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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6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신명 4,1.5-9
복 음 : 마태 5,17-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고등학교 때 처음 타자기를 보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컴퓨터는 보편화되지 않았지요. 따라서 타자기는 너무 신기했습니다.
더군다나 직접 타자를 쳐보면서 종이에 글이 찍히는 것을 보면서
마치 책을 출판하는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당연히 자판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 이름을 타자 치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특히 두 손가락만을 이용한 독수리 타법이라서
1분에 3~40개의 단어만 띄엄띄엄 타자할 수 있었습니다.
그 뒤에 실력을 향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두 손가락의 독수리 타법으로는 실력 향상이 불가능했습니다.
저의 이 독수리 타법을 본 누군가가 양손을,
그러니까 모든 손가락으로 타자를 하면 속도가 빨라진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계속된 연습으로 양손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고,
또 타자기 자판도 모두 외우면서 속도가 비약적으로 향상했습니다.
한때, 1분에 800타까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 당시에 두 손가락만 사용하는 독수리 타법만을 고집했다면
실력 향상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몸에 익히면서 비로소 향상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과거의 방식에만 매여있으면 어떤 발전도 이룰 수 없습니다.
새롭게 변화하는 모습을 만들어 갈 때,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와 너무 다른 이 현재를 살면서, 이 현재에 맞게 신앙생활도 계속 변화 발전시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그때가 좋았어.’만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과거에만 매여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만을 강조하면서 그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조항은 모두 613개에 이르지요.
사실 이 조항 613개를 거슬러 올라가면 십계명이 되고,
또 이를 다시 줄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이 사랑이 율법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매여있는 종교 지도자들은 사랑은 보지 않고 613개의 조항만을 봅니다.
사랑의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으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내용이 녹아 들어갔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은 사랑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인 삶이 아니라, 지금 실천해야 하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 안에서만 우리는 하느님 나라로 힘차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들과 다른 점을 하나를 들라면,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 하나를 들라면,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복음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들과 구별 짓게 하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이는 복음을 예표하고 있던 구약의 율법이
이제 복음 안에서 완성(실행, 성취, 채워짐)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온몸으로 율법과 예언을 실행하셨고,
결정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한 19,30)고
하시면서 모든 것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계명을 실행하는 이가 복됨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는 계명을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알고 있는 것을 말로 선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킴’으로써 계명을 ‘실행’하고,
그 실행으로 가르치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 그레고리우스는 말합니다.
“설교자에게는 법이 하나 있는데, 설교하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는 법이다.”
그리고 어제 우리가 기념했던, 유명한 설교가였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가르치는 바를 행동으로 파괴시킨다면,
사람이 법을 안다고 자랑하는 것이 쓸모없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실현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하는 일입니다.
'스스로' 한다는 것은 ‘사랑의 원의’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기를 원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하오니, 주님!
제가 말씀의 계명을 스스로 지킴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이가 되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하고,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고,
비록 작은 것 하나라도 깊은 사랑을 담고 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 (마태 5,19)
주님!
제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이 제 행동의 뿌리가 되게 하소서!
제가 행동으로 가르치게 하시고, 가르친 바를 행동으로 파괴하지 않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하게 하시고, 작은 일에도 사랑을 담아 행하게 하소서.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쳐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은 율법을 없애러 오지 아니하고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사람들이 건네준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하셨다.
거룩한 계명들은 어느 것 하나도 폐지해서도 고쳐서도 안 된다.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하며 잘 가르쳐
하늘나라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인간적으로 작고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하찮은 것이 아니라, 필요하게 여기신다.
주님께서는 그 계명들을 모두 가르치셨고 또 지키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17절)
율법과 예언서는 둘 다 중요하다.
이 책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과 살아가는 일에 관한 법이 담겨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둘 다 완성하셨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그 율법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말씀을 실천하며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완성해 갈 것이다.
우리에게는 주 하느님께서 만드실 새 하늘과 새 땅이 약속되어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면, 그에 따라 옛것은 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18절) 라는 말씀은
율법에서 가장 작다고 여겨지는 것조차도 영적 의미로 가득 차 있으며,
모든 것이 복음서에 요약되어 있음을 알려 주는 표현이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19절)는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으로,
마지막 날에 가장 작은 자, 내쳐진 자요, 말째가 되어 벌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업신여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지금 중요한 사순시기를, 부활을 향한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이것이 단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행사로만 끝난다면,
우리가 맞는 부활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부활은 우리 자신의 새로운 탄생을 촉구하고 있으며,
또한 영광스러운 나 자신의 하느님 안의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가 부활을 축하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제 하느님 사랑의 계명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올바로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교구의 인사이동으로 뉴욕에서 댈러스로 떠나면서 이동방법을 생각하였습니다.
