡 3:18).
첫째, 한 번은 책을 읽다가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로마 천주교와 개신교단은 서방 교회에 속하는데, 이와는 많이 다른 동방 교회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이종성, 교회론, 157쪽). 서방 교회는 구원론에서 죄와 칭의를 강조하나, 동방 교회는 생명과 몸을 강조합니다. 또한 전자는 어거스틴, 후자는 아타나시우스나 이레니우스의 가르침을 귀히 여기는 점도 특이했습니다. 참고로 저는 이 양 방면 모두를 귀히 여깁니다.
둘째, 예전에는 주님의 부활을 주님께서 죽으시고 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하나의 사건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시편 제이 편을 인용한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행 13:33)라는 말씀에 있는 ‘오늘’이, 소위 크리스마스 날이 아니고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관련 구절들을 더 추구하면서 주님의 부활에 대한 저의 이해가 전보다 더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바울의 복음을 말한 위 본문에 대한 저의 이해는 부활에 대한 이러한 사전 학습에 기초한 것입니다.
사실 위 본문은 겉으로만 보면 매우 간단합니다. 즉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부활하신) “다윗의 씨”가 바울의 복음입니다. 문제는 ‘다윗의 씨’(the seed of David)를 제대로 이해하는가 입니다.
참고로 성경에서 ‘다윗의 씨’가 처음 등장한 곳은 사무엘기하 7장 12절부터 14절까지(네 씨를 일으킬 것인데 …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에서 입니다 여기서 ‘네 씨’는 문자적으로는 솔로몬을, 영적으로는 주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네 씨를 일으킬 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로부터 태어나실 때에(마 1:1),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은 그분이 부활하셨을 때에 각각 성취되었습니다(행 13:33).
여기서 그분의 성육신은 대체로 좀 익숙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씨이신 그분의 ‘인성’ 부분이 부활하실 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롬 1:3-4)는 말씀은 많은 분들에게 다소 생소한 것이 사실입니다(고전 15:45 하). 저도 이 부분을 제 확고한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기도와 추구 과정이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게 큰 도움이 된 것은 고운 가루와 기름의 연합(mingling)을 말한 구약의 ‘소제’(레 2:4) 그리고 나사로와 주님의 부활의 차이를 숙고해 본 것입니다. 즉 부활했던 나사로는 다시 죽었지만, 주님은 부활하신 후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계 1:18). 나사로의 부활이 기적적인 한 사건이었다면, 주 예수님의 부활은 (기름이 흠뻑 적셔진 고운 가루처럼) 그분의 인성이 신성으로 적셔져서 죽지 않는 인성이 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각각 “죽음을 무효화하심”(딤후 1:10), “(마지막 아담이) 생명 주는 영이 되심.”(고전 15:45 하),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심.”(롬 1:4)으로 표현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복음은 1) 주님의 부활(롬 1:4), 2) 죽음의 문제가 해결됨(딤후 1:10), 3) 주님의 내주하심(골 1:27), 4) 주님께서 맏아들이심(롬 8:29). 5) 한 몸(교회)(고전 12:27)에 무게 중심을 둔 복음입니다. 즉 바울은 주님 자신이 우리 안에 생명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영과 혼과 몸 안에서 죽음을 삼켜버리심으로(롬 8:10, 6, 11), 우리가 썩지 않을 것이 될 것을 복음으로 전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위해 전파자와 사도로 세워졌습니다(딤후 1:10-11).
오 주님, 죽음을 무효화하신 주님과 견고하게 연합하여
죽음이 만연한 이 하락의 시대를 거슬러 서 있을 수 있도록
매 순간 은혜가 되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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