비행기로 가면 4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자동차로 가면 23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신문사의 후임 신부님과 코네티컷 신부님이 함께 해 주기로 해서
저는 자동차로 이동하기로 했습니다.
비행기로 이동하면 간편하지만 불편함을 감수하고
자동차로 이동하기로 한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미국에 살면서 한 번쯤은 자동차 여행을 하고 싶었습니다.
마침 동행하기로 한 신부님들이 있어서 10일의 일정으로 댈러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첫째 날은 필라델피아로 가서 지냈습니다. 동부에 있는 교구 사제들과 식사를 하였습니다.
둘째 날은 버지니아 비치에서 머물었습니다.
아침에 바다에서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보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셋째 날은 노스캐롤라이나의 샬롯에 머물렀습니다.
샬롯의 한인성당은 제가 대림특강을 했던 곳입니다.
넷째 날은 조지아의 애틀랜타에 머물렀습니다.
저는 2006년에 애틀랜타 한인성당에서 대림특강을 했었습니다.
다섯째 날은 루이지애나의 뉴올리온즈에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 재즈 음악을 들었고, 사순시기 전에 있는 축제를 보았습니다.
남부의 열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뉴올리온즈에서 2일을 머물고
일곱째 날에는 텍사스의 휴스톤에서 머물렀습니다.
휴스톤의 한인성당 신부님이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설날 미사를 휴스턴 한인성당에서 함께 했습니다.
휴스톤에서 2일을 머물고 드디어 뉴욕을 떠난 지 10일 만에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도착했습니다.
이번 여행에 감사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꼼꼼하게 일정을 챙겨주고, 운전을 해 주었던 신부님들에게 감사합니다.
신부님들은 좋은 숙소를 예약하였고, 한국 식당을 찾아 주었습니다.
축제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 주었습니다.
신부님들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혼자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여행입니다.
여행 중에 저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매일 아침 미사를 봉헌하고 출발하였습니다.
고단한 일정 중에서도 서로를 배려하는 신부님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후임 신부님은 제게 인수인계를 잘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긍정의 마음, 먼저 경청하는 소통의 마음,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겸손의 마음을 배우겠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여행 중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 말이 좋은 인수인계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뉴욕에서 바로 댈러스로 이동했다면 저도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10일간 여행하면서 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에 본당의 미사를 집전하고, 자리를 지켜준 보좌 신부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보좌 신부님이 없었다면 이번 여행은 어려웠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비자 문제로 먼저 귀국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좋은 날씨를 허락해 주시고, 시간을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운전에 대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특히 장거리 운전에는 신경을 써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2시간 정도 운전하면 잠시 쉬는 것이 필요합니다.
혼자 하면 힘들기에 교대해 주어야 합니다.
초행길이기에 교통법규를 잘 지켜야 합니다.
운전에는 3가지 방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준법운전입니다. 준법운전은 교통법규를 잘 따르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고는 교통법규를 어기면서 시작되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신호체계를 따라야 합니다. 자신의 운전 실력을 믿고 과속해서도 안 됩니다.
둘째는 안전운전입니다.
운전을 잘하는 사람은 교통의 흐름을 잘 파악합니다.
앞의 차량과 뒤에 따라오는 차량을 살펴봅니다.
추월하려는 차량은 추월할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운전하기 전에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갑니다.
운전하기 전에 미리 차량을 점검합니다.
타이어의 상태, 엔진 오일 점검, 가야 할 목적지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해 놓습니다.
운전을 많이 해야 하는 사람은 안전운전을 잘해야 합니다.
셋째는 양보운전입니다.
운전하면서 길가에 고장 난 차가 있으면 내려서 도움을 줍니다.
본당에서 차량 봉사를 원하면 기꺼이 봉사합니다.
짐을 들고 걸어가는 어르신이 있으면 모셔다드립니다.
이런 분에게 운전은 사랑을 실천하는 선행이 됩니다.
운전 중에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이런 분에게 운전은 기도하는 시간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준법 운전은 물론 안전운전에 양보 운전까지 해 주었던 신부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율법의 완성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귀보다 가난을,
건강보다 질병을, 장수보다 단명함까지도 택할 수 있는 결단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상대방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주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나도 따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율법은 삶의 규범입니다.
유다인들의 율법은 613개 조항에 이릅니다.
그 가운데 248개 조항은 명령, 365개 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이것은 거슬러 올라가면 십계명이 되고, 더 줄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됩니다.
한 마디로 줄이면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무시하거나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의미를 알고 지켜야 합니다. 정신을 알고 지키면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그러나 율법이라는 도구를 절대시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멀어지고 사람과의 관계도 형식화됩니다.
따라서 껍데기만을 지킬 것이 아니라 내용을 지켜야 합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우리가 가야 할 최종목적지도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돌판에 새겨진 율법, 의무로 주어진 규정을 지키는 것에 머물지 않고,
성령의 도움으로, 자기 공로가 아니라 은총으로 채워주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을 채우는 것입니다.
형식에 내용을 넣어주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라’, ‘하지마라’고 했을 뿐, 예수님처럼 몸소 백성을 어루만져 주시고,
일으켜 세우시고 공감하며, 소통하는 일은 하지 못했습니다.
율법의 한계를 뛰어넘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계명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계명 준수만으로는 율법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도 법이니까 지킨다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안전과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나의 생명을 지키는 차원에서 준수한다면
그것은 큰 사랑의 행위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내용과 의미를 살리는 노력이 더 필요합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5,19). 하신 예수님 말씀은
우리를 언행일치의 삶으로 초대합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바를 실천하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결정한 것, 쏟아놓은 말들을 미루지 말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에페6,6).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1233)’.하고 고백한 율법 학자를 떠올리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을 실천하여 율법을 완성하는 날 될 수 있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율법을 성실히 실천하는 것과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종래의 예언자나 지도자들과 뚜렷이 차별화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유다인들의 특기였던 이분법적인 가르침, 과도한 흑백논리,
폐쇄성과 편 가르기를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그릇된 선민사상에 깊이 빠져,
자신들만 주님으로부터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이요,
나머지 사람들은 개보다 못한 이방인 취급을 했습니다.
자신들은 구원의 뜰 안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방인들은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으로 간주했습니다.
예수님 가르침의 두드러진 특징이 개방적이요 통합적이라는 것,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절대 단편적이거나 편향적이지 않고
지극히 보편적이고 균형이 잘 잡혀 있습니다.
율법주의에 잔뜩 사로잡힌 유다인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율법을 성실히 실천하는 것과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은 사실 좋은 것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섬기고 경배할 것인지?
동료 인간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
하느님의 손길이 닿은 피조물과 어떻게 조화롭게 공존하며
살아갈 것인지를 잘 안내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율법에 대한 과몰입입니다.
율법이 포함하고 있는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의 정신은 뒷전이고,
오로지 율법 한자 한 획에 과몰입되고 혈안이 된다면 바로 율법 지상주의입니다.
율법 전체를 바라보고, 핵심 정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율법의 세부적인 항목의 준수 여부를 이웃들에게 강요할 때, 그것은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율법 지상주의와 관련해서 경계해야 할 대상이 또 있습니다.
지나친 성전 중심주의입니다.
물론 성전과 성막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고 살아 숨 쉬고 계시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 역시 거룩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좁디좁은 성전 개념을 대폭 확장시키셨습니다.
예수님 당신 자신은 물론이고 당신 발길 닿는 모든 장소가 성전이 되신 것입니다.
세리 두목이 자신의 집에서 준비한 성대한 잔치에 가신 예수님께서는
편안한 자세로 앉으셔서 포도주잔을 기울이시고 그들과 밤늦도록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세리 두목의 집이 거룩한 성전이 된 것입니다.
하루는 갈릴래아 호숫가 한적한 풀밭에 오 천명이나 되는 굶주린 백성들이 운집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미사를 거행하신 것입니다. 풀밭을 성전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군사들에게 체포되신 예수님께서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시다가
성 금요일 오후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피비린내 나는 골고타 언덕을 거룩한 성전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님께서는 여기저기 수많은 성당과 예배당 안에도 거처하시지만,
너무나도 당연히 주점에도 현존하시고, 노래방에도 현존하시고, 식당 안에도 굳건히 현존하십니다.
그 모든 장소가 거룩한 성전입니다.
물론 그곳에 비록 때 묻고 남루하지만 거룩함을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말입니다.
가르치는 자는 먼저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기원전 1250년경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의 종살이로부터 탈출시켰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대장정의 길에 올랐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석 달째 되는 초하루 날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
이곳 시나이산에서 모세는 야훼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내려받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의 백성으로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과 율법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출애급기 19장-24장이 담고 있다.
舊約에 의한 모든 율법은 예수님 당대에 이르러
248개의 행령(하라는 법)과 365개의 금령(말라는 법)으로 발전되었다.
이제 새로운 계약을 앞두고 구약과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이 밝혀진다.
예수께서는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글자 그대로 꼭 지켜야 할’ 율법을 내려받던 입장과는 달리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 立法者의 입장에서 율법의 정신과 참뜻을 밝히려 하신다.
이것이 바로 마태오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 가르침의 진수인 산상설교(5장-7장)이다.
산상설교의 권두에서 참된 행복의 길을 가르치시고(5,3-12),
제자들더러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건실히 유지하고 밝히는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신(5,13-18) 예수께서는
이제부터 진정한 율법 완성의 길을 보여 주실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17-18절)
이로써 예수의 구약율법에 대한 태도는 명확하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율법을 통하여 이미 준비되고, 시작된 하느님의 원초적인,
동시에 결코 곡해 되지 말아야 할 의지를 성취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율법 속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본질적인 정신과 의지가 무엇인지는
차후 6개의 대당명제와 이를 결론짓는 황금률(7,12)로 선포된다.
산상설교의 가르침은 결국 예수께서 주시는 새로운 계명과도 같다.
그분은 새로운 계명을 통하여 구약의 율법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정신과 그 참뜻을 밝혀주신다.
이것이 바로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하나도 없애지 않고 완성하는 길이다.
율법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예수께서는
율법의 일 점이나 일 획에 집착하지 않고 이를 심화시키시고,
때로는 과감하게 폐기시키기도 하실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시는 새로운 계명과 율법의 정신을
먼저 지키고 행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행하도록 가르치는 일이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두 구절(19-20절)은
마태오 복음이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기본노선을
산상설교 첫 부분에 언급하고 있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마태오 복음서의 독자가 대부분 유대교 출신의 그리스도인이거나
유대교로부터 개종한 신자라는 사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바이다.
동시에 이 사실은 마태오 복음 공동체 안에 구약의 율법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이 있었다는 사실도 말해준다.
예를 들면,
① 구약의 율법이 종말에 이르기까지 유효하다는 입장,
② 유대교 율법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 또는
③ 예수께서 주시는 새로운 계명이 오직 유효하다는 입장 등이 그런 것이다.
물론 마태오 복음이 견지하는 입장은 세 번째 지론이다.
그렇다고 다른 입장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약의 계명을 지키면서 스스로 구약의 율법을 어기고,
또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 들기는 하되,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게 된다는 결론이다.
사순시기를 보내는 우리들의 자세를 들여다보면
오늘 복음의 마지막 두 구절이 참으로 마음에 와 닿는다.
사순시기는 분명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음식과 언행을 삼가며
부정을 멀리하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하는 일로서
다가올 부활축제를 준비하는 齋戒의 시기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禁肉이 규정된 금요일에 ‘몰랐다’, ‘外食이라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 된다’, 더러는 ‘관찮다’, ‘재계의 뜻과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등등의
핑계를 운운하며 금육을 쉽게 파기하는 우리들이 아닌가?
나로부터가 그렇다.
진정한 재계는 정신이나 마음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재계는 필히 육신의 수행이 따라야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그 어느 때보다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나 기존 전통을 종식시키시고,
그와 상반된 도전과 파격을 주시려고 오신 분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율법은 인간의 삶에서 ‘실천’하도록 제정한 지침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직된 전통주의와 주입식 강요는
이를 실천하고 생활화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획일화된 이론은 공감으로 이어지지 못하였고,
공감하지 못하니 실천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지도층의 도식화된 교육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율법 학자들은 그 허술함을 감추려고
더욱 가혹하게 율법과 규정의 잣대를 들이대었고,
그 결과 가식과 위선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와 다른 방식을 택하십니다.
공생활을 통하여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가까이 계시면서’ 참된 진리를 몸소 보여 주셨고,
목숨까지 바치심으로써 사랑의 진정성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분은 정녕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참된 쇄신과 개혁은 이전의 것을 폐기하고, 과거와 단절하며
완전히 새로운 파격을 만들어 내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통과 역사 안에 한결같이 존재하여
온 진리가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지를
공감하게 하여 구체적으로 살게 하는 것,
그것이 진짜 혁명이고 참된 진보입니다.
최 코르디아 수녀
오늘 1독서에서 모세는
하느님께서 주신 규정과 법규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면
모든 민족들이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지혜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 사물, 사건이나
상황을 깊게 이해하고 깨달아서
자신의 행동과 인식, 판단을 이에 맞출 수 있는 것을 뜻하며
일상 생활에서의 경험을 통해 사람 안에서 발전한다고 합니다.
지혜와 비슷한 지식은 어떤 주제에 대한
사실, 기술, 정보에 대한 이해를 뜻하는 것으로
관찰이나 교육을 통해 사실에 대해 학습함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지식은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하면 사람들에게 유용할 수 있지만,
그르친 방법으로 사용할 수도 있기에 긍정과 부정 모두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혜는 선과 인간성, 타인에게 영감을 주는 영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인생과 상황, 타인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과 견해를 항상 제공합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따른다고 지키는 규정과 법규들이
지식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기계적으로 학습해서 하느님의 뜻, 사람과 상황에 대한 통찰 없이
나와 남을 옭아매는 사슬로,
판단하는 잣대로 휘두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보면
율법의 세부조항들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시면서도
율법이나 예언서를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단단히 정신을 차려 지혜로 이끄는 하느님의 법을 따를 수 있도록
오늘도 성령의 도우심을 청해 봅니다.
출처 :